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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사 일반(神人事 一半)

등록일 2023-02-01 20:15 게재일 2023-02-0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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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낙률시인·국악인
오낙률시인·국악인

추수가 끝난 뒤 논바닥에 떨어진 벼알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버려진 듯 보이는 벼알이 따고 남은 감나무에 몇 알 남겨진 까치밥처럼 겨울나기를 해야 하는 몇몇 생명 집단의 소중한 겨울 양식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버려진 게 아니라 또 다른 생명을 위하여 무의식중에 행해지는 농부들의 소중한 배려가 되는 셈이다.

언제부턴가 겨울철이 되면 수백 수천 마리의 까마귀 떼가 겨울 들판에서 논바닥에 떨어진 벼알이며 풀씨를 쪼아 먹느라 장관을 이루고 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까마귀 대신 기러기 떼가 겨울 들판의 운치 있는 풍경을 그려내곤 했는데 그것도 세월 탓이지 요즘 들어서는 그 풍경이 바뀐 것이다. 논바닥에 새까맣게 내려앉은 까마귀 떼를 보며 검은색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아서 그리 나쁜 현상은 아닌 것 같다.

사실, 그렇게 버려진 벼알로 겨울 허기를 이겨가는 생명이 어디 까마귀뿐일까. 들풀이 모두 말라버린 탓에 황조롱이의 공격을 피해 이리저리 가시넝쿨을 옮겨 다니며 살아가는 참새떼며, 쥐구멍이 훤히 노출되어 들고양이며 맹금류의 눈을 피해 야행성으로 살아가는 들쥐 등의 설치류에게도 논바닥에 떨어진 벼알은 겨울나기를 위한 소중한 양식이 되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세상에 그냥 버려지는 것은 없다. 시골집 하수구에 떠내려가던 밥 찌꺼기조차 그냥 버려지는 게 아니라 지렁이며 각종 미생물의 소중한 먹이가 된다. 그리고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서 산나물 채취를 나갔다가 산에서 점심 주먹밥을 먹을 때에도, 들에 나가 새참을 먹을 때에도, 첫술을 뜨기 전에 빠짐없이 행해지던 ‘고수레! 의식’ 또한 그 시작된 유례를 떠나, 자연물로 존재하는 뭇 생명들과 공생하려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날 인간의 부(富)는 자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인간 생활을 가만히 보면 오히려 자연을 지배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엄연히 자연을 향한 배신행위에 해당하며 인간성의 상실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 생활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연이 존재하였으므로 자연에 의지한 인간성 회복 운동으로 얻은 부를 이용해 다시금 탈 인간성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격이다. 어쩌면 오늘날 여러 형태로 가해지는 자연을 향한 폭력이 마침내 인간에게로 그 칼날이 되돌아와 새로운 형태의 봉건적 사회로 회귀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인간은 만물과 더불어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옛말에 신인사 일반(神人事 一半)이라는 말이 있는데 직역하자면 신의 일과 인간의 일이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들의 사회처럼 인간이 속한 자연이라는 사회도 민주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자연이라는 사회의 구성원 속에는 우리가 미물쯤으로 생각하는 참새며 들쥐며 지렁이까지도 포함된다고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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