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골 앙상한 개가부푼 달을 보며 짖어대는 것이어쩌면 헐벗은 사람들의 서러운 원망 같아 숙연해진다달이 빵으로 보였는지누렇게 단 꿀을 입힌 달이 별안간 뜯고 싶어진다저물녘, 훤한 달빛 아래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줄줄이 서서푸석푸석 부푼 빵을 배급받고 있다시인의 눈은 그리 특별한 것을 찾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일상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머물러 곰곰히 생각해보고 시적 언어와 정서로 한 채 언어의 집을 짓는 것이다. 시인의 눈에 비친 실직자들이 무료급식을 위해 줄줄이 서서 빵을 배급받고 있는 쓸쓸한 모습들을, 그 가난한 대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씁쓸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시인
2017-04-20
새가 날아간 흔적은없다새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새를 날려 보내고하늘은 멍청해진다누가 보았다고 하는가새발톱에 맺힌피새를 날려 보낸 하늘에는 발자국도 어떤 흔적도 남겨져 있지 않다. 새를 날려 보낸 하늘을 멍청해진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무슨 뜻일까. 최선을 다해 하늘로 비상(飛翔) 하는 새나, 새를 날려 보내는 하늘에게는 그 어떤 미련이나 아쉬움도 원망도 없다. 그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물질들의 역할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억지와 인위(人爲)가 배재된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를 가만히 들려주고 있는 아침이다.시인
2017-04-19
그 사거리 지나 계단 아래 사람들밀양 부산 조치원 서울역노숙을 준비하고 있거나이미 잠이 든 저렇게 많은 사람들차가운 시멘트바닥에 쓸리는 나뭇잎들햇살이 먼지를 먼지가 햇살을 부둥켜안 듯소주병과 박스와 신문지이렇게 많은 비천한 몸뚱이들이미자의 노래던가물큰 배부른 여인네의 양말 밖으로 비치던 노래저렇게 많은 누에들타고 떠나지도 못할 거면서막차 앞에서 막차를 기다리며지하도 계단 아래 폐박스나 신문지를 깔고 눕는 노숙자들을 바라보며 시인은 시대의 아픔을 느끼고 있다. 고향으로 떠나는 막차는 부르릉 거리고 있는데 그 차를 타고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시대가 양산해 내는 이러한 모습들에 대한 시인의 고발을 읽으면서 씁쓸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다.시인
2017-04-18
라이브 화면 바그다드에는탱크와 사막의 누런 흙먼지와밤이면 충격과 공포의 크루즈 미사일지옥의 불기둥이 치솟지만꿈속인 듯 거리를 걸으며주머니 속 동전 만지작거리며나는 무력하다(….)이명처럼 시내 곳곳에서 총성이 울리고봄의 한낮 가위눌린 꿈처럼나는 무력하다천지에 봄이 와서 움츠렸던 목숨들이 기지개를 펴고 되살아나는 때에 세계의 화약고 바그다드에는 끔찍한 살육의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념과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이러한 전쟁은 신이 부여한 생명의 질서를 파괴하고 참살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운 생명들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들에 대한 비애와 공포가 밀려와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인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있다.시인
2017-04-17
