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설을 쓰는가? 그 질문에 굳이 답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게 내 삶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중 하나였으니까.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도 너는 좋아하는 일을 하잖아.” 정말 그럴까? 나는 소설 쓰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것일까? 깜박이는 커서를 앞에 두고 쓴 커피를 연거푸 들이켜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대체 나는 왜 이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가.’
문학을 전공하는 고등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다 보면 어떤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단순히 문학작품이 좋아서 글쓰기를 시작했던 아이들은 대학이라는 문턱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나는 그들을 무사히 졸업시키고 대학에 안착시켜야 한다는 사명을 안고 월급을 받고 있기 때문에 시스템에 편입되기 위한 글쓰기를 가르친다. 마음 한구석에서 양심이 소리친다. 이게 옳은 것인가? 제멋대로 튀어 나가는 아이들의 문장을 천편일률적으로 만드는 것. 다양한 생각을 기성의 틀에 욱여넣는 것이 정말 제대로 된 교육일까? 학생들과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따끔하다.
나 역시 대학에서 문학을 배웠다. 좋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골몰했고 위대한 작품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그렇다면 좋은 작품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독자는 진정 자의적으로 문학 작품을 선택하고 있는가?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코너가 보인다.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그쪽으로 발길을 향하게 된다. 책의 겉표지는 화려한 작가의 약력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책이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이 작가가 어떤 상을 받았는지, 모두가 알 만한 유명인이 이 작품을 얼마나 감명 깊게 읽었는지. 그것은 책을 비호하고 있는 굉장한 껍데기이며 선택을 종용하는 목소리다. 신춘문예 역시 그런 시스템이다. 심사에서 운 좋게 선택받은 사람이 작가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수많은 문학상은 문단에 안전하게 편입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하루에도 수십 권의 책이 세상에 쏟아지고 가지각색의 서사가 범람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오직 글 자체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작가는 과연 몇이나 될까?
등단을 하고 몇 년간은 그 사실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나 역시 그러한 시스템의 수혜자였으며 내게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문예지에 글을 발표하고 나면 악몽을 꿨고 작은 지적에도 몸을 움츠렸다. 나는 더욱 자신을 채찍질했다. 더 깊이 있는 사유를 해야 해. 적확하면서 아름다운 문장을 써야 해. 독특한 소재를 찾아서 다층의 서사를 구축해야 해. 그래야만 인정받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될 수 있어.
그때의 나는 단조로운 삶과 미진한 재능을 탓했다. 그러면서도 매일같이 책상 앞에 앉았다. 소설 쓰기의 괴로움은 소설 쓰기만으로 잊을 수 있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예술이라는 가치보다는 내 삶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넣다니.
그러다 한 가지, 너무나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 고통의 과정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이란 단순한 재미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들어있을지도 모를 컴컴한 미로 속으로 기꺼이 발을 내딛는 욕망이나 충동에 가깝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다. 내 안에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이리저리 살펴본 뒤에 나름의 답을 내어놓는 것이다. 그러한 사고 과정을 기록하는 지난한 행위가 쓰기다. 글을 쓰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자리에 앉아 집중하는 것. 이후에 남는 건 일련의 발자국이다. 작업물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목소리로 박제된다. 시간은 흐르다가 끝나기 마련이지만 소설의 서사는 차원의 벽을 넘어선다. 그러니까 소설을 쓴다는 건 과거의 망령에 조언을 듣고 미래의 인류와 소통하는 일, 상처를 입고 치유 받는 일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이러한 작업에 매료되었고 많은 것을 잃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흔쾌히 선택했다.
이것은 비단 소설 쓰기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삶의 지점을 향해 간다. 가끔은 이것이 옳은 방향일까에 대해 의심하기도 한다. 내게 재능이 있을까. 온 힘을 다해 당도한 끝이 허무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 ‘즐거움’이라고 이름 붙이자. 그 경쾌한 단어를 원동력 삼아서 어리석고 부당한 세계를 향해 기꺼이 나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