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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청년 예술가들의 창업활동

김태곤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청년실업이 좀처럼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취업의 대안으로 창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몇 년간 지속된 청년실업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직면한 우리사회의 새로운 문제이며 시급히 시정해 나가야 할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공식적인 실업통계에 잡히지 않는 구직단념자들을 꼽을 수 있다. 지역 문화·예술계 역시 이러한 청년 실업문제에서는 별다른 해결책 없이 청년실업률을 높이는 원인이 되고 있다.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예술가 지망생들은 구직활동과는 거리가 먼 창작활동을 통해 1인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예술가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창작 활동이 부가가치가 높은 노동 생산성을 추구해 경제적 이익을 창출해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늘 부족하고 궁핍하다.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1월 취업자 수는 2623만2명으로, 2018년 1월보다 1만9천명 증가했으며, 실업률은 4.5%로 글로벌 금융위기 후폭풍이 몰아친 2010년 이후 가장 높았다고 한다. 체감 실업률을 보여주는 고용보조지표 역시 13.0%로, 1년 전보다 1.2% 상승했다. 그리고 청년층 고용보조지표 역시 1.4% 상승한 23.2%이다. 1인당 국민소득(GNI) 3만 달러 시대라고 하지만 상대적 격차를 개선하지 못할 경우 국민들이 체감하는 경제성장이 둔탁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며 문화·예술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통계를 문화·예술계를 통해 정확히 작성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지역의 예비 예술가들은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해 부단한 자기 노력을 가져가야 할 것이다. 이처럼 예술인들에게 취업이나 창업에 관한 고민은 어제와 오늘의 일은 아니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된 관심사이기도 하다.20세기 오스트리아 빈 미술계의 대표 화가이며, 황금색 작품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어린 시절 작품 활동과 함께 창업을 통해 명성을 얻은 인물로 유명했다. 가난한 보헤미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학창시절부터 빨리 돈을 벌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었다. 빈 장식공예학교에 다니는 동안 어려운 집안 사정을 돕기 위해 학교에서 받아온 일거리로 푼돈을 벌어 생활비에 보태곤 했다.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해 학생의 신문으로 두 살 아래 동생 이었던 에른스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예술가 컴퍼니’를 결성하게 됐다. 소위말해 청년창업을 시작한 셈이다. 1879년 당시 오스트리아 빈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명으로 링슈트라세를 중심으로 장대한 공공건물이 완공되기 시작한 시기로 도시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신축건물들은 하나같이 섬세하고 화려했으며 고답적인 실내 장식들을 요구했었다. 이러한 왕실의 요구사항을 성실히 충족시켜 나가며 클림트의 ‘예술가 컴퍼니’는 서서히 링슈트라세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빈의 국립극장인 부르크 극장의 실내 장식과 벽화를 성공적으로 제작하며 빈 예술계에서 명실상부한 창업의 신화를 이뤄 나갔다.그는 회사운영을 위해 본인의 작가관에 메여 고민하기 보다는 그만의 독창적 화풍을 이용해 벽화 제작 등 다양한 실내장식을 접목시켜 창의력을 부각시키는 조형 활동으로 펼쳤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 예술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례로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충분히 활동해 창작활동과 더불어 창업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오늘날 우리주변을 되돌아보면 근본적으로 대기업의 성장잠재력은 한계에 달해 있으며, 중소기업 중심의 글로벌 강소기업을 발굴 육성이 더욱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이에 우리의 청년예술가들도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처럼 예술을 응용한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도전 정신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2019-03-18

교사라는 탈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선생님께서 우리 학교에 와 주시면 안 되세요? 어떤 선생님도 우리말을 안 들어주세요. 무턱대고 거부부터 하세요. 제가 오늘 하루 종일 교무실이며, 특별실을 뛰어다녔는데 선생님들께서 짜증만 내시고, 어떤 선생님은 아예 교무실에 들어오지 말라고까지 하셨어요. 저희가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봉사를 하겠다는 건데, 더군다나 새로운 부서를 만들겠다는 것도 아니고, 작년에 열심히 활동한 부서인데 말이에요. 정말…!”올해 고등학교 고학년이 되는 학생과의 전화통화 내용이다. 학생은 “정말”이라는 말 다음에 뭔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학생은 그 학교 교사들보다 훨씬 더 현명했다. 동아리를 대표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교사들을 찾아다니며 부탁을 드렸을 학생의 모습을 생각이 안쓰럽고, 미안했다. 그리고 학생이 교사들에게서 받았을 창피와 모욕, 그리고 좌절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마 학기 초라 선생님들께서 바빠서 그러셨을 거야. 그러니 다음에 정중히 다시 한 번 더 부탁드려 보렴. 열심히 했으니까, 너희들 뜻을 알아주시는 선생님께서 분명히 계실거야!”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비록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 말 또한 형식적인 인사에 지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필자는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학생에게 말의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지금 학교 현장의 분위기상 그 학생은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설령 이 나라 교육 현실이 거지같다고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기적(奇蹟)이라도 일어나기를 필자는 바랐다. 기적이 꼭 일어나서 그 학생이 학교와 교사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뢰를 제발 잃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이제 우리 교육은 기적이 필요한 상황까지 와버렸다. 학생들이 학교 교육활동에서 교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사들 또한 학생들의 발전을 자발적으로 돕는 일은 당연을 넘어 교사들의 의무이다. 그런데 이제 지극히 당연한 일조차 특별한 일이 되어버렸다.안타까움에 “당연(當然)”의 뜻을 찾아보았다. “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그러하다.” 여기에서 필자는 우리 교육이 무너진 이유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 교육에는 “일의 앞뒤 사정”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교육은 일의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앞뒤’란 ‘일의 중요성’이다. 적어도 필자가 학창시절 때에는 학생이나 교사나 일의 앞뒤를 분간했다. 학생에게 있어 우선 된 일은 교사를 존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사들은 최우선적으로 세상 무엇보다도 학생을 사랑으로 지도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졌다.더 이상 학교의 교사는 학생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졸업을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학교라는 곳에서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고 있다. 교사들에게 있어 학생은 자신의 모든 사랑을 쏟아부을 대상이 아니라 단지 직장에서 마주해야하는 업무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교육 현실이 이러한데 학교에 무슨 ‘교사 존경’과 ‘학생 사랑’이 있을까.그런데 필자는 이 나라 교육이 이렇게 된 데에는 교사라 불리는 사람들의 책임도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학교 교육에 흥미를 잃게 만든 사람도, 그래서 그들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한 사람도 바로 교사들이기 때문이다(물론 이 나라 교사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과연 이 나라에 진정한 교육이 존재하기나 할까? 우리 학교 현장에 학생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던 그 옛날 스승과 같은 교사들이 아직 있을까?필자의 눈에는, 물론 스승도 계시겠지만, 필자를 포함해 이 나라 학교에는 교사라는 탈을 쓴 월급쟁이 직업인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2019-03-13

일자리 만들기보다 더 중요한 것

김진홍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최근 실업률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한국경제의 구조적인 변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과거 성장기에 있어서는 단순 노동에 가까운 인력들을 공장에서 거의 무한대로 늘릴 수 있었다. 또한 개발도상국으로서의 상대적 후진성을 무기로 임해지역에 위치한 다양한 수출특화공단에서도 일자리가 문제가 아니라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 문제가 되던 시기에는 전국 실업계 고등학교의 취업률은 거의 100%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하지만 이와 같은 일자리의 창출 메커니즘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대량의 고용을 수반하는 공장제 고용은 중국, 베트남 등지로 옮겨간 지 오래되었고, 그와 같은 고용이 필요한 중소기업에 적합한 일자리에 맞는 훈련기관격인 실업계 고등학교 또한 자취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남아있는 흔한 말로 3D업종에는 외화벌이에 나섰던 과거의 우리 청년들의 모습을 지닌 동남아시아 등지로부터 찾아오는 외국인근로자들이 채우고 있다. 정작 일자리가 있기는 하지만 일할 사람도 없고, 실제 아무리 3D직종이라고 하더라도 중소기업이 필요로 하는 국내산 인력을 구하기 힘든 실정인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구조가 제조업중심에서 유통, 금융, 서비스, 항공우주 등 선진국형 산업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는 일자리의 창출방식과 인력양성 방식도 다양하게 발전되어야 마땅하지만 우리에게는 선진국과 같은 오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빠른 시간에 빠른 속도의 구조변화가 지금의 일자리문제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포항도 일자리창출에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 경기가 부진한 상황에서 정책협조차원에서 기업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자리란 한계가 있다. 깊이 있는 지식이나 숙련된 기술직의 자리는 갑자기 만들고 싶다고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저 단순노무직 뿐이다. 안정적인 급여생활을 하고싶은 취업자 입장에서는 선뜻 내키지 않을 것이기에 실업률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포항경제의 미래를 생각할 때 무리한 일자리창출은 오히려 독약과도 같다. 그보다는 포항에서 앞으로 어디에 어떤 인재가 얼마나 필요할지를 예측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일례로 조만간 국제크루즈여객부두가 완성된다. 크루즈여객터미널에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을 구사할 수 있는 인력들이 필요해질 것이다. 영일만항 배후단지에서 식품가공센터를 구축하여 6차 산업을 활성화시키려면 여기에도 농수산물 수집부터 공장의 생산과정, 유통판매를 책임질 전문 인력이 다수 필요해질 것이다. 또한 포항시는 올해 관광객 700만 명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포항지역 곳곳에 숨어있는 고대사, 과거의 전설과 설화,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스토리텔링이 무수히 잠자고 있는 핵심지역도 많다. 과연 포항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포항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문화해설사는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는지 궁금하다.우리는 일자리 창출에 앞서 현재의 일자리,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일자리를 먼저 직시한 후 그에 맞출 수 있는 인력수요예측과 이들을 선제적으로 훈련, 양성하는 선행조건부터 갖출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예상되는 일자리에 대한 예비 전문 인력 양성프로그램을 다수 개설하여 알린다면 포항을 떠나려는 지역 청년들의 발목을 잡는 효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수년 후를 내다보는 선제적인 비전의 제시는 시민의 희망을 높이는 간접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특화된 인력충원으로 기업의 서비스만족도와 지역 이미지의 제고 등 포항의 보이지 않는 가치까지도 함께 높여 이를 계기로 새로운 일자리가 동반 창출되는 선순환까지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19-03-12

