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막바지, 설한의 추위가 봄을 막아선 어느 날 소년이 물었습니다 “춥지, 그래도 봄은 곧 오겠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너는 언제나 따스한 봄이야” 농담도 해석으로 더욱 빛나기도 하는 것이어서 소년의 얼굴엔 잠시 홍조가 번졌습니다 소년은 그만 봄을 자기 것으로 지키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소년과 소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소년은 소녀의 따스한 농담 한마디에 하늘을 나는 꿈을 꾸어보는 것입니다소녀가 소년에게 한 “너는 언제나 따스한 봄이야”라는 말은, “소년의 얼굴”에 “홍조가 번지”도록 한다. 소년과 소녀 사이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기에 그 말은 농담이었지만, 그 농담은 소년이 수줍게 미소 짓게 하고, “봄을 자기 것으로 지키고 싶은 욕심”을 갖게 만들며, “하늘을 나는 꿈을 꾸어보”기 시작하도록 이끈다. 농담은 소년의 마음, 나아가 그의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따스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7-12
길에도 나무에도눈이 펑펑 내려 쌓여눈이, 눈이 내리고 쌓여발이 푹푹 빠지는 밤이렇게 눈이 와서 아름다운데이렇게 눈이 와서 부를 수 없네그래!얼른 나가보라 전화해야지너 사는 집에도 눈이 오겠지밤이 푹푹 빠지는눈이 펑펑 쏟아지겠지어떤 시인은 아름다움을 마주하면 어쩔 줄 모르는 맑고 순순한 영혼을 갖고 있다. 위의 시의 시인처럼. 함박눈이 내려 “길에도 나무에도” 쌓이는 밤, 시인은 이 밤이 너무 아름다워 좋아하는 너를 부르고 싶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눈이 너무 쌓여 너는 올 수 없다. 전화라도 하자, “얼른 나가보라”고. “밤이 푹푹 빠지는” 아름다운 눈의 밤을 만끽하라고. 시인은 저 아름다움을 혼자만 향유할 수 없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7-11
조각에는로댕의 혼이 있다모든 것을집중할 때우주는세계는사랑은고독한 섬여기에남몰래 흐르는눈물이 빗발친다한 사람의 삶은 우주와 세계 속에서 진행되며, 사랑을 통해 가치를 갖는다. 그럼으로써 어떤 우주와 세계와 사랑이 하나의 삶에 융합된다. 조각가는 이 융합된 삶 속의 “모든 것을 집중”하여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그 창작 과정에서 자신의 혼을 작품에 투여한다. 그렇게 만든 조각 작품은 하나의 삶-섬-처럼 고독하다. 한 인생과 조각가의 혼이 뒤섞여 형성된 그 섬에는 그들의 눈물이 소낙비처럼 내리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3-07-10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면 머지않아 죽는다는 말을 들었다그가 나를 알아보고 먼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무척 자연스럽군무언가를 기다리듯 그가 내 앞에 서 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안경을 추켜올리는 손을 바라보고 있다그가 오래 살기를 바란다시인이 말하듯이 자신의 분신을 만나면 “머지않아 죽는다”고 한다. 시인은 분신을 만나게 되었는데,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신을 관찰한다. 분신은 시인을 만나 반가운 모양이다. “먼저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것을 보니. 또한 시인처럼 분신도 시인을 이리저리 관찰한다. 시인-자신의 분신-을 만났으니 분신도 곧 죽게 될까? 시인과 분신 중 누가 먼저 죽을까? 마지막 행은 그런 질문을 하게 이끈다. 문학평론가
2023-07-09