칠월 장맛비, 시퍼런 초록 골짜기를흘러나오는 오래된 옛집나보다 먼저 죽어간 이들의 저녁을 위하여슬며시 문고리를 열어둔다저물녘 강둑에 스며든 적막감이 한기로다가와 스멀스멀경전 속 숨은 비밀이 되어방안 가득 똬리를 튼다주술에 걸린 듯 박태기나무 팝콘 같은 꽃잎들후두둑 떨어져 어둠의 두터운 안부를빗길 위에 떠내려 보낸다검은 물기둥 궁전이 있는 사북, 뭉텅뭉텅킬링필드의 목 잘린 해골처럼 쌓여서산맥을 이루는 폐석탄 잔해들굳은 능선의 부르튼 틈새마다엔붉디붉은 물결의 시간이 깊은 주름으로흐르다, 꽉 다문 막장 문 입구에서녹슨 눈물의 뿌리로 환생하기도 한다막장으로 가는 마지막 길숨이 긴 여름햇살, 제 몸 서랍 속 비늘모두 털어내어바다로 가는 길을 열고 있다적막감과 차가움이 낡은 폐광에 고여 있는 사북은 유년의 힘겨웠던 시간과 함께 묵은 시간의 찌꺼기들이 녹슬고 있는 곳이라는 시인의 인식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붉디붉은 물결의 시간이 깊은 주름으로 새겨진 추억의 시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바다로 가는 길을 마련하고 있다. 그것은 회생과 치유의 바다로 가는 길이다.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노래하는 시가 아닐 수 없다.시인
2017-04-14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역이 없는데 역전 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 속을 긁어내는풍경이 생각난다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빛이 살고 있고말라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송이 꽃이 있다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이 땅 어느 소읍에든 있을 법한 풍경 한 장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미가 녹아 있고 사람의 정겨움이 스며있는 시골 이발소의 정경과 곱사등이 이발사와의 추억을 가만히 펼쳐보이며 시인은 정겹고 따스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고 있다. 까까머리 머리통 벅벅 긁히며 몰래 춘화를 훔쳐본 적이 있는 필자의 어린 시절 동네 이발소와 꼭 닮아 있는 듯하여 가만히 눈 감아보는 아침이다.시인
2017-04-13
남자나 여자나 한때 천사였기에날갯죽지에 아직도 깃털이 솟는다만새는 외려 훨훨 날기 때문에 겨드랑이에 솜털뿐인 거여여자들이 겨드랑이 깃털을 다듬는 것은사내들보다 더 천사에 가깝기 때문이지여자는 죽을 때까지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단다아파트든지 백화점이든지 높은 층수만 보면날아오르려는 아내를 나무라지 말거라죽지는 꺾였지만 이 어미도 칠순 천사다참 재밌는 시 한 편을 본다. 이정록 시인의 많은 시들에 어머니와의 대화 혹은 어머니에 대한 재미난 서사가 나타나 있다. `여자는 죽을 때까지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는 한 줄의 시에는 세상의 여자들, 아니 인간의 욕망이 잘 표현되어 있다. 칠순 노모인 어머니 자신도 평생을 상승욕구를 품고 사는 여인 중의 하나라는 의중을 `이 어미도 칠순 천사다`라는 시의 끝머리에서 읽을 수 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아침이다.시인
2017-04-12
보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어서 보입니다여문 쌀알 같은잘 익은 말 한 톨허공은 등불을 켜고울음은 길을 열어뿌리가 곧추서는 숲새소리가 눈부십니다가슴에서 가슴으로말의 빛이 빛나는 공간꽃빛보다 고운 것은말빛입니다눈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움보다 말로 전해지는 아름다움이 더 빛나고 깊다는 시인의 인식에 동의하고 싶은 아침이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말로 들어서 그 뜻과 의미가 더 깊게 전해져오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복음인 것이다. 시인은 시로 빚어낸 언어를 꽃빛보다 더 고운 말빛이라고 칭하고 있다. 말빛이 거느린 환한 그늘이 깊고 넓기 때문이다.시인
2017-04-11
