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기다리다늦도록 지루해진 골목길에는잠시 텅 빈 틈을 나고 담벼락이 높기도 하네나는 닳고 닳은 골목길자꾸만 떠나려는 너를아귀가 맞지 않아 뻐근한 쪽문을 열고놓아주네 휘어질 듯 졸던 담벼락이문소리에 놀라 한 번 크게 소스라치고깨어나네 일제히起立하여 네가 가는 길을 가만히열어주네 내 흐린 시선이가 닿을 수 없는 골목의 저편모퉁이를 돌다 말고 가던 길 돌아보던 네가길 지우는 저녁마다 푸른 영혼으로 꺾어진담벼락에 스미네사랑하기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이별의 애상을 잔잔하게 표현한 위의 시를 만나니 마음이 뭉클해진다. ‘너’를 기다리며 살아온 ‘나’는 “자꾸만 떠나려는 너를” 기어이 ‘놓아’준다. ‘담벼락’이 이때의 ‘나’의 마음을 표현한다. ‘너’를 보내려고 연 문소리에 ‘담벼락’은 “소스라치고/깨어나” “길을 가만히 열어”주고, “골목의 저편”에서 “가던 길 돌아보던” 너의 마지막 이미지가 그 담벼락의 영혼에 푸르게 스며든다...... 문학평론가
2023-06-12
남편의 실직으로 고개 숙인 그녀에게엄마, 고뇌하는 거야?다섯 살짜리 딸 아이가 느닷없이 묻는다고뇌라는 말에 놀란 그녀가고뇌가 뭔데? 되물었더니마음이 깨어지는 거야, 한다꽃잎 같은 아이의 입술 끝에서재앙 같은 말이 나온 이 세상을그녀는 믿을 수 없다책장을 넘기듯 시간을 넘기고 생각한다깨어진 마음을 들고 어디로 가나고뇌하는 그녀에게아무도 아무 말 해주지 않았다하루 종일길모퉁이에 앉아 삶을 꿈꾸었다아이의 말은 꾸밈없다. 저 아이가 엄마에게 “마음이 깨어지”고 있냐는 물음은 남편의 실직으로 괴로운 엄마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해낸 것이다. 엄마는 아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깨져버렸다는 진실을,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뇌’한다. 마음이 깨진다는 “재앙 같은 말”을 아이가 말하게 되는 세상은 “믿을 수 없”는 세상, 그래서 엄마는 다른 삶을,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하리라. 문학평론가
2023-06-11
비 내리는 병실에서빛이 일렁이고 있다우리는서로 같은 아침을 바라본다연한 손을가지런히 모으고창을연다비를 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미래를사랑이라 믿는다‘우리’ 중 누군가가 아픈가 보다. 병실에 한 사람이 누워 있고 한 사람은 그 옆에서 아픈 이의 손을 잡은 모습. ‘우리’는 “서로 같은 아침을 바라”보고 있다. 창밖에는 비가 온다. ‘우리’의 미래는 저 내리는 비에 젖어들어 무겁기만 하다. 하지만 빛이 비 사이를 뚫고 병실로 들어와 일렁이듯이, 맞잡은 손이 있기에 “비를 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 미래도 있는 것이다. 창을 열고 맞이하려는 ‘우리’ 사랑의 미래. 문학평론가
2023-06-08
내 유년의 곡식 밭에서밀은 여전히 밀이고, 호밀은 여전히 호밀이던 때,추수를 끝낸 빈 밭에서나는 어머니와 함께 이삭을 주웠다그리고 낱말들을낱말들은 까끄라기가짧기도 하고 길기도 했다현대인의 삶에서 말과 사물은 분리되어 있다. 사물로부터 떨어진 말이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고 조작되어 거짓이 판치는 세상이 현대다. 하나 말과 사물이 일치하는 행복한 때가 있었다. 유년 시절의 말이 그렇고 자연 속에서 노동할 때의 말이 그렇다. 이때의 “밀은 여전히 밀이”었으며, 그 낱말은 밀 하나하나의 다양한 ‘까끄라기’까지 담아내어 “짧기도 하고 길기도 했다”는 것. 시의 말이 그러한 말 아니겠는가. 문학평론가
2023-06-07
