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이라는 영화가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영화 ‘오징어 게임’은 어린 시절 즐겼던 6개의 추억의 게임을 통해 456억 원의 상금의 주인을 가리는 극한 경쟁을 그린 작품이다. 대형 상금이 걸려 있는 오징어 게임은 처절한 경쟁 속에서 승리하려는 인간 욕망을 잘 표출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약육강식과 정글의 법칙만이 통하는 경쟁구도에서 승리하기 위한 몸부림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미국의 NYT는 ‘오징어 게임’ 자체를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인들의 이야기로 평가했다.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것은 적자생존의 욕망을 담아낸 이 영화가 우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각종 선거 역시 일종의 오징어 게임이다. 지방의원, 국회의원, 대통령이 되기 위한 각종 선거도 결국은 승자를 가리기 위한 치열한 게임이다. 이 처절한 게임의 최종 승자는 처음부터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데 매력이 있다. 선거 초반에는 단연 일등을 유지하다 갑자기 추락하는 후보가 있고 후발주자가 앞서가 성공한 경우도 허다하다. 한국 정치도 ‘오징어 게임’과 같이 무수한 실패자가 양산될 수밖에 없다. 이 비정한 게임에 이 나라의 정치인들은 도박에 목숨을 걸 듯이 뛰어 들고 있다.
한국의 정치판에도 ‘오징어 게임’처럼 비정한 규칙은 존립한다. 지지층을 중심으로 진영으로 갈라 줄다리기 놀이까지 등장한다. 선거법이라는 그럴듯한 규칙이 존재하지만 승리하기 위해서는 변칙이 다반사로 발생한다. 법망만 피한 상대에 대한 비난과 흠집, 마타도어와 흑색선전인 네거티브가 자행되는 것이다. 승리를 위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가 동원될 수밖에 없다. 최종 승자가 456억을 독점하는 ‘오징어 게임’처럼 대선의 승자는 온갖 특권을 누린다. 사실 선거라는 제도는 대의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민주주의 편의적 방식이다. 선거의 결과는 다수결의 결과일 뿐 결코 분배 정의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역대 대선에서 노무현이나 박근혜 대통령 당선처럼 2∼3%의 차이로 운명이 달라진 경우도 많다. 이번 대선도 5%내외로 당락이 결정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이번 선거도 결국 승자가 독식하는 네거티브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선거의 승자는 정의가 되고 패자는 ‘오징어 게임’의 탈락자처럼 비참하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는 선거를 폐하고 과거처럼 권력의 세습이나 체육관 선거로 돌아갈 수 없다.
이번 대선에도 초장부터 일확천금을 노리는 ‘오징어 게임’처럼 참가들이 엄청 많았다. 누가 정치를 단기 투자로 가장 장기적 재미를 보는 비즈니스라고 했다. 그러므로 4∼5년마다 재개되는 게임은 흥행될 수밖에 없다. 이 정치판에도 오징어 게임이 불가피하다면 게임의 규칙부터 바로 잡고 참가자들이 철저히 지켜야 한다. 신자유적 경쟁은 피할 수 없고 치열한 경쟁은 능률을 수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나라 선거가 적자생존의 오징어 게임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내가 살고 너는 죽는 처절한 경쟁만이 능사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공생의 정치는 언제쯤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