양성평등 문화, 일상에서 만나다

박은미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개발실장1995년 유엔 4차 북경세계여성대회 이후 성주류화 전략이 채택되면서 양성평등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춰 양성평등을 위해 법률의 재정비와 정책이 도입되어 그 내실화를 다져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017년 세계 각국의 성평등 순위를 매긴 세계경제포럼(WEF) 연례 보고서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144개국 중 118위를 기록했다. 이 보고서는 성격차 지수를 측정하는 도구로 경제참여기회, 교육성취, 정치적 힘, 건강 등이 사용되는데 한국의 경우는 여성의 정치, 경제 참여 분야의 고위직 진출에 있어서는 지속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성격차가 발생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한국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에 기인한 것인데, 유교적인 문화와 관습에 의한 사회화가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성 또는 남성이라는 성별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연의 섭리에 의해 결정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 간에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남성 간에는 분명히 차별은 존재한다. 성이라는 본원적이고 생리적인 차이로부터 야기되는 자녀출산이나 육체적 한계와 같은 생물학적 원인보다는 윤리적·도덕적 규범을 통해 자녀양육이나 경제활동 과정에서의 사회적 역할을 구분하는 것까지 확대·적용되어 차별화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사회·문화적, 법적, 제도 내 관계에서 남성보다는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부당한 대우와 억압이 거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성차별을 여성차별의 의미와 같은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다수이다. 이처럼 사회적 차별성을 극복코자 할 때 우선적으로 근본적으로 무엇을 다뤄야 할 것인가?한편, 생물학적 차이인 ‘여성과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 차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점도 검토해야 봐야 한다. 절대적 평등인 여성과 남성 간 차이를 무시하고 성 중립적인 평등주의를 채택할 것인가, 아니면 상대적 평등인 여성과 남성간의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평등주의를 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두 평등의 개념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 실질적인 의미의 양성평등 실현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우리는 절대적 평등에 기초하는 법적 평등을 통해 여성과 남성에게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실질적 평등 수준까지 달성되지 못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양성평등이 제대로 나아가려면 양성 간의 차이에 대해 사회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고, 그들이 수행하는 다양한 역할을 편견 없이 수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양성평등은 단지 양 성간의 똑같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수도 있는 권리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양성평등은 남녀 간 권력 불평등을 해소하고 사회구조를 바꾸며, 여성과 남성이 갖고 있는 다양한 가치들 간의 균형을 이루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함께 모색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권리가 특혜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권리라는 인식도 함께 동반돼야 한다. 그럼 인식의 변화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상 속으로 양성평등 의식 교육이 확산돼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아기부터의 생애주기별 양성평등 의식 교육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제도적인 측면에서 양성평등 의식을 논의하거나, 정책적인 측면에 양성평등 의식이 형성된 사례는 드문 것으로 판단된다. 이젠 공공분야를 벗어나 학교, 기업 등 다양한 분야와 대상들에게 양성평등 의식 교육프로그램이 제공돼야 할 것이며, 이를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고취시키는 교육도 중요하다.특히 성평등 고정관념이 존재하는 경우 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교육 받기를 꺼려하는 것으로 보아 양성평등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홍보도 필요할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2019-03-11

3월 학교 반성문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학교가 생동감을 찾았다. 겨우내 주인을 기다려 온 책걸상은 물론 교실이 주인을 만나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긴 기다림 뒤의 재회는 늘 감동이라는 이야기를 생산한다. 그곳이 학교, 특히 기숙사 학교라면 그 감동의 깊이는 사뭇 다르다. 활짝 열린 교문마냥 활짝 열린 대지와 더 활짝 열린 자연의 싱그러움을 닮은 3월 학교 이야기는 그대로가 3월 수채화다.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 그 마음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딱 3월 첫째 주 지금 학교 모습이 아닐까. 운동장 가득 샘솟기 시작한 야생화를 닮은 학생들의 모습, 겨울을 저 멀리 밀어 내고 만개한 산수유, 가지마다 꽃봉오리를 매단 나뭇가지들! 이들의 모습을 인간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언어가 짧은 필자는 “푸릇푸릇”밖에 떠오르지 않는다!올해도 자연을 닮은 푸릇푸릇한 학생들이 저마다의 교문을 열고 학교라는 큰 도화지에 들어섰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의 눈밭 같은 새 하얀 학교 도화지! 선입견과 고정관념, 어른들의 이기심 같은 모든 부정(不淨)들이 말끔히 사라진 그런 도화지! 저마다 큰 꿈을 가진 우리 학생들이 그 도화지에서 틀릴까봐 마음 졸이지 않고, 다른 아이들보다 못 할까 주눅들지도 않고 자신의 꿈과 희망과 행복을 마음껏 그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것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아니 이런 영화는 만들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만들어진다고 해도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 이유는 아직 어른 말을 배우지 않은 아이들을 제외한 우리가, 이 사회가, 이 정부가 너무도 타락했기 때문이다. 자기 말만 난무한 시대에 대통령을 비롯한 모두가 자기 말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3월 교문을 들어서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미안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과연 자기밖에 모르는 이 사회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입학을 축하한다는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그래서 이 나라 교사에게 묻는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학창시절 선생님과 얼마나 다르십니까? 선생님의 작년 수업과 올해 수업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선생님은 왜 선생님이 되셨습니까?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어떤 꿈을 꾸라고 말 해 주실 수 있습니까?”그리고 이 나라 부모에게 묻는다! “부모님께서는 자녀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십니까? 부모님께서는 자녀에게 희생과 배려와 양보를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부모님께서는 자녀의 꿈에 대해 얼마나 자유로우십니까? 부모님께서는 점수와 숫자에 대해 또 얼마나 너그러우십니까? 부모님께서는 혹시 자녀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SKY 꿈을 꾸고 있지는 않으십니까?”이 질문들은 십년 이상 매년 필자가 필자에게 던지는 질문들이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답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매년 새 학기가 시작된다. 분명 봄은 새 봄이다. 그런데 왜 필자는, 학교는, 사회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새 정부가 들어섰고, 새 교육감이 자리를 했는데, 과연 우리 사회는, 우리 교육은 무엇이 달라졌는가?자유학기(년)제, 고교학점제, 과연 그 다음은 무엇인가? 시험을 위한 똑같은 수업, 줄 세우기식 시험, 맹목적인 명문대 진학! 이것 말고 이 나라 교육에서 이야기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1979년 3월 학교와 너무도 똑같은 2019년 3월 학교! 정말 우리는 무엇을 위해 교육을 하는가? 정말 학교는 왜 존재하는가? 필자는 오늘도 참회의 글을 쓸 수밖에 없다.“(전략) 제 눈높이로 학생들을 평가하지 않게 하소서/제 생각이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는 오만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소서/제가 앞장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뻔뻔함의 죄를 짓지 않게 하소서 (후략)” (졸시 “교사의 기도” 중에서)

