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자는 너무 커서 앉기에 너무 커서의자에 앉는 사람을 파묻어 버리거나제 위에 앉는 사람을 자기 위(胃)로 먹어버린다시방도 어떤 이가 좋아라, 해롱대며깜냥 안 맞는 자리에 겁 없이 올라가서세상에! 가엾게끔 목 내놓고 앉았네세상의 풍조를 비판하는 세태 풍자시다. 너무 큰 의자는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일컫는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으스대고 있는가. 그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굽실거리고 아첨하는 데 취해서 제 목을 노리고 다가오는 올가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시인의 현실인식을 직접적으로 펴 보인 시다.시인
2017-05-22
지나가는 비에도시가 박살났다유리창 속에 물구나무선 도시그림퍼즐처럼박살난 도시 위로어지럽게 피던 물꽃들자취 없이 지자금세 새 유리창을 갈아 끼우는 강물강물 속으로천천히 기차가 지나간다가로등은 물고기들의 밤길을 위해물 속에도 등을 켜고다시, 붉은 네온 띠의 다리 위에선유리창 깨지는 소동에 놀라물꽃 속으로 흩어졌던사람들, 물고기들집중호우 때문에 비에 잠긴 도시의 풍경을 펼쳐 보이고 있다. 시인은 비에 잠긴 도시를 깨어져 박살난 유리도시로, 비에 젖은 사람들을 물고기들로 표현하고 있다. 깨어진 유리창을 갈아 끼우고 도시는 금방 복원되고 새로이 축조되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휴머니즘이 사라져가는 세상을 향한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이 시 전체에 깔려있다.시인
2017-05-19
곳곳의 부지런한 나무들이, 풀들이돌들이, 집들이, 길들이제각각의 글자를 쓰고 있다어느새 방대한책이 되어버린 봄길아마도 맹인들만이무사히 이 봄을 건널 수 있으리함부로 아름답다 그러지 말게!온갖 사물들도 이제공부하고 있으니봄이 온 자연에는 생동하고 움트는 소리와 연두색 새순들의 빛깔이 어우러지는 한 권의 책이라는 시인의 설정이 재밌다. 자연이 내뿜는 순연한 생명력은 제각각의 글자를 쓰고 있는 것이리라. 봄길을 걸으면 이러한 풍경들에 경이로운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게 되는 환희에 빠져들게 된다. 시인은 자연물들이 제각각 공부하고 책을 저술하는 것을 즐기며 봄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5-18
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눈부시게,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지는 해 아래로 걸어가는출렁이는 당신의 어깨에 지워진사랑의 무게가내 어깨에 어둠으로 얹혀옵니다사랑이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더군요사랑은사랑은때로 무거운 바윗덩이를 짊어지는 것이더이다사랑은 밝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사랑하는 일들의 힘겨움과 고난을 말하고 있다. 사랑은 눈부시고 날개를 다는 것만은 아니고 붉은 노을을 밀어내며 다가오는 어둠이기도 하고 무거운 바윗덩이를 짊어지는 것이라는 시인의 고백에 깊이 동의하고 싶은 아침이다. 어둠 속을 무거운 바윗덩이를 짊어지고 꿋꿋이 걸어가는 것이 참다운 사랑이 아닐까.시인
2017-05-17
수많은 빗줄기가정원에서 자라고 있다걸어두었던 가지마다촉촉이 젖어 반짝이며 꽃이 되었다지난봄에 흩날리던 벚꽃이비가 되어 내리리라생각했을 때구르다가 스스로 깨치고꽃 냄새를 피웠다빗속의 빗줄기팽팽히 당겨지면이 긴장감,나의 목숨에 생기가 도는움츠렸던 겨울의 답답함 속으로 내리는 봄비는 많은 것을 열어준다. 생명과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다. 시인의 목숨에 생기가 돌게 하고 열리는 삼라만상과 소통하며 환희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다. 촉촉히 젖어 반짝이며 꽃이 되게 하고 봄꽃세상, 희망세상을 열어젖히는 것이 봄비다. 시인의 눈도 마음도 영혼도 어떤 예감으로 일어서는 봄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음을 본다.시인