퇴직 이후안경을 벗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알은체를 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많아졌다한 걸음 물러서야 내가 더 잘 보이듯눈이 흐린 만큼 마음만은 다시 맑아드디어 천국의 문도 보인다.밝은 별빛이 눈을 찌른다퇴직 이전의 시인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했을 터, 안경을 쓰고 지내야 했을 것이다. 이제 퇴직한 그는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 해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자 별빛이, 눈에 보이는 밤하늘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발원하여 마음의 눈을 찌르기 시작한다. 그곳은 천국이다. 시인은 천국이 다가옴을 감지하고 있는 것.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려는 시인의 모습은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문학평론가
2023-07-06
나이 먹으니 알겠더군평생 남의 무덤이나 짓다가결국은 순장당할 팔자라는 거키만 한 등짐 지고뒷골목 종종거리다 사라진 사람들발버둥 쳐야 벌금 고지서 하나 못 당하는 신세차라리 네게 망명해새로운 나라나 만들까가난한 아이를 위한 헌법을 만들고외로운 여자를 위한 군대를 훈련시킬까남을 종으로 부리는 세상깊은 해자 파고 높은 성을 쌓고내 손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아모자란 자들이 다스리는저 슬픈 나라를아무 미련 없이내려다볼까“남을 종으로 부리는”인 이 나라에서, 시인도 종처럼 “순장당할 팔자”를 벗어날 수 없다. “벌금 고지서 하나 못 당하는” 신세인 시인. 하나 그는 “내 손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자신의 왕국-시집-을 가진 사람 아닌가. 남의 종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시인인 것, 하여 시인은 다른 나라로 망명가고 싶어 한다. “가난한 아이를 위한 헌법”이 세워진 정의로운 나라, 순박해서 모자라 보이는 자들이 다스리는 나라로. 문학평론가
2023-07-05
책상 선반에 새가 날아와 종종거린다.한쪽 다리가 잘려서 외발로 서 있다.날개 달린 친구가 몸이 성치 않은 모습을 보니마음이 아프다.새가 날아가려고 날개를 펼치자웃는 것처럼 보였다부질없이 가여워하는 내 마음에수치심을 주려는 듯.이 새는 제대로 앉을 수도 없고뽐내고 걷거나 거들먹거릴 수도 없지만날개만큼은 다른 새들처럼, 아니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른다.책상 위로 날아와 앉은 외발 새를 본 화자는 “마음이 아프다.” 하나 화자의 그 마음이 잘못이라는 듯 그 새는 “웃는 것처럼” “날개를 펼”친다. 수치심을 느끼는 화자. 동정심이란 상대의 능력을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데서 나오는 마음일 수 있다. 보라, 저 외발 새가 펼친 당당한 날개를. 그제야 화자는 “제대로 앉을 수도 없”을 저 새가 “날개만큼은 다른 새들”보다 더 강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문학평론가
2023-07-03
작년 이맘때 뗏목에서 일하는 엄마 곁에서 놀다가엄마가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송사리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물속으로 들어가 버린 아기가 있었습니다멀리서 물개가 보고 부리나케 헤엄쳐 왔지만구하지 못한 아기가 있었습니다빈 독을 관 삼아 잠자는 아기를 넣고 묻은 돌무덤가에서귀뚜라미가 울고 있습니다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아기의 꿈속에서반딧불이 태어나고 있습니다아기가 “물속으로 들어가 버”려 세상을 떠버렸다…. 아기는 이 세계와 너무 친하기에 그런 일을 당한 것, “송사리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물에 들어간 것이니. 그래서인지 아기가 묻힌 “돌무덤가에서/귀뚜라미”는 추모의 울음을 울고, 이 울음소리에 맞추어 “아기의 꿈속에서/반딧불이 태어”난다. 아기의 죽음이 너무도 슬픈 나머지, 세계는 꿈의 세계에서라도 아기를 대신한 반딧불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7-02
