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다 어디로 갔을까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지나가버린 옛 시간 속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시인은 그 옛 시간들 속에 존재했던 것들을 하나씩 호명하고 있다. 물론 답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지나가버린 것들이다. 그러나 간절한 목소리로 그들을 부르는 시인의 따스한 목소리를 듣는다. 반문명적인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시인
2017-12-14
고꾸라지고 엎어지며 바닥에 닿고 보니온통 캄캄하고 질퍽한 뻘 흙뿐이로구나그것들, 치마폭 벌려 포옥 감싸 안는 뻘 흙들너무 안타까운지 저도 혀 끌끌 차고 있다바닥에 이르러 보니 거기는 캄캄하고 질퍽한 뻘 흙같은 절망의 상황이었음을 인지하고 그 상황을 벗어나 피하지 않고 그 절망의 무늬들과 무게들을 감싸 안는 여유와 포용력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현실이 추레하고 비극적이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피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시인
2017-12-13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먼 허공에 부러진 촉끝처럼 박혀 있었다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모든 모의(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누추한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쓸쓸하기 그지없는 폐염전 둑을 걸으며 시인은 아버지의 한 생과 그 길을 따라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한 생을 바람이라는 시련 속에 부대끼며 살아온 아버지의 세월을 읽고 있는 것이다. 훼손되고 아픔으로 점철된 삶이었음을 느끼며 운명적으로 그 길을 따라 걸어야하는 자신의 삶을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12-12
강은, 겨울 동강은 자신을 사이에 둔 마을과 마을을, 강의 이편저편 마을로 나누기 싫었던 것이다자신을 사이에 두고 길은 끊어지고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도끊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어린아이들도 괜히 강 건너 서로를 미워하며 돌을 던지거나큰 소리로 욕이나 해대며짧은 겨울 한낮을 다 보내는 것이 슬펐던 것이다하여, 강은 지난밤 가리왕산의 북풍한설을 불러제 살을 꽝꽝 얼려버린 것이다저 하나 육공양으로 강 이편 마을들과 강 저편 마을을한 마을로 만들어놓은 것이다꽝꽝 얼어붙은 겨울 동강을 보고 분열과 편 가르기에 익숙한 세상을 향해 던지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강 이편 마을과 강 저편 마을을 이어주기 위해 얼음이 얼 듯이 사람 사이에 따스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주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극도로 소통이 단절되고 파편화, 개인화 되어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가치가 아닐까.시인
2017-12-11
봉지 속에 한 사내가 있다꽃 떨어지자말자 봉지 속에 유폐된 사내얼마의 내공을 쌓았기에독방에 갇혔어도부처님 몸빛보다 더 찬란할까봉지를 벗기자눈부신 가을 햇살이 황금빛에 튕겨 깨진다몸 안 가득 채운단물은사내의 땀방울이다 그리움이다세상에 단 한 번도 내보이지 않고 고인눈물이다눈물이 매달린 배 나뭇가지 사이에서사내가잘 익은 자기 얼굴을 웃으며 따고 있다가지에 매달려 봉지로 씌워진 배는 한 사내로 비유되어 있다. 봉지 속에 밀폐된 채 바깥 세상에 대해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며 기다리고 기다린 시간이 지나고 어느 가을볕에 드러난 그는 단물을 흠뻑 지닌 성숙한 열매가 된다. 시인은 배가 익어가는 얘기를 하면서 우리네 인생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눈물과 그리움의 시간들, 그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이 나중에는 소담스럽고 원숙한 결실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잔잔한 감동을 거느린 시다.시인
2017-12-08
