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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 심포지엄

등록일 2013-10-31 00:46 게재일 2013-10-31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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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신라<기조연설>

고대 `비단길` 오늘날 `바다길`에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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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문경 <숭실대학교 명예교수>
기원전 139년 중국 한나라 무제는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대월씨국에 장건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13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장건이 서역의 지리·민족·풍속 등에 관해 얻은 지식은 매우 많았다. 이후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를 이어주는 고대 교통로를 따라 많은 사람과 산물이 오갔고, 특히 중국의 특산품인 비단이 서역으로 수송되면서 `비단길(Silk Roed)`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구학자들은 이 `초원의 길(Step Route)`만을 비단길이라고 한정지어 불러왔지만, 동서문물교류사연구가 깊어지면서 오늘날 이는 `바다의 길(Sea Route)`에도 함께 적용되고 있다.

이슬람제국의 전성기에 태어난 세계적 지리학자 알 마스오디는 자신의 저서 `항금초원과 보석`에서 신라를 언급하며 `그곳으로 간 외국인은 공기가 맑고 물이 좋으며 자원이 풍부해 아무도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신라시대 규모는 작지만 서양 문명과 교역이 이뤄졌음은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경주 괘릉의 무인석상이나 흥덕왕릉 무인상에서의 심목고비 등은 서역인임을 의심할바 조차 없는 것들이다.

특히 신라말이 되면 경주에서 가까운 영일만이나 울산만에서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횡단하여 내주에 이르는 바닷길도 이용됐다. 이는 중국의 당국사보에도 기록돼 있다. 또한 거란족이 남하하는 신라하대에는 계림을 출발하여 남해안을 지나 흑산도 부근에서 바다를 건너 양자강이나 남중국으로 직항한 것으로도 나타난다.

서역 문명과의 교역은 신라인들이 모여 살던 중국 광주에서 형성된 `신라방`을 통해서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진귀한 서·남방 상품들은 이러한 교역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경주는 중국 장안에서 유행하던 서역풍의 정취를 닮아가고 있었으며 그런점에서 `삼십오금입택`으로 표현되던 특수부유층들은 인도의 공작미 등 사치성 소비재를 제공해 주는 무슬림의 왕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혜초가 본 인도·중앙아시아

혜초 행로, 실크로드 핵심지역 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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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삼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길은 인간에게 희망을 꿈꾸게 하고 교류와 소통을 낳는다.

인류의 역사는 길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인 혜초는 구법자의 길을 생애 내내걸었다. 인도까지 여정의 그 길엔 죽음의 사막도 험준한 산맥도 막지못했다.

그가 걸은 외롭고 힘든 구법 행로를 살펴보면 우연히도 오늘날 실크로드에 해당하는 핵심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동양에서 혜초에 앞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선국적 세계인이자 동양이 낳은 걸출한 세계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아시아 대륙의 끝, 서단까지 다녀와서 쓴 왕오천축국전 같은 견문록을 남긴 전례는 더더욱 없다.

그는 용기만 앞세운 수행자가 아니었다. 애틋한 연민을 간직한, 너무나 인간적인 한국인이었다.

신라 계림에서 태어나 열 여섯살때 당나라로 간 혜초는 가는길이 현재 해로설과 육로설로 나눠지지만 그 길은 이후 업적에 비하면 큰 의미는 없다.

그는 당나라에서 밀교의 전통을 이어받고 법을 구하기 위해 천축국 다섯나라와 중앙앙시아는 물론 멀리 아랍까지 여행했다. 그래서 흔히들 최초의 외국 사절이라고도 일컫는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등지고 구법자의 길을 걸었던 그는 그리워 눈물짓던 고향땅을 밟아 보지 못하고 타향에서 7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너무나 크다.

특히 아랍의 지배력이 확대되는 격변기의 중앙아시아를 순력한 혜초가 남긴 아랍과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 소그드 제국과 투르크 등 중앙아시아 일대의 광범위한 나라들에 대한 탐방과 인상적인 전문(傳聞) 기록은 동서문화 교류의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제시한다.

해양실크로드 교역항 말라카 역사·문화 고도 말라카, 혼합문화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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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석준 교수 <목포대학교>
항구 도시는 육지와 섬을 해상네트워크로 연결하는 하나의 거점 역할을 한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예외가 아니다.

1403년에 건설된 말레이시아의 역사적인 항구도시 말라카는 그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말라카는 중국 명나라가 바다 지배를 확대할 땐 왜소했지만 명나라 장군 쳉허가 300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인도와 아라비아, 동아프리카에 걸쳐 7번의 항해를 시작하고, 북방의 위협에 직면한 조정이 내부로 관심을 돌린 사이 급속 성장한다. 말라카에 드나드는 중국선박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든 틈을 타 투르크, 아르메닝, 아랍, 아프리카, 유럽의 상인들이 빈번히 왕래하면서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잇는 무역의 거점이 된 것이다. 특히 말라카는 그 과정에서 이슬람교가 유입돼 술탄제가 확립된 말라카 왕조가 들어섰는데, 외래문화를 수용·통합하는 과정에서 혼합문화를 일찍이 완성시켰다는 점이 특이하다.

