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수업 첫 시간에는 항상 실수를 겁내지 말라고 가르친다. 대신 실수를 했을 때에는 반드시 사과하라고 덧붙인다. 그게 작은 실수든, 혹은 큰 실수든.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아이들은 이 부분에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곤 한다. 사과라는 말이 무겁게 들리는 까닭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틀린 것을 인정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꾸만 꾀를 낸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정당하게 들릴 논리를 찾는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지만, 틀려선 안 되기에 자신을 끝없이 합리화시킨다.
다음부터 조심하겠다는 말 한 마디면 해결될 일도 그러다보면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커다란 거짓말을 동반한다. 과외를 할 때부터 그런 상황을 몇 번쯤 겪다 보니, 이제는 아예 수업 첫 시간에 사과에 대해 가르친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겁내지 말라고. 그건, 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혹은 나의 마음이 너와 다를 때에도 쓸 수 있는 표현이라고. 사소한 실수에서부터 누군가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을 때에까지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거라고. 그 정도의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은 목숨을 건 사죄나 영어에서의 ‘Apologize’ 같은 것이 아니라고. 그건 그냥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맺는 사람들끼리의 최소한의 성의 표시 같은 거라고.
종종 그런 아이들이 있다. 그럼 그런 사과는 가식이고 거짓말인 거 아니냐고. 자신은 진심이 아니면 사과하기 싫고, 진심이 아닌 사과는 받고 싶지 않다고. ‘진심’이라는 말이 무겁게 들리기보다는 귀찮은 무언가를 처리하는 방식처럼 느껴진다. 진심. 그걸 어떻게 확인하지? 어떻게 믿을 수 있지? 타인의 진심을? 자신의 진심조차 믿지 못하고 알 수 없는 고작 인간이? 지나고 나서야 늘 그것이 자신의 진심이었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유약하디 유약한 인간에게, 나는 종종 진심이라는 말은 너무 해로운 말장난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어쩌면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라서 뭘 그런 걸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냐고 할 수도 있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시기가 언제든 좋으니 빨리 왔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서로의 실수에 대해 잘 사과하고, 그래서 내가 가르치는 내용이 수준 낮은 이야기처럼 들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또 어른이 되고, 아이들은 그런 어른에게서 배우며 자랄 테니까. 그래, 어디 이게 아이들만의 문제일까. 어른들이 그랬으니 아이들 또한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며 자란 것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유감이라는 간단한 말조차 하지 못해서 더 큰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타인을 욕보이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실수는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실수에는 죽일 듯이 달려드는 정의 중독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그가 죽을 때까지 물어뜯으면서, 자신이 그 자리에 서는 것이 두려워 필사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고, 타인에게 죄를 전가하는 사람들이란.
사과를 잘 하지 않는 사람들만큼이나 무서운 건, 사과를 잘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토록 진심과 진정성을 강조하는 사회이면서, 이 사회는 누군가의 진심과 진정성을 결코 믿지 않는다. 아는 것이다. 자신 또한 어떠한 진심도, 어떠한 진정성도 없이 단지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자신 또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생존’하고 있을 따름이며, 정의나 대의보다는 돈과 안락함에 얼마든 쉽게 유혹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 우리가 타인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건 오직 그것이 자신의 돈과 안락함에 도움이 될 때뿐이다. 그 모든 악순환을 가리기 위해, 우리는 진심이라거나 진정성 같은 말들을 만들고 치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실수하지 않을 자신도 없고, 사람 없이는 살아갈 자신도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투박하게 구르고 실수하며 끝없이 사과하며 사는 수밖에. 나는 말하고 싶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 그러다보면 무수히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사과하는 수밖에. 끝없이 사과하고, 끝없이 실수하며, 그렇다하더라도 끝없이 시도하며 살아갈 수밖에. 내가 지쳐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투박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