돌아가신 할머니가할아버지 봉분 옆에 걸터앉아 있다한 세대가 잡초 가시에 찔리며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식사가몇 번이나 더 차려질지 궁금해한다소나무가 된 동생에게 건넨부모님 잘 모시라는 형의 말에못 갚을 부채처럼 퍼지는 햇빛나는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됐는데준비된 사람은 있었을까슬퍼 다행한 일뿐인 이들이양갱이 포장을 까던 날일가의 무덤 앞에 살아 있는 사람이 모인다. 그런데 위의 시에 따르면, 가족무덤 앞에는 산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할아버지 봉분 옆에 걸터 앉아 있”는 것을 보라. 한편 죽은 이는 “소나무가 된 동생”처럼 무덤가의 자연물들로 변해 있기도 하다. 무덤 앞은 산 자와 죽은 자,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장소인 것, 이곳에서 ‘한 세대’의 산 자들은 “슬퍼 다행한” 기묘한 상황에 놓인다. 문학평론가
2023-06-29
어깨 무겁다고슬쩍내려놓을 수도 없는 짐말은 삼켜야 했다세찬 바람 불고 갈 때마다우우우 속울음 울어도일탈할 수 없는 제자리스스로 길이 되어오늘도꼿꼿하게 지키고 섰다요즘은 전봇대를 보기 힘들다. 젊은 세대는 전봇대를 본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년에 다다른 이들이라면, 전봇대는 도시 속 일상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사물이었음을 잘 알 테다. 한데, 늘 전봇대를 대했으면서도 왜 이 시인처럼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까. 길목을 ‘제자리’에 “꼿꼿하게 지키고” 서 있는 전봇대의 삶의 무게를, 하여 “일탈할 수 없”어서 “스스로 길이 되어”야 하는 전봇대의 운명을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3-06-28
언젠가 물어보리기쁘거나 슬프거나성한 날 병든 날에꿈에도 생시에도영혼의 철삿줄 윙윙 울리는그대 생각,천 번 만 번 이상하여라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사시사철 내 한평생골수에 전화 오는그대 음성,언젠가 물어보리죽기 전에 단 한 번 물어보리그대 혹시나와 같았는지를‘상사’의 마음이 잘 표현된 시다. ‘상사’는 항상 ‘그대 생각’에 빠져 있는, ‘나’만 아는 상태다. ‘상사’에 빠지면 ‘한 평생’ 그대를 잊을 수 없다. 그대 생각이 메아리처럼 “골수에 전화 오는/그대 음성”이 되어, “영혼의 철삿줄”을 “윙윙 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사의 핵심은 그대도 ‘나’처럼 ‘나’를 생각했는지 알고 싶다는 점이다. 하여 “죽기 전에 단 한 번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그대의 ‘나’에 대한 마음이다…. 문학평론가
2023-06-27
난전의 장사꾼 틈에 천사가 잠들어 있다한파 속 엄마 품에 잠든 아기는 지금어느 별나라를 여행하고 있는 걸까갈라터진 엄마의 손바닥 이불이 아이의 우주인 듯볼우물 배냇짓까지 해가며지진으로 붕괴된 건물 잔해 속에서구조 대원들이 아이를 꺼냈다아빠는 얼른 아이를 받아안고는손바닥 이불로 아이의 눈을 가려준다그 순간안도의 작은 한숨이 세계인들에게 밀물졌다세상이라는 난해시를 읽어내는 만국의 언어였다손바닥 이불은세상은 몰인정한 세계가 되었다고 하지만, 깊은 사랑이 발현될 때가 있다. 한파 속에서도 장사를 해야 하는 어떤 엄마. 그 “엄마 품에 잠든 아기”를 보라고 시는 말한다. “지진으로 붕괴된 건물 잔해 속에서” 구조된 “아이를 받아안”으며, “손바닥 이불로 아이의 눈을 가려”주는 아버지도.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로부터 시적인 ‘만국의 언어’가 발견될 때가 있는 것, 그래서 세상은 ‘난해시’다. 문학평론가
