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 꼬부라는 졌지만 아직도 정정한 늙은이와풍 맞아 한쪽이 어줍은 안주인과대처 공장에 나갔다가한쪽 손을 프레스기에 바치고 돌아온 아들과젊어 혼자 된 환갑 가까운 큰딸이붉은 페인트로 새마을이라 써놓은무럭무럭 훈김이 나는 미닫이문 안에서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뽀얀 절편을 뽑아내고 있습니다방앗간이 ‘아직도’ 있는 곳이 있다. 위의 시의 방앗간은 ‘새마을’이란 이름이 붙은 걸 보니 1970년대에 세워진 곳일 테다. 이곳 주인은 늙었지만 아직도 정정하다. 하지만 안주인은 풍을 맞았고, 아들은 공장에서 “한쪽 손을 프레스기에 바”쳤다. “젊어 혼자 된” 큰딸은 환갑이 다 되었다. 이 가족은 기구해 보이지만,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활기차게 살고 있다. 여전히 “뽀얀 절편을 뽑아내고 있”는 것. 문학평론가
2024-03-04
튀어 오르는 자의 기쁨을 알 것 같다뛰어내리는 자의 고뇌를알 것도 같다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종아리를 걷는 맨발들이 보이고총총 사라진 뒤달빛이 해파리처럼 공중을 떠돈다아무도 없는 공터에트램펄린이 놓여 있고속이 환히 비치는 슈퍼문이 떠 있다아래에서 위로 “튀어 오르”면 신나고 기쁘다. 반면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일은 깊은 고뇌를 필요로 한다. 저기 공터에 놓인 ‘트램펄린’에서, 한밤중에 “종아리를 걷”고 뛰는 이들은 튀어 오르고 있는 걸까 뛰어내리고 있는 걸까. 저 트램펄린 위의 사람들 모습은 우리들의 삶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기쁨과 고뇌의 반복 리듬을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들을 위로해줄 달빛은 “해파리처럼 공중을 떠”돌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4-03-03
다 내 것이라 여겼던 손발인데손은 손대로 하고 싶은 것 하게 하고발도 제 뜻대로 하라고 그냥 둡니다내 맘대로 이리저리 부리면말을 듣지 않습니다눈이 보여준 것만 보고귀가 들려준 것만 듣고 삽니다다만 꽃이 지는 소리를눈으로 듣습니다눈으로 듣고 귀로 보고손으로는 마음을 만집니다발은 또 천리 밖을 다녀와걸음이 무겁습니다늙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 시에 따르면 나의 몸이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한다. 내 의지로 몸을 부리려 하면 몸은 이에 반항한다. 그러니 나는 나의 몸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야 한다. 이때 몸의 부위들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꽃이 지는 소리를/눈으로” 들을 수 있게 되고, 손은 “마음을 만”질 수 있게 되며, 발은 “천리 밖을 다녀”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늙음에 순응하면 늙음은 다른 세상을 열어준다. 문학평론가
2024-02-28
절망이 유행이다. 절망적인 절망은 그렇지 않고. 그런 절망 안에야, 즉 격심한절망 안에야 늘 그래도 희망이 불타고 있는 법인데,오늘날 설쳐대고 있는 건 아늑한 절망히죽거리는 절망.니체의 포즈로: 선악이란 없으며, 존재하고존재했으며 또 존재할 모든 것, 그 모든 것은 한결같다고:자연과정이라고:인간 없는 인류라고,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얼마나 굼뜨게 인생이 흘러버리는가, 희망희망은-얼마나 극렬한가 아직도 언제나!옛 동독 시절 독일의 비판적 음유 시인 볼프 비어만의 시인데, 지금 한국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현 상황에서 ‘절망’을 운운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아늑한’, ‘히죽거리는 절망’ 아닐까. 왜냐하면 “격심한/절망 안에”는 “희망이 불타고 있는 법”인데 요즘 말해지는 ‘절망’ 안엔 극렬한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 그 절망은, 모든 게 ‘자연과정’이라며 현실에 순응하는 절망처럼 보인다. 문학평론가
