봄의 서막을 알리는 꽃 소식이 남도에서 시작해 북상 중이다. 이제 막 피어오른 봉오리마다 생명이 깃들고 봄의 기운이 달콤한 숨결을 내보낸다. 동백의 붉은 꽃, 순결한 하얀 매화, 아찔한 노란 유채가 화사하게 피어오르면 사람들의 눈도 마음도 환해진다. 아쉽게도 한파의 영향으로 올해는 제철꽃들이 벙글지 못했다. 그래도 봄은 막을 수 없는 법 3월 중순이면 지각한 꽃들이 더 화사하게 제모습을 비출 것이다. 꽃들이 피어나는 계절에 맞춰 전국 각지에서는 다양한 봄꽃축제도 시작된다. 꽃의 정령들이 화사하게 너울대는 남도로 사랑하는 이와 여행을 떠나보자. 봄의 교향곡을 듣게 될 것이다.
혹한 속 꽃망울 틔운 통도사 ‘자장매’ 눈부신 자태
고매한 군자 닮은 순천 선암사 ‘선암매’ 한참 절정
지심도 군락 절반인 동백숲엔 ‘흰 동백’ 꽃도 자라
장흥 정남진 바닷가 토종 동백은 3월 중순이 최고
1000년 전 중국 산동성서 이사 온 구례 산수유 숲
마을 곳곳 엄호하듯 3만 그루가 융단처럼 둘러져
제주 녹산로 10㎞ 2차선 길 따라 만발한 유채꽃길
애월 한담해안산책길은 가장 제주다운 모습 담아
□ 홍매화 향 아찔한 양산 통도사
매화는 봄을 알리는 꽃이다. 매서운 추위를 뚫고 피어 강인함과 지조를 상징하기도 하고, 기품 있는 자태로 고고함을 대표하기도 한다.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긴 겨울이 지난 양산 통도사 도량에는 홍매화가 활짝 피었다.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뚫고 나온 것처럼 매화가 핀 통도사는 봄의 기운으로 환하다. 많은 매화 중에서도 역대 선지식들을 모신 영각 앞 홍매화가 해마다 통도사에서 가장 일찍 꽃을 피운다. 마치 오랜 세월 수행으로 일군 향기처럼 매화는 그윽하고 맑은 향을 내뿜는다. 순백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백매는 홍매화 옆에 서니 조금은 빛을 잃었다.
매화야 남도에서 지천으로 피지만 통도사의 홍매화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수령이 350년이나 된 이 홍매는 통도사를 창건한 신라시대 자장율사(590~658)의 법명에서 비롯됐다고 하여 자장매(慈藏梅)라고도 부른다. 매화는 사군자 중 하나다.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절개를 상징한다. 홍매화는 매화 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사찰에 핀 꽃인데도 통도사의 홍매화는 묘하게 자극적이다. 어떤 이들은 화장한 여인의 모습과 비교하기도 한다. 여인의 상큼한 미소를 닮았다는 것이다.
홍매화와 어우러진 경내는 천년 고찰답게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대비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스님들은 무심하게 홍매화 나무 아래로 합창한 채 지나간다. 홍매화 주변에는 사진작가들이 몰려와 진을 치고 있다. 꽃잎이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 어김없이 셔터 누르는 소리가 고요한 경내를 자극한다.
양산시 원동면 일대도 매화 명소다. 영포마을을 비롯해 쌍포·내포·함포·어영마을 등에 매화 밭이 조성되었다. 특히 영포리 영포마을에는 매화나무 2만 그루에서 폭죽이 터지듯 꽃이 피어난다. 개인 농원인 ‘순매원’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 낙동강 변에 있어서 매화 밭과 강, 철길이 어우러진 장관을 만날 수 있다.
□ 여린 꽃그늘 아래 매화 향기 가득한 순천 선암사
이른 봄, 글 읽는 선비들이 도포 자락을 날리며 매화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탐매(探梅)’라 했다. 매화 핀 경치를 찾아가 구경하는 탐매는 그저 보고 즐기는 것을 넘어 애틋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담긴 여행이다. 사군자 중에서도 매화를 맨 앞에 두었으니, 혹독한 겨울을 지나 도도하고 단아한 자태를 드러낸 매화 한 송이는 고매한 군자를 대하는 것과 같았으리라.