2019-03-06

오일러수가 담긴 광고판

김현욱시인구글(Google)은 2004년과 2005년에 1만 5천명의 직원을 뽑았다. ‘오일러수가 담긴 광고판’이라는 기발한 채용방식도 이때 사용되었다. 2004년 7월 9일,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101번 고속도로에 이상한 광고판이 세워졌다. 그 광고판에는 회사 이름도, 홍보하는 제품도 없었다. 하얀 바탕에 다음과 같은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First 10-digit prime found in consecutive digits of e}.com닷컴 앞에 필기체로 쓴 e는 오일러수를 뜻한다. 광고판을 해석하면, 오일러수의 숫자 나열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10자리 소수를 찾아 닷컴 앞에 넣으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고속도로를 지나며 저 광고판을 보았지만, 대부분은 ‘저게 뭐야?’하고 그냥 지나쳤다. 물론 그중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오일러수를 찾아보는 소수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정답을 찾을 수 없다면 잠깐 호기심이 발동했던 소수의 사람들도 거기서 멈췄을 것이다.하지만, ‘도대체 저게 뭘까?’, ‘10자리 소수를 입력하면 뭐가 나올까?’ 너무 궁금해서 도저히 못 참는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문제를 풀어보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광고판을 본 사람들 중에 극소수의 사람만이 C++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7427466391’이라는 정답을 찾았을 것이다. 정답을 인터넷 주소창에 입력한 사람은 ‘축하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좀 더 수준 높은 문제를 만난다. 왕성한 호기심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 그 문제를 피할 리는 없다. 두 번째 문제까지 풀어 다음 페이지에 접속한 사람들은 ‘축하합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구글 채용사이트로 접속하여 간단한 이력서 제출만으로 누구나 선망하는 구글에 취직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위 글은 정재승 박사의 책 ‘열두 발자국’ 서문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필자라면 어땠을까 자문해보니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문학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호기심이 발동하여 덤볐을지 모른다. ‘오일러수가 담긴 광고판’은 당시 실리콘밸리와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이렇게 뽑힌 사람들은 얼마나 창의적이고 열정적일까? 창의적인 사람들은 호기심이 왕성하고 관찰력이 뛰어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무엇보다 정재승 박사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호기심, 도전정신 같은 자발적 동기만으로 끝까지 몰두해 해답을 얻거나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건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 보이는 가장 강력한 특징입니다. 호기심이나 꿈, 재미, 보람 등 다양한 내적 동기. 그리고 명예, 인정, 직위, 인센티브 등 외부에서 부여된 외적 동기. 이런 동기들에 지속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끝까지 천착하는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데 있어 외적 동기와 내적 동기가 잘 균형 잡힌 사람들이 세상을 의미 있게 변화시킨다.”고 정리했다. 최근 미국 일간지 LA타임스는 하버드 합격보다 더 어려운 한국 공무원시험 열풍을 꼬집었다. 하버드 입학률이 4.59%인데, 한국 공무원 합격률은 2.4%에 불과하다. 3년 넘게 공시를 준비한 어느 공시생의 사연을 소개하며, 한국의 수많은 청년들이 공무원이 되기 위해 인생을 바치고 있다고 전했다. 공무원 열풍이 거세지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중에 공공기관의 채용비리 백태도 한국 청년들의 도전정신을 꺾는데 일조했다. 공정하지 못한 나라에서 그나마 공무원 시험이 공정하다는 인식도 크다. 구글처럼 창의적인 채용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처럼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된다면 공시열풍은 옛말이 될 것이다. 0.98명이라는 세계 최저의 출산율 해결 비법도 여기에 있다. 참고로 세종시의 출산율은 1.57명이다.

2019-03-05

스마트시티와 합창의 닮은 점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우리 대학에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선배 교수님들의 정년퇴임식 자리에서 교수합창단이 축하공연을 하는 것이다. 내가 학부시절 합창단이었다는 것을 아시는 교수님의 권유로 뒤늦게 합창단에 합류하게 된 터라 그것이 언제 어떻게 생긴 전통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두어 차례 공연에 참여해 보니, 퇴임을 맞으신 스승이자 선배 교수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어 더 없이 좋은 일이라 생각됐다.2019년 정년퇴임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교수합창단 연습 일정 공지도 함께 날아들었다. 내 일정표를 보니 개강 첫 주에다 여러 일들이 겹친 소위 ‘지옥 주간’이라, 연습 시간을 비우는 것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학부시절 지도교수께서 정년퇴임을 맞으시는 자리라, 며칠간 일정 몇 개를 무리해 앞당겨 소화한 후 겨우 참석할 수 있었다.실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연구에 밤낮이 없으면서도 공연 일정이 잡히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모이는 단원들. 좋은 소리를 기대하는 열정에 비해 연습 시간은 언제나 턱없이 부족하다. 짧은 준비 시간을 알차게 활용하여 최대 효율을 내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고 할까. 서로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스스로 부족한 부분은 파트별 가이드 음원을 들으며 혼자라도 틈틈이 익힌 후 연습에 임해야 한다.혼자 연습할 때나 파트 연습에서는 언제나 뭔가 부족한 내 목소리가 언짢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든 파트가 모여 다 같이 한번 불러 보고 나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 화음에 스스로 놀라 기분이 좋아진다. 각자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서 동그랗게 하나로 모아진 화음만이 지휘자의 지휘봉 끝자락을 따라 춤을 춘다.학부 시절부터 합창 동아리 활동을 했으니 합창단 경력이 내 연구 경력보다 더 길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생각해 보면 내가 취미로서 좋아하는 합창과 연구 분야로서 좋아하는 스마트시티 사이에는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첫째, 당연하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개개인의 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면 1+1은 2가 아니라 화음이라는 시너지가 더해져 그 이상이 된다. 셋째, 단원 개개인의 음악적 기교나 성량이 아니라 전체 소리의 어울림이 새로운 성공의 지표가 된다. 넷째, 청중의 입장에서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곡의 큰 그림을 보는 유능한 지휘자가 필요하다. 다섯째, 단원들은 자기 소리에만 열중해서는 안 되며, 옆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 눈빛과 호흡을 맞춰야 한다. 여섯째, 그렇게 잘 만들어진 합창의 화음은 화려한 아리아보다 더 강하고 긴 여운을 단원들 모두와 청중의 가슴속에 남긴다.스마트시티도 마찬가지다. 첫째, 인공지능, 블록체인, IoT, 빅데이터 등 소위 4차 산업혁명의 시대 영웅으로 떠오른 그 어느 기술도 단독으로는 스마트한 세상을 절대 만들 수 없다. 둘째, 이들 기술이 함께 활용되면 1+1은 2가 아니라 시너지가 더해져 그 이상이 된다. 셋째, 스마트시티의 성공 지표는 특정 기술의 우수성이 아니라 전체의 조화와 그것이 가져올 시민 혜택에 있다. 넷째, 시민이 체감할 도시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큰 그림을 보는 유능한 지휘자가 필요하다. 다섯째, 도시를 구성하는 제품과 서비스, 기술은 단독(Stand-alone)으로만 존재해서는 안되며, 전체가 하나의 시스템을 이뤄야 한다. 그렇게 잘 만들어진 스마트시티여야만 그 구성원인 정부, 시민, 민간 기업 모두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다.한주 간 무리하게 일정을 소화한 탓에 좀 힘겨웠는지, 다음날은 코피로 하루를 열었다. 지혈하려 휴지를 코에 말아 넣으면서도 연신 합창곡 마지막 소절을 흥얼거린다. ‘오늘 이렇게 멋진 날에~’ 스마트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아침마다 웃으며 콧노래를 부르게 되길 간절히 빈다.

2019-03-04

촛불에 갇힌 교육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촛불을 켜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촛불을 들었는데, 청와대도 정부도 촛불에 갇혀 버렸어요. 뭔가 불리하면 누구 탓만 하는 정치꾼들, 그들은 얼마나 교육을 잘 받았기에 촛불이 만들어 준 이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들고 있는 걸까요? 정치꾼들 정말 한결같네요.”식당에서 선후배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하는 대화를 들었을 때 필자는 섬뜩함을 느꼈다. 말하는 사람들의 어조와 말이 전달되는 상황을 더 생생하게 전달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필자는 이 말을 들으면서 현 정부의 교육철학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3년 째 적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부에 새로운 교육철학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어느 지인의 말이 진실처럼 다가왔다. 이 나라에서 적폐는 마치 주홍글씨와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적폐는 현 정권의 무기처럼 사용되고 있다. 정권 출범 전부터 지금 교육 환경 타령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 모든 곳에 적폐 딱지를 붙였다. 적폐 정치, 적폐 언론, 적폐 사법, 적폐 행정, 적폐 경제, 적폐 교육 등! 그리고 적폐 청산의 장군이 되어 사회를 휘젓고 다녔다. 그 모습은 마치 변방 나라의 장수 같았다.어용(御用) 언론들은 모든 잘못된 것이 바로 잡힌 이상적인 새 사회가 곧 펼쳐질 것처럼 떠들었다. 아닌 줄 알면서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믿음 하나로 국민들은 참고 기다렸다. 적폐 완장을 찬 정치인들은 여론조사 결과에 도취되어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최저임금인상, 고교무상교육 등 과정에 대한 고민 대신 오로지 정권 연장에 필요한 정책들을 쏟아냈다.기고만장의 정점에서 정치인들은 자신들은 완벽하다는 착각에 빠져버렸다. 그 착각은 그들에게 도덕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자신들은 무결점의 경지에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주었다. 환상 속에서 정치인들은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마치 절대 진리인 것처럼 설교를 하고 다녔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것은 “틀렸다!”라고 지적하고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 했다. 그 무리수가 그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우월주의에 중독된 그들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말이다. 권력의 맛에 중독된 이들은 자신들만큼은 실패한 역사의 주인공들과는 다르다고 외친다. 그리고 모든 것에는 예외가 있듯 자신들은 영원하다고 서로에게 최면을 건다. 그러면서 그들은 늘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희생양을 찾는다. 희생양을 찾지 못하면 기꺼이 만든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불안과 두려움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것을 없애 줄 존재는 자기들뿐이라고 말한다.어느 정당 정치인들이 불러일으킨 교육환경 논쟁 또한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20대 남성의 낮은 ○○당 지지와 관련해 지난 정권 시절의 교육적 환경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짐작” 지난 정권에서도 교육을 담당했던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과연 이들이 말하는 교육적 환경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분명 이들은 교육을 정치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20년째 교육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 나라 교육환경이 달라진 때가 있었는지 떠올려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혼돈만 가중되고 있는 지금 교육 환경이야말로 이 나라 교육 역사상 가장 낯선 교육 환경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교문마다 입학식 관련 가로펼침막이 내걸렸다. 저마다 교육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지고 교문을 들어설 학생들! 만약 그 학생들이 지금 이 나라 정치적 환경에 대해 묻는다면 필자는 꼭 말하고 싶다, 말할 가치가 없다고. 교육 독립 운동을 펼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 요즘이다.