아프지 마라아프면 희망도 아파괜찮겠지, 괜찮겠지여태 하던 가게 문도 닫고집도 줄이고 줄여서아주 변두리로 밀렸다지만질경이만큼 잘 버텨왔잖아제발 아프지만 마라아들이 아프면 희망도아버지도 아파“아프지 마라”라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자식에게 주는 아버지의 말에 깊은 부정(父情)이 녹아들어 있다. 지금까지 ‘질경이’처럼 버텨온 것처럼, 앞으로도 버텨내야 한다는 말. 무슨 일이 있어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당부. 특히 “아들이 아프면” “아버지도 아파”라는 말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아프지 마라”라는 말은 사랑의 표현임을 깨닫게 해주기에. 사랑의 대상이 아프면 자신도 아픈 것이 사랑일 테니. 문학평론가
2023-06-06
남극 아등바등하는군요펭귄 열병 걸린 듯 기우뚱가는 소리 칼 가는 소리처럼 기우뚱거리고요침착 좀 침착하게우리 뭐가 문제인지 생각해봐요장미 드릴게요맞은 뺨에 기우뚱당신 망가지고 있었군요 사소하다고요?역대 최장 장마라고요 엎친 데 덮쳤다니까요!하나하나 사라지거나 죽거나 들었어?여름 강원도 군데군데 폐가 기우뚱우리 사회는 기후 위기를 ‘사소’한 것으로 여긴다. 위의 시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고자 한다. “뭐가 문제인지 생각해”보자며 ‘?’를 붙이면서, ‘최장 장마’에 ‘당신’이 조금씩 망가지고 있고, 강원도의 ‘폐가’처럼 세계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진실을 들으라면서 말이다. 이에. 기우뚱대던 남극의 빙산이 녹아내리는 소리는 “칼 가는 소리”와 같다. 마치 지구가 조금 있으면 살해당할 것처럼. 문학평론가
2023-06-04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아니야 아니야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무심하고 냉정하고 징그러운 당신.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언제나 뜨거운 사랑의 갈망을 채워주지는 못하기에. 반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부드럽고 그윽하고 기쁨을 샘솟게 하기 때문이다. 야누스 같은 당신. 결국 ‘사랑한다’는 단어만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당신에 대해 어떻게 쓰든, 당신의 얼굴을 지울 수 없다는 진실에 도달하면서. 문학평론가
2023-06-01
이천년 전 도시에도따뜻한 볕은 들었을까천 년 전 폐허에도미풍은 불었을까화덕에 구워지던 빵 조각그 일그러진 잔상에도최고의 영광 속에 깃든참혹한 미를 느끼는 것은인간의 이기심인가야차의 시계는돌아가는 길을 지키고 있으니이곳에 기대어 멈추고 싶어라시인이 여행하는 곳은 폼페이 같이 폐허가 된 도시일까. 이곳에서 시인은 “참혹한 미”를 느낀다. “구워지던 빵 조각”처럼 부풀며 일그러지는 옛 도시의 잔상이 영광과 파멸을 동시에 드러내기 때문이리라. 시인은 이 폐허에서조차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에 이기심 아닐까 반성하지만, 이미 무서운 ‘야차’ 같은 시간이 폐허로부터 “돌아가는 길을 지키고 있음”을 감지하고 이곳에 멈추고자 하는 욕망을 받아들인다. 문학평론가
2023-05-31
