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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아침, 부활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4-20 23:25 게재일 2011-04-2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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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옥 / 포항성모병원장
오는 24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최대 축제인 부활절이다. 오늘날 IT문명의 발달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신비에 대한 직감력이 상실하고 있지만 부활은 원래 봄의 축제였다. 유대인들은 가나안의 봄 축제를 파스카 축제에서 따로 떼어 새롭게 해석했고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신비에서 진정한 봄을 깨닫는다.

부활은 신앙의 눈으로 봐야 한다. 일생을 걸어도 후회가 없는 늘 부족한 그리스도인의 삶인,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다.

부활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이 신적 권위를 지닌 진리임을 확인해 주고 구약의 약속 뿐 아니라 생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약속의 실현이며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확증한다.

주님 부활은 우리를 다시 살리셨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입양`은 부활의 결과이다. 여기서 말하는 `입양`은 흔히 말하는 우리 사회의 입양과는 다르다. 비록 성자 그리스도의 아들 됨과 우리의 자녀 됨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입양이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거룩한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다시 낳으셨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장차 우리부활의 근원이며 원천이라고 한다.

본래 죽음은 숨이 끊어지고 육체적 활동이 모두 중단되는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다른 차원의 죽음 예를 들면 정신적, 영적인 죽음도 있다. 모든 희망을 잃고 아무런 의욕도 없이 무감각하게 지내거나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서 미움과 증오 속에서 산다면 정신적인 죽음일 것이다. 또는 많은 잘못을 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꽁꽁 닫고 자신 안에 고립되어 산다면 이는 영적인 죽음이다. 만일 이런 정신적 영적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새롭게 살게 됐다면 이미 이 세상에서 부활을 체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부활은 세상 종말에 있을 궁극적인 부활과 같은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비천한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필립 3·21)되는 부활을 미리 조금 맛보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일상의 작은 체험을 통해 마지막 날에 있게 될 궁극적인 부활을 어렴풋하게나마 두려움이 아닌 희망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부활의 길은 치유의 길이다. 또한 삶으로 들어가는 훈련이다. 치유란 우리의 상처를 돌보고 인생사의 억압과 괴로움을 다스린다. 이 길은 우리 안에 피어날 삶에서 우리의 가능성과 능력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서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들에서 시작된다. 삶이 위협당할 때, 우울과 좌절에 시달릴 때, 실망과 체념이 엄습할 때면 늘 부활의 길을 묵상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서 일어나며 내면의 경직을 깨치고 부활의 너름새와 자유에로 인도해 주는 삶을 새로이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 여기에서 부활을 맞이해야 한다.

이 지상의 삶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 지상의 삶은 천상의 삶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부활신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더욱더 세상에 투신하도록 하며 끊임없이 세상을 변화하기 위한 노력과 협력을 북돋아줘야 한다. 여기에서의 부활은 죽음이 먼저이다. 즉 죽음의 체험 없이 부활체험이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예수님 한분에게만 일어난 신비한 기적으로 그치지 않는다. 성서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새롭게 변화됐다고 전한다. 제자들은 이 만남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얻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작은 부활이 세상 마지막 날에 있을 궁극적인 부활을 확신하고 선포한다면 우리는 매일 아름다운 아침,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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