2019-02-27

사소함의 미학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몇 년 전, 학위 논문을 심사할 때의 일이다. 한 장씩 읽어가다가 어느 한 모퉁이에서 나도 모르게 눈이 멈췄는데, 그 이유는 바로 명명백백한 표절의 흔적 때문이었다. 방대한 자료를 훑다보니 출처 밝히는 것을 깜빡했나보다 하고 있었는데, 감사해야 할 학생의 지도교수가, 오히려 투덜대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슨, 그 부분은 전체 중 지극히 소소한 부분이라 아무도 모르는데, 괜히 문제를 삼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박사 논문도 아닌 석사 논문에서 뭐 그리 소소한 것까지 따지느냐는 원망의 눈빛마저 보내는 바람에 적잖이 당혹해 했던 기억이 있다.옛말에 ‘필작어세(必作於細)’라는 말이 있다. 노자의 ‘도덕경’ 63장에 나오는 말로,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뜻이다. 사소한 것이라고 가벼이 여기게 되면 뒤에 큰 화를 당하기 십상이다. 한비자가 ‘천 길 제방도 땅강아지나 개미의 작은 구멍으로 무너지고 백 척 높이의 고대광실도 아궁이 틈에서 나온 작은 불씨 때문에 타버린다’고 한 것이나, 공자가 일찍이 ‘군자는 광대함에도 도달하고 작고 정미한 것에도 진력하여 높고 밝음을 끝까지 추구하며 중용을 도로 삼는다.’고 한 것은 모두 ‘사소함’의 중요성을 설파한 말들이다.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가 쓴 ‘산업재해 예방: 과학적 접근’이라는 책에는 ‘1:29:300의 법칙’이 나온다. 이는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그와 관련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들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통계적 법칙으로, 핵심은 큰 재해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방치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중국 반캬오 저수지 붕괴 사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 2차 의료 감염 사건 등도 모두 인근 댐들의 저수량을 감안하지 않은 설계, 기술자들의 안전규칙 위반, 수술 전 올바른 방법으로 손 닦기 같은 사소함을 무시한 결과이다. 물론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거나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있고 보면, 작은 것에 집착하다 큰 것을 놓치는 경우도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100%의 실패를 막는 것은 1%의 실수, 곧 사소함이다.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은 이러한 디테일, 사소함에 강하다. 이 ‘사소함’은 단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하찮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큰 것을 보기 위한 첫 걸음이자 주변을 배려하는 ‘세심함’을 내포한 말이다.그런데 세상에는 내게는 자그마한 일이, 상대에게는 큰일이자 상처이고 평생의 아픔이 되는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마시던 소주병을 베란다 밖으로 무심코 던진 게 길 가던 행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목숨을 앗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재미로 놀리고 때린 일이 상대에게는 상처가 되어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세상이다. 오래 전 사탕 한 개를 훔친 아이, 겨우 사탕 한 개쯤이야 하고 눈감아 준 것이 수십 년 후 은행털이범이 된 경우도 많이 본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법, 이 모든 것은 초기의 사소함을 크게 생각지 않은 탓들이다.사소함을 차츰 무시하다보면, 나중엔 큰일을 사소함으로 여기는 대범함이 생기기도 한다. 힘겹게 번 돈으로 도와주었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뭐 큰 금액도 아니고, 그런 사소한 것쯤이야, 친구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등 임용 출제 기간에 개인 사유로 무단이탈해 놓고선 오히려 사소한 일이라며 문제없다고 발뺌하는 교육계 인사들…. 이들에게는 도덕적 양심이 없다. 따뜻한 심장이 없다. 모든 게 ‘사소한’ 까닭이다.내게의 ‘사소함’이 남들에게 ‘큰일’이라면, 그것은 결코 ‘사소함’이 될 수 없다. ‘사소함’은 ‘나’가 아닌 ‘남’을 위한 배려이다. 그래서 ‘필작어세(必作於細)’에 담긴 사소함의 미학‘은 바로 다름 아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인 것이다.

2019-02-24

Ctl+c, Ctl+v 사회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시간을 얼려버릴 추위에도 자연은 결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철을 아는 자연은 천천히 겨울 솜이불을 걷어내고 있다. 때론 겨울이 마지막 투정을 부리지만, 바뀌는 바람에 겨울도 수긍한다. 바뀐 바람을 타고 눈이 꽃 소식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바람이 가지에 묻은 겨울을 털어내면 자연은 꽃눈을 힘껏 밀어 올린다. 그렇게 밀어 올린 봄은 작년 봄과는 다른 봄이다.사람들이 자연에 감탄하는 이유는 바로 새로움 때문이다. 자연에는 구태(舊態)가 없다. 자연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낸다. 자연이라고 왜 미련이 없을까마는 새로움을 짓는 방법을 아는 자연은 미련을 모른다. 춥다고, 가물다고 절대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 그 어떤 탓도 하지 않고 자연은 자신과 주변을 살핀다. 이것이 자연이 겨울을 임하는 자세이다.겨울은 자연에게 준비의 시간이오, 기다림의 시간이며, 또 철저한 자기반성의 시간이다. 그런 시간들이 있기에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자연의 힘은 때를 아는 것이다. 자연에게 있어 2월은 출발의 달이다. 새 출발을 시작하는 자연의 이야기를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상략)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기어코 /봄은 찾아온다는 것//슬픔과 고통 너머/기쁨과 환희로 가는 길은//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음을/가만가만 깨우쳐 준다//이 세상의/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여//나를 딛고/새 희망 새 삶으로 나아가라 (하략)” (정연복 「2월」)자연은 슬픔과 고통을 기꺼이 감내(堪耐)하고 기쁨과 환희로 가는 길을 만들고 있다. 그 길은 꽃들이 만개한 꽃길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게 서로 손잡고 그 꽃길을 가면 된다. 자연은 인간들에게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그 길에서 모두가 행복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발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하지만 인간들은 자연의 이야기에 귀를 닫아버렸다. 비록 해는 바뀌었지만, 어찌해서 이 사회는 바뀐 게 하나도 없을까?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앵무새 유전자라도 이식받았는지 정말 변한 게 단 하나도 없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특히 정치와 교육에는 새로움과 희망이라는 단어가 없는지도 모르겠다.뭔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나아지기는커녕 더 힘들기만 하다. 마치 올무에 걸린 모습과 같다. 발버둥 칠수록 더 옥죄는, 그래서 결국엔 고통스럽게 생을 마치고 마는 올무에 걸린 삶! 과거라는 올무에 걸린 이 나라의 운명이 안타까울 뿐이다. 인구 절벽, 경제 절망, 교육 붕괴, 정치 불신…! 이대로 가다간 남는 건 결국 국가 부도밖에 없다.이 나라의 미래가 부도로 끝나기를 바라는 국민은 없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를 털어내야 한다. 지금처럼 정치 이익을 위해서 과거의 특정 부분만 그대로 복사(ctl+c)해서 붙여넣기(ctl+v)를 해서는 안 된다. 과거청산이 어려우면 과거를 용서하자! 민족상잔의 주범도 이해를 하고 대화를 위해 간과 쓸개를 내놓는데, 왜 우리끼리는 서로의 올무가 되는가!이 나라에 진정 봄이 오기 위해서는 교육부터 봄을 맞이해야 한다. 그런데 곧 교육의 봄인 3월이지만, 신학기에 대한 설렘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나라 교육방향의 핵심 키워드 또한 ‘과거 복사’, ‘붙여넣기’이기 때문이다. 말로만 창조, 변화를 외치지, 교육현장에서는 글자 하나 틀려도 생난리를 치는 게 이 나라 교육 현실이다.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아이가 말한다. “아빠, 내 친구 벌써 수포자(수학 포기 자)다. 근데 학원에서는 중학교 2학년 끝났대. 엄마가 초등학교 때 중학교 수학 다 끝내라고 했대. 내 친구 정말 불쌍해!” 이 나라 교육의 봄은 언제 오는가!

