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숲 속을 걷고 걸으니나는 천년 나무광활한 초원을 바라보고 바라보니나는 광활한 초원숲과 초원이 기르는 아름다운사람, 마을, 도시사람이 가꾸는 아름다운숲, 초원, 꽃밭생명과 생명이 사랑으로 껴안는 곳맑고 깨끗한 하늘과 땅이 눈 뜨는 곳사람이 꽃이고 꽃이 사람인 곳숲, 초원, 꽃의 나라숲과 사람과 초원에고이고 고이는 평화의 꿈흐르고 흐르는 생명의 강숲은 생명의 공간이다. 숲은 생명과 생명을 잉태하고 순환시키고 보존하는 유기체다. 숲은 아름다운 초원과 꽃밭, 품위있고 인간다운 인간을 지지하고 함께하며 생명력 있는 마을과 사회를 만들어간다. 시인은 숲과 사람과 초원에 흐르는 평화의 꿈, 생명의 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3-22
오래 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다밤마다 강 건너에서 거칠게 흔들던몸짓이날 물리치려던 것이었는지, 부르려던 것이었는지어둔 꿈길을 막니처럼 아릿하게 거스르면겨울 천정에 얼어붙었던 철새들은그제야 낡고 깊은 날갯짓을 한다불온한 전생(全生)이 별자리를 밟고서녘으로 흐른 사이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의 지극(至極)이강물에 닿아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잎 진 나무로 강가에 몸을 잠그면가지 끝에 옮아 피는 앙상한 길내 몸 빌려 검게 꽃 피는 아버지모두가 한 물결로 펄럭인다생은 몇 번씩 몸을 바꿔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유곽이었다가 성당이었다가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는데새벽이 오는 변방의 강가에 기대어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나는 차마 묘석처럼 깜깜하지 못했다시인은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의 아이의 얼굴에 투영되어 있음을 본다. 천년을 건너온 이 지울 수 없는 운명의 유전을 깊이 깨닫고 있다. 인생은 몇 번씩 몸을 바꿔 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 유곽이었다가 성당이 된다는 시인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이렇듯 유전하는 것이 인생이다. 아버지와 나와 아이에게로 흘러오고 흘러가는 지울 수 없는 운명의 한 꼭지를 들여다본다.시인
2017-03-21
나 어렸을 적 보름이나 되어 시뻘건 달이 앞산 등성이 어디쯤에 둥실 떠올라 허공 중천에 걸리면 어머니는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하시고는 했는데, 달이 너무 무거워 하늘의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다는 것인지 혹은 당신의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그립게 걸렸다는 말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하여 거의 사십여년이나 애를 썼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어린 시절 어머니가 보름달을 보며 하신 말 한 마디가 평생의 화두가 되어왔는데. 이제 시인이 그때의 어머니만큼 나이들어 다시 그 말을 떠올리니 어머니의 깊은 가슴 속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평생을 속초에서 민초들의 애환을 써온 시인으로서 어찌 그 어머니의 뜻을 모르겠는가. 시인은 아직 그 달인 보름달을 보며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본다.시인
2017-03-20
신림 7동, 난곡 아랫마을에 산 적이 있지. 대림동에서 내려 트럭을 타고 갔던가, 변전소 같은 버스를 타고 갔던가, 먼지 자욱한 길가에 루핑을 이고 엎드린 한칸 방, 누나와 조카 둘과 나의 보금자리였지. 여름밤이면 집 앞 실개천으로 웃마을 돈사의 돼지똥들이 향기롭게 떠가는 것을 보며 수제비를 먹었지. 찌는 듯한 더위에 못 이겨 야산에 오르면 시골처럼 캄캄하던 동네, 개천 건너 그 동물병원 같은 보건소는 잘 있는지 몰라. 눈이 커다란 간호원에게 매일 아침 붉은 엉덩이를 내리고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대씩 맞고 다녔지. 학교가 너무 멀어 오전 수업을 늘 빼먹어야 했던 집. 아니 결핵을 앓던 나를 따스히 보살펴 주던 집. 겨울이면 루핑이 심하게 울어 조카의 어린 몸을 난로처럼 안고 자던 방. 아니 봄을 기다리던 누님과 나의 지상의 좁은 방 한칸.가난하고 어려웠던 지난 시절, 이 땅 어디에선들 이러한 삶의 풍경들이 없었을까. 허물어져가는 방 한 칸, 볼품없는 생의 여건들 속에서 아이들은 해맑게 자라나고, 찌든 가난이 대물림되는 그 힘겨운 생활 속이었지만 거기엔 사람다운 따스함과 어떤 어려움에도 꺾이지 않는 힘이 스며 있었다. 불편함과 결핍 속에서도 희망과 기다림이 얽혀 있었던 것이다.시인