2017-05-16
헌 집에는 늙은 개 한 마리가 낡은 마당을 어슬렁거릴 뿐후박나무 그림자가 길어져도 문 여닫는 소리가 없다바람이 혼자 산다바람처럼 드나드는 그녀는 발소리도 말소리도 없다바람을 먹고 사는 바람꽃이 찾아오는 날은그녀를 떠나 있던 물 긷는 소리도 오고밥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온다헌 집은 소리들, 미세한 소리들로 차고 기운다후박나무 그림자가 더욱 길어지고그녀는 후박나무 아래서바람을 더듬는다 바람의 여린 뼈가 만져진다그녀는 주름투성이의 입술을 문다후박나무 잎새들이 검게 변한다헌 집이 조금씩 산기슭으로 옮겨간다양지바른 산기슭에 그녀의 새집이기다리고 있다는 걸 후박나무 그림자는 안다시간이 조용히 다녀간 헌 집 늙은 개 한 마리 봄볕에 졸고바람꽃 찾아와도 물 긷는 소리 들리지 않는다혼자 사는 한 노파의 낡고 쇠락한 헌 집의 정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 집에 사는 노파의 평화로운 삶의 모습도 함께 비춰주고 있는 것이다. 바람만 드나드는 집에는 바람과 함께 노파가 살아가고 있다. 고적하고 고독한 생을 마감해가는 노파와 헌 집을 담담하고 안정된 어조로 풀어내는 참 평화로운 느낌의 시다. 시인
2017-05-15
망성리의 밤하늘엔 별이 쏟아진다. 저마다 전설을 간직한 별들이 망성리에선 지천으로 깔려 있다. 여름밤 강가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면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별들을 망성리 하늘에선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밤마다 강물에 뛰어드는 별, 길게 불붙은 세상의 유성들은 망성리에서 몸을 푼다. 누구나 가슴에 별을 품고 있듯이 망성리의 별은 모두 사람 하나씩 품고 있다. 자신의 별을 보고 싶은 사람은 망성리에서 이름 없는 별들 중에 유난히 가슴 파고드는 별 하나 만나게 된다. 별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별을 품어 망성리의 밤은 기다림의 밤이다.경남 울주에 있는 망성리라는 곳은 유난히 별을 많이 볼 수 있는 깨끗한 대기의 공간이다. 탈속의 공간이고 천상의 공간이다. 낭만과 신비의 공간이다. 인간 중심의 공간이 아니라 자연의 공간인 것이다. 시인은 오염되지 않은 이런 자연의 공간과 욕망과 좌절, 분열과 파괴의 인간의 공간을 대비시키며 순화와 화해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7-05-12
오래된 나무를 보다 진실이란 말에대해 생각해본다 요즘 들어 진실이란말이 진실로 좋다 정이 든다는 말이 좋은것처럼 좋다 진실을 안다는 말보다 진실하게산다는 말이 좋고 절망해봐야 진실한 삶을안다는 말이 산에 든다는 말이 좋은 것처럼좋다 나무그늘에 든 것처럼 좋다진실이라는 말이 좋다는 것을 유사한 의미의 다른 말을 물고 강조하는 재미난 작품이다. 진실이 좋다는 것을 전제해놓고 진실과 연관된 여러 경우를 동원하여 긴밀하게 결합시키며 재차 강조하면서 진실의 의미에 대해 깊이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5-11
벼르고 벼르다가집안에 우거진 잡목들을 캐냈다잡나무를 마당에 던져 말리다가버드나무 껍질 벗겨 코뚜레 만들었다매끈매끈 벗겨진 버드나무 가지안쪽으로 힘주어 밀면, 둥글게 휘어졌다칡덩굴과 구리줄 칭칭 감아코뚜레 모양을 둥글둥글 잡았다노간주나무 코뚜레도물푸레나무 코뚜레도 아닌버드나무 코뚜레를 세 개나 만들어일터 사무실 입구에 걸어두었다그러고는 까마득히 잊었으나첫 번째 만든 코뚜레에 걸려든서울처녀한테 장가를 들고두 번째 만든 코뚜레에 걸려든강변 빈집을 거저 얻었다그리고 마지막 코뚜레에스스로 걸려든 내가,고분고분 얌전해져 있었다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코뚜레를 만드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전원적인 분위기의 시다. 그러나 시인의 인식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코뚜레는 구속과 억압받는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시련과 좌절의 의미도 품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실존의 위기 의식을 초월하고자 하는 시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방황과 불안정과 시련이 극복되어 초월하고 세상과 화해하려는 정신이 나타나 있다.시인