2019-02-20

사랑의 진정한 가치

김태곤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시공을 초월해 한번쯤은 사랑을 경험하게 되고, 지금도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렇듯 사랑은 인간이면 누구나 겪게 되고, 알게 되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또한 사랑은 사람마다 고유한 특징을 가지며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표현되어진다. 그중에서도 이성간의 사랑, 즉 에로스(Eros)는 강한 정서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연인들의 신체적 매력에 끌려 열정적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젊은 연인들이 서로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하는 문화 중 가장 대표적인 기념일을 꼽으라면 단연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Valentine Day)를 떠올리게 된다.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을 자극하여 과소비를 부추긴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의 기념일은 성탄절 다음으로 단연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를 꼽는다. 실제 일부 여중고생들의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선물들이 점점 과소비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고가 선물들이 다량 판매되고 있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정보화, 국제화, 세계화 시대의 개방문화가 조성한 새로운 소비문화이자 신생 소비의식으로 인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세계 미술계에서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예술가를 꼽으라면 필자는 미국의 팝아트의 거장인 로버트 인디애나(1928∼2018)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 뉴욕의 중심가에 거대한 조형물로 제작된 ‘Love’라는 작품은 미술을 모르는 일반 관광객이라도 한번쯤은 가까이에서 감상을 하게 되고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큰 특징은 간결하고 문학적 상징이 내포된 기하학적 작품을 주로 제작한다는 점이다. 문자와 상업디자인을 이용한 그래픽디자인 방식을 이용해 논리적이고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형상화 시켰으며, 극단적으로 간결하면서도 단순한 표어문자가 주는 문학적 상징성을 깊이 있게 담아내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Love’는 문자라는 추상적 매체를 이용하여 작품을 대하는 관람자들에게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영어를 모르는 문맹인이라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알파벳 4개로 구성된 조형물은 색채의 대비에서 오는 강한 인상을 남겨주기에 충분하다.Love라는 단어를 작품으로 처음 표현하게 된 계기는 1964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그에게 크리스마스카드 디자인을 의뢰한 것이다. 당시 단순한 사랑이라는 단어에 강렬한 색채인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 세 가지 색깔로 표현하여 구성된 Love카드가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카드 성공에 힘입어 1966년 입체작품으로 ‘Love’를 제작해 뉴욕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며 이후 ‘Love’는 1970년대 미국 내 우표, 포스터, 티셔츠, 머그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면서 미술품이라는 한계를 넘어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초기의 디자인에 관한 저작권을 보장받지 못해 ‘LOVE’는 상업적으로 수없이 많이 무단 복제되어버렸고, 경제적 이득은 전혀 얻지 못하는 불운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를 가장 상업적인 예술가로 혹평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 중 “모든 사람들이 나의 작품 ‘Love’를 알고 있지만, 나에 대해서는 모른다. 나는 익명이다.” 라는 의미는 유명 예술품 뒤에 숨겨진 예술가의 고단한 삶의 여운을 느끼게 해준다.밸런타인데이를 보내며 사랑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우리는 Love라는 단어가 갖는 화려함에 빠져 육체적 사랑이 주는 쾌락에만 빠져 있지 않은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분명 Love라는 단어 속에는 에로스적인 의미도 있지만 헌신적인 사랑인 아가페와 정신적인 사랑 필리아, 친구간 사랑인 스토르지 역시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는 나를 살리기도 했지만 아프게도 했다.”는 말처럼.

2019-02-19

일·가정 양립 문화가 필요한 이유

박은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개발실장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의 1인당 연평균 노동시간은 2016년 기준 2천69시간이다. OECD국가 중 멕시코와 함께 최장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으며, OECD 평균인 1천764시간보다 305시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OECD, 2016).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7년 노동생산성은 한국(34.3달러)이 OECD 22개국 중 17위로 세계 10위권 경제규모라는 위상이 무색할 만큼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낮은 편이다(OECD, 2016).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1위 아일랜드(88달러)의 38%에 불과하고, 한국과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비슷한 스페인(47.8달러)에 비해서도 13달러 이상 낮은 수준이다. 노동시장 내 기업 특성을 고려한 고용환경의 변화가 추진되지 않으면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 노동의 생산성은 크게 증대되지 않을 것이다.경북지역 여성은 일과 가정생활을 비슷하게 우선시한다는 비율이 44.5%로 높게 나타나서 남성(33.2%)에 비해 일·가정 양립에 대한 필요성을 더 강하게 느끼는 것으로 판단된다(통계청, 2017). 또한, 경북지역 육아휴직급여 수급자는 2천493명으로 남성이 212명, 여성이 2천281명으로 남성비율은 8.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통계청, 2016). 육아휴직의 최대 걸림돌은 재정적 어려움과 직장 동료 및 상사들의 눈치인 것으로 나타났다(인구보건복지협회, 2017). 육아휴직 활용의 다수가 여성들인 이유는 육아가 여성의 몫이라는 전통적 성역할 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직장 내 승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남성의 육아휴직은 노동시장에서 여전히 수용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육아휴직제도는 선진국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지만 정작 맞벌이 부부는 마음 놓고 육아휴직을 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젠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는 데는 신패러다임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일·삶의 균형, 일·가정양립지원의 활성화가 중요하다. 일·가정양립제도는 남녀 근로자가 경제활동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의 충돌을 완화하고자 도입했다. 일·가정양립은 양성평등과 저출산 현상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 단계에 접어들었다.현재 일·가정양립제도는 크게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대변되는 부모휴가제도와 유연근무제로 구분할 수 있다. 부모휴가제도는 출산(전후)휴가제도, 육아휴직제도, 배우자출산휴가제도, 가족돌봄휴직제도 등이 있는데, 그 영향력과 제도적 개선 가능성을 육아휴직제도를 중심으로 검토되어 왔다. 일·가정양립지원을 위한 다양한 휴가·휴직제도 중 육아휴직이 제도적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그 보편성과 중요성은 물론, 출산휴가와 달리 근로자의 선택에 의해 제도 활용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근로자의 임신, 출산, 자녀 양육기의 모성보호와 경력단절을 방지하여 경제활동을 촉진하고 자녀 양육기의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 때문에 공공기관 내 일·가정양립제도의 도입 및 활용은 여성이 경력을 유지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이다. 일·가정양립은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양성평등 실현이 요구되고 있으며, 개인 및 기업, 국가의 경쟁력 제고나 출산율 등에 있어서 국가운영을 위해 매우 긴요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시장과 가정생활에서의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출산전후휴가, 육아휴직 등 다양한 휴가시스템을 도입해야 할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저출산 극복과 함께 일하고자 하는 지역 환경을 마련하려면 일·가정양립 문화 확산이 필수 요인일 것이다.

2019-02-18

교육위기 체감 지수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SKY캐슬의 위력이 대단하다. 광고계는 물론 각종 토크쇼까지 캐슬 출연자들이 점령했다. 대박 드라마의 파급 효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SKY캐슬처럼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은 단순하게 보고 즐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다룬 사회 문제가 현실에서는 꼭 해결되기를 바라는 주술 같은 기원을 담고 있다.특정 정치인들의 골수 지지자들을 제외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 대해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규모를 떠나 모두 죽을힘으로 버티고 있다. 그런데 그 힘도 거의 소진되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이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주춧돌과도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흔들리고 있다. 이들이 무너지면 이 나라도 무너진다. 위기 체감 지수라는 것이 있다면 그 수치는 이미 최대치를 넘어섰다.그럼 교육위기 체감 지수는 어떨까? 단언컨대 다른 어떤 분야보다 월등히 높다. 이를 증명하듯 “공교육은 죽었다. 학교는 죽었다.”라는 말들이 더 이상 소설이나 연구논문의 주제가 아닌 일상 언어가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SKY캐슬과 같은 드라마가 만들어졌다.교육위기 체감 지수를 계산할 항목들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나 필자는 교육의 본질과 교육과 사회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은 항목들을 추출해 보았다. 교육의 본질에 대한 지속도, 공교육의 사회 기여도, 사회 변화 반영도, 공교육에 대한 교육 수요자의 기대와 신뢰도, 교육 공급자들의 교육 의지 및 유연성 정도! 각 항목들의 점수는 얼마일까?그 답은 우주가 말해준다. 우리 교육은 우주를 비롯해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내몰고 있다.“엄마, 아빠 실은 책상에 앉으면 공부가 다 되는 줄 알았어요. 성적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줄 알았으니까요. (중략) 성적, 대학, 이런 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았어요. (중략) 이렇게 귀한 시간을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도 모른 채 성적이나 올리자고 문제나 풀어대면서 낭비할 순 없어요.(중략) 힘은 아빠, 내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보다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뭘 위해 사는지, 그게 선명할 때, 그게 뚜렷하고 확실할 때 나오는 거 아니에요?”우주가 학교를 그만 두기로 결심하고 부모와 나눈 이야기다. 우리는 우주의 물음에 뭐라고 답할 것인가? 그런데 비록 드라마이지만, 어느 교사는 이렇게 답을 했다.“니들은 인간이기 전에 학생이야, 고3이라고! 대학갈 생각을 해야지 학교를 관둬! 자아탐구 좋아하시네. SKY 못가면 뭐라고? (학생들 - 사람대접 못 받는다.)”드라마는 끝났지만 학벌주의 사회는 더 공고(鞏固)해지고 있다. 학교 교육은 명문대를 가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가 되어버렸고, 명문대 진학을 성공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교사들은 명문대라는 올가미로 학생을 겁박(劫迫)하고 있다.또 학부모들은 말로는 배려니, 희생이니, 양보니, 참교육이니 떠들면서 속으로는 내 자식만의 성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다. (물론 모든 교사와 학부모들이 이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위선자들로 가득한 우리 학교 교육에 정말 희망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기나 할까?드라마나 영화가 무서운 것은 그 내용이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도 있지만, 그 장면들이 가까운 시일에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배우들의 절규가 헛된 메아리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절규가 주는 경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교육 현장을 점검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학교도, 교사도, 학부모들도 알기는 알지만 실천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오늘도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학교를 나올지 학원에서 고민하고 있다. 연중 내내 환하게 불 밝힌 학원과 겨우내 불 꺼진 학교, 참 아프다.