말라카가 해상도로의 중심에서 동서문명이 이곳을 통해 교차한 역사의 도시로 성장한 이면에는 북으로는 인도차이나 반도, 서로는 말라카 해협, 남으로는 수마트라와 자바, 동으로는 남중국해로 연결되는 자연환경이 큰 역할을 했지만 해상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도시와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다문화를 일찍이 받아들인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잠재력이었다 할 수 있다.

서양의 식민지 지배를 거치면서 다양한 문화적 색채가 서로 혼합된 `말라카디움`(cara Melaka)이 만들어 진 것도 그런 맥락의 하나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현재 말라카의 역사와 문화를 재구성해 관광산업화 하려 하고 있다. 다양한 민족집단이 넓은 공간에서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는 모습이야 말로 그 어떤 유물과 유적에 비해서도 손색없다. 이질적인 외래문화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대표적 사례다.

장보고와 동아시아 해상교역

장보고 개설 청해진, 공무역 넘어서 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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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진 교수 <숭실대학교>
9세기 초 신라인의 해외진출과 국제교역 활동에 있어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해상왕`으로 알려진 장보고(張保皐)다.

그는 당시 중국으로 간 것은 극심한 자연재해와 식량기근으로 말미암아 자활의 길을 찾아 바다를 건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그러나 그 후 당나라 문물을 접하면서 눈을 떳고 또 신라인들이 당나라 해적들에게 잡혀와 노비로 팔리는 것을 근절하기 위해 신라로 귀국 후 흥덕왕의 재가를 받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당나라 서주(徐州)를 상대로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일반적으로 청해진이 설치되기 이전의 동아시아 교역은 사신의 왕래를 통한 공무역 체제가 전부였다. 공무역은 공물과 회사품의 교환을 통한 교역으로 관시(官市)나 호시(互市)를 개설해 사신들에게 교역을 맡긴 것으로 민간 교류와는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당나라에서 흑산도와 남해안을 거쳐 일본의 기타큐슈에 이르는 국제무역 항로의 중간지점에 장보고가 개설한 청해진은 공무역을 넘어선 교역을 이루어 내 사실상 해양실크로드 교류의 한 축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장보고는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면서 황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당-신라-일본을 연결하는 국제무역을 주도하기까지 했다.

장보고가 당시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산둥성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짓고 이곳을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게 되자 왕권 다툼에까지 뛰어들어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부분 등을 미뤄 신라 해상교류 무역의 활발했고 그 영역이 지대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장보고가 이룩한 당-신라-일본의 해상교역 활동이야말로 오늘날 동아시아 해상교역 네트워크의 출발지가 됐다고도 볼 수 있다.

선사시대의 한일교류 실크로드 종착역 논쟁 추가연구 거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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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희 박사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선사시대의 한일교류와 해양실크로드 속의 한일교류와는 시기적으로 거리가 있다.

일본에서는 나라를 해양실크로드의 종착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1991년 일본의 옛 수도인 나라현의 나라공원에 실크로드교류관을 조성한데 이어 1998년에 대규모의 실크로드박람회를 개최한 바 있다.

그러나 그후부터 다소 잠잠하다. 실크로드 루트를 연구하고 재현하면 역사적으로 신라라는 국가가 먼저 나올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신라 등의 문물이 일본으로 전해진 것과 맥을 같이한다.

알다시피 신라와 가야지역에서 간사이 지방에 이르기까지의 해양루트는 갑작스럽게 개척된 것이 아니고 그 오래전부터 피할수 없는 관계를 맺어 왔다. 일각에서는 한일 양지역의 관련성이 뚜렷해지는 것은 약 2만년전에 출현한 세석인문화를 통해서라는 학설도 있다.

한일 양지역에서 상호교류가 나타난 것은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이고, 철기시대에서부터는 대륙에서 시작된 한반도→일본으로의 문화전파가 지속됐다 할 수 있다. 특히 금속기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물자는 물론 상당수 인력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러다보니 서일본 각지에서는 영남지역에 철기와 원료를 입수하기 위해 한반도와 교류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속에 세토나이카이 교역루트가 발달하게 됐고, 이는 삼국시대로까지 이어지며 해양실크로드 종착역이 일본 노선이라는데 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경주 신라가 실크로드의 동쪽지역 종착역이라고 하면 이는 일본 주장과 다소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으로 역사적으로 이를 어떻게 고증, 입증시킬 것인가는 하는 과제를 남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각계 각층에서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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