담기 위하여 태어났으므로 담겨질 수 있는 것들모두 가리지 않는다 티끌 먼지 재티 검불쇠똥 달기똥 돼지똥 개똥혼자서 설움받는 것들은 다 오라내, 그대들 가득 품어 입맞추리니귀하고 깨끗하여 선반이나 응접실화려한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것들도오라, 그대들의 힘이 뭉쳐끈끈한 땀내 피워낼지니그리하여 그대들 모여땅의 깊은 자궁에 정액으로 뿌려진다면내, 언제든 끌어안고 입맞추리라담기 위하여 태어났으므로 담겨질 수 있는 것들의모든 그리움 향해그대들 몸 바친 사랑이 새 살 틔울 때까지내 몸 끝끝내 바쳐져 있다삼태미는 짚으로 엮어 만든 삼태기를 일컫는데 시골에서 이것 저것 수납하는 용기다. 시인의 의식이 껴안고 담으려는 것은 농촌 현실의 보잘 것 없는 여러 물건들 뿐만 아니라 화장대 위의 고급스럽고 화려한 것들도 꼭 같이 한 삼태미 속에 담아내는 넉넉하고 푸근함이 묻어난다. 농촌, 가난 때문에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흙이라는 생명의 원천에서 얻은 것들이어서 소중하고 가치로운 것이라는 시인의 인식에 깊이 동의하고 싶은 아침이다.시인
2017-12-07
파도를 잘 봐둬좋은 날은 한쪽에서만 부딪쳐 오지파도를 약간 비껴 치고 나가야 뒤집히지 않아그렇지 않아도 나뭇잎인데옆에서 부딪쳐 봐라삼각파도 칠 때삼각팬티 상상하다간 그 속에 꺼 잘려 나간다고 봐야지물흐름을 잘 살펴봐수면은 멀쩡하지만물 속은 엄청나게 빨리 흐를 때가 있어(….)너울을 잘 봐옆구리로 오는지도 살피고풍 걷으면 그때부터 선장이 다 해뭔 말인지 알겠냐풍으로 균형을 그래도 잡고 있는데걷고 나면파도가 죽든선장이 살리든 그것밖에 없어잔잔한 물결의 바다도 예견치 못한 순간에 거센 파도를 몰고 온다. 동해의 시인 류재만의 시에는 바다와 인간의 화합, 적응, 동행을 제재로 한 작품이 많은데 매우 건강한 정신이 스며있음을 본다. 거센 물결을 헤쳐나가는 배몰이 연습을 얘기하면서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를 건너는 자세랄까 정신을 일러주고 있다. 함께 흐르고 같이 가야한다는 화합의 시인 정신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시인
2017-12-06
침상에 눕는데무언가 허연 게 떨어진다귀를 간질이던 귀지귀이개를 찾다가손톱으로 긁어낸다톡톡, 사악삭이명처럼 아득한 속울음귓속을 한없이 파고든 듯어느새 가슴을 찌른다그도 숨을 쉬는 걸까그 동안 정체된 것들의여린 호흡귀지란내 몸의 새살이다여린 살을 송송 돋게 하는그 무엇,이 엄청난 밀어내기로윤기 나는 귀지싱그러운 생명의 힘병상에서 귀지를 파내는 사소한 행동에서 시인은 몸속으로 깊어져가는 병을 다 감당해내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본다. 귀지 한 조각도 자신의 몸의 일부고, 새로 돋아난 살점이라고 여기고 있다. 하찮은 귀지지만 그것을 자신을 살게 하는 싱그러운 생명의 힘으로 여기는 긍정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시인
2017-12-05
아스라한 안개바다목적지를 향해 떠나야 하는 길손들이잠시 머무는 안식처어둠을 헤치며 달리는 성난 파도처럼내일을 향해 기차는 달리고저 멀리 고비사막의 모래바람이만날 수 없는 평행선 위를 가로지르는졸음에 겨워 휑한 객석올망졸망 보퉁이마다 생의 이정표야간열차는 길손들의 마지막 생을 위해쉼 없이 내달린다안개 속을 마냥 달려가는 야간열차 속에서 인생을 읽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시다. 열차 바깥은 깜깜한 어둠에 쌓여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쉼 없이 달려가고 있다. 그 속에 올망졸망한 생의 보퉁이들을 쓸어안고 잠든 길손들, 어쩌면 그들의 한 생이 그러했듯이 앞만 보고 끝없이 달려온 야간열차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는 쉼없이 달리는 야간열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시인
2017-12-04
한 나무에게 가는 길은다른 나무에게도 이르게 하니?마침내모든 아름다운 나무에 닿게도 하니?한 나무의 아름다움은다른 나무의 아름다움과 너무 비슷해처음도 없고 끝도 없고푸른 흔들림너는 잠시누구의 그림자니?푸르른 숲을 바라보며 우주와 인생을 읽어내고 있는 시안이 깊다. 푸르게 어울어진 숲의 실상은 하나 하나의 독립된 나무들이 서서 숲을 이뤄내고 있다. 우리네 한 생도 그런 것 아닐까. 각기 다른 모습과 성격과 정신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바람이 일어 숲이 일렁이듯이 우리 사는 세상도 사람의 일들로 흔들리고 바람이 일지만 그래도 넉넉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살만한 푸르른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12-01