전남 순천 선암사의 매화는 ‘선암매’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린다. 수백년 동안 꽃을 피워낸 고목이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돼 있다. 매서운 겨울 추위를 견디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나무들이 종정원 담장을 따라 고운 꽃그늘을 드리우고, 여행자는 그 아래에서 짙은 매화 향기에 취한다.
순천 향매실마을에는 선암사와 또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아직 꽃은 덜하지만 3월 중순을 넘어서면 산자락을 따라 자리한 마을이 하얀 매화로 구름바다를 이룬다. 마을 단위로는 전국 최대 면적을 자랑하는 매화나무 재배지로, 주민들은 매화가 만개하는 시기에 축제도 연다. 음력 1월에 피는 ‘납월매’로 이름난 금둔사와 조선 시대 읍성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낙안읍성 민속마을도 봄날을 만끽하기 좋은 탐방지다.
□ 화선지에 물감 번지듯 화사한 매화마을
매화는 봄의 전령사다. 이른 봄에 떨쳐 일어나 섬진강 일대를 흰색으로 채운다. 섬진강 하류 백운산 자락의 광양매화마을은 이른 봄이면 새하얀 매화로 눈부시다. 10만 그루에 달하는 매화나무가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마을 일대에는 흰 꽃의 띠가 형성된다. 매화가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마치 화선지에 물감 번지듯 매화가 화르르 퍼지고 있다.
매화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주로 양반집 정원에만 심었던 귀한 꽃이었다. 섬진강을 여행하는 시인들은 매화마을을 세 가지 색을 가진 곳이라고 했다. 푸른 하늘과 은빛 모래, 흰색 매화가 조화를 이루는 곳. 마을 중심에는 청매실농원이 있다. 산 중턱에 있어 매화마을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임권택 감독의 작품인 ‘취화선’을 비롯해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도 자주 등장한 곳이다.
청매실농원 중앙에 있는 2000여개의 항아리도 진귀한 볼거리다. 따뜻한 봄 햇살과 함께 마당에 펼쳐져 있는 항아리 사이로 벌들이 웅웅거리며 날아다닌다. 매실을 곁들인 된장과 고추장 속으로 매화의 기운이 담겨 더욱 향기롭다. 청매실농원으로 향하는 언덕길에는 매화와 관련된 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 해안선 따라 수줍게 핀 동백, 거제 지심도
‘수줍은 봄’은 경남 거제의 바다에 먼저 깃든다. 붉게 핀 동백꽃이 3월이면 해안선 훈풍을 따라 소담스런 자태를 뽐낸다. 장승포항 남쪽의 지심도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동백 군락지다. 원시림을 간직한 지심도의 식생 중 50%가량이 동백으로 채워지며 동백 터널을 만든다. 지심도의 동백꽃은 12월 초부터 피기 시작해 4월 하순이면 대부분 꽃잎을 감춘다. 3월 중순까지가 구경 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지심도에서는 100년 이상 된 동백이 숲을 이룬다. 수백살짜리 동백이 자생하고, 전국에 몇 안 된다는 흰 동백꽃도 이곳에서 핀다. 흰 동백꽃은 날씨가 맞고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는 행운의 꽃이다. 동백꽃에는 ‘하나뿐인 사랑’이라는 꽃말이 있다. 지심도의 동백꽃은 오붓하게 산책하며 만나는 꽃이다.
선착장에 내리면 지심도의 주요 관광지를 잇는 둘레길이 조성돼 있고, 동백 꽃망울은 길목에서 불현듯 모습을 드러낸다. 해안 절벽이 있는 마끝, 포진지, 활주로를 거쳐 망루까지 두루 거니는 데 두 시간 정도 걸린다. 도다리쑥국, 물회 등은 거제의 봄을 더욱 향긋하게 채우는 별미다. 지심도 동백꽃의 붉은 기운 뒤로는 장승포 바다가 펼쳐진다. 섬 정상에서는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고, 맑은 날이면 남쪽 대마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3월 동백꽃의 향연이 마무리되면 4월은 유자 향이 섬을 채운다.
□ 단아한 아름다움 장흥 묵촌리 동백림
전남 장흥의 봄은 정남진 바닷가에서 시작된다. 따뜻한 남쪽 바다에서 불어온 봄바람은 묵촌리(행정구역 접정리)에 이르러 동백 꽃망울을 터뜨린다. 용산면 묵촌리 동백림은 수령 250~300년의 고목 140여그루가 모인 아담한 숲이다. 이곳 동백나무는 붉은 꽃잎이 5장 달리는 토종 동백이다. 꽃송이가 작아서 화려하진 않지만, 한국 여인네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닮았다.
