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누가 권력을 갖고 있는가, 어떤 절차에 따라 정치권력이 작동되는가가 정치 형태를 규정한다. 모든 구성원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고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갖는 것, 이것이 전체주의 체제와 다른 민주주의 사회의 장점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구성원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어느 누구도 정치과정의 참여에 소외되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위정자들이 국민의 뜻을 들어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뉴스 보도를 접하면서 우리가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은, `국민을 위한다`는 말이 사실상 정치적 수사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국민은 과연 누구를 의미하는가? 국민들이 말하는 것이 제대로 정치과정에 반영되고 있는가?
2016년 지금 한국 정치의 민낯을 들여다보면 민주주의를 말하기가 부끄럽다. 권력집단이 과연 전체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지 비판적인 시선이 적지 않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리를 새삼 강조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가 전체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일정 기간 대표성을 갖고 일하는 것이다. 현명한 합의는 밀실에서 거래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론의 장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다른 결정들이 내려지는 현실을 보면서, 핵심 권력의 이너 서클에 있는 소수자들은 그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이 믿는 바를 정당화하는 정보만을 취사선택하는 확인편향(confirmation bias)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사회 구성원의 의견을 대변하기 보다는 자기중심주의(egocentrism)의 틀에 갇혀 다수의 의견을 외면하고, 여론 결과 또한 자족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민주주의는 어원적으로 민중을 의미하는 `demos`와 지배를 의미하는 `kratia`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수의 민중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자신은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마치 관객처럼 정치에 대한 관전평만을 늘어놓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집단의 이름으로 동원되고 있는 조작된 자발성의 여지는 없는가? 현대 민주주의 이론을 정리한 로버트 달은 민주적 과정의 특징으로 일반 시민들의 `효과적인 참여`를 강조한다. 구성원에게 구속력을 갖는 중요한 정책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시민들이 자신의 선호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올바른 방향감각을 갖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군주에게 충성하듯이 권력에 굴종하는 수동적인 신민(臣民) 의식을 떨쳐 버려야만 민주주의가 바로 서는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市民)의 존재는 민주주의의 희망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적인 변화를 추동해가기 위해서는 정치적 회의감과 무력감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시각을 갖고 정치과정에 책임감 있게 관여하는 시민들을 키워야 한다.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다수의 국민들이 민주적인 시민의식을 갖고 소수의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해야만, 힘의 행사가 신중해 질 수 있다. 조지 버나드 쇼는 “민주주의 사회의 선거란 무능한 다수가 부패한 소수를 당선시키는 것이다”고 풍자하였다. 백남기, 우병우, 최순실로 회자되는 여러 사건과 사태들을 지켜보며 우리가 다시 생각할 것은 무엇인가? 한국 사회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최근 현실을 돌아보며 정치인만이 아니라 유권자 스스로도 뼈아프게 되물을 일이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떳떳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