하얗게 눈 덮인 장항 습지어쩌다가 외따로 떨어진쇠기러기 한 마리찢어진 날개 퍼덕이며무리 찾아 날아간다꺼억꺼억, 울음보 터뜨리며쇠기러기, 너도 나처럼약간은 외로운가 보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가 보다.외로움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모두 느끼는 정서인가 보다. 저 무리로부터 “외따로 떨어진/쇠기러기 한 마리”의 울음이 시인의 마음을 적신다. 저 기러기의 날개는 찢어져 있다. 시인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이상이 찢어져버린 것일까. 동병상련이다. 동물은 그저 미물이 아니다. 동물 역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외로운 자들은 서로 기댄다. 시인의 외로움을 들추어낸 저 기러기에 시인이 마음을 기대고 있듯이. 문학평론가
2023-05-30
맑고 푸른 하늘입니다 선을 그으면 찢어져 조각날 것 같은 하늘입니다 오래전의 하늘입니다 오래전의 맑고 푸른 하늘입니다 돌려달라 돌려달라 소리가 부딪쳐서 떨어지는 하늘입니다오랜 만에 날씨가 맑았나보다.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 펼쳐져 있는 어느 날. 시인은 그 하늘이 얼마나 유리처럼 청명했던지 “선을 그으면 찢어져 조각날 것 같”다고 표현한다. 미세먼지로 푸른 하늘을 보기 어려워진 지 오래여서, 지금 저 푸른 하늘은 ‘오래전의’ 하늘이라는 것. 그 하늘이 지금 나타난 것은, 예전의 자신을 “돌려달라”고 요청하는 소리를 지상에 떨어뜨리기 위해서다. 현 기후-환경 문제를 재치 있게 드러낸 작품. 문학평론가
2023-05-29
꿈에 친구와 놀았다.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누구라도 금세 잊어버릴 만한 사소한 일상을함께 했다. 밥을 먹고, 걷고, 앉아서 쉬기도 하며울었다. 꿈이어서 숨도 차지 않는 울음을 계속“거기서는 행복해?”“아니.”십수 년 전 스스로 물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친구였다.죽은 친구는 귀신이 아니라친구인데 그저 죽어 있을 뿐꿈속에서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필자도 죽은 친구가 나오는 꿈을 꾼 일이 있다. 깨어나서 깊이 슬펐다. 위의 시의 시인도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 죽은 친구가 나오는 꿈을 꾼 일이 있었나보다. 내가 어떻게 형언할 수 없었던 꿈을 깬 후의 슬픔을, 시인은 담담한 어조로, 하지만 아프게 표현한다. “꿈이어서 숨도 차지 않는 울음”이라니. 그리고 꿈속에서도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 아프게 한다. 문학평론가
2023-05-25
동쪽 바다에 가서붉은빛 한 동이를철철철 넘치도록 담아 왔네해가 뜨지 않거나 꽃이 피지 않는 날마다한 홉씩 꺼내어 마음의 정수리에 들이부었네아무도 어둡지 않은 봄날의 찬란이었네꽃에게 헌정한 마지막 황홀이었네미소가 떠올려지는 동시에 어떤 슬픔도 느껴지는 시다. 동해 일출의 ‘붉은빛’을 담아 와서 “마음의 정수리에 들이”붓는다는 시의 착상이 미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속에 담긴 붉은빛이 드러낸 ‘봄날의 찬란’은 ‘마지막 황홀’, 즉 곧 끝날 황홀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어둡고 황량한 나날로 채워져 있는 것, 붉은 일출의 황홀한 ‘이미지-기억’을 마음에 들이부어도 어두운 일상은 다시 나타나리라는 슬픔. 문학평론가
2023-05-24
당신과 나의 욕설도무지막지한 주먹 앞에선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분노를 훔쳐라나는 불씨를 어금니에 물고 있는 어둠이다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다. 짧지만 강렬한 울림을 주는 시. 오직 작은 일에만 분개하고, 세상의 부정의에 욕설로만 대응하는 “당신과 나”에게 이 시대의 프로메테우스는 분노라는 불을 훔쳐 오라고 명한다. ‘촛불’이 아니라 폭발 일보 직전인 분노의 불씨를 어금니에 물고 있는 어둠이 우리 시대의 프로메테우스다. 그는 말한다. 마음의 깊은 곳에 분노를 품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개선될 수 없다고. 문학평론가
