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쯤이면 어릴 적 어머니께서 간식으로 가마솥에 쪄주시던 포슬포슬 분 나던 감자가 떠오른다. 오순도순 식구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감자에 김치 한 토막을 척 걸쳐 먹으면 무더위 속이라도 한껏 행복하기만 했다.
그 추억을 이어와 요즘도 현대인들의 인기 군것질거리이기도 한 감자는,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프랑스 탐험가들이 유럽으로 가져가서 전파됐다.
사실 유럽으로 들어간 감자가 처음에는 돼지 사료나 전쟁 포로들의 식량으로만 사용됐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감자는 음침한 땅속에서 자라며 울퉁불퉁 못생긴 데다가, 솔라닌이라는 독 때문에 잘못 먹으면 탈이 나는 식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입견을 깨고 사람들의 식탁에 널리 보급되기까지는 20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감자의 이로운 점을 이용하고자 재배에 주력한 지도자가 있었는데 프로이센의 황제 프리드리히와 프랑스의 루이 16세였다.
이들의 혜안 덕분에 감자는 전쟁 중 전투 식량으로 기근에 구황작물로서 톡톡히 역할을 발휘해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필자는 감자를 먹을 때마다 어쩐지 이런 유럽의 역사와 함께 우리 청송사과를 떠올리게 된다. 그건 아마도 프랑스어로 ‘폼 드 테르’라고 불리는 감자의 뜻이 ‘땅에서 나는 사과’이기도 하려니와 대한민국 최고의 사과로 정평이 나 있는 ‘청송사과’ 또한 하나의 벽을 깨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위한 출발 선상에 서 있기 때문이다.
올 가을부터 청송사과의 꼭지를 자르지 않고 시장에 출하하기로 한 결정을 두고 한 말이다. 필자가 농가에 방문했을 때마다 한목소리로 토로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바로 오랜 관행으로 이어온 사과의 꼭지 절단 작업에 관한 얘기였다.
사과 꼭지를 자르는데 드는 농가의 인건비는 청송군에서만 생산량 기준으로 한 해 86억 원, 전국적으로는 매년 660억 원 이상이 추산된다. 유통 과정에서 꼭지에 찔려 흠이 나면 높은 값을 받을 수 없고 또 모양을 좋게 하려고 병행하는 이 작업 때문에 농가의 손해가 막중하다고.
모든 성취는 시도하기로 한 결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거두절미하고서 군민과 농민들만 바라본다는 다짐으로 군 관내 6개 사과 계통출하조직(청송농협, 남청송농협, 현서농협, 대구경북능금농협, 청송사과유통센터, 청송군조공법인)과 ‘꼭지 무절단 청송사과 유통’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시작은 언제나 혼란스러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꼭지 사과를 선호하지 않는 유통시장의 높은 벽을 넘어야 하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우리 사과농업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결과적으로도 영광된 결정이리라는 걸 확신한다.
인력 절감뿐 아니라 온전한 꼭지 덕분에 사과의 신선도가 오래 유지되어 생산자나 구매자 모두에게 이득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이 사업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전국 농산물 도매시장 및 공판장, 대형유통업체에도 협조를 구하고 나아가 방송을 통한 적극적인 홍보, 다양한 판촉행사 등으로 홍보·마케팅에도 전력을 다하여 소비자의 인식을 바꿔볼 참이다.
물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만으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영양가 많은 감자를 강제로 재배하게 하여 전투 식량으로 보급했기에 오스트리아와의 7년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루이 16세 또한 가축의 먹이쯤으로 인식하고 있던 감자를 두 팔 걷어붙이고 재배를 장려했기에 흉년의 기근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 또한 그들과 일맥상통한 심정으로 이 사업에 온몸을 던지고자 한다.
첫걸음은 가장 어렵지만, 반대로 제일 용감한 행동이라고 여긴다. 청송의 이런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국의 사과유통시장 흐름에 정착시킬 수 있도록 선도적인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관행이라는 하나의 벽을 깨부수고 바다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우리 군민 앞에 서서 활짝 웃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