천 번의 구애 끝에 사랑을 얻은 수컷사마귀가물어뜯긴 생식기를 움켜잡고 비릿하게 우는 밤외양간에는 수컷의 그것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만삭의 소가어둠의 모가지를 쥐어틀며 몸을 푸는 밤입니다자궁을 열고 세상 밖으로 던지는 첫 화두음 메,아비 없는 후레자식의 울음입니다방아깨비가 달 속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밤마당가 알곡이 두둥실 떠다니는환한 밤입니다시인은 조금씩 다른 네 개의 풍경을 제시하며 살아온 자신의 한 생을 가만히 관조하고 있음을 본다. 수컷 사마귀가 비릿하게 우는 밤이랄까, 인공 수정된 만삭의 소가 몸을 푸는 밤이랄까, 이런 밤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삶이 비슷하다고 느끼고 있다. 어쩌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의해 운명 지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시인은 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4-10
이제 우리 헤어질 때가 되었다어둠과 어둠 속으로만 떠돌던 나를그래도 절뚝거리며 따라와주어서 고맙다나 대신 차에 치여 다리를 다친 일과나 대신 군홧발에 짓이겨진 일은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가정법원의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너 혼자 울면서 재판 받게 한 일 또한 미안하지만이제 등에 진 짐은 다 버리고신발도 지갑마저도 다 던져버리고가볍게 길을 떠나라그동안 너는 밥값도 내지 않고 내 밥을 먹었으나이제 와서 내가 밥값은 받아서 무엇하겠니굳이 눈물 흘릴 필요는 없다뒤돌아서서 손 흔들지 말고가라인간이 사는 곳보다새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어린 나뭇가지에서 어린 나뭇가지로 날아다니는한 마리 새의 그림자가 돼라한 마리 새의 그림자가 돼라시인은 시에서 자신의 그림자에게 말하는 형식을 빌렸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그리 녹록지 않았고, 사랑하는 일 또한 그런 것이어서 참으로 힘들고 눈물 속의 시간들이었음을 고백하며 이제 훌훌히 새들의 세상으로 비상하고 싶어하는 심정이 나타나 있다. 끊임없이 반성하고 자정(自淨)하는 마음가짐으로 진정한 자신과 자기가 바라는 사랑에 이른다는 시인의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시인
2017-04-07
가난한 마을의 겨울이 지나고돌아오지 않는 이름을 부르는 종달새가 온종일하늘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일찌감치 몰려와 있던 구름은몸을 풀기에 아직 무겁지 않았다가난한 마을에풀이 돋고 잎이 나고 보슬비가 뿌려주지 않았다면저들은 무엇으로 한세상을 이루었으랴녹색의 배경이라는 시의 제목에 스민 시인의 마음을 따라가보면 참 깊고 그윽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겨울을 견디고 피어오르는 연두, 초록의 새순들은 그들의 질긴 목숨을 담금질할 수 있도록 차가운 얼음바람과 폭설이 있었다는 논리가 깔려있다. 그런 혹한의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면 저리 눈부신 초록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시련과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 인생사가 어디 있을까. 우리의 오늘은 우리가 극복한 그런 시련과 힘든 시간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리라.시인
2017-04-06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그것은 어쩌면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또 어쩌면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어쩌면 나에겐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가난한 연인들이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물푸레나무는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란 뜻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나무다. 어린가지의 껍질을 벗겨 물에 담가보면 파란 물이 우러난다.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산속의 크고 작은 계곡 쪽에 아름드리로 자라는 갈잎의 큰 나무인데 시인은 이러한 고운 빛깔로 물들이고 물드는 나무의 속성을 읽어내고 있다. 세상을 푸르게 만들고 때로는 겸허히 자신을 들여다보며 묵언정진하는 물푸레나무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시인 정신이 비쳐진 시다.시인