2023-05-23
몇 개의 점을 그리고 있었다. 종이를 접으면 몇 개의 점은 서로 만났다. 하나의 점이 독백이었을 때 또 하나의 점은 어둠이었다. 독백과 어둠이 만나는 점은 하나의 세계여서 내가 있거나 나는 없는 세계. 하나의 세계를 멈추려고 꽃잎은 떨어진다. 빼앗긴 얼굴을 되찾기 위해 나는 시를 읊고 춤과 봄을 연결하는 바람이 분다.위의 시에 따르면, 시 쓰기는 독백과 어둠, 나의 존재와 나의 비존재를 겹치게 만드는 작업이며 이 작업을 통해 시의 ‘공간-세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시 쓰기는 결국 나를 잃어가는 행위, 즉 비인칭적인 어둠에 의해 나의 얼굴을 빼앗기는 작업이다. 꽃잎이 떨어지듯 ‘나의 죽음’이 이루어지는 작업. 반면 시를 읊으면 바람이 불고 생기가 일어난다. 그 바람은 “춤과 봄을 연결”하고 “빼앗긴 얼굴을 되찾”게 해준다. 문학평론가
2023-05-22
당신을 만나러 가는길 속에한참을 있었습니다별빛을 따라몸을 눕히는가난한 갈대밭이털을 부비고 있었습니다바래져가는 갈잎 위로시린 별빛이주춤주춤 쌓입니다그 별빛 다 녹도록걷고 또 걸어도제자리걸음입니다삶은 ‘길’로 비유되어 왔다. 위의 시의 시인에게 삶은 “당신을 만나러 가는/길” 위에 있다. 그런데 “걷고 또 걸어도/제자리걸음”인 것이 갈대밭 속에 있는 그 길이다. 사랑의 길은 밤에 놓여 있으며, 당신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밤길을 비추는 별빛도 마음 시리게 쌓일 뿐이다. 사랑하는 삶은 혼란에 빠질 것이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길만이 우리의 삶을 삶답게 이끌 수 있는 것 아닐까. 문학평론가
2023-05-21
우리는 형광등을 켜고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에숟가락을 들이대며 웃었다케이크를 자르면빈 공간이 커지고날 부르는 목소리를경계하며 살아간다 해도한 번쯤 불을 껐던 그 입으로누군가를 새로이 축복할 수 있기를떠나가는 자가 눈에 남긴 발자국을 보며겨울이 남긴 화인이라 여겼다사람들을 배웅하고 돌아오자머리에선 재 냄새가 났다 (부분)생일 케이크를 잘랐을 때 드러나는 ‘빈 공간’처럼, 사람들과의 관계는 공허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시인에겐 친구들의 축복을 받으며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친구들과 음식을 같이 먹는 그 시간은 고맙고 소중한 순간이다. 결국 그 친구들은 화자를 홀로 남기고 길 위의 눈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갈 터, 그 발자국은 화자의 머리 속에 ‘화인’으로 찍힌다. 타인이 화자의 삶에 뜨겁게 찍은 화인. 문학평론가
2023-05-18
오늘에 이르러 인류의 마을은 사방이 벽, 머흘다 어디쯤엔가 우리도 멸종 위기종으로 줄을 섰으리 함부로 헐고 쌓은 지구별, 억년 빙하 녹는다 해수면 아래 지도가 사라진다 홍수, 산불, 쓰나미, 침출수, 더는 쌓을 데 없는 쓰레기, 여기 아닌 소행성에 버리자-는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자-는 어이없는 입방정이라니…. 이 캄캄한 오늘, 이 몹쓸 고립감, 어쩌나?!그래도 우리 땅, 초록별이다 다시 토닥토닥 흙을 다지고 사과나무를 심거라 아들아! (부분)인류 멸종 위기는 ‘억년 빙하’의 해빙과 해수면 상승, “홍수, 산불, 쓰나미” 등의 현상을 통해 그 징후가 나타나는 중이다. 