밤 강에 나가 보는 심사를동행의 어깨 위에 가만 손으로 얹어보면하류까지 소리 없이공평히 어둠 실은 강이다밤 강물 곁에서 나는어둠이며 어둠 위의 살림들인 가로의 불이며하늘의 빛들이고 내려가는밤 강물 곁에서늦게 본 이처럼 유순한강물의 숨은 낯빛을바로 보진 못하고딴청으로만 걷고 있었다유유히 흐른 밤 강물 앞에서 시인은 늦게 본 맏이처럼 유순한 심정으로 강물을 들여다보고 있다. 어둠 실은 강물은 공평함을 느끼고 있다. 공평하지 않은 세상의 강물은 삐걱거리며 흐르고 온갖 풍파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렁이며 흐르는데 밤 강물은 그런 세상을 비웃듯 평평하게 어둠도, 가로의 불빛도, 하늘의 빛들도 모두 품고 가만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현실 인식이 깊음을 본다.시인
2017-11-30
어머니는 콩나물을 키웠고콩나물은 어머니를 가르쳤구나시루에서 고개를 쳐들면 마주칠 눈뽑는 일 죄 짓는 마음이라서어찌 머리통을 잡고 당길 수가 있으랴미안해서는 안 된다고저요 저요하나같이 발돋움하다가 뽑힌 모습굽은 목이 절대로 비굴의 곡선이 아니라는 걸뽑아 보고야 알았다매사에 숙여주던 곡선아버지 앞에서 어머니 아름다웠다콩나물을 사다가 먹는 아내의 빳빳한 고개길러서 먹던 어머니와는 사뭇 달랐다콩나물 공장이 생겨나면서우리 집에는 경정 한 권이 사라졌다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 콩나물에서 시인은 새로운 인식에 도달함을 본다. 그냥 생각없이 보고 먹었던 콩나물에서 어머니의 삶을 발견한 것이다. 비굴하지 않은 곡선으로 살았던 어머니의 한 생을 본 것이다. 한결같은 정성으로 매사에 숙여주던 곡선으로 살아온 모성을 아내가 사온 꼿꼿한 콩나물에서 본 것이다. 말없는 경전이 아닐 수 없다.시인
2017-11-29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세상으로부터 나를완벽히 봉해 본 적 있던가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얼음으로 꽉 찬 일산의 호수를 바라보면서 시인은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성찰과 반성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어떤 시끄러움도 위태로움도 느낄 수 없는 절대 고독의 시간을 떠올리고 거기에 고요히 침잠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펴고 있다. 이것은 닥쳐오는 번잡스러운 생각들, 한 쪽으로 몰려가는 마음들을 참고 견디며 몸도 마음도 절대 침묵의 시간 속으로 밀어넣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음을 본다.시인
2017-11-28
어떤 벌레가 어머니의 회로를 갉아먹는지깜박깜박 기억이 헛발 디딜 때가 잦다어머니는 지금 망각이라는 골목에 접어든 것이다번지수를 이어놓아도엉뚱한 곳에서 살다 오신 듯한 생이 뒤죽박죽이다밤낮이 예 있어도 분간할 수 없으니문득 얕은 꿈에서 깨어난 내 잠더는 깊어지지 않겠다이리저리 뒤척거릴수록 의식만 또렷해져나밖에 없는 방 안에서 무언가 뚝 떨어지고누군가 건넌방 문을 여닫는다, 환청인가?그리고 보면 나도 어느새 후생과 사귈 나이필자는 오래 전 김명인 시인의 어머님을 뵌 적이 있다. 울진군 직산이라는 바다마을의 시인의 옛집에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늙은 어머니의 시간과 기억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본다. 어머니의 기억의 혼란과 망각의 상태는 연로한 어르신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한 현상이다. 예순을 넘긴 시인에게도 그런 기억의 혼란 혹은 망각의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담담히 그런 시간들을 예감하며 안타까운 눈으로 노모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따스하기 그지없다. 시인
2017-11-27
껍질 속에서 밥 먹고 껍질을 쓴 채 여자를 만나고껍질 안에서 사랑을 하는 것들의몸은 가버린빈 껍데기의 쓸쓸함을 밟으면서(….)딱딱한 얼굴 가죽 밖으로는 나오지 못한네 몸 속의 미소를 떠올린다잇몸까지 왔지만 침묵이 된네 생각 속의 수많은 말들을 어루만진다무창포 바닷가에서 빈 껍데기의 고동 껍질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사람의 일들에 가 닿아 있음을 본다. 껍질 같은 굴레와 구속의 현실에서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고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부질없는 집착과 소유에 갇혀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들, 수많은 말을 집어삼키며 살아가는 쓸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한 생이 아닐까. 자기가 뒤집어 쓰고 있는 쓸쓸한 껍질들을 들여다보면서 말이다.시인
2017-11-24
