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어귀에 살던 새순오빠네 집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둘렀다. 어릴적 기억이라 동네 오빠 이름은 맞는지 확신은 없지만, 울타리의 가시는 눈에 선하다. 남후초등학교까지 가려면 어린 내 걸음으로 삼십여 분이 걸렸다. 옆집 미정이를 우리 집 앞에서 먼저 만나고, 순연이 집 앞에 가서 학교 가자고 큰소리로 외치면 얼굴이 유난히 하얗던 순연이는 책보를 가녀린 허리에 매고 달려 나왔다. 우리 셋은 서너 번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에 살았기에 학교 가는 길도, 하교 후 ‘짜개놀이’와 ‘왼발은 뛰어도 관계없어요’, ‘숨바꼭질’도 함께 했다.
순연이 집도 마을 어귀였다. 그 옆집 울타리엔 이맘때 즈음 노르스름해진 탱자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가시가 많은 담장이지만 개구멍 하나 정도는 꼭 있다. 그 집엔 아들만 셋인 것으로 기억한다. 개구진 사내아이들이 지나다닌 길이었을 게다. 막내 아들인 새순오빠가 나보다 몇 살 위라 그나마 초등학교를 잠깐 같이 공유했기에 희미한 기억이라도 있는 것이다.
먹을게 흔치 않던 우리는 시고 쓰고 아주 쬐금은 단맛이 있는 탱자가 노오래지면 몰래 따 먹기도 했다. 먹기보단 공처럼 던지고 놀기도 하고 소꿉놀이에 반찬이 되기도 했다. 이제껏 내가 본 탱자나무는 낮은 키에 울타리로 선 것 뿐이었다. 얼마나 오래 우리 곁에서 울타리로 살아왔는지 몰랐다. 그러다 슬그머니 콘크리트 담장으로 바뀌어 버려 탱자가 귀해졌다.
보경사 장독대 앞에 더 귀한 탱자나무가 400년 동안 앉아 있다. 앉아 있다고 한 건 법성리의 탱자나무처럼 줄기를 늘씬하게 뽑아 올리지 않았단 말이다. 400년을 견뎌온 것을 인정받아 경상북도 보호수가 됐다. 오랜 세월을 간직한 어르신답게 품도 팡팡하니 그늘에 고양이가 쉼터를 마련하고도 남을 만치다. 가지도 잎도 가시도 푸른색이라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아야 탱자나무 맞네싶다. 그래서 열매가 노랗게 색을 내는 지금 가면 귤이 익은 거랑 똑 닮아 귤을 추운 곳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사자성어가 왜 생긴 건지 알게 된다.
초나라 왕은 제나라 사신인 ‘안자’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제나라 출신 범죄자를 그 앞에서 심문했다. 왕의 의도를 알아챈 안자는 “귤이 회남에서 나면 귤이 되지만 회북에서 나면 탱자가 된다고 합니다. 제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 중에는 도둑이 없습니다. 그런데 초나라에만 가면 도둑질을 하게 되니 어떻게 된 영문일까요?”라고 맞받아쳤다. 이 말에 초나라 왕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귤화위지’는 심는 지역에 따라 귤이 탱자가 되듯이 사람도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장독대 옆에 서서 된장 간장이 익는 동안 날 좋을 때마다 뚜껑을 열어 놓으면 탱자나무가 자주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5월 하얀 꽃을 피운 날엔 꽃가루도 한소끔 뿌려주었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장맛은 깊어지고 탱자는 노랗게 익었더랬지. 보경사 스님들은 향긋한 탱자 향이 밴 된장국을 드셔서 경내에 울리는 목탁 소리도 더 은은한듯하다.
탱자나무는 역사 속에 유배를 보낸 죄인 처소 주변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치는 일로 등장하기도 한다. 뾰족한 가시가 돋친 탱자나무가 빼곡하게 숲을 이루면 아무리 향기 좋은 열매가 열려도 죄인에게는 험상궂기만 한 탱자나무였을 것이다. 비록 귤이나 유자만큼 사랑받지 못해 쓸모가 없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놀 때 ‘탱자탱자 놀다’라고 표현하고, ‘유자는 얼어도 선비 손에 놀고 탱자는 잘 생겨도 거지 손에 논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탱자를 낮추어 보았다. 덜 익은 청열매로는 아토피 치료에 쓰고 가을에 잘 익은 것은 잘게 썰어 효소로 만들어 차로 마신다.
가을이면 노랗게 익은 탱자를 한 바구니 따서 집안 곳곳에 담아두어 그 향긋함이 집안을 가득 채우게 했다. 우리 집에 더 놓겠다고 덤비면 장독대 옆에 선 탱자 어르신 엄하게 가시를 세우며 나무라신다. 이 가을엔 담장을 지나는 이를 위해 욕심을 내려놓거라.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