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감래(苦盡甘來)’, 참으로 오랜만에 입에 올려보는 사자성어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찾아온다는 고진감래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이었다.
새마을운동에서 보듯이 땀을 흘리며 일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고 자식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부끄럽지 않아도 되는 위안거리였고 서로 지탱하는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고진감래를 이야기하면 현실감이 없는 사람, 옛날 사람이라는 핀잔이 뒤따른다.
이처럼 우리의 주변에서 사라지는 단어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개인주의가 확장되며 ‘우리’라는 단어가 힘을 잃고 있으며 배려, 협조, 기다림 등의 단어들이 퇴색되고 있다.
그 자리를 일확천금(一攫千金), 로또, 주택청약,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땅 투기 등이 차지하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자리 잡았다.
선조는 부유하지 않아도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의식주(衣食住)만 해결할 수 있으면 행복했다.
힘들게 살아도 손님 대접할 줄 알았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는 정으로 이웃은 사촌처럼 가까웠다.
하지만, 현재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물질만능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며 사랑, 배려, 나눔의 샘물이 점점 고갈되고 그 자리를 폭언과 폭력이 채우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이웃이 이웃을 아무런 이유 없이 가해를 가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빼앗는다.
의식주는 우리의 생활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불의 관계이지만 언제부터인가 꼭 필요도 하지만 남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변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되었다.
인구 28만 명이 거주하는 경산시의 주택 보급률은 현재 123%에 이르지만 내 집이 없는 시민들도 있다.
열심히 노력하고 아끼면 살 수 있었던 집이 어느 날 모든 것을 끌어다 붙여도 가질 수 없는, 가진 자만 더 가질 수 있는 전유물이 되어 버린 것에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지역민의 행복을 책임져야 할 자치단체장으로서 서글프다.
3선 임기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상생을 이야기하고 싶다.
지역발전을 위해 많은 자금이 투자되고, 높은 빌딩이 올라가고 편의시설이 갖추어진다 해도 서로가 아닌 나만이 고집 된다면 우리의 삶이 행복할까?
우리가 아닌 나만 강조되는 사회라면 내일을 과연 기대할 수 있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얼굴에 미소가 번지려면 서로를 위한 사랑과 배려, 칭찬, 나눔이 필요하다.
성경에 “밭의 곡식을 다 베지 말고 과부와 고아를 위해 남겨두라”는 구절이 있다.
밭 귀퉁이에 조금 남긴 곡식이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가진 자들이 힘들고 약한 자를 항상 생각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즉 가난하고 힘든 자들도 사회구성원임을 잊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리라.
종교를 떠나서라도 우린 경주 최 부자의 선행을 이야기하고 어려운 중에서도 남을 돕는다는 가슴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뭉클하지만 정작 자신이 행동에 옮기기에는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더라도 남이 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 강하고 아직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경산시는 착한 가게 등 착한 나눔을 정기적으로 할 방법을 찾았고 지금도 계속 나눔에 동참할 사람들을 찾는 나눔의 도시가 되었다.
경산은 앞으로도 발전가능성이 무궁하며 여러 가지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다. 어떠한 사업이라도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내 나라로, 울 엄마에서 내 엄마로 세상이 변하고 돈이 지배하는 사회이지만 우리는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가족이 없었다면 현재의 내가 있을 수 없고, 사회가 없다면 가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남을 배려하는 상생의 문화가 우리를 존재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