2017-04-05
잡은 손을 놓았어흩어지는 너와의 추억먼지처럼 떠돌다 사라진다손바닥에 아직 남은 체온가슴을 누르는 푸른 지문들은빛 점선으로 다가오는 나비떼숨을 쉴 수가 없어풀어지지 않는 견고한 매듭결코 부서지지 않는 거겠지천년이 지나우주를 떠돈다 해도풀리지 않는 결속바람따라 누웠고 이슬따라 떠나도푸르게 눈 뜨고소매를 잡는 너수천 번 내 얼굴을 만지며조금씩 수척해져가고 있어저 붉은 바람 속풍장은 자연으로 망자를 돌려보내는 장례풍습의 하나다. 시인은 누군가와 결별의 시간을 가지면서 잠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할 것을 간절히 빌고 또 빌고 있음을 본다. 그가 망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바람에 얹어 훌훌히 보내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수천 번 얼굴을 만지며 그를 붙잡아두고 있음을 본다. 천년이 지나 우주를 떠돈다 해도 풀리지 않는 결속으로 서로를 묶어두고 싶어하고 있는 것이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본다.시인
2017-04-04
아궁이에서일렁이는 불길이얼굴을 적셨으니타고 남은 재를흙바구니에 담아공중에 흩뿌려놓았으니수만개의 별빛이하늘과 호흡하는너의 폐부 속으로 스며들었으니숨을 내뱉어라올라가서 올라가서 이제바람에 뒤척이는 꽃밭이 되어라아궁이의 타오르던 불길이 재로 스러지듯이, 태양을 마주하며 아름답게 꽃 피우던 한낮의 꽃밭이 날 저물면 어둠 속 별이 빛나는 하늘과 호흡하는 자연의 이치를 들여다보며 시인은 우리네 한 생을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화려하고 다이나믹했던 청춘의 시간들이 지나면 가만히 하늘과 소통하며 자신을 들여다보며, 겸허히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3-31
복사꽃 그 눈빛이 열매 맺은 햇살소리로그리 염려해주니 또한 좋구만하도나 사려 깊어서건너오는 말 눈빛이 따사로와기뻤구만올봄엔 꽃 소식도 이렇게 빨리 들을 줄이야말씀 하나하나가 마음에 꽃가지 벋듯먼 산 솔빛이 햇살 받아머릿결 빗은 말씀이군만이리 정겨운 말이 있어이렇게 가슴 더운 말이 있어이 봄은 꽃가지 꺾어들 듯헹가래치고 싶구만봄을 맞이하는 시인의 기쁨을 담담히 풀어내는 작품이다. 북풍한설의 차가운 엄동을 견딘 자연도, 사람도 봄을 맞이하는 기쁨은 한없이 크다. 갖가지 봄꽃들이 피어나는 봄 천지에는 어떤 예감과 희열로 넘쳐나고 가슴마다 정겨운 말들이 솟아나 누구든 꽃가지 꺾어들고 헹가래치고 싶지 않겠는가. 희망 큰 봄이 오고 있다.시인
2017-03-30
벗어 내린다어둠 위에 누우며마지막 실루엣 하나까지도속으로 흘러오는 문이 열리고텅 빈 사각지대로 날아다니기 시작 하면서날아간 나비들은또 다른 나비의 나비로 날기 시작하면서늪에 빠진 나비들젖은 날개들물 젖은 시간의 끈들을 뜯어내며건너던 다리를뛰어내리기 시작했다그리고벗어 내렸다흰 눈 날리어 가던 날겨울 숲으로 날아간 나비들젖은 죽지 말리며비릿한 몸 냄새 뜯어내며하얗게 눈 내리는 저녁 하늘다리 건너수 천 수만의 작은 오로라 불빛들로천막 실루엣 친친 두르며가만가만 돌아오고 있었다하얗게 날리는 눈발을 나비로 형상화한 아주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본다. 수천 수만 송이의 내리는 눈은 나비가 되어, 수 천 수만의 작은 오로라 불빛들로 귀환하는 환상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새 생명이 잉태되고 되살아나는 새봄을 기다리고 확신하는 시인 정신이 아닐 수 없다.시인
2017-03-29
강가에 물고기 잡으러 가던 고양이를 친 트럭은놀라서 엉덩이를 약간 씰룩거렸지만아무렇지도 않게 북으로 질주한다숲으로 가던 토끼는 찻바퀴가 몸 위를 지나갈 때마다작아지고 작아져서 공기가 되어가고있다흰구름이 토끼 모양을 만들었다짐승들의 장례식이 이렇게 바뀌었구나긴 차량행렬이 곧 조문행렬이었다시체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해도 소용없다자동차가 질주할 때마다 태어나는바람이고양이와 토끼와 개의 몸을 조금씩갉아먹는다며칠이고 자유로를 뒹굴면서살점을 하나하나 내던지는 고양이아닌 고양이개 아닌 개 토끼 아닌 토끼인 채로 하루하루하루하루 석양만이 얼굴을 붉히며운다자유로를 달려 출근하는 시인에게 거의 매일 반복되어 목도되는 `로드킬`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강가로 물고기를 잡으러 가다 죽은 토끼도 고양이도 어쩌면 열악한 생존의 조건 속에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은 아닐까. 달리는 차량행렬이 조문행렬이라 표현한 시인의 현실인식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건조하고 냉정하고 완강한 삶의 여건들이 지속되는 현실에 복종하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이 시에서 발견할 수 있어 우울한 느낌이 들게 한다.시인