2019-02-13

최고의 교육

김현욱 시인로베르타 골린코프와 캐시 허시-파섹 교수는 캐나다, 싱가포르 등 전 세계 국가들이 교육개혁을 추진할 때 우선해 자문하는 저명한 교육과학자다. 20여 년 동안 공동 작업을 수행한 두 교수가 최근 출간한 ‘4차 산업혁명 시대 미래형 인재를 만드는 최고의 교육’(이하 ‘최고의 교육’)에서 미래가 원하는 아이들의 역량을 6C 역량이라고 명명했다. 6C 역량은 협력, 의사소통, 콘텐츠, 비판적 사고, 창의적 혁신, 자신감을 가리킨다.‘최고의 교육’에 따르면, “태어난 순간부터 사회적인 자기 통제력을 발달시키는 방식으로 협력을 배운다면, 의사소통은 협력을 기반으로 구축된다. 콘텐츠는 대상과 사건들의 정보를 습득하는 의사소통 능력을 통해 거두게 되는 결과다.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비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미래가 가장 원하는 인재다. 창의적 혁신은 콘텐츠와 비판적 사고에서 탄생한다. 마지막으로 실패를 극복하고 도전을 지속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원하는 6C 역량을 가진 미래형 인재”라고 할 수 있다.핀란드는 2001년부터 세계경제포럼의 글로벌 경쟁력 지수에서 줄곧 최상위권을 지키는 교육 강국이다. 핀란드의 교사들은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높은 보수와 대우를 받는다. 최고의 전문성과 긍지를 갖춘 핀란드 교사들은 교과서로 수업하지 않고 교육과정을 함께 설계하고 계획하고 자신이 맡은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진다. 다른 나라 아이들이 스트레스 속에서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는 동안 핀란드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자신이 배운 것을 적용하고 응용한다.비즈니스 사상가이자 베스트셀러작가인 다니엘 핑크는 우리 아이들에게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 몇십 년은 특정한 생각을 하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의 것이었다. 코드를 짜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계약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 변호사, 숫자들을 다룰 줄 아는 MBA 졸업생처럼 말이다. 하지만 왕자의 열쇠는 이제 교체되고 있다. 미래는 매우 다른 생각들을 가진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거의 될 것이다. 창조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 패턴을 인식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예술가, 발명가, 디자이너, 스토리텔러와 같은 사람들, 남을 돌보는 사람, 통합하는 사람, 큰 그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최고의 부를 보상받을 것이고 가장 큰 기쁨을 누릴 것이다.”로베르타 골린코프와 캐시 허시-파섹 교수는 즐거운 놀이 학습을 통해 6C 역량을 키울 것을 주문한다. 우리 사회는 놀이와 공부가 분리되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놀이와 공부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한다. 우리의 전통놀이인 비석치기를 예로 들어보자. 비석치기를 하는 아이들은 비석치기라는 놀이의 능동적인 주체가 된다. 자유롭지만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비석치기를 하는 아이들은 협력하기 위해 활발하게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비석치기를 하려면 각 단계, 즉, 콘텐츠를 이해해야 하며, 분쟁이 생기면 문제해결을 위한 비판적 사고를 해야 한다. 비석치기를 잘하기 위해서 또는 이기기 위해서 끈기 있게 도전할 수 있는 인내심과 자신감도 필요하다. 놀이와 공부가 따로 놀아서는 안 된다. 놀이가 공부고 공부가 놀이다. 놀이는 6C 역량을 키우는 최고의 교육이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학생들은 주당 33시간 정도 공부하는데,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주당 평균 70, 80시간을 공부한다. 우리나라 아이들의 삶의 만족도는 세계 꼴찌이고 학습효율도 바닥이다.“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 없는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2007년 앨빈 토플러가 우리에게 한 말이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는 게 뼈아프다. 우리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놀이다. 놀이 속에 배움이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미래형 인재를 만드는 최고의 교육은 바로 놀이다.

2019-02-11

캐슬의 반격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어머니 뜻대로 분칠하는 바람에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르고 근 50평생을 살아왔잖아요? (중략) 그깟 병원장이 뭐라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허깨비가 된 건 같다고.”‘캐슬’의 절규 중 하나이다. 50대 잘 나가는 의사의 절규. 비록 ‘캐슬’은 종료 되었지만 아직도 허깨비라는 말이 메아리가 되어 귓가를 맴돈다. 의사이면서도 성공에 눈멀어 자신의 딸을 죽게 한 마마보이의 절규이지만, 그 절규의 깊이는 남다르게 보였다. 그 절규가 필자의 내면 깊숙이 잠자고 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흔들어 깨웠다.“당신 얼굴이 뭔데요? 어머니 아들, 예서 아빠, 내 남편, 주남대 교수. 그거 말고 당신 얼굴이 뭐가 더 있는데?”“강준상이 없잖아, 강준상이!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캐슬 부부의 대화이다. 앞의 말은 오로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전형적인 이 나라 부모의 마음이다. 그리고 뒤의 말은 드디어 자아정체성에 대해 눈뜬 외로운 영혼의 모습이다. 정말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한서진(예서 엄마)처럼 대답할지 모른다.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하고 누구의 아들, 누구의 엄마 아빠로 산다면 우리는 가까운 시일 내에 강준상(주남대 교수)이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울부짖는 다음의 절규를 똑같이 들을지도 모른다.“어머니랑 제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요.”유명 대학 병원의 차기 병원장 후보라면 외형적으로는 분명 성공한 인생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강준상은 울부짖음으로 말하고 있다. 분명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다. 그리고 외형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도 사회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사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런데 불편한 진실은 그런 사람들보다 성공 도착증(倒錯症)에 빠져 사람으로서 가져야 될 기본 소양도 못 갖춘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강준상의 절규를 인용한 이유는 잘못된 인생을 사는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부모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과연 나는 어떤 부모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면 자식들로부터 강준상보다 더 큰 원망을 들을 지도 모른다.“당신도 욕심내려 놔. 예서 인생하고, 당신 인생은 다른 거야.” 울부짖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강준상이 아내 한서진에게 한 말이다. 필자는 지난 주 거리(距離)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이 나라 사람들은 부모, 그 중에서 학부모가 되는 순간 거리감각을 잃어버린다. 특히 자녀와의 거리 관계에서는 자녀를 자신과 동일시 해버린다. 그래서 자녀의 의중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녀를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 한다. 그러는 순간 아이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로봇이 되어 부모가 입력한 명령어대로 움직인다. 아이들이 자신의 말대로 완벽하게 원격조정될 때 부모들은 자신들이 정말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강할수록 아이들의 개성은 빠른 속도로 죽어간다. 그리고 결국엔 빈껍데기만 남는다. 그 모습을 드라마는 놓치지 않고 극적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혹 아이들의 절규가 들리는가!“어머니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해서 학력고사 전국 1등까지 했고, 어머니가 의대 가라고 해서 의사 됐고, 어머니가 병원장 되라고 해서 그거 해보려고 기를 쓰다가 내 새끼인지도 모르고 혜나 죽였잖아요. (중략) 날 이렇게 만든 건 어머니라고요. 지 새끼도 몰라보고 출세에 눈이 멀어 그까지 병원장이 뭐라고. 낼모레 쉰이 되도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놈으로 만들어 놨잖아요. 어머니가….!”위의 절규는 필자가 뽑은 캐슬의 최고의 절규이다. 필자는 이 장면을 보고 심장이 멎는 듯 했다. 과연 필자의 아이들은 물론 학생들이 필자에게 이렇게 따지고 들면 필자는 과연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캐슬의 절규가 곧 현실이 될 것 같은 생각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2019-02-06