2017-05-10
청춘남녀의 애달픈 사랑인가붉게 타오르는 빛이 보이지도 않고페로몬 향이 나는 사랑의 냄새도 없는 것이몸과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사랑하는 이의 속을 활활 태워버리고는천년이 지나 발견된 미라에도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고스란히 남아 있을지독한 사랑의 흔적 같은방사능무한한 에너지를 준다고 믿고 있는 원자력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는 작품이다. 러시아 체르노빌 원전사고나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온다. 아주 광범위하고 오랜 시간 동안 모든 생명체들을 무력화시키고 파멸에 이르게 하는 방사능은 시인의 말처럼 마치 지독한 사랑의 흔적 같은 것이다. 원자력발전소에 근무하는 시인의 연작시 `방사능 시대`는 갈수록 원자력발전 의존율을 높여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크지 않을 수 없다.시인
2017-05-09
오라, 오라! 손짓한 하늘과 구름과 나무와 풀과 꽃을 향해기쁨으로 전 속력을 다해 질주했는데느닷없이 앞을 가로막고 선보이지 않는 유리창유리창에 반사된 허상의 유혹에목숨을 잃어버린 새죽은 새 위로유리창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날아가는또 한 마리의 새저 새가 날아가는 곳은 어디일까?달리던 환한 길 앞에서갑자기 나는 더듬대고 머뭇거린다유리창에 반사된 허상의 유혹에 부딪혀 목숨을 잃은 새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실은 인간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얼마나 자주,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허상의 세계에 유혹되고 함몰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시인이 말하는 `한 길`이 바로 우리가 설정한 허상의 길이다. 그래도 무모함과 그 무모함이 가져올 엄청난 비극 앞에서 멈추고 머뭇거리는 것은 성숙되고 균형감 있는 생의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인
2017-05-08
뜨거운 육신은 부처환락의 거리는 법당고통의 신음은 경전이 마음 떠나서 어디서 구할까이 길을 떠나서 어디서 구할까아아, 이 피고름 물컹한 고깃덩이, 이 육신을떠나서 어디서 무엇을 구할까이 치욕과 분노와 욕망을 떠나서내 고통 나의 슬픔 떠나서 무엇을 구할까평생을 노동현장에서 치열한 투쟁의 삶을 살아가면서 시를 써온 시인의 솔직한 고백이 나타난 시다. 행복과 미래를 열망하며 길을 떠나는 자는 치욕과 분노와 욕망의 현재에 밀착해 지나온 현재들을 계속 돌아보며 반성과 새로운 모색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채찍질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05-04
꽃이 아니라고 기죽지 마라눅눅한 습지를 지탱해온 그늘과불임의 시간들 뭉쳐 촘촘히도 피었구나너를 다녀간 세상의 모든 음지가다 독이 되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저 불온한 사람의 손길이지이어지는 혐의들그리운 체온 감지하며 늑골 아래서저토록 푸르게 꽃이 될 수 있으니내 스러져 썩은 후에도 다시이녁의 한 줌 허리에 깐깐한 꽃으로피어날 수 있을까습지에 번지는 곰팡이를 시인의 눈은 그냥 간과하지 않는다. 비록 음습한 곳에 번지는 세균덩어리지만 그 속에도 생명이 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꽃을 피워올린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네 삶의 주변에도 이러한 인생들이 있다. 비록 주목받지 못하고 그늘 속에 살아가지만 최선을 다해 자신의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피워올리는 생의 꽃 또한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이다.시인