2023-06-26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내 할아버지가 맞나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니광대 근처에, 낯선 구멍 하나어쩌다 눈이 세 개가 되셨나고 물으니내가 보고 싶어 그러셨단다아프지 않으셨냐고 물으니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정도라며 웃으신다내가 눈으로도 마음으로도억장이 무너지는 듯해침만 삼키고 있으니까닭을 알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신다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손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면서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해낸, 애틋한 시다. 손녀가 그리워서인지 눈이 하나 더 생겨 손녀의 꿈에 나타나신 할아버지. 아프지 않았냐는 손녀의 질문에 “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정도라”고 그는 대답한다. 나비는 예로부터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성물로 여겨졌다. 할아버지는 이 나비를 통해, 얼굴에 구멍이 뚫릴지라도 손녀와 만나고자 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6-25
아주 중요한 순간처럼 구름이 천천히 속력을 줄여횡단보도 앞에 멈춰선다이 세상이 누구의 기막힌 착상일지 생각해보다가 불안은무상한 하늘의 깊이에 놀란다사 분의 일쯤 뜯겨진 비닐봉투 속에서슬픔과 절망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쏟아진다스무 번쯤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동안 큰 가방 같은창문이 쓸모없는 풍경을 방안으로 끌어들인다혼자 하는 사랑은 고문이다혼자 먹을 음식을 식탁보 위에 충분히 펼쳐놓으며불안은 이 중요한 문제에 관해 골똘히 생각해보다가통증이 있나 없나 손등을 포크로 살짝 찍어본다 (부분)우리 현대인들이 살면서 느끼는 감정 중 많은 부분을 불안이 차지한다. 하나, 비록 불안이 생활에서는 쓸모없지만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기도 한다. 하늘의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는 이 세상에 대해서, 그러나 구름 위의 하늘이 보여주는 지극한 무상함의 깊이에 대해서. 또는 “슬픔과 절망이” 쏟아지는 “혼자 하는 사랑”의 고통에 대해서, 그러나 고통이 가져오는 살아있음의 감각에 대해서도. 문학평론가
2023-06-22
내 눈동자는 매일 밤 어떤 장면의 끝에서 완전히 부서지곤 했다.비슷하고 반듯하게 전개되는 일상을 거부하며 숲으로 들어간 사람은 숲에서 길을 잃는다. 자신이 지나쳐 온 길의 나무마다 표식을 남기지만, 그는 자신이 남긴 표식과 끝없이 마주할 것이다. 나무는 반복되고 숲은 증식한다. 날렵하고 작은 칼. 그것이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얼굴에 단 하나의 표식을 남긴다. 돌아오지 말 것.숲은 내 뒤에 있다. 숲은 나를 뒤적거린다.시인의 ‘눈동자’가 어떤 숲에 부딪쳐 부서진다. 그 숲은, 한 번 들어간 사람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미로와 같다. 게다가 증식하는 특성이 있는 미로. 결국 숲속의 사람은 ‘작은 칼’로 “자신의 얼굴에” “돌아오지 말 것”이라는 표식을 남겨 숲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만다. 이 숲이란 무엇일까. 시의 세계 아닐까. 시인 뒤에 있는 숲-시의 세계-이 시인을 뒤적거리며 시는 써진다는 것을, 3연은 말해준다. 문학평론가
2023-06-21
그가 햇볕이 잘 드는 공장 담벼락에 붙어 낮잠을 즐기고 있다눌러쓴 모자 위로 시간이 온도를 높이고 있는 중이다누가 깨우지만 않는다면 팔짱은 죽을 각오로 앉아 시간을 풀지 않을 것이다봄볕에 나온 수천마리의 벌들이 그의 잠 속에 빠져 꿀을 채취하고 있다노동에도 ‘서정성’이 있을까. 아마 지루한 작업의 연속일 공장에서의 노동에도 말이다. 아마 노동 자체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잠깐의 휴식 시간, 낮잠 자는 노동자의 모자 위에서 햇볕이 온도를 높이는 꿀 같은 시간에는 깊은 서정이 풀려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정에 잠긴 그의 잠 속으로 “수천마리의 벌들이” 들어와 단 꿀을 채취한다는 것. 그렇게 벌들이 잠 밖으로 꺼내 간 그 꿀이 서정시의 말이 될 테다. 문학평론가