SKY 캐슬의 질문 없는 배움

김현욱 시인지난 25일은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한국과 카타르의 8강전이 열린 날이다.동시에 JTBC 드라마 ‘SKY캐슬’ 최종회가 결방된 날이기도 하다. SNS에서는 축구 때문에 ‘SKY캐슬’이 결방된 것에 불만을 토로하는 글들이 우후죽순처럼 올라왔다. 도대체 ‘SKY캐슬’이 뭐길래?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SKY캐슬’과 관련된 글들이 부지기수였다. ‘SKY캐슬’의 ‘SKY’가 뭘 의미하는지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학창시절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공부. 정작 공부의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공부란 도대체 무엇일까? 도올 김용옥 선생에 따르면, ‘공부(工夫)’는 영어 ‘to study‘의 번역어로 ‘도움을 주어서 공을 이루다’라는 의미다. 공부(工夫)의 어원은 ‘공부(功扶)’와 같은 것으로 ‘공(功)’은 ‘힘을 더해 이루어 내다’라는 말이고, ‘부(扶)’는 ‘돕다’라는 뜻으로, 이를 합치면 ‘성공에 이르도록 스스로를 돕는다’라는 의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에서 ‘스스로 돕는’것이 바로 공부다.그동안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지겹도록 들었던 공부 좀 하란 말은 ‘스스로를 도와라!’는, 엄청난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앞으로 자녀와 학생들에게 ‘공부해라!’하지 말고 ‘스스로를 도와라!’라고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했으면 좋겠다. 심오한 뜻이 잔소리로 들리지 않게 말이다.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은 ‘질문 없는 배움’에 대해 일깨워 준다. 장면은 이렇다. 성균관 유생들의 첫 수업 시간, 요강을 든 정약용이 교실로 들어선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맨 먼저 나온 질문이 ‘성적 처리’다. 정약용은 기다렸다는 듯 “내 수업 시간에 불통이 다섯이면 낙제, 수업이든 활동이든 성균관에서 낙제가 셋이면 출재와 동시에 청금록영삭(유생의 명부에서 삭제되는 일)인 건 알고들 있을 테고……. 그래서 준비했다.”면서 요강을 내밀고는 뇌물을 요구한다. 성적이라는 말에 긴장한 유생들은 금반지와 가지고 있던 돈을 요강에 넣지만 이선준이라는 유생은 문제를 제기할 기회를 엿본다. 정약용은 돈을 걷은 뒤에 요강에 든 색색의 천을 꺼내고 불꽃을 일으키고 사과를 꺼내 유생들에게 던져 주는 등 신기한 광경으로 유생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때 이선준 유생이 문제를 제기한다.“그만두십시오. 지금은 논어재 시간입니다.” “이런, 못난 스승이긴 하나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네.” “한데 어찌 서역의 잡기로만 귀한 상유들의 시간을 탕진하십니까?” 그러자 정약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들고 있던 요강을 떨어뜨려 산산조각 내버린다. 그리곤 이선준의 질문에 답한다. “논어 위정편, 군자불기에 대해 강했네. 군자는 한정된 그릇이 아니라, 진리를 탐하는 군자라면 갇혀 있는 그릇처럼 편견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강했네. 서역의 잡기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는 건 무슨 고약한 편견이며 정약용이란 놈이 서학을 좀 했다 해서 고전을 싫어할 거라는 무지몽매함은……. 참 용감하기도 하군.”(이하 중략)서슬 퍼런 정약용의 말에 누워있던 문재신마저 눈을 비비고 일어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성적 발표. 이선준만 통을 받고 모두 불통. 당혹해하는 다른 유생들의 질문에 정약용은 이렇게 말한다.“그래서다. 이 엉터리 수업에 불만을 제기한 유일한 학생이니까. 진리는 답이 아니라 질문에 있다.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 준 세상은 사라지고 없다. 스승이란 이렇게 쓸데없는 존재들이다. 허나 스스로 묻는 자는 스스로 답을 얻게 되어 있다. 그것이 이선준이 통인 이유다.”

2019-01-30

학부모 관심과 교육 간의 거리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필자는 어려서부터 관계(關係)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이야기는 반복 수준을 넘어 세뇌(洗腦)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천은 역시 다른 모양이다.필자는 관계는 곧 거리(距離)라고 생각한다. 관계는 대상과의 거리 맺기이다. 거리 조절을 잘 하면 관계가 좋아지고, 거리 조절에 실패하면 관계는 어긋난다. 너무도 당연한 이론이지만 우리가 관계에 있어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하는 이유는 바로 거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베스트셀러에 빠지지 않는 책이 있다. 바로 ‘관계와 거리’에 관한 책들이다. 처세술, 인생론 등으로 명명되는 이런 책들이 많이 팔리는 현상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계 맺기, 즉 거리 조절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거리를 생각할 때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을 떠올린다. 이 말을 잘 활용한 시가 있다. “다가서면 관능이고/물러서면 슬픔이다./아름다움은 적당한 거리에만 있는 것/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안 된다/다가서면 눈멀고/물러서면 어두운 사랑처럼 (후략)” (오세영 ‘양귀비’)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안 되는 거리는 얼마일까? 이 거리를 오세영 시인은 “적당한”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답이 바로 “적당한”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거리를 계속 찾고 있지만, 아마 평생 못 찾을 것 같다.우리 사회 모든 분야가 지금 매우 어렵다. 그 해결책으로 요소들 간의 거리에 대해 깊이 고찰해 볼 것을 제안한다. 필자는 우리 교육에서의 거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교육계에는 다양한 거리가 존재한다. 학생과 학생 간의 거리, 학생과 교사 간의 거리, 학생과 학부모 간의 거리, 학부모와 교사 간의 거리. 학부모와 학교 간의 거리, 교육과 시대 간의 거리 등! 그런데 혼돈 가득한 지금 교육계의 상황을 보면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거리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SKY 캐슬”이다. 필자는 교사이기 전에 두 딸을 둔 학부모의 입장에서 “학부모 관심과 교육 간의 거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교육의 몫을 따지기란 힘든 시대가 되었다. 사회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교육의 경계도 많이 허물어졌다. 예전에는 학교가 교육을 담당하는 주된 기관이었다. 그 때는 교육에 있어 학교와 교사의 역할 비중이 매우 컸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공교육을 훨씬 능가하는 사교육 기관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면서 학교와 교사의 역할 비중은 상당히 줄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와 교사, 그리고 학교 교육에 대한 생각이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비록 드라마이지만 “SKY 캐슬”에서 보듯 요즘 교육은 학교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교육과 학부모 간의 거리는 매우 가까운 반면, 학부모와 학교 간의 거리는 매우 멀게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거리가 변한만큼 교육에 대한 이상도 변했으면 다행인데, 우리 교육 현실은 여전히 점수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점수에 더 안달을 느끼게 되고, 멀어진 학교보다 가까워진 사교육에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교육 기관에는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다 줘도 전혀 아깝게 생각하지 않지만, 학교에는 단돈 100원을 내도 아깝게 생각하는 게 지금의 교육 현실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교육 당국, 그리고 학교와 교사의 문제도 매우 크다.분명한 것은 교육과 학부모 간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교육은 본질에서 더 멀어진다는 것이다. “교육 1번지 목동 엄마 따라잡기” 등과 같은 프로그램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래서 학부모로서 필자는 교육과 좀 더 헐렁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필자가 빼앗아 간 교육에 대한 거리를 학교와 교사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2019-01-29

세화(歲畵)와 이모티콘

김태곤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2019년 기해년(己亥年) 새해가 밝았다. 특히 올해는 재물과 복의 근원을 상징하는 황금돼지해로, 지난 어느 해보다 풍요롭고 행복한 한 해가 될 것이다. 새해 첫날이면 우리민족은 지난날 안 좋았던 일은 모두 잊고 한 해를 밝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로 다채로운 세시풍속을 즐겼다. 이러한 세시풍속은 우리 조상들의 삶속에서 대대로 지켜 내려온 생활에 대한 습관으로, 일 년을 주기로 철에 따라 되풀이되는 고유한 풍속을 말한다. 의식주를 비롯해 음악과 무용, 놀이 등 문화의 모든 요소가 들어있어 전통문화의 보고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중 떡국과 세화는 새해를 송축하고 무병장수와 재앙을 막기 위한 대표적인 음식과 그림으로 꼽을 수 있다.설날 떡국을 먹는 것은 흰 가래떡에 한 해를 시작하는 시간의 경건함을 담고 있으며, 고대 태양 신앙에서 유래됐다. 나이떡국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새해 첫날 떡국을 먹음으로써 비로소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희고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떡처럼 한 해를 밝게 보내라는 의미와 함께 순백의 떡과 순백의 국물을 마시며 지난날 안 좋았던 일은 모두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축복의 메시지도 담겨져 있다. 특히 떡국에 사용하는 떡은 가래떡을 얇게 썰어 둥근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하는데, 이 모습은 마치 엽전을 연상시킨다. 옛날 화폐인 엽전처럼 생긴 떡국을 먹으면서 새해에는 돈도 많이 벌고 풍족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함께 담고 있다.새해가 되면 세배, 세찬, 설빔과 함께 송축하고 액운을 막기 위해 세화(歲畵)를 즐겨 그렸는데, 이는 왕과 신하들이 서로 주고받던 궁중풍속이었다. 질병이나 재난 등의 불행을 사전에 예방하고 한 해 동안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벽사적이고 기복적인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 문짝에 주로 붙이기 때문에 문배(門排) 또는 문화(門FFFC)라고도 했는데, 농촌보다는 정교한 대문을 가진 서울 등의 도시 주택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풍습화된 세화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반 대중적인 성격을 띠며 확산되기 시작했다. 관원들은 대개 도화서에서 그려 올린 세화를 임금으로부터 하사받고, 민가에서는 광통교 일대의 그림 가게에서 구입해 붙였다고 한다. 이 광통교에 나돌았던 세화들은 도화서의 화원들이 그린 것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세화들도 많았다고 한다. 세화의 주 소비층은 처음에는 주로 사대부들이었으며, 그림의 내용은 도교적 인물과 길상의 의미를 지닌 식물 등이 주류를 이뤘다. 이후 서민층까지 확산되면서 서민들이 이를 흉내 내어 해마다 정초가 되면 세화를 사서 붙이거나 그들의 주거 공간을 장식하며 민화로 발전시켜 나갔다. 고문헌을 살펴보면 “설날 대문에 세화를 붙이는데 갑옷을 입고 한 손에 도끼를 들고 서있는 장군상을 그려 붙이며 이를 문배라고 부른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는 밖에서 병을 몰고 오는 역신이나 화재를 일으키는 신, 재앙을 불러오는 신 등 모든 악귀를 쫓아내는 길상과 벽사의 함축적 의미를 담은 세화의 상징성을 의미한다.새해가 되면 액을 막고 복을 바라는 목적으로 성행했던 과거의 세화풍습은 급속한 현대사회의 변화 속에서 주술적 의미가 점차 희박해지면서 연하장이라는 대중문화를 가져왔다. 이제는 IT산업의 발전과 모바일 문화의 변화에서 오는 이모티콘과 특수문자가 대신하고 있다. 벽사적 성격의 ‘문배용 세화’와 길상적 성격의 ‘송축용 세화’ 모두는 인간의 행복과 장수에 대한 기원과 믿음을 바랬던 우리 선조들의 멋스런 세시풍속이었다. 황금돼지해를 맞는 이번 설날 아침에는 축복과 행운이 가득 새겨진 건강한 이모티콘으로 세화의 진정한 의미를 전하는 친교의 시간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2019-01-28