2017-03-28
자작나무가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다돋아나고 있다, 가슴에서도피어나고 있다두 그루가 마주보고 있다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한번도 채우지 못한목마름의 샘을자작나무가 틔우고 있다자작나무가 나를 보고 있다내가 자작나무를 보고 있다자작나무가 자작나무를 낳고 있다구겨져서 납작하게 눌린 나무가잎사귀에 피어서주름들이 지워지고 있다내가 자작나무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이 시는 가슴 아픈 서사가 바탕이 되어 있다. 죽은 형의 어린 아이를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자작나무는 순정한 어린 조카를 지칭한다. 이제는 그 아이가 제법 커서 시인의 무릎 위에 앉아 있고 시인은 그 아이에게서 안식과 생명의 힘을 느끼고 있다. 자작나무의 어린 잎사귀가 피고 주름이 지워지는 것처럼 이 아이의 미래도 그렇게 푸르고 고결한 자작나무 같은 한 생을 살아가기를 염원하는 시인의 마음을 본다.시인
2017-03-27
사랑은 짐승입니다사랑이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는 어둠이고 빛이고 물어뜯으면서 미쳐 날뛰는 짐승입니다사랑 앞에서는 사랑만 말해야 합니다 사랑 외에 어떤 주제나 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피골이 상접 사랑으로 연명하고 사랑으로 별을 끄고 사랑으로 환히 켭니다사랑에 빠져 곧 익사해도 지푸라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리지도 않습니다사랑은 사랑을 위하여 기꺼이 간까지 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그대는 지금 사랑을 잃은 사랑이란 짐승입니다그대는 지금 눈물 속에 드러누운 눈물이란 짐승입니다털이 눈물에 젖었고눈물의 가뿐 숨 몰아쉬면서 눈물의 호흡을 합니다그대의 눈물로 안드로메다가 은하수가 우주가 흠뻑 젖는 것 같습니다내 곁에 없는 내 사랑마저그대 눈물에 흠뻑 젖어서 끝없이 축축 처져 내리는 밤입니다사랑을 `영혼이 맑은 짐승`이라고 규정하는 시안이 놀랍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짐승에 비유한 것도 특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의 상실은 엄청난 결핍과 슬픔에 이르게 하지만 그러나 절망에 젖어있지는 않고 사랑은 그 회복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게 된다는 시인의 인식에서 어떤 희망을 가지게 된다. 사랑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무너져 일어서지 못하는 나약한 것이 아니라는 사랑에 대한 강한 확신과 신념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다.시인
2017-03-24
우네물고기 처량하게쇠 된 물고기하릴없이 허공에다자기 몸을 냅다 치네저 물고기절 집을 흔들며맑은 물소리 쏟아 내네문득 절 집이 물소리에 번지네절 집을 물고물고기 떠 있네고택(古宅)이나 고찰(古刹)의 지붕 추녀 끝에는 청동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풍경(風磬)이 달랑거리고 있다. 가만히 올려다보며 그 맑고 청량한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의 평화경에 이르게 된다. 시인의 상상력은 물고기가 물고 유영해가는 절집을 그리고 있다. 속세에서 얼룩진 더러운 것들을 다 떨쳐버리고 영원의 시간 속으로 헤엄쳐가며 쏟아내는 맑고 깨끗한 소리. 청동물고기가 허공의 물살을 가르는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