동백림은 풍수적인 이유로 조성됐다. 마을을 감싸는 산자락이 청룡의 등에 해당하는데, 그 길이가 짧아 마을에 액운이 미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동백나무와 소나무,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꽃은 3월 중순에 만개하며, 3월 초~4월 초 꽃과 낙화를 즐길 수 있다. 나뭇가지에 달린 동백꽃도 좋지만, 송이째 떨어져 붉은 융단이 깔릴 때 더욱 볼 만하다.
묵촌리는 동학 농민군의 장흥전투를 이끈 이방언의 고향이기도 하다. 광활한 동백숲을 보려면 천관산 동백생태숲에 가자. 계곡을 따라 약 20만㎡에 걸쳐 동백 군락지가 형성돼 있다.
장흥삼합을 비롯해 먹거리 천국인 정남진 장흥토요시장은 토요일과 오일장(끝자리 2·7일)이 서는 날 열린다. 장흥 특산물이 알뜰한 가격에 거래된다. 야생 차밭과 비자나무 숲을 통과하는 길이 인상적인 보림사, 밤하늘의 신비를 엿볼 수 있는 정남진 천문과학관, 정남진 전망대 등 봄꽃을 찾아가는 길에 들러볼 여행지가 많다.
□ 아찔하고 향기롭게 구례 산수유마을
노란 꽃이 마을을 온통 덮어버렸다. 산수유가 그렇게 눈부신 줄 미처 몰랐다. 전남 구례 산수유마을. 눈이 아찔해질 정도로 노란 꽃잎은 멀리서 보면 마치 개나리 같은데 가까이 다가서면 쌀알처럼 작은 산수유들이 모여 노란색을 이룬다. 산수유가 가장 화사하게 핀곳은 구례군 산동면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 중국 산동성 처녀가 지리산 산골로 시집오면서 산수유 묘목을 자지고 와 심은 곳이라 해서 마을 이름이 산동이 됐다.
산동면에서도 대표적인 산수유마을은 위안리 상위마을. 무려 3만 그루의 산수유가 마을 곳곳을 엄호하듯 빽빽하게 심어져 있다. 이웃한 하위마을, 반곡마을, 대평마을까지 2㎞가량 길마다 산수유를 볼 수 있다. 소박한 초가집 마당에도 산수유꽃이 파고 들었다. 하나 둘씩 대처로 떠나 빈집이 된 곳에도 어김없이 피어 있는 산수유는 적막한 풍경을 밀어내고 한폭의 수채화로 남는다. 상위마을 아래 반곡마을은 한류드라마의 원조가 된‘봄의 왈츠’의 무대이기도 하다.
□ 유채꽃의 향이 가득한 제주 나들이
표선면 가시리의 녹산로 유채꽃길은 가시리마을 입구에서 10㎞ 정도 이어진 2차선 도로다. ‘시간을 더하는 마을’이라는 뜻처럼 가시리 녹산로는 시간을 더 내어 드라이브하고 싶은 길이자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될 만큼 이름나 있다. 녹산로 근처에 솟은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등 높고 낮은 오름의 능선을 따라 유채꽃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제주의 유채가 여기에 다 모였나 싶을 정도다. 3월 말이면 녹산로 양옆 길가에 유채꽃과 더불어 벚꽃이 팝콘처럼 꽃망울을 터트린다. 두 꽃이 만나는 순간은 제주 봄날 최고의 장면이다.
제주의 봄을 느낄 수 있는 또다른 곳은 애월읍 곽지리 한담해안산책로다. 한담해안산채로는 애월리 마을에서 곽지리 곽지해수욕장까지 해안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구불구불 해안선을 따라 꽃길이 이어진다. 소담하게 핀 유채꽃을 감싸는 돌담과 에메랄드빛 바다 사이로 난 길을 걷다 보면 이 길이 가장 제주다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섬의 서쪽 하늘에 해가 저물면 노을이 내리는 바다와 돌담 너머 핀 유채꽃도 금빛으로 물든다. 노란 봄꽃은 석양속에서 다른 어투로 말을 건다. /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