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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녀에게 생명을 주소서

등록일 2012-08-30 21:17 게재일 2012-08-3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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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석 경북여성정책개발원 교육인재개발실장

광복절 아침 조간신문에서 한 소녀를 보았다. 단발머리에 맨발로 책상의자에 앉아 무거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소녀는 시간이 갈수록 다양한 패션의 옷을 갈아입은 모습으로 카메라의 필름으로 남겨져 있었으나 나는 가슴에서 올라오는 뜨끈한 울먹임 때문에 한동안 그 사진을 똑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 소녀는 길 건너편 일본 국기를 쳐다보고 있는 종군 위안부 소녀상이다.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건너편 인도에서 246일째되는 날이 소녀가 맞는 첫 번째 광복절이다.

지난해 12월14일 소녀상이 세워지고 난 후, 소녀는 이웃들이 만든 목도리·옷·털모자·담요를 입고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냈을까? 새해에는 세뱃돈을 넣은 복주머니도 달았는데 행복했을까? 이것들은 단지 현재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우리가 감싸주고 싶은 소녀의 아픔일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본다. 내가 본 소녀의 나이는 15세, 그녀의 표정은 또다시 나의 목젖을 메이게 한다.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억압, 슬픔, 절망, 그리고 침묵의 단어를 연상한다. 소녀의 눈은 무시무시한 전쟁터에서 제국주의의 폭력적 전사들로부터 당하는 성폭행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이 심리적 억압으로 응축돼있고, 소녀의 눈은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혼자 남았다는 외로움으로 슬프고도 슬프다. 소녀의 눈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며, 돌아가더라도 희망이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절절히 흐른다. 그리고 그녀의 꼭 다문 입은 침묵으로 외치고 있다.`잃어버린 소녀시대를 진정으로 보상해 달라!`

전쟁은 힘없는 나라의 소녀들에게 지옥의 삶이 되었다. 소녀들은 망한 나라의 슬픔을 안고 제국주의자들의 전리품 취급을 받았다. 국권의 상실은 국민권의 상실로 이어져 일본제국은 소녀들에게 그 어떤 주체적 삶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소녀들은 일본제국의 소녀사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을 보호할 경찰도 군인도 없었고, 부모들도 그 행위를 막지 못하였다. 모진 목숨은 하늘이 내린 것이어서 살아남았으리라.

일본은 오늘도 여전히 사과하지 않는다. `일본의 차기 총리감`이라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위안부가 일본군에 폭행·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 며 일본이 한국소녀들을 강제연행했다는 증거를 대라고 한다. 하시모토 시장의 이런 발언은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설치, 운영을 처음으로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를 부인하는 일본 우익의 전형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대한 견해를 묻는 일본 취재진에게 대답하는 과정에서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전면 부정하고 나선 그의 모습에서 여전히 제국주의의 공격자 망령 정서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아 섬뜩하다. 과거를 참회하지 않고, 현재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치세력들의 공격성을 감지한다. 과거의 역사필름을 되돌려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힘이 약해질 때 또 침략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전시여성인권문제로 규정한 것에 찬성의 박수를 보낸다. 이 문제는 인류 보편적 인권문제일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우리 정부에서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하니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또 여성으로서 기대가 크다.

다시 한번 소녀를 쳐다본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너의 눈에서 그 어두운 빛이 사라지고, 환한 웃음을 보일 때까지 우리가 너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줄게….” 그렇게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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