2024-02-27
물 수(水)에 갈 거(去)법 법(法)물 흐르듯 가는 것이 법이라 배웠지(중략)법이 눈물을 닦아주는 거라면억울한 밑둥까지 살펴야제대로 법으로 밥 먹는 사람결국 법을 공부하는 것은법을 달달 외는 게 아니라 눈물을 공부하는 것그렇게 통섭했다면수많은 조영래가 있지 않았을까눈물이 법이 된 시대 벌써 오지 않았을까어느새 한국 사회는 법의 근본 취지를 망각해버렸다. 법은 마치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 위의 시는 법의 본질을 우리에게 다시 일깨워준다. 법이란 “물 흐르듯 가는 것”이며 힘없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거”라는 본질. 하나 한국엔 “법을 달달 외”어 현실에 적용하는 법 기술자가 득시글댄다. 반면 “법을 공부하는 것은” “눈물을 공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문학평론가
2024-02-26
(전략)싱싱한 새벽 공기를 따라 내처 뛰어나갔던 그 자리이제 노을에 젖은 가슴이 그만 오른 발길에 차인다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그러면 누군가 물을 것이다, 언제 헤어질 것이냐고어떤 날을 그리워하기를 바란다면네 몸의 상처를 낭자하게 내버려두며동거하지 않음에 대하여 슬퍼하지 말며발가벗은 몸으로도 꽃을 피울 줄 알아야 한다선홍빛 상사화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잠깐 이런 생각도 하는 것이다상사화는 꽃과 잎이 피는 시기가 달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비유되곤 하는 꽃. 시인이 이 꽃을 들여다보다가 생각한 것은 잃어버린 사랑일 테다. “노을에 젖은 가슴”이 되었던 실연의 시간. 하나 그는 이 실연의 상처가 이파리와 ‘동거’하지 않고 “벌거벗은 몸으로도 꽃을 피”우는 상사화로 피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여 그리움으로 “네 몸의 상처를 낭자하게 내버려”두라고 스스로에게 권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2-25
빛의 줄기들은 마음이 처음 왔듯내 얼굴에 가만히 와서얹히겠지그 언덕으로, 천천히부서지고 따스해지는 빛을만져보며물결이 일렁이듯아무 슬픔도 없이갑자기 눈물을 흘리게 될까롱샹성당에 나를 데리고 온신비하고 이상한 그 일이시인을 감싸는 타인의 마음처럼, 빛은 그의 얼굴 위에 “가만히 와서/얹”히자, 시인은 자신에게 다가온 따스한 빛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몸 위로 물결처럼 번져나가는 빛에 이끌려, “아무 슬픔도 없이//갑자기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빛은 어떤 장소를 다른 장소로, 어떤 사물을 다른 것으로 드러내며 다르게 감각하도록 이끌 터, 이렇게 시인은 ‘롱샹성당’만의 독특한 감각이 불러일으킬 신비를 상상해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02-21
오랫동안 풍을 앓던 동생 초상을 치르고망백이 넘은 누이는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방문요양사만 날마다 드나들었다이레 만에 구급차를 대동한 요양사에게 겨우부축받으며 문밖을 나서던 삭정이 같은 몸이무너지듯 마당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울었다동네사람들이 모여들어 달래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중략)비애의 곡절이 끝나기도 전에 혼절한 그이를 실은구급차가 황급히 떠나고 사람들이 혀를 차며돌아서자 철없는 새끼고양이가 봄볕을 쬐며바닥난 슬픔 위를 뒹굴었다(하략)가난하고 아픈 이들에게 슬픈 일은 연이어 일어난다. 위의 시가 보여주듯이. 비극은 문학작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비극은 자주 일어나는 바, 고대에서와는 달리 현대의 비극은 낮은 곳에서 볼 수 있다. 풍을 앓은 동생을 저 세상으로 보낸 누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고는, 그 역시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빈집 수돗가’에 한창인 작약은 이 남매의 비극적 삶을 더욱 짙은 슬픔으로 채색한다. 문학평론가
