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문득 옛일을 돌이키거나 그리워하는 경우가 있다. 연구실을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전에 쓴 논문을 찾았기로 그런 정황에 빠져든다. 1920년대 소련 희곡을 공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유학을 떠난 두 번째 해에 쾰른에서 사흘 연속 알바를 하게 되었다. 견본시장에서 화재와 도둑을 방지하는 야경꾼 노릇을 한 것이다.
사흘 일해서 당시 돈으로 400마르크, 한화(韓貨)로 18만원 정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행복한 마음에 대학 인근 책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간다. ‘불가코프 희곡전집’과 ‘러시아-독일어 사전’같은 책을 사들인다.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이전의 한국에서 러시아문학 관련 서적을 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러시아희곡을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형편이어서 서책 구하기가 난제였다.
지도교수는 “여기서 공부하면 어떠냐?!”고 물으셨다.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오늘날처럼 러시아 자료가 풍성했다면 필시 나는 유학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유학을 나간 결정적인 이유는 자료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을 현대 중문학이나 브레히트 연구자들도 어느 정도 공감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불가코프 희곡전집은 감동 이상으로 다가왔다.
희곡 ‘투르빈씨네의 나날들(Dni Turninych)’을 읽다가 어느 날 난관에 봉착한다. ‘독서백편(讀書百篇)’을 수없이 되풀이해도 ‘의자현(義自現)’이 되지 않는 것이다. ‘궁즉통(窮卽通)’이라는 말도 있잖은가?! ‘그래, 불가코프가 키예프 출신이잖아. 필시 러시아어가 아니고, 우크라이나어일 가능성도 있겠군.’ 그런 생각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길로 쾰른 대학 슬라브학부 도서관을 찾아 두 권으로 출간된 ‘러시아-우크라이나어’ 사전을 빌려 복사한다. 당시 도이칠란트에서는 복사는 원하는 사람이 하되, 제본은 제본 전문가가 해주는 식이었다. 적잖은 돈을 들여 두툼하고 큼지막한 사전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렇게 풀렸다.
희곡에서 불가코프는 러시아어, 독일어, 우크라이나어를 곳곳에서 활용하였다. 작품을 읽고 난 소회는 뿌듯함 그 자체였다. 그렇게 나는 유학생활의 첫 번째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논문을 마칠 무렵 서울에서 연락이 온다. 지도교수의 ‘회갑기념논문집’을 낼 터이니, 논문 한 편 보내라는 것이다. 논문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났을 때 찾아든 기쁨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래서였을까! 논문의 마지막 마침표를 나는 느낌표로 바꿨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그런 생생한 쾌감과 즐거움은 찾아오지 않았다.
지도교수의 ‘회갑기념논문집’은 그렇게 강렬한 추억으로 남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싫든 좋든 추억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 추억이 우리를 살아가도록 강력하게 인도하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백세시대’가 보편화한 오늘날 ‘회갑기념논문집’을 출간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오후에 만난 색바랜 논문을 읽다가 홀연 찾아든 소회가 감상에 젖도록 한다. 창밖에 매미 크게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