인류는 사납고 험한(‘머흘다’) 상황에 갇혀 있는 것이다. 위의 시에 따르면, 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은 인류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적 인간’으로 거듭 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땅, 초록별”이 인류 모든 이의 공유지임을 인식하면서, 모든 이들이 나무를 심을 때 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3-05-17
어디에서 옵니까 고요는 온종일 혼자와 놀다 보면 인사를 버리고 안부를 잃습니다 어떻게 말을 건넬까요 손을 흔들어도 영혼일 뿐이라면안녕 나는 조금씩 사라집니다 오래 전 마음 같지 않습니다 마음…. 커다란 단어라는데 너무 빨갛고 어지러운 단어라는데 나에게는 걱정이 많은 말이에요 말하는 순간 놓쳐버릴까 두려운 한순간(중략)아름다움과 어리석음이 뒤섞인 뒷모습은 어디로 떠나갑니까 입을 열면 부드러운 안개가 흘러나오는 새벽 오늘의 한숨은 다정한 악기입니다 조금씩 아껴 아프다 어두워지는 근심의 힘으로 오로지 조용함으로 감싸여 유영하기를 바라던 작은 물가입니다(부분)시인이 “영혼일 뿐”인 당신에게 건넨 말은 사라짐에 대한 걱정의 말뿐이다. 나는 사라지고 있으며 당신도 사라질까 봐 걱정이라는 말. 그런데 당신은 정말 어느새 사라진다. “아름다움과 어리석음이 뒤섞인 뒷모습”을 보이며. 시인에게 찾아온 당신에게 한 말이 고작 걱정일 뿐이니 어리석지 않은가. 하지만 그 어리석음의 뒷면에 아름다움이 스며든다. 걱정의 말은 사랑의 말이고, 아름다움은 사랑에서 비롯되니까. 문학평론가
2023-05-16
칠월의 밤은 또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 영화가 있고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잊은 그대가 있었다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위의 시에 따르면, 소나기가 내리는 밤이 많은 칠월은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 영화”를 볼 수 있는 달이다. 우리는 그 영화에서 애써 “잊은 그대”를 지금 시간에 아프게 만날 수 있다.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이 “아직도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런데 이 아픔은, 우리의 마음속에 ‘그대’가 살아있음을, 그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시인은 이 여름을 사랑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5-15
우리가 마주 보고 누웠을 때당신의 심장은 아래로 쏟아지고내 심장은 쏟아지는 세상을 받아냈는데내 팔베개에서 자꾸만 강물이 흘러당신 귀는 깊이 잠들지 못했네내 피가 실어 나르는 복숭아 꽃말을다 듣고 있었네 그때 나는벌써 죽은 사람이었고당신은 살아서는 다시 못 꿀꿈처럼 가엾이 아름다웠네사랑을 몸으로 느낄 때가 있다. “우리가 마주 보고 누웠을 때”가 그렇다. 심장과 심장이 뒤섞이고 피가 서로에게 흐르는 시간. 위의 시는 나른하면서도 격렬한 그 시간을 보여준다. ‘나’의 피가 “복숭아 꽃말을” “실어 나르”고, “당신 귀는 깊이 잠들지 못”하는 ‘몽유도원’의 시간. ‘나’의 삶이 ‘당신’ 속으로 용해되는 이 시간에서 “나는/벌써 죽은 사람”이 되고, “당신은 살아서는 다시 못 꿀” 아름다운 꿈이 된다. 문학평론가
2023-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