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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향의 고장에서 화사한 봄맞이 하세요”

장유수기자
등록일 2013-02-08 00:40 게재일 2013-02-08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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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문학기행`
▲ 조지훈의 청년시절부터 일제식민정책을 통곡하며 절필한 사연, 광복 후 박두진·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로 활동한 일대기를 볼 수 있는 지훈문학관. 영양/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겨울의 끝자락이면서 아직은 봄을 기다리는 시기.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봄소식을 기다리는 몸과 마음은 서서히 지쳐간다.

요즘 `힐링`이라는 말이 도처에 유행이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데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다는 말이다.

문학의 존재 이유는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학기행이야 말로 훌륭한 `힐링` 소재가 아닐까.

영양은 문향(文鄕)의 고장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여행을 하기에 제격이다. 지역 곳곳에 문학의 향기가 스며있고 숱한 문인들이 시대를 노래했다.

특히 영양에는 우리나라 순수문학의 대표적 시인인 청록파 조지훈을 비롯해 후배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문학의 길을 열어주었던 영양문학의 맏형 오일도 시인, 청송의 김주영 선생과 함께 현대문학을 이끌어 가고 있는 거장 이문열 선생의 고향이다. 문향(文香)을 따라 자연과 전통이 어우러진 문향(文鄕)의 고장 영양을 찾아 나서보자.

월록서당·시인의 숲·지훈시공원 등 볼거리 풍성

□조지훈과 주실마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로 잘 알려진 이곳은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이며, 대표적인 한국 현대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지훈(1920∼1968)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동탁(東卓·본명) 조지훈은 1968년 5월, 48세의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일제 강점시대,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 시대에 절반씩 살며 저항과 지조로 일관한 선비였다.

박두진·박목월과 함께 청록파 시인인 그도 항일의 피를 이어받았다. 16세(1936년)에 상경, 조선어학회를 알게 돼 `큰사전` 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2년 최현배·이희승 등 33명의 인사가 검거된 조선어학회사건 소용돌이 땐 낙향했고, 광복 후엔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으로 복귀한 국문학자였다. 시인 신경림은 책 `시인을 찾아서`에서 조지훈에 대해 `멋과 지조의 시인`이라고 했다.

한양 조씨 집성촌인 주실마을 복판에 자리잡은 `호은종택`으로 불리는 조지훈의 생가를 찬찬히 둘러보면 시인이 멋과 지조의 시인이 된 연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 지훈 시비공원.

주실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풍수적 특성을 갖고 있다. 야트막한 뒷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마을 앞 봄의 기운을 한껏 품고 있는 너른 들 사이로 시냇물이 흐른다.

마을 초입에 있는 `지훈문학관`은 그의 청년시절부터 일제식민정책을 통곡하며 절필한 사연, 광복 후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로 불리면 활동한 일대기가 잘 정리돼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시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작은 계곡을 따라 오르는 시공원에는 조지훈의 동상과 시 27편이 돌에 새겨져 있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시 `승무` 옆에는 춤을 추는 동상도 있다. 한들거리는 봄바람 속에서 그의 시를 하나하나 읽으며 공원을 산책하다보면 시인의 꼿꼿한 마음이 느껴진다. 월록서당, 시인의 숲, 지훈시공원 등 볼거리도 즐비하다.

일제강점기 삶의 고독과 비애 노래한 애국시인

□오일도와 감천마을

조지훈의 생가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영양읍을 거쳐 감천리에 가면 오일도 시인의 생가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애국시인 일도(一島) 오희병(吳熙秉·1901∼1946)은 `노변의 애가`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등이 대표작.

그의 시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는 삶의 고독과 비애이다.

그는 호(일도)처럼 늘 자신을 외로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외로움과 비애의 정서는 모든 시에 배어 있다.

이는 조국 상실과 식민지 상황이 연관돼 있으며 1925년 7월 조선문단에 발표한 `한가람 백사장에서`에는 조국상실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어둠, 저문해, 갈바람, 밤, 비바람, 외나무다리 등 객관적인 상관물로 제시하고 있다. 또 `노변의 애가`는 일제 강점기의 어둡고 괴로운 시대를 배경으로 시인의 자연관조의 정서가 슬픔과 허무를 자아내고 있다.

▲ 오일도 시비공원.

오일도 시인은 작품활동보다는 순수한 시 전문잡지인 `시원`을 창간해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더 중요한 시사적 의미를 지닌다.

감천마을은 허리춤에 오는 낮은 토담길이 정겨운 동네로 이 마을 안쪽에 조부 오시동이 고종1년(1864년)에 건축한 시인의 생가가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 정침과 대문채가 `ㅁ`자형을 이루는 경북 북부지역 전형적인 양반집으로 대문채엔 `국운헌(菊雲軒)`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토담 너머로 흘겨보는 시골집의 마당 풍경엔 어릴 적 외할머니 집에서 놀던 기억의 편린을 읽어 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책을 읽는 시인의 동상 옆에 앉아 암울했던 시절 시인의 정신세계를 잠시 더듬다 보면 엄혹한 일제시대를 살면서도 고매한 정신과 올곧은 절개를 잃지 않은 시인의 대쪽 같은 마음이 가슴에 와 닿는다.

광산문학연구소·정부인 안동장씨 예절관 등 체험

▲ 소설가 이문열.

□이문열과 두들마을

현대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는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 이원철이 홀로 월북한 후 어머니 조남현의 슬하에서 5남매가 안동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어렵게 살았다. 초등학교 졸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검정고시이다. 안동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고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970년에는 사법시험을 본다며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학과를 중퇴했다. 사법시험에 실패한 뒤 1976년 결혼과 동시에 군에 입대했다. 그의 이런 생활이 기초가 돼 자전적 소설인 `젊은 날의 초상`이 탄생했다.

특히 이곳 두들마을은 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역정의 시절과 겹을 이루며 개인의 지적 모험을 소설로 표현한 거장 이문열의 마음의 고향이다. 그의 작품 `선택`,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금시조`,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등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가 살았던 옛집과 문학연구소인 광산문우(문학연구소)에는 젊은 학도와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고자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등 자신의 집필 및 문학체험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두들마을은 `언덕 위의 마을`이란 뜻의 순 우리말로 이름부터 정감이 넘친다. 강을 끼고 깎아지른 절벽이 마을을 떠받치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광제원이 있었던 곳으로, 석계 이시명(李時明·1590∼1674)이 1640년에 들어와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스스로 `석계`(石溪)라 했으며 그의 후손 재령 이씨의 집성촌이다. 석계고택(경북도 민속자료 제91호)과 석천서당(경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유우당(경북도 문화재자료 제285호), 주곡고택(경북도 민속자료 제114호) 등 30여 채의 고택이 있다. 특히 이곳은 몇 해 전부터 문화재와 고택들이 말끔하게 보수·보존되고 있는데다 광산문학연구소, 북카페, 음식디미방 체험관과 정부인 안동 장씨 예절관 등 현대식 전통가옥들이 새롭게 들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영양/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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