2017-03-17
꿈은 이루어졌다하얀 눈밭온몸을 불사르며입술이 부르트고 손발이 부어올라숨이 턱까지 차오르는한없이 험한 수렁의 길절체절명 혹한의 길설산의 눈부심과 황홀함에 든 지설일 열흘지칠 줄 모르는 몸부림의 재촉포터와 쿡들의너덜거리는 조리에 몸 설어한 생의 비린 무게 옮길 때면찡한 울림 혼미한 흔들림해질녘 붉게 타는 황혼을 짚고우뚝 솟아 뜨거움에 몸부림치며환희의 붉은 화살을 맞고피 흘리며 선 장엄한 설벽을 보네설산의 둔탁한 숭엄함가슴에 퍼 담고내 작은 영혼 한 구석에저 깊은 설산의 꿈틀거림과 숨소리모아소리 없이 쏟아지는 하얀 폭포 하나내 몸 속 깊이 들이고 싶네히말라야의 한 봉우리인 안나푸르나를 등정하면서 설산의 장엄하고 숭엄한 느낌을 거침없는 필치로 그려낸 시다. 영원의 시간 속에 살아있는 산에 들면서 인간의 왜소함과 가벼움에 비해 묵묵히 전해주는 산의 목소리를 듣는 시인을 본다. 깊은 설산의 뜨거운 목소리와 숨소리를 들으며 생에 대한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다지는 시인을 본다.시인
2017-03-16
폭설 끝나고, 몰아치는 바람마당 귀퉁이부터 얼어붙는다감나무 꼭대기에 몇 알 남겨둔 까치밥참새, 까치들이 수시로 와서 쪼아먹고가지들, 텅 빈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오늘 무슨 날일까못 보던 재비둘기 한 쌍이빈가지 위에 앉아 두런거리고 있다반가운 마음뿐 그냥 바라만 보는데미안하다, 미안하다빈가지는 자꾸 흔들리고 있다저 흔들리는 것들 때문에봄은, 오고야 말 거다맹위를 떨치던 한겨울 추위도 대한(大寒)을 지나면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봄을 기다리는 것이 어찌 참새나 까치, 재비둘기 뿐이랴. 움츠리고 닫아걸었던 자연이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어떤 예감으로 빈 가지들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은 생명의 계절이 다가오기 시작하는데 대한 반가움과 기대를 희망에 찬 확신의 목소리로 읊조리며 가만히 마지막 추위를 건너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3-15
주스나 콜라처럼마시는 것이 아니다젖은 먹는 것이다이 오래고도 유정한 식량언젠가 `아프리카의 참상` 이란 보도사진전에서정강이뼈가 유독이 앙상했던 쾡한 눈의 덩치 큰 한 사내아기가, 살갗이랄까 껍질이랄까 아무튼 모든 살점이 육탈해버려서 머리 위로 올라붙은 그야말로 피골상접한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아기는 엄마의 바닥을 빨고 있었고, 엄마는 자기 육신의 맨 마지막을 아기에게내어 물리고 있었다참혹한 것 넘어서는이 숭엄함원래 종교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젖은 우리의 하나님이었다젖은 생명의 원천이고 시인의 말처럼 오래되고 유정한 식량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아프리카의 참상이라는 보도사진전에서 본 사진 한 장에서 그것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엄마가 자기 육신의 맨 마지막을 아이에게 건네고 있는 사진 속에서 시인은 그 어떤 이념이나 종교보다도 거룩한 이념과 종교를 봤다. 거룩한 본능 한 컷이 눈 앞에서 떠나지 않는 아침이다.시인
2017-03-14
하얀 눈 위에작은 발자국이 찍혀 있다빨갛고 가녀린 발이 뿅뿅뿅 밟고 갔으리언덕이 끝나는 곳에서발자국은 끝나고새파란 허공에새 한 마리 해맑은 실루엣으로 찍혀 있다내 발자국 끝나는 곳에서 나도 저처럼둥실 떠올라허공에 그림자로 찍힐 수 있을까해맑기는커녕 검고 칙칙한 얼굴이 되어누더기로 허공에 남을까그것이 두렵지만창작과비평 시집 제 1권은 신경림 시인의 `농무`다. 평생 민초들의 상처와 아픔을 절절한 가슴과 목소리로 민족시를 써온 시인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한 생을 성찰하면서 허공에 발자국을 찍는 새처럼 깨끗하고 해맑게 생을 마감할 수 있을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본다. 치열하게 살아온 한 생이지만 혹여 검고 칙칙한 얼굴로 누더기로 허공에 남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빠져듦을 본다. 노 시인의 겸허한 목소리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아침이다. 시인
