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가만히 보면 하늘도 순전히 내 편

등록일 2022-06-13 18:09 게재일 2022-06-14 18면
스크랩버튼
오낙률 시인·국악인
오낙률 시인·국악인

저 지난주 말, 그러니까 6월 5일엔 그토록 기다리던 단비가 내렸다. 약 40 여일 만의 비 구경이어서 아직도 그 고마움이 여운으로 남는다. 비록 가뭄 해소에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비라서, 우리 농민들에겐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만치 엄청난 하늘의 선물이 아니었나 싶다.

한창 가뭄이 심하던 무렵, 필자도 약 2천여 평의 밭에 고구마를 심었다. 햇볕이 너무 강하고 땅이 지나치게 건조한 탓에 비가 내리지 않는 상황이 며칠만 더 지속된다면 애써 심은 고구마 싹이 모조리 말라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지만, 계절이 바쁜 탓에 헛수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진행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고구마심기 작업이 거의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이틀에 걸쳐 단비가 내렸으니 ‘가만히 보면 하늘도 순전히 내 편’이라는 오만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의 측면에서 보면 뭇 생명의 삶이라는 것이 물의 순환로에 서서 쉼 없이 물의 순환 활동을 돕고 있는 행위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수왕지절(水旺之節)이라는 여름철이면 며칠만 비가 내리지 않아도 극심한 가뭄에 허덕이게 되는데. 비가 내리지 않는 곳에서의 생명 활동이란 가뭄을 못 이겨 벌겋게 말라가는 길가의 산야초처럼, 최소한의 생명력조차도 위협받는 그런 불안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가뭄에 말라서 죽은 식물을 보며 그 죽음의 원인을 오해한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물이 없어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물이 없는 곳에서는 그 생명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그것은 물이 없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물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생명도 필요치 않다는 대자연의 절대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 처음 생명이 살기 시작한 후로 물을 찾아 군집을 이루며 사는 생명 무리는 다분히 그들의 자의가 아니라, 대자연의 힘 즉,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 삶의 위치를 부여받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이 흐른다./낮은 곶으로 무게를 내려놓으며/흐름을 추억하며 흐른다.//때로는 곤두박질치며 흘러야 하는/그런 숙명이 있어,/물망초 꽃잎에 쉬어가는 순간을/삶이라 했다.//미나리꽃 하얀/ 자작나무 응달을 지나/물봉선 군락이/ 연붉은 화원을 이루는 여울목에서/꽃으로 머물던 시절/먼저 자라를 털고 일어나 여정을 재촉하는 물이 있어/그것을 이별이라 했다.//이별이란/ 앞서가는 물의 순탄한 흐름을/손 모아 기도하는 일이다./이별이란/횡(橫)으로 흐르던 물이 비좁은 여울을 지날 때/종(縱)으로 흐르는 일이다.”-오낙률 시집 ‘봄은 안 오고 꽃만 피었네’중에서

세상은 오직 물의 순환을 위한 공간일 뿐이다. 인간을 포함한 지상 모든 생명체는 물이 순환하는 물길에 해당한다. 지금 순간에도 내 몸을 통해서, 혹은 저기 산야의 푸르디푸른 나무들의 잎을 통해서 물은 끊임없이 순환의 여정에 드는 것이다. 다만 그 길을 따라 흐르는 물은 오직 티 없이 깨끗하고 맑은 물일 뿐, 아직 정제되지 못한 탁한 물은 지표의 하천을 타고 바다로 흐르거나 어느 시골 마을의 논바닥으로 흘러들어 몇 날의 햇볕을 받으며 정제의 과정에 드는 것이다.

청사초롱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