2024-02-20
단지 외로워서 제 몸에서 송곳니처럼 뻗은 가지들이필시 그 외로움으로 한 계절을 같이 해온 무성한 이파리들그러나 일찍이 병든 이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긴 손을 뻗은 채 서 있는 궁산 기슭의 서어나무 한 그루뱀의 혓바닥 같은 연이은 참사를 몰고 온 여름의 폭풍에도마냥 꺾일 듯 쓰러졌다가 일어서길 반복하며 해마다알을 품고 새끼쳐나가는 까치집을 몇 년째 붙들고 있다(중략)스스로조차 어찌할 바 모르는 바람의 본성에 따라흔들리면서 흔들리지 않는 나무의 지혜에 충실하게어쩌면 그 누구도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비탄의 시간,(하략)모든 존재자들은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 저 ‘서어나무’와 까치도 그렇다. ‘까치집’은 두 존재자가 맺은 관계의 결실이다. 까치는 서어나무 위에 둥지를 지어 나무를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나무는 “바람의 본성에 따라/흔들리면서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까치집을 “몇 년째 붙들”며 보호한다. 이 관계 맺음을 통해 존재자들은 ‘연이은 참사’에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 인간의 삶 역시 그러할 테다. 문학평론가
2024-02-19
빛이 허약해지는 겨울에는바르게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거기에는 늘 새가 있고태양이 돌아누운 하늘은 새들의 것혀와 입술이 읽어주는 몸의 연애처럼기계가 읽어주는 쓸쓸한 소음처럼뭉근히 울려 퍼지는 날개책을 덮으면투명한 몸으로핏물처럼 번지는 문장등 뒤척이는 밤을 열면새들의 눈알이가지처럼 빛난다(하략)하늘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계절이 있다. “빛이 허약해지는” 계절인 겨울이다. 빛이 약해야 하늘의 존재자들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에. 무엇이 드러나는가? 새다. 겨울엔 “하늘은 새들의 것”이라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 진실은 시각을 넘어서는 감각. 키스할 때의 촉각이나 “쓸쓸한 소음”의 청각을 통해 “뭉근히 울려 퍼지는 날개”로 현현한다. “투명한 몸으로/핏물처럼 번지는 문장”을 선사하는 날개로. 문학평론가
2024-02-18
오래된 사진 속 너는카페의 창가 의자에 앉아나를 바라보고 있다내가 바라보는 곳은내가 지나온 세계이기도 하지만카메라 너머의 사물들을 붙들 것처럼너는 흰 손을 뻗으며얼굴에 환한 빛을 밝히고 있지만(중략)잠에서 막 깬 사람처럼나는 네가 몸을 기울인 공간의 온도와습도를 상상한다손 끝에 닿은 사물들이뜨거운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위의 시에 따르면, 사진 속의 세계는 수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속의 인물을 보고 있자면, 그가 “나를 바라보”며 “흰 손을 뻗”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느낌은 “내가 지나온 세계이기도” 한 사진 속 공간과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이 겹치는 ‘상상’으로 이끌고, 현 공간과 섞이는 사진 속의 세계는 “온도와 습도”를 가진 살아있는 세계, “사물들이/뜨거운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세계로 현존하게 된다. 문학평론가
2024-02-15
연못가 버드나무에선바람이 불 때마다몇 마리의 물고기가 툭 툭 놓여났다공중을 물들이며 스스륵 잠기는 물고기(중략)버드나무는물속에 잠긴 발등을 오래 바라보며고요하다이게 버드나무의 마음이라면연못 속에도나뭇잎에서도물고기들이 태어나고 자란다어느 저녁나도 툭 놓여나겠지밤이 연못 속으로 고이고물속은 한없이 깊어지고나를 데려다준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텐데연못과 그 옆에서 연못을 “오래 바라보”고 있는 버드나무와 이 풍경을 보고 있는 ‘나’는 서로 감응하며 미메시스된다. 하여 연못의 물고기는 버드나무 나뭇잎이 되며,‘나’ 역시 물고기처럼 “툭 놓여”날 테다. 이러한 마술의 현현은 미메시스가 마음에서 일어나기에 가능한 일이다. 연못과 버드나무와 ‘나’의 마음은 미메시스로 인해 물처럼 뒤섞이며 깊어지고, 이 마음속에서 “물고기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2-14