2017-05-02
진달래 산수유 꽃물 든 산을지방천방 들뛰며 혼령을 깨워사향노루 목을 따서 피를 마시고꿈틀꿈틀 휘돌아 뭉쳐진 산이벗어도 벗어도 몸을 감아와양지에서 맥쩍게 술을 마시고노루를 베고 누운 산 너머 하늘헤헤롱 아지랑이 흥건한 자색 구름진달래 산수유 꽃물 든 꿈에노루는 자꾸 울며 숨을 달래고봄이 무럭이 번진 산의 풍경을 시인은 우리의 몸에 비유해서 시를 풀어가고 있다. 산은 진달래 같은 화사한 봄꽃뿐만 아니라, 노란 빛의 산수유꽃을 피우고 노루의 피를 마시며 계절의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본다. 이맘때쯤의 봄 산은 꽃물에 젖고 진한 생명의 수액에 젖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봄산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다.시인
2017-05-01
벼랑 끝에 피어난 꽃이었기에그리도 마음 쓰셨던 어머니붙잡고 기는 갈망 속에서이 길을 선하였을 때이미 그 강은어머니의 눈물이었습니다세월속에 작아지는 그 모습푸른 하늘에한 그루의 나무에북두칠성에 새겨 보지만그날의 봄은 가로등처럼멀어만 집니다어머니 가시고 다시 맞는 봄은 시인에게 엄청난 그리움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머니와의 수많은 추억이 되살아나는 봄날 시인은 이승과 저승의 건널 수 없는 강, 그 아득한 거리를 느끼고 있다. 꽃은 피고 따스한 생명의 계절이 왔지만 영원히 볼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느껴지는 시다.시인
2017-04-28
박바위 위에 엎어져 낮잠 들었던 숙이 이모입이 대숲 쪽으로 돌아갔다몸 절반에 딱딱한 돌이 치고 들어일생 그 무게를 끌고 다닌다가랑이에 바람 들어 떠나버린 사랑 기다려빈 사랑채 품고 건너는 반평생낡은 몸 한쪽 아직도피가 돌지 않는 이모깜박이지 못하는 한쪽 눈으로 바라보는절반의 세상기울어진 가을 저녁 근처 백화점에서 나는평평한 바위를 보았다온몸에 맥반석 기운이 스며들어 피를 돌리고몸에 안정감과 평화를 주며잡스러운 기운들 막아준다는꽃돌 침대를숙이 이모가 버린세상의 한 쪽을 뒤집어 쓴그 희한한 바위 덩어리를 보았다필자의 외가가 있는 구룡포에 가면 박바위라는 곳이 있다. 말목장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바위벼랑이 있는 곳이다. 여기에 얽힌 가족사와 함께 필자의 일상이 섞여 있는 시다. 이 시에서 언급하고 있는 작은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선하고 착하게, 비록 가진 것 별로 없지만 꿋꿋이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들의 풍경들은 이 땅 어디에도 산재해 있는 것이다.시인
2017-04-27
나팔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왠지 꽃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다 아니,빨려들어가고 싶다붉고 부드러운 원형의 문을 지나 하이얀 빛으로 자리 잡은수술과 암술의 세상에 꽃가루 한 점이 되어 자리를 잡고 싶다가던 발 멈추고 나팔꽃을 가만히 바라다보고 있으면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산들산들 나팔꽃의 속삭임이 들려온다그러면 불현 듯 지금의 나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꽃 속으로쑤욱 빨려들어가 그만 나팔꽃이 되고만 싶다나팔꽃에 매혹되어 꽃과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는다. 꽃가루 한 점이 되고 싶은 소멸의 충동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멸과 함께 또 다른 공존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높은 시안을 발견할 수 있다. 사소함과 통하는 가벼움과 미미함이라 할지라도 소통을 통한 공존을 염원하는 깊은 시심을 찾을 수 있는 시다.시인
2017-04-26
