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나라냐!”라고 시민들의 분노가 빗발치고 있다. 대통령 뒤에서 온갖 특혜와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을 행사해 온 개인과 집단을 일컫는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가 전국을 뒤흔들고 있다. 대통령 지지율은 바닥을 치고 여야 간 정치적 공방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비자는 `망징`편에서 망국의 조짐으로 “연락 책임을 특정한 신하에게 주어 외부와의 접촉을 일임해 버린다. 임금이 어둡고 무능하여 무슨 일이나 우유부단하며 남의 의사에 이끌릴 뿐 자기 주장이 없다”는 점을 든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아무런 권한과 자격이 없는 한 개인이 대통령의 권력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 국정을 농단해 왔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보며 이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 현재 한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역사 페이지에 이 시대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과연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인 배분 과정”이다. 이는 정치학 교재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의 정치에 대한 개념이다. 사회적 자원과 다양한 이해관계를 `권력(power)`을 통해 조정하고, 법과 합리적인 권위(authority)를 바탕으로 가치를 분배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이다. 정치의 본질이자 핵심 키워드인 `권력`은 다른 행위자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행위를 강제할 수 있는 영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치는 누가 권력을 차지하고 어떻게 정책을 형성하고 있는지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통령은 최고 권력으로써 기본적으로 국민 다수의 가치를 존중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이기에 무엇보다 공사 구별이 중요하다.
`가치, 권위, 배분`의 측면에서 현재 한국사회는 각종 특혜와 이권이 특정 집단에게 독점화된 가치와, 권력소유자의 합법적인 권위의 실종, 공정하고 투명한 분배의 과정이 사라진 벌거벗은 정치의 시대다.
결과적으로 정권의 부패 구조에 성난 민심을 담은 `시국 선언`들이 쏟아지고 있다. 대학가에서 시작된 흐름이 고등학생들도 대자보에 민주주의를 쓰며 촛불 시위에 동참하고 있다. 진로와 취업문제로 여력이 없는 학생들이 일상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추운 날씨에도 거리로 나선 시민들의 마음에는 파워 엘리트(power Elite)들의 무책임에 대한 깊은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는 최고 권력이 어떻게 사유화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이다. “작은 이익에 사로잡히면 큰 이익을 해친다”고 했다. 사적 이해관계가 앞서면 공적 정의가 붕괴된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한다. 역사의식이 없는 개인과 집단이 만들어낸 파행을 보며 민주투쟁의 역사를 다시금 살피게 된다.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면 정치적 위기는 더욱 확산될 수밖에 없다.
`최순실` 사건은 `뫼비우스의 띠`(Mobius strip)처럼 박근혜 대통령과 연결되어 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직사각형 종이를 꼬아서 양끝을 붙여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한쪽 면만 갖고 있다. 띠의 앞뒷면을 구별하기 어렵고 내부와 외부를 경계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최순실`로 시작되었지만 사실상 청와대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 형국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다름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불신과 불통의 정치 현실은 여야나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다시금 수면 아래에서 은폐, 축소되거나 왜곡되는 것은 없을 것인가? 무엇이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볼 일이다. “거짓을 바로 잡고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역사의 표준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였던 신채호 선생의 외침이 새삼 다시 와 닿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