2017-03-13
한잔 술에 여기까지 왔구나휘청거리며 걷다 보니해는 지고 어둠이 깔리는 강가강물은 어둠으로 깊어간다강바닥에 쌓이는 흙 앙금도돌에 묻은 푸른 이끼도물로 감춘 물풀들도강둑에는 하얀 꽃, 노란 꽃, 빨간 꽃푸른 잎모든 것들은 그 윤곽만 남고어둠으로 묻힌다이제까지 살아온내 마음속 입혀온하얀 꽃, 노란 꽃, 빨간 꽃항시 푸를 것으로만 보았던 무성한 숲들도새벽의 먼동으로 왔으니해 다 진 어둠 속에서는이제 떠나보내야 한다흐릿하게 검은 흔적만 남기고한 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시인이 저문 강가에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깊은 사념에 빠져듦을 볼 수 있다. 불꽃처럼 화려했던 순간들도 있었고 시리고 아픈 어둠의 시간들도 있었다. 이제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시인에게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으로 여기고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본다. `새벽 먼동으로 왔으니 어둠 속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라는 고백에서 겸허한 시인의 생의 감각을 엿볼 수 있다.시인
2017-03-10
한 올 한 올 매화 꽃가지붉은 색실이 풀리고 있다흥얼흥얼 수로를 따라 흘러드는눈 희미한 콧노래어머니, 아득한 그곳에서 재봉틀 돌리시는지한 땀 한 땀흰개미들 내려와 풍경을 꿰매고 있다낡은 영화 필름처럼느리게 느리게 재봉틀이 돌아간다어머니 노루발 지나간 바느질 자국에다시는 몸 아픈 날들 오지 않으리라모든 안팎이 사라지리라봄비 내리는 날 시인은 어머니의 바느질을 하시는 모습과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를 떠올리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본다. 이른 봄날 터지는 매화꽃송이처럼 어머니의 재봉틀 노루발이 지나간 자리에 흰개미떼 닮은 실밥 자국이 나던 것을 떠올리며 시인은 몸 아파서 먼저 떠나가신 어머니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다.시인
2017-03-09
슬그머니 허리를 펴는데새벽 안개를 헤치며서둘러 논둑길을 질러가는시골 여학생 같은 보랏빛 나팔꽃이잎 뒤에 얼굴을 가리고는 키득거립니다시원했습니다만그러고 보니 나의 아침 방귀가당신의 그 신중한 하루를또다시 시끌벅적하게 만들었군요새벽 논둑길에서 놓은 시인의 방귀이야기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시다. 방귀가 시의 모티브는 되었지만, 시인은 방귀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시끌벅적하게 하루를 열며 가는 시골 여학생들과 깨어나는 자연의 생명력에 초점이 놓여있는 작품이다. 싱싱한 생명력은 소란스럽다. 소박하면서도 소란스러움 속에는 자연스러움과 낙천성이 스며 있다. 다가오는 봄날, 엄동의 대지에서 움츠렸던 자연이 강한 생명력으로 시끌벅적하게 되살아나는 눈부신 시간들을 기다려본다.시인
2017-03-08
귀가 밝아진다는 건 그래도 슬픈 일만은 아니었다지나간 다큐멘터리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데작년 첫울음 울다 간 소쩍새가 한 문장 속에서 다시 깃을 친다홀로 밤늦게 찾아와 길게 목을 풀던 첫손님누군들 그 울음을 받아 적을 수 있었을까늘 멀리만 보려던 닫힌 창가에 바짝 다가앉았다손때 묻은 수첩을 꺼내든 이의 등 뒤로 눈이 까만 밤새가 울었다올해 소쩍새 울음을 들으려거든며칠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아니 더 늦을지도 모른다고 바람이 아직 차다고그때나 한번 찾아와 보라고정작 나는 그 새가 언제 우는지 기다려지기보다어디서 우는지 울어야 하는지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저 울음이 배어나왔을 저녁 어둠은아직 창밖의 나무옹이 속에 웅크려 있었다저물녘 누군가 앉아 있던 자리도 그러하였을 것이다울창하고 맑은 밤의 창을 가진 이가 부러운 게 아니었다아직 내 마른 묵필은 그 어둠을 가질 수 없었다깊은 봄밤 시인이 시를 쓰는 창가로 정적을 깨치며 들려오는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시인은 깊은 사색에 빠지게 된다. 