세상을 다독여 재우려는아기 숨결 같은 눈이라니뒤척이는 진창으로 내려와 점점이입김 내불고 숨을 놓는다깊어 가는 골목마다빈 나뭇가지마다 고요한 뜰에아기 살결 같은 눈이 쌓여먼 나라웅숭깊은 창을 열면칠흑의 어둠 속거룩한 성자겨울밤 가만히 쌓이는 눈. 순결하고 아름답다. 시에 따르면, “아기 숨결 같”은 이 눈은 “세상을 다독여 재우려는” 듯 자신의 고요한 숨결을 이 세상 위에 놓는다. 세상은 어떠한가. “뒤척이는 진창”이다. 이 진창의 골목 구석까지 내리는 눈은 세상을 더 깊게 만든다. 하여, 눈 내리는 창밖 세계는 더욱 ‘웅숭깊은’ ‘먼 나라’로 현현한다. 눈이 ‘칠흑의 어둠 속’을 밝히는 ‘거룩한 성자’로 이 세상에 도래했기 때문에. 문학평론가
2024-02-13
인생에 악착같이 밀착해야지그것을 맹렬히 붙들어야지이 날의 달콤함이 가시기 전에나의 체온으로 영원한 온기를 남겨야지모든 나라에 미치는 끝없는 바다는변덕스러운 파도에 쓰고 짠나의 고통을 쪽배처럼 흔들흔들실어 나르겠지만나는 남겨야지, 저 언덕에 나의 흔적을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던 나의 뜨거운 시선을그러면 가시나무의 매미는 노래하겠지나의 욕망이 부르는 날카로운 울음을(하략)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여성 시인 안나 드 노아이유의 시. 사람이 삶에서 가장 욕망하는 것은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것 아닐까. 예술가들의 본질적 욕망은 거기 있는 것 아닐까. 세계라는 바다는 “나의 고통을” “실어 나”르지만, 그들은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뜨거운 시선”을 시로, 형상으로 표현하고, 이 세계 속에서 품게 된 “욕망이 부르는 날카로운 울음”을 노래하면서 이 바다를 항해한다. 문학평론가
2024-02-12
한 왕관처럼대지의 이마에한 왕관처럼날아가고 있었다 새들이멀리서 보았다그리고 나는 바로 거기에서 소리쳤다축하한다대지여, 축하한다.인도 현대시인인 께다르나트 싱의 시. 짧지만 응축적이면서 황홀한 시다. 시인은 대지 위를 나는 새들을 “멀리서 보”고 있다. 그 새들의 비상은 마치 대지의 이마 위에 씌워진 왕관 같은 모습이다. 이 세계의 왕이 대지라고 할 때, 비상하는 새들이 대지가 이 세계의 왕임을 드러내기에 그렇다. 시인이 대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건, 새들의 비상으로 비로소 대지가 세계의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기 때문일 터. 문학평론가
2024-02-07
사랑이란….하늘을 향해 나는 것매 숨결마다 장막을 백 개씩 뜯어내는 것처음엔 한 숨 한 숨 끊고처음엔 한 걸음 한걸음 끊는 것이 세상을 무시해버리는 것자기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심장아, 네게 축복이 있길사모하는 자들의 무리 속에 도달하기를보이는 곳 너머의 그곳을 바라보길가슴속 골목길을 달리기를오 심장아,이 숨결은 어디서 왔는가오 심장아,이 두근거림은 어디에서….오 새여, 새들의 언어를 말하라나는 들리는 소리에 숨겨진 신비를 알고 있다 (하략)13세기 페르시아 신비주의 시인인 루미의 시. 중세 시대에 놀랍게도 루미는 사랑에 대한 확 트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사랑은 신과의 사랑을 의미하겠지만, 사람끼리의 사랑 역시 저 이미지는 생생하게 들어맞지 않는가. 하여, 사랑은 ‘새들의 언어’로 소통한다. 사랑이란 “하늘을 향해 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사랑에 빠진 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 지상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2-06