연하장을 나누며

강성태서예가·시조시인기해년 새해 새날이 밝았다. 이 아침 뜨는 해는 어제와 다르고 오늘 본 강물은 내일과 다르듯이 매년 새해를 맞으면서 느끼는 것은, 새해에는 그 전 보다 새롭고 희망적이며 발전적이기를 기대해보는 것이다. 새해 첫날 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의 해돋이 명소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해맞이를 하며 건강과 평안, 합격과 승진, 성공과 영달을 염원하는 것도 종전보다 좀 더 낫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필자는 새해가 되면 연례행사처럼 해맞이 후 정결한 마음으로 연하장을 쓰고 그린다. 연하장이란 새해를 축하하고 소망하는 바를 글이나 그림으로 담아 보내는 덕담 편지다.올해는 기해년 돼지해니 만큼 돼지 그림을 복(福) 자와 조합해서 그리고 쓴 ‘福된 새해’ 작품과 ‘여시구진(與時俱進:시대와 더불어 함께 발전한다)’ 한자성어를 세로로 쓴 작품 등을 친지, 친구, 지인, 동료 등의 분들에게 나눠드렸다. 그렇게 연말연시 또는 설날에 즈음해 연하장을 정성껏 써서 이웃과 주위에 나눠 온지 벌써 20년을 넘었다.서툰 붓글씨, 어설픈 먹그림이나마 마음을 담은 연하장을 받은 분들은 대부분 한결같이 밝은 표정으로 감사와 덕담의 인사를 건네온다. 어떤 친구는 연하장 글귀를 되새기며 살다 보니 1년 신수가 훤하게 풀렸다고 하고, 어떤 지인은 사회생활이 순탄하게 이뤄지고 사업과 직장에 큰 진전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분은 붓글씨의 효능(?)을 믿어선지 필자가 건네 준 10년 이상 된 빛바랜 연하장을 사무실 한쪽 벽면에 차례대로 붙여두고는 글귀의 의미를 오래도록 음미하기도 한다.화선지에 붓으로 쓰고 그린 연하장이 살아가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람은 작은 것에 감동하고 상대방의 정성에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작은 연하장 한 장이라도 직접 써서 보내준 사람의 성의를 고맙게 여기고 눈에 띄는 곳에 붙여두거나 소중하게 간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수시로 연하장의 글귀를 되새기며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시사하는 바를 인지하고 깨닫게 되어 생각이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면서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지향한다고 한다.비단 그 같은 일은 간단한 연하장에만 국한되지 않고, 꿈이나 목표, 가르침 등의 글귀를 쓰거나 새겨서 가까이 두게 되면 그것을 지침(指針) 삼아 생각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조금씩 그에 근접하게 되거나 유도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컨대, 개인적인 소망이나 좌우명, 그리고 가훈, 교훈, 원훈, 사훈 등의 문구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는 것도 자신과 구성원들이 목표나 가르침을 항시 인식하고 은연중 사고나 행동의 변화를 일으켜 목표에 부합되도록 유도하는 맥락이 아닐까 싶다.비근한 예로 수년 전 미국의 저명인사나 교수, CEO 등 사회지도층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70% 이상이 학창시절에 장래희망이나 꿈을 구체적으로 적어 책상 머리맡에 붙여두고, 매일 글귀를 보면서 목표를 향해 매진한 결과 원하는 바를 달성했다는 통계결과가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꿈을 이루기 위한 긍정적인 자세와 확고한 의지, 그리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부단한 노력이 수반돼야 함은 자명한 일이겠지만-.한 줄의 명언이나 한 편의 글이 사람의 명운을 바꿔놓은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사실상 연하장이든 좌우명이든 그 내용을 늘 인지하도록 가까이에 두고 보면 무엇인가 당사자에게 심경의 변화가 생기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자신의 목표를 자주 되새기다 보면 느낌도 깊어져 생각이 변하고 행동이 바뀌게 되면서 꿈을 향한 실행과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때, 소박한 연하장 한 장으로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며 그래서 연하장을 받는 분들이 조금은 더 행복해지고 꿈의 현실화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기를 아낌없이 축원해본다.

2019-01-23

‘몬도가네’식 교육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해는 바뀌었지만 사회는 그대로다. 해가 바뀌면 사회도 바뀔 거라고 생각할 만큼 순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새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최소한의 희망을 가져보았다. 하지만 역시 해만 바뀌었을 뿐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변화의 조건을 생각해본다. 분명한 것은 그 조건에서 시간은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시간만 흐른다고 뭔가 변화하리라는 기대는 너무 공상적인 이야기이다.문제는 역시 사람이다. 사람이 그대로인 상태에서는 어떤 상황이 변하기는커녕 더 악질적으로 고착화된다. 이런 현상은 교육, 정치, 경제 등 사회 전 분야에서 확인되고 있다.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분야 중 어느 곳 하나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대통령은 성과를 강조하고 있지만 정말 “글쎄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는 역시 사람이다.사람! 도대체 사람이란 어떤 존재일까? 이에 대해 철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등 많은 분야에서 연구가 이루어졌고, 저마다 사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것을 찾아 읽어보았지만 필자는 아직도 사람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없다. 그만큼 오묘한 것이 사람이다.사람에 대한 많은 이야기 중 필자의 마음을 오랫동안 머물게 한 내용이 있다. 중국 회남자(淮南子)에 적힌 말이다. “물체엔 기(氣)는 있으나 생(生)이 없다. 초목은 생은 있으나 지(智)가 없다. 동물은 지가 있으나 의(義)가 없다. 사람은 기도 있고, 생도 있으며, 지도 있고, 또한 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에서 가장 귀한 것이 사람이다.” 솔직히 이 말의 뜻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사람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 무엇인지는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로 사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기, 생, 지, 의를 다 갖추는 것이다. 여기서 이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 깊이 있게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과연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앞의 네 가지 중에서 몇 가지나 진정으로 가지고 있을까?‘다시’(박노해 시인)라는 시가 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중략)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중략)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필자는 사람에 대한 의미가 흔들릴 때마다 이 시를 읽는다. 그리고 이 시의 내용처럼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현실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라는 말이 더 옳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그 답은 1월을 보내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교육의 목표는 분명 앞의 시 ‘다시’의 마지막 행에 나온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에 대한 방법을 찾는 것이 교육이다. 그런데 그 희망을 아이러니 하게도 교육이 죽이고 있다. 1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자.안타깝게도 어쩔 수 없이 학원에서 오로지 점수를 위한 기계가 되어버린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 과연 우리는 희망을 말 할 수 있을까. ‘미래교육’이니 뭐니 하는 말로 더 이상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 고문을 해서는 안 된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 “점수만이 희망이다!”라고!방학과 학원이 동의어가 되어버린 이 아픈 현실을 과연 누가 만들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나는 아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교사나 학부모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아이들이 학원에 있을 동안 과연 이 나라 교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몬도가네”라는 말이 있다. “기이한 행위, 특히 혐오성 식품을 먹는 등 비정상적인 식생활을 가리키는 단어. 1962년 세계 각자의 엽기적인 풍습을 소재로 한 이탈리아 영화 ‘몬도 카네’(Mondo Cane: 이탈리아어로 ‘개같은 세상’)에서 나온 단어” 몬도가네야 말로 지금 우리 교육에 제일 적합한 수식어가 아닌가 싶다.

2019-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