할 일이 지천이다부르지도 않았는데내 방 창을 성큼 넘어 들어서는 가을볕에내 마음 말리기할머니가 내다 놓은 새빨간 고추 사이에슬며시 던져 놓기마음을 서두르게 하는 갈바람에치맛자락에 묻혀 두었던 미련 뜯어 내날려 버리기처음 낙엽 떨구는 길에서가을볕에 물든 붉은 사과 한입 베어 물고가을 한가운데로 걷기금방이라도차갑게 웃어 버릴 것 같은 따가움에괜시리 쑥스러워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다청명 하늘 아래 투명하고 깨끗한 가을이 다가와 지겹고 견디기 어려웠던 폭염의 시간들을 몰아내고 있다. 가을은 선선한 바람을 몰고오는 것이다. 시인은 그 바람에 살면서 묻어두었던 미련도 날려 보내고 붉은 사과 한입 베어 물고 가을을 걷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다. 갑갑하고 힘겨웠던 시간들을 날려 보내고 시원하고 소담스러운 결실의 시간들 속으로 걸어가고 싶어하고 있다. 가을을 맞는 우리의 마음을 읽어내는 시안을 본다.시인
2017-11-23
그는 가슴 속 담겨 있는 술병을 꺼내뚜껑을 열면 울음이왈칵 쏟아질 것 같은데그 안에서 고통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바다는 핏빛이고밤안개는 번지고, 내리고, 흐르고, 피어나고, 우는데붉은 나뭇가지에 목숨처럼 매달린리본이 아이의 눈망울처럼 바람으로 다가오는데그는오늘도 건조대에 널린 빨래처럼몸을 방파제에 걸친 채상처받은 개구리처럼또다시 똬리를 튼다지난 2월 필자는 두 번째 진도 팽목항을 다녀온 적이 있다. 아직 세월호가 인양되기 전이었고 팽목항에는 거센 바람에 노란 리본들이 팔랑거리고 조문을 위한 컨테이너에는 조문객들이 뜸하게 들었다가 눈물을 훔치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시인은 그 아픔의 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을 기다리며 가슴을 치는 유족들의 깊은 그늘을 세상에 펴 보이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7-11-22
숨 차도록 고래불 쉼터에 오르면저 편 검푸른 심해 위바다새 하나거부할 수 없는 금강송 향에 취해며칠째 배회 하는가울창한 숲 골짜기 마다지친 일상 내려놓는 평화가지마다 출렁이는 도란도란 이야기꽃천사아이들 웃음소리햇살 길섶소담하게 핀 하늘나리꽃 한 송이불현듯 푸른 향기로 다가오시는 어머니불어오는 초록 녹음 마시며내장까지 시원하다시던 울산댁하얀 모시적삼 단아하게 옷고름 여미며오시는 어머니 어머니시인은 영덕 칠보산에 오르며 검푸른 물결로 와 닿는 고래불 해변이며, 울울창창한 춘양목이며, 햇살 길섶의 하늘나리꽃을 눈에 가슴 속에 퍼담고 있음을 본다. 그 푸른 향기 속에 불현듯 다가오시는 어머니를 만난다. 하얀 모시적삼 단아하게 여민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를 환영으로 만난 것이다. 그리움이 깊으면 불현듯 선명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가만히 젖어드는 시인의 눈시울이 보이는듯하다.시인
2017-11-21
뜬금없이 왔다가는황망하게 떠나갔네후두둑 소낙비처럼가슴에 빗금 긋고잡지도 놓지도 못한신기루 그 사랑은사랑의 속성이 아닐까. 잠깐 스치지만 옷깃이 젖고 흔적을 남기는 여우비 같은 것. 금 속에 숨어 있다 햇살 속에서도 갑자기 후두둑 내리는 여우비는 사랑하는 일과 꼭 닮았다는 느낌을 시인은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신기루 같이 반짝이고 지나지만 그 느낌과 흔적을 쉬 지울 수 없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시인의 깊은 눈은 그 순간의 아름답고 혹은 차가운 잔영들을 놓치지 않고 가만히 그려내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7-11-20
내가 오늘 국사 책을 읽으며머리 아픈 이유는내 탓이지만내 아버지 탓이기도 하다그 아버지의 끝없는 아버지그들 탓이기도 하다이렇게 첩첩산중의이야기만 하는 것도이야기만 하게 만든 것도내 탓이지만아버지와 그 끝없는 아버지그들 탓이기도 하다뒷날 내 아들이 국사 책을 읽으며머리 아플 이유도아들 탓이지만 그 아들의못난 아버지인 내 탓이기도 하다고난의 아픈 역사는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음을 시인은 가족사에서 찾고 있음을 본다. 근본을 어찌 부정할 것인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를 탓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치열하게 살아오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지울 수 없는 혈흔과 같은 내림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가에 눈을 두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는 아침이다.시인
2017-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