내 고향동네 썩 들어서면첫째 집에는큰아들은 백령도 가서 고기 잡고작은 아들은 사람 때려 징역에 들락날락더 썩을 속도 없는 유씨네가 막걸리 판다둘째 집에는고등고시한다는 큰아들 뒷바라지에 속아한 살림 말아올리고애들은 다 초등학교만 끄을러 객지로 떠나보낸문씨네 늙은 내외가 점방을 한다셋째 집은마누라 바람나서 내뺀 지 삼 년째인 홀아비네 칼판집아직 앳된 맏딸이 제 남편 데리고 들어와서술도 팔고 고기도 판다넷째 집에는일곱 동생 제금 내주랴 자식들 학비 대랴 등골이 빠져키조차 작달막한 박대목네 내외가면서기 지서 순경 하숙 쳐서 산다다섯째 집에는서른 전에 혼자된 동네 누님 하나가 애들 둘 바라보며 가게를 하고여섯째 집은데모쟁이 대학생 아들놈 덕에 십년은 땡겨 파싹 늙은 약방집 내외갖가지 인생의 고달픔과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고향동네 이웃들의 삶을 상세하게 그려내면서 그 속에 배인 아픔과 한스러움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시골 소읍에 가면 이런 가슴 아픈 서사는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 시에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어떤 아픔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은 얘기들이 소복하여 정겹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한 아침이다.시인
2017-04-25
알약의 뒤를 따라서 15분쯤 갔을까 어설픈 실루엣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등 너머 비몽사몽에 느껴지는 내가 살았던 적이 없는 나의 집, 나의 냄새가 절어든 안방에는 나를 기다려 수절하는 내 그림자가 있었다추억 밖의, 지워진, 잊혀진 무의미가, 그리움 밖의 사건 속 주인공이 되어 폭우와 폭풍과 땡볕의 여름 에너지를 충전 받아가며 나를 기다린 모양, 많이 탈색되어 있었다내 그늘을 덧입으려고 페이지를 넘겼는데, 넘겨도 넘겨도 같은 페이지였다, 진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찾아 첫줄부터 읽는 사이, 내 그림자는 벌써 떠나가버렸고, 그의 실루엣만 가뭇이 뒤따르고 있었다. 붙잡으려고 허우적거리는데 든 적도 없는 잠이 눈꺼풀을 비비며 하품하고 있었다시인은 수면제를 복용하고 얼핏 잠이 들 뻔 했던 순간의 감각과 기억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 흐릿한 기억의 통로에서 어설픈 실루엣을 만나게 되고, 온갖 고초와 시련을 견디며 자신을 기다린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허상(虛像)만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은 또 다른 자신의 그림자와 함께 우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시인
2017-04-24
날 저물고 새들도 둥지에 든다서늘한 바람의 옷자락그 감촉에 몸 맡기며 숲길 돌아들면땅거미 안으면서 어깨 추스르는 나무들가지와 가지들 사이로 별이 뜬다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지난날들이불현듯 그의 마지막 말들이 뜬다차마 잊지 못하고 있는 말들은 저토록별이 되어 빛을 뿌린다 하나 둘, 그리고 여럿그 별들이 숲에 내린다. 가슴에 스며든다우리는 이제 서로 다른 길 위에 서 있음을다른 세상에서 더러는 그리워할 뿐임을말해주는 건지, 가까이 다가왔다가는이내 다시 멀어진다 여태 애태우던말들도, 이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제각각허공에 빈 메아리로 떠돌고 있는지….마음마저 더 어두워지고, 집도 점점멀어지는, 낯선 저녁 숲길노을이 번지는 저물녘 숲길에서 멀어져간 모든 것들을 그리워하며 쓸쓸히 호명하고 있는 시인의 저녁을 본다. 헤어져간 것들이 제 나름의 떠도는 별이 되어 떠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시인의 가슴은 젖어 있다. 해가 질 무렵이면 이런 그리움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때가 있다. 별이 되어 낯선 저녁 숲길을 헤매거나 떠도는 그리운 것들이 있다.시인
2017-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