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아주 먼 옛날, 신라 시대 현곡면 오류리에 열일곱, 열아홉 자매가 살았습니다. 청등·홍등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자매였습니다. 자매는 마음씨도 고와서 온 마을에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옆집에 씩씩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매는 전쟁터로 떠나는 청년을 담장 너머로 훔쳐보았습니다. 언니는 장독 뒤에 숨어서, 동생은 담 밑에 숨어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자매 둘 다 청년을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뒤,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자매는 너무나 슬퍼 ‘용림’이라는 연못으로 갔습니다. 연못가에서 목 놓아 울던 자매는 꼭 껴안은 채 연못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듬해 봄, 연못가에 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는 한 나무처럼 서로 뒤엉켜 자랐습니다. 나무는 봄이면 청등·홍등 같은 예쁜 꽃을 피웠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자매가 죽어서도 짝사랑한 청년을 위해 ‘등불’을 달았다고 믿었습니다. 그 꽃을 ‘등꽃’이라 이름 짓고 얼키설키 자라는 나무를 ‘등나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청년이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청년은 자매의 슬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숨을 바칠 정도로 자신을 사랑했던 자매를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시렸습니다. 청년은 하루하루 죄인의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결국, 청년도 용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바친 사랑에 목숨으로 보답했습니다.
청년이 죽은 뒤 연못가에 팽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청년의 화신이라 믿었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등나무가 청꽃·홍꽃을 피웠습니다. 두 등나무는 힘껏 껴안듯이 팽나무를 감고 올라갔습니다. 세상의 어느 사랑이 저리 지순하며 죽어서도 껴안을 만큼 간절할까요.
희붐한 새벽빛을 물리고 등나무·팽나무 아래 서 있습니다. 해가 천 번이나 뜨고 졌는데, 두 나무는 줄기를 줄기차게 뻗었습니다. 팽나무는 몸통 껍질을 떨어내며 가지를 쑥쑥 밀어내고 있습니다. 팽나무가 제 가지에 얼마나 많은 마음을 쏟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굵은 가지와 작은 가지가 얼키설키 어울립니다. 자매와 함께 현생에서 어우렁더우렁 살았다면 얼마나 보기 좋았을까요.
이제는 등나무를 봅니다. 등나무는 팽나무보다 줄기가 가느다랗습니다. 그런데 줄기는 작지만 옹골차 보입니다. 등나무 줄기를 만져 보았습니다. 간절함일까요, 절박함일까요, 등나무 줄기는 꼿꼿하면서도 부드럽게 팽나무를 힘껏 타고 올라갑니다.
전설의 자매는 한 남자를 놓고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하며 애달픈 사랑을 안으로 삭히려 애를 썼습니다. 갈등의 한자어는 葛(칡)과 藤(등나무)입니다. 칡과 등나무 줄기는 감아올리는 방향이 다릅니다. 칡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등나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습니다. 갈등은 서로 얽히듯이 뒤엉켜 있는 상태를 말하지요.
등나무의 꽃말은 ‘사랑에 취하다’입니다. 알고 나니 사랑에 취한 자매 청등·홍등이 떠오릅니다. 서로의 사랑을 지켜가며 한 발 한 발씩 자랐지요. 그렇게 등나무는 약한 부분을 이끌어주며 곱고 아름다운 꽃을 주저리주저리 피워냈습니다. 자매는 어느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서로가 나누는 사랑을 지금도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가끔 후회합니다. 내 감정에 너무 솔직하여 옆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상처를 주는 말은 한쪽에서 한쪽으로 내뱉는 화살과 같습니다. 툭 내뱉지만 맞은 사람은 몹시 아픕니다. 피를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사랑해서 솔직하다고 말합니다.
나 또한 그렇습니다. 굽은 나무가 마지막까지 산을 지키고, 고향 하늘 아래 산다는 이유로 많은 말을 거침없이 뱉었습니다. 한 가지에 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 상처를 주었습니다.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다는 구실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습니다. 때로는 밉고 때로는 보기 싫었다는 게 솔직한 말입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습니다. 갈등하지만 한데 어울려 끊임없이 서로를 타고 등나무 같은 사람.
등나무는 등지고 살지는 않습니다. 나무 지지대에 등을 대고 살아갑니다. 어느 시인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대의 등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등 돌리는 아픈 사연이 있었나 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추억을 쌓은 벗들이 어깨동무한 등, 아버지의 든든한 등, 우당탕했던 형제들의 등을 생각해 봅니다.
등신(藤身)처럼 줄기와 가지가 뒤엉켜 살더라도 등지지 말고. 등을 대면서. 그렇게 어우렁더우렁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