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어린이 날인 5월 5일은 칼 마르크스의 생일이다. 그는 1818년 5월 5일 독일에서 탄생하여 1883년 3월 14일 영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대인 변호사의 아들로 독일 라인란트 팔즈주의 트리어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거처 영국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런던에서 철도청 임시직, 신문 기고가로서 궁핍한 생활을 하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세상을 떠났다. 23세에 예나 대학에서 자연철학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그의 생활은 빈곤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대학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그가 작성한 기사 문제로 기자직에서도 해직되었다. 그는 친구 엥겔스의 경제적 도움을 받기도 하였지만 자녀를 먼저 보낸 인간적인 아픔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60여 권의 저서는 그를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그의 ‘경철 수고’,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은 대표적인 저서이다.
2008년 6월 6·15 공동선언 8주년 기념 해외 동포행사 관계로 2주간 독일을 방문하였다. 짬을 내어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로 4시간 걸리는 마르크스의 트리어 생가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모젤란트의 넓은 포도밭을 지나 트리어에 있는 그의 생가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의 기념관이 된 대저택 담장에는 붉은 장미꽃이 만발하였고, 생가 2층에는 그의 저서 등 여러 유물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기념관 벽면에는 그의 사상을 이어가는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도식이 잘 소개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레닌, 중국의 모택동, 베트남의 호치민, 쿠바의 카스트로, 체 게바라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그러나 궁금했던 북한 김일성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직원들에게 물어도 모른다는 답변밖에 없었다. 북한에서는 아직도 ‘위대한 김일성 주체사상’을 선전하지만 그는 이미 마르크스의 대열에서는 탈락된 것이다. 그것이 북한식 왕조적 공산주의에 대한 냉혹한 평가인지도 모른다. 나도 20대 초반 마르크스의 저서를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몰래 빌려 본 적도 있다. 반공을 국시라고 하던 시기에 그의 저서는 ‘불온 저서’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온 문서로 분류된 책일수록 더욱 잘 팔리던 시절이었다. 당시 국가 보안법에 위반되는 불온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현상이 발생하였다. 당시 마르크스와 레닌, 모택동 관련 저서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금서를 많이 읽은 사람이 진보적 지식인으로 대접받았다. 당시 사회 운동이나 학생 운동의 이론가들은 이러한 좌파 서적에서 운동의 방향성을 탐색했던 것이다. 당시 청년 학생이나 좌파 지식인들은 독재 정권하에서 사회적 정치적 모순의 해법을 좌익 이념서적에서 찾으려고 했다. 프랑스의 속담에 ‘20세에 공산주의자 한번 안 되어보면 바보이고, 60대 넘어까지 그대로 있으면 더욱 바보’라는 말이 있다.
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원조 공산주의자 마르크스를 다시 생각해 본다. 불행히도 그는 평생 소망이던 ‘계급 없는 사회’를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시 1871년 파리 코뮌도 지지했지만 70일 천하로 끝나 버렸다. 후일 레닌의 1917년 볼셰비키 혁명도 그의 혁명이론과 맞지 않았다. 타도 자본주의를 외쳤던 마르크스가 다시 살아난다면 오늘의 수정 자본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의 노동의 가치는 점차 존중받고, 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의 자본주의 모순은 다소 해소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혁명사상을 전면부정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자본주의 현실이다. 그의 유명한 자본론은 자본주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 수정 자본주의 길을 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아직도 좌파 철학자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5년 BBC방송은 전문가 설문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 단연 1위로 마르크스’를 뽑았다. 그는 아직도 북런던 하이게이트 공원 묘지에 안장돼 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