2023-06-20
우리가 섬기는 기쁨이 우리를 기뻐할까날지 않기로 결정한 새에게 우리는 가혹하게 군다회복기의 환자에게 요구한다일어나 걷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태양에 기뻐하라고어서 눈 뜨고 저 달빛도 보라고보면어둠은 본 사람을 제단으로 삼는다제물 된 것이 몸 위에 얹혀 있다(중략)몸 위에서 어둠은 자유롭다우리가 잠든 사이 몸 위에서 많은 일이 벌어진다가끔 잠들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렇게 한다 (부분)우리는 누군가에게 “우리가 섬기는 기쁨”에 따를 것을 강요하곤 한다. “날지 않기로 결정한 새”에게도 빛이나 밝음이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둠은 그 빛을 “본 사람”을 “제단으로 삼는다”고 한다. 어둠은 “우리가 잠든 사이” 많은 일을 벌인다는 것. “잠들지 않은 사람에게도” 어둠은 일을 벌이는데, 그는 날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일 것이다. 어둠이 삶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무시하지 말 것. 문학평론가
2023-06-19
나는 그물을 들고 있다그물망 사이로 아무것도 없이빛나는 바다를 본다사공 없는 바다 한가운데파닥거리는 물고기아가미에서 중얼거리는 입술해변을 서성이던 종마가모래바람을 일으키며나에게 다가와 큰 소리로 운다나는 벌떡 일어나서 말의 안장에 오른다이제 막 눈뜬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며거울 너머 펼쳐진 백사장을 달려간다 (부분)‘나’는 거울 안-꿈 속-에 있다. ‘나-시인’은 그 안에서 어떤 무엇을 건지기 위해 그물을 들지만, 보이는 건 “빛나는 바다”뿐. 하지만 “바다 한가운데” 어떤 물고기가 파닥거리며 무엇인가를 아가미로 중얼거린다. 시의 말일까. 이때 “큰 소리로” 울며 다가온 말. ‘나’는 그 말에 올라타고 거울 바깥의 세계로, 즉 꿈밖-사막 같은 백사장-으로 달려 나간다. 꿈과 현실, 시의 얽힌 관계를 환상적으로 펼쳐놓은 시다. 문학평론가
2023-06-18
고비사막까지 태평양까지 날아가며갈기갈기 찢어지고 뒹굴어질까마귀들이었어요.우리집 빨랫줄에 매달려눈물 뚝뚝 흘리는저 까마귀들 말입니다.한 번 쓰고 버리면 아까워내장을 빼내고 주둥이를 씻어줄줄이 집게에 꽃힌잘 썩지 않는 비닐 말입니다.아무리 까악까악 울려고 해도진짜가 되지 못하는 까마귀들 말입니다.까마귀는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새로 여겨져 왔다. 시인은 오늘날 까마귀가 세상에 널려 있음을 알려준다. 그에겐 저 검은 비닐이 까마귀다. 그 까마귀는 잘 죽지 않는다. 그래서 “눈물 뚝뚝 흘”린다. 그 눈물은 “내장을 빼내” 다시 쓰이면서도 “진짜가 되지 못하는” 자신의 운명 때문에 흘리는 것이지만, 지구의 비참한 미래가 보이기에 흘리는 것이기도 하다. 썩지 않는 폐기물들로 뒤덮인 지구의 미래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3-06-15
물방울은 천년을 두고 떨어져서바위에 구멍을 뚫는다.그러나 돌멩이는만년을 두고 몸부림쳐도호수에 구멍 하나 뚫지 못한다.이런 섭리로 하여우리는 돌멩이와 물방울의강도를 예측하지 못한다.남들이 총알처럼 강하게울부짖을 때그래서 시인들은바람처럼 노래한다.‘강도’는 겉모양만 봐서는 ‘예측’할 수 없다. 물과 돌을 보라. 단단한 돌을 호수에 아무리 던져보아도 “구멍 하나 뚫지 못”하지만 작고 여린 물방울은 바위에 기어코 구멍을 뚫는다. 시인은 이를 우리의 말에 유비시킨다. 울부짖는 말은 겉으론 총알처럼 강력하게 보이지만 사람들 마음에 구멍을 뚫지 못한다. 하지만 시의 말은 바람처럼 가벼이 떠돌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고 보면 단단한 권력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