어둠을 뚫고 짙은 어둠 속으로 뱉어넣는 처절한 그 울음소리에 시인은 자신의 삶의 태도와 시를 써 온 열정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간절하고 처절하게 울음을 뱉는 소쩍새처럼 자신의 창작에 대한 열정도 더 불태우고 더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3-07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학교를 중퇴한 뒤권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공사판 막일꾼이 되었다결혼을 하자 더욱 어려워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떨어먹고 도로 서울로 와다시 공사판급성신부전증이라 했다삼남매 장학적금을 해약하고두 달 밀린 외상 쌀값 뒤로무허가 철거장이 날아왔다산으로 가 목을 맸다내려앉을 땅은 없어재 한 줌으로 다시 허공에 뿌려졌다나이 마흔둘우리 시대의 우울한 초상이 아닐 수 없다. 구구절절한 한 사내의 서사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내려앉을 땅도 없어 허공에 목을 맸다는 시인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땅의 갑남을녀 중에는 이와 비슷한 궁핍과 결핍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누구의 책임일까. 빈익빈 부익부라는 사회현상이 낳은 가슴 아픈 얘기다.시인
2017-03-06
착한 개 한 마리처럼나는 네 개의 발을 가진다흰 돌 다음에 언제나 검은 돌을 놓은 사람검은 돌 다음에 흰 돌을 놓는 사람그들의 고독한 손가락나는 네 개의 발을 모두 들고 싶다. 헬리콥터처럼공중에그들이 눈빛 없이 서로에게 목례하고서서히 일어선다마침내 한 사람과 그리고 한 사람바둑은 흑백의 돌을 차례로 번갈아가며 놓는 게임이다. 시인은 이런 기본적인 원리에 갇혀있기를 거부하면서 흰돌을 연달아 두 번 놓거나 하는 일탈을 떠올리며 인간의 규범과 규칙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발을 땅에 디디지 않고 공중에 네 개의 발을 모두 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날 수 없는 인간은 바둑을 번갈아 놓아야 하는 원리처럼 인생이라는 게임의 규칙에 돌아올 수밖에 없는 한계에 이르고 만다는 것이다.시인
2017-03-03
그녀는 소금창고를 가지고 있다낡고 오래된 창고 안에는소금덩이들이 무더기로 부려져 있다소금창고를 물려받던 열댓 살 무렵소금 저장법을 알 리 없는 그녀는시도 때도 없이 녹아 흘러버리는 소금을어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 탓에소금물은 그렁그렁 녹아내리기 일쑤였다그녀가 아들을 잃고 남편이 떠나던 이십여 년 전무심코 열어본 소금창고에서는짜디 짠 소금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창고의 문은 여간 닫히지 않았고곁에 있던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그녀의 눈 속에는 소금창고가 있다이맛살과 눈주름이 폭삭 내려앉은 창고 안에는넘심넘실 녹아나가는 소금물을꾹꾹 눌러 말린 소금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누렇고 검게 그을린 소금덩어리아들을 잃고 남편을 먼저 보낸 이 시 속 서사의 주인공 여인에게 소금창고는 일터를 넘어서 한(恨)이 소복이 쌓인 눈물의 창고이리라. 열댓 살부터 물려받은 소금창고는 힘겨운 생의 터전이었으리라. 이제는 쇠락한 소금창고처럼 이맛살과 눈주름이 깊은 중년의 여인으로 소금창고와 함께 바람 속 세월과 함께 낡아가고 있는 것이리라.시인
2017-03-02
이른 봄 아침억만 개의 햇살 쏟아져내리고어디서 왔는지그 여우바람, 햇살을 흔들어수면 가득 물보석판을 벌인다물보석이 탐이 나는지넋 놓고 바라보던 잉어들그만 눈이 먼잉어들잉어들잉어들그걸 또 목에 걸고 싶어여기저기 연이어 튀어오른다제 몸이 온통 금덩이인황금 잉어들이눈부신 이 아침수곡지에서시인은 잉어 이야기를 하면서 내심 인간을 떠올리고 있다. 황금 잉어는 그 자체가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을 자아내는 존재다. 저수지의 물과 햇살과 바람이 어울리면서 그 황홀경은 극에 달한다. 그러나 그 황홀경의 이면은 헛되다라는 시인의 인식이 깔려있다. 인간의 모든 순간들은 어쩌면 황금잉어처럼 황홀경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거대한 환영에 사로잡혀 있고, 그 황홀경을 위해 한 생을 바치는 우매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 시인의 현실 인식인 것이다.시인