택배 받아 내용물 다 들어내고빈 포장 박스를 뜯어 해체한다.당초의 얼개대로 접고 붙인 부분들을일일이 찾아 뜯고 다시 편다.사람도 접히고 붙여진 몇 굽이 곡절들로생을 포장해 미움도 사랑도 담아내지만언젠가는 여기 이렇게 뜯어 펴는 박스처럼 해체되리라.다만 길고 짧은 시간 그가 앉았다 간 자리엔따스한 온기만이 남아 식으리라.여섯 면의 곽이었던 몸피가 분해되면 납작하게 평면으로 쭈그러든다.그렇게 용도 폐기된 상자가 골판지 낱장들로그동안의 크고 작았던 삶에 상관없이원래의 면목대로 고물상 한옆에 쌓인다.반납되곤 한다.인생은 ‘포장 박스’ 같다. 삶은 “몇 굽이 곡절들”을 “접고 붙”이면서 포장 박스가 되고, 그 박스 안에 “미움도 사랑도 담아”낸다. 하나 용도를 다한 포장 박스가 해체되듯, 인생 역시 원래대로 “평면으로 쭈그러”져 저 세상으로 반납될 것이다. 인생은 허무한 것인가? 하지만 적어도 “그가 앉았다 간 자리엔/따스한 온기가” 얼마 동안 남아 있다. 눈물겹지만, 그 온기만으로도 삶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문학평론가
2024-02-05
어딘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는가하루 일이 끝나면 흑맥주 한 잔괭이를 세워두고, 바구니를 내려두고남자도 여자도 커다란 맥주잔을 기울이는어딘가 아름다운 거리는 없는가먹을 수 있는 열매가 달린 가로수가어디까지고 이어지고, 노을 짙은 해질녘에젊은이가 상냥하게 떠드는 소리로 흘러넘치는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의 힘은 없는가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날카로운 힘이 되어, 눈앞에 불쑥 나타나는시인은 ‘~없는가’라는 문형의 문장을 반복하면서, 현재는 찾기 힘들어진 아름다운 마을, 아름다운 거리,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워한다. 시인에 따르면, 일 끝나고 함께 일한 남녀 모두 흑맥주를 마실 수 있는 마을은 아름답다. “젊은이가 상냥하게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도 아름답다. 또한 “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 사람의 “날카로운 힘이 되어” “불쑥 나타”날 때, 그 ‘사람의 힘’ 역시 아름답다. 문학평론가
2024-02-04
지그시 두 손으로 감싸면 꼭 심장을 쥔 것 같다불은 견딘 것들은불의 성질을 그대로 닮아서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는사람의 심장도밥그릇 크기로딱 그만큼 뜨거워졌다따듯한 밥그릇을 심장으로 치환하는 상상력이 놀랍다. 사실 밥은 우리의 삶을 살게 해주는 것 아닌가. 심장이 우리 생명을 지탱해주듯이. 한데 시인의 유추는 더 나아간다. 따스한 밥과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는” 이의 심장을 동일화 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밥을 지어 먹이겠다는 마음 역시 밥처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것. 그 마음은 불처럼 뜨겁다. 그래서 그것은 불을 견딘 밥처럼 “불의 성질을 그대로 닯”는다. 문학평론가
2024-02-01
숲을 찾았다.사라지지 않을 물과사라지지 않을 공기와 나무에게 입술을 대었다.집도 자동차도 직업도 사람도 모두 바뀐다.저물녘과 새벽만 바뀌지 않는다.가난한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죽기 전까지 함께 할 것들이 나를 살린다.화분에 쌓인 돌을 오래 보았다.부정한 입술이 맑아졌다.시인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살리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것들은 가난하다. 시인에 따르면 집이나 자동차, 사람마저도 변한다. 부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한낮의 세계에 존재하는 그것들은 ‘부정함’을 끌고 온다. 반면, 낮밤이 교차되는 ‘저물녘과 새벽’은, “화분에 쌓인 돌”처럼 변하지 않는 것들의 세계다. 그리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에 “입술을 대었”을 때, 부정한 삶은 맑아질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4-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