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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문화재 발굴, 90년 전 현장 속으로

황성호기자
등록일 2017-02-02 02:01 게재일 2017-02-02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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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경주 황복사터<BR>헌덕왕릉 등 모습 담겨<BR>십이지상 등 발굴 과정 생생<BR>일본학자 노세 우시조가 촬영<BR>문화재 실태 확인 귀중한 자료<BR>경주학연구원 700여장 필름공개
▲ 노세 우시조가 경주 황복사터 십이지상을 발굴·조사하고 있다.

【경주】 경주학연구원이 최근 90년 전 경주 문화재 사진을 공개했다.

경주학연구원은 일본 나라시 아스카엔(飛鳥園)에서 보관해 오던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의 한국 관련 문화재 유리건판 필름 700여장을 재촬영해 공개했다.

노세 우시조(能勢丑三·1889~1954)가 일제강점기에 경주를 방문해 유리건판에 남긴 이 사진은 당시 우리 문화재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정비되기 전 실태를 확인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동안 미공개로 있던 사진이 국내에 소개되기까지는 경상북도와 (사)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의 지원이 있었다.

▲ 신라 유물 발굴 현장에 인부로 추정되는 사람이 서 있다.
▲ 신라 유물 발굴 현장에 인부로 추정되는 사람이 서 있다.

경주학연구원은 2014년부터 아스카엔 측과 교섭한 끝에 지난해 12월 유리건판 3천700여장을 복제 촬영했다.

이중 700여장이 한국과 관련한 사진과 실측도면이다.

노세 우시조는 1926년 경주 서봉총 금관 발굴 현장을 찾은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의 수행단 일원으로 처음 경주에 왔다.

당시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교실 조수였던 그는 37세였다.

이 짧은 경주 방문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돼 경주의 문화유산에 매료되게 된다. 특히 십이지신상에 빠져 십이지와 관련된 국내 유적지는 모조리 찾아다니며 유리건판 사진으로 남겼다.

그가 사비를 털어 촬영과 발굴, 복원까지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교토의 재력가 자제였기 때문이다.

▲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석탑.
▲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석탑.

고대학협회 이사장이자 동료 학자였던 쓰노다 분에이(角田文衛)는 `고고학 교토학파`라는 글에서 “노세는 열정적으로 조선 고고학과 일본 석조공예사, 회화사를 연구했다. 특히 그는 신라 문화재만 보면 감격해 당시 경주에서의 애칭이 `감격선생`으로 불리었다”고 소개했다.

이번에 소개된 사진을 보면 1928~1931년 원원사(遠源寺) 터에 완전히 붕괴된 채 벼랑 아래 방치돼 있던 삼층석탑재를 수습해 탑지를 조사한 뒤 이를 복원하는 전과정이 도면과 함께 유리건판에 남겨져 있다.

동서 석탑터를 실측하고 발굴한 모습과 각종 부재를 모아 놓은 사진, 석탑을 복원하기 위해 모형을 만들고 가조립한 장면, 노세가 직접 그린 평면도와 석탑 모형도까지 원원사터 관련 사진만 300여장에 달한다.

이밖에도 헌덕왕릉과 구정동 방형분, 진평왕릉, 흥덕왕릉, 경덕왕릉, 성덕왕릉, 김유신장군묘 등 신라 왕릉을 비롯해 개성 고려왕릉에 대한 조사도 병행해 사진으로 남겼다.

▲ 곰방대를 문 발굴 인부가 원원사터에서 출토된 십이지상을 측정하고 있다.
▲ 곰방대를 문 발굴 인부가 원원사터에서 출토된 십이지상을 측정하고 있다.

경북 예천 개심사지 석탑, 전남 구례 화엄사 석탑 등의 십이지상을 최초로 주목한 것도 노세였다.

노세는 한국 십이지상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그와 관련한 선구적 업적을 남긴 연구자였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지금처럼 정비·복원되기 이전 신라 왕릉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향후 문화재 연구를 위해 보고서 발간 및 전시회도 개최될 예정이다.

/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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