2017-02-28
눈은 내리고 할 일이 없어눈을 맞으며 골목을 어정거린다술 잘 먹던 친구도 지난 가을돈 벌러 객지로 떠나고그 집 앞을 지나니썰렁한 빈집에 눈이 자꾸 가네소주 대병 받아놓고 주거니 받거니신세타령 옛날얘기 농사얘기 많이도 했었는데서울 어디에서 다리 뻗고잠이나 잘 자는지텅 빈 농촌의 풍경과 현실은 적막강산이 아닐 수 없다. 바쁜 농사철이 지나고 겨울로 접어들면 농촌은 황량한 공동묘지와 같다는 말은 지나친 말일까. 젊은이들은 일을 찾아 떠나고 남아있는 노인네들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움츠리고 소주 대병 받아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야말로 빈집 투성이의 농촌은 무덤과 같은 곳이라는 시인의 인식에 깊이 동의하면서 그들의 신세타령에 귀 기울이고 싶은 차가운 아침이다.시인
2017-02-27
천 년을 산 나비 한 마리가내 손에 지친 몸을 앉힌다천 년 전 앙코르와트에서내 손이 바로 꽃이었다는 것을나비는 어떻게 알아보았을까그 해에 내가 말없이 그대를 떠났듯내 몸 안에 사는 방랑자 하나손 놓고 깊은 노을 속을 다시 떠난다뜨겁고 무성하고 가난한 나라에서뒤뜰로만 돌아다니는 노란 나비흙으로 삭아가는 저 큰 돌까지늙어 그늘진 내 과거였다니!이제 무엇을 또 어쩌자고노을은 날개를 접으면서자꾸 내 잠을 깨우고 있는가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라는 천 년 전 유적지에서 시인은 영원의 시간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지금 앞에 날아와 앉는 나비 한 마리는 천 년의 시간을 살았고 천 년 전 꽃이었던 나의 손과 해후하고 다시 이별한다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적지에서의 저녁은 천 년 동안의 망각과 잠을 깨우고 깊은 시간을 불러내는 때이고, 그 깊은 시간을 느끼게 해 주는 때라는 것이다. 그윽한 시간의 깊이를 본다.시인
2017-02-24
낡은 집 부수며 비비대어 나오는 나를누가 애처롭다고 측은하다고 하는가헐어버린 희고 둥그런 감옥누가 주워 옷 해 입는가어렵게 몸 빼내어 날개에 힘을 얻고껍질 벗어버리고 얻는 새로운 하늘인간아!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란다누에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론 애벌레를 감싸고 있는 하얀 집에서 실을 뽑는것에 누에의 존재 가치는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의 인식은 좀 다르다. 그 고치 속에서 몸 빼내 날개에 힘을 얻어 새로운 세계로 날아오르려는 애벌레에게 가 닿아있음을 본다. 새롭게 열어가는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 고치 속 애벌레의 꿈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이 너무 닫혀있고 경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데 의문을 던지는 의미 있는 시가 아닐 수 없다.시인
2017-02-23
천장에도 지구가 있다면내가 누워 바라보는 천장에도 지구가 있다면내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천장의 지구도 빙글빙글 돌고상처 입은 연인들은 피 묻은 드레스를 입고 여전히 사랑을 맹세할까코피처럼 순결한, 오토바이처럼 열렬한 길 위에서의 사랑상처가 사랑이라면상처투성이의 삶이 사랑이라면죽기 전에 나, 누워서 사랑 하나 완성할 수 있을까몸을 뒤척일 때마다 내게서 떠나는사랑천장의 지구를 바라보다 눈감으면내 안에서 지는 노을지구에도 천장이 있다면나 고요히 눈감고 노을이 될 테야노을 속으로 번지는 곱디고운 단풍이 될 테야그대 상처의 저녁을 어루만지는 순교하는 종소리그 종소리를 따라 아득히 밀물지는단 한 번의 어둠이 될 테야지구의 그림자가 달에게 먹히는 천체현상이 월식이다. 시인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시를 끌어가고 있다. 사랑은 뜨거운 열정과 함께 쓰라린 상처를 수반하는 속성이 있다. 지구와 달의 사랑도 열렬한 사랑 끝에는 먹히고 마는 상처를 안게 된다는 천체의 속성을 빌어 아무리 뜨거운 인간의 사랑도 끝내는 쓰러지고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사랑의 아픔보다는 그 사랑이 얼마나 애절하고 아름다운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