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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람과 쓰레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여름 휴가철이면 온 산천이 몸살을 앓는다. 물 좋고 경치 좋은 곳마다 사람들이 북적대고, 사람들이 다녀간 곳마다 쓰레기 더미가 악취를 풍긴다. 모처럼 기대를 걸고 계곡이나 바닷가를 찾았다가 함부로 버린 쓰레기가 눈에 띄면 기분을 잡치게 마련이다.그런 쓰레기와 악취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터인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의외로 그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래서 저들도 갈 때는 태연히 거기다가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 심지어는 먹고 마시고 놀던 자리에 쓰레기를 그대로 두고 가는 파렴치들도 적지가 않다.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 농어촌 사람들이 행락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까지 치워야 하는 처지가 된다.행락철의 쓰레기문제는 해결방법이 의외로 간단하다. 자기가 가져온 것은 도로 가져가는 것이다. 자기가 먹고 마신 쓰레기는 집으로 가져가서 평상시처럼 분리 배출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어느 계곡 어느 바닷가에도 담배꽁초나 수박껍질 하나 없는 깨끗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쉽고도 좋은 일을 사람들은 왜 한사코 마다하는 것일까.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길러진다고 한다. 젖먹이 아이를 늑대가 데려가서 키우면 늑대의 습성을 그대로 가진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떤 교육을 받고 무엇을 학습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우리나라 산천에 쓰레기가 넘쳐나는 것은 그만큼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반증인 것이다.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생활을 하려면 어려서부터 남과 더불어 사는데 필요한 사회성을 길러야 한다. 그 사회성의 기본은 역지사지하는 마음, 즉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다. 올바른 인성을 위한 교육은 유치원에서부터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는가, 건전한 사회의 바탕이 되는 가장도 기본적인 인성을 함양하는 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다. 삽으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도 있지만, 올바른 인성교육으로 절감되는 사회적 비용만 하더라도 실로 엄청난 것일 수 있다.남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악취를 풍기며 나의 기분을 잡쳤다면, ‘이렇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구나. 나라도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의 태도일 것이다. 유치원생들에게 설명을 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일인데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교육과 학습이 충분히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그런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걸 의미한다.남을 배려할 줄 아는 능력, 역지사지하는 공감능력은 올바른 인성의 기본이고 교육의 최종 목표라야 한다. 학문과 종교와 예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도 바로 그런 것일 때 그것이 인류에게 기여하는 바가 될 것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느냐 덕을 끼치느냐가 인격을 평가하는 기준일진대 이해와 배려와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해도 남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라면 제대로 인격을 갖춘 사람일 수가 없는 까닭이다.우리나라가 한 걸음 더 선진국이 되고 국민들이 보다 성숙한 시민이 되려면 무엇보다 우선으로 유치원에서부터 철저하게 올바른 사회성을 기르는 학습을 시켜야 한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은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나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학습하고 또 학습하여 뇌리에 각인하고 몸에 배게 하는 것이 바로 바람직한 교육이 될 것이다. 제가 먹은 쓰레기를 되가져 가는 정도의 교양이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가 무슨 짓을 하고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한낱 저급한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2019-08-08

달걀 껍데기를 품은 방학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달걀 껍데기에도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필자를 포함해 2019년 중등 교감 자격 연수에 참가한 백 명이 넘는 연수생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강사만 바라보았다. 강사는 연수생들의 반응을 살폈다. 서로의 눈치가 몇 번 오가도 답이 없자 강의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래도 강사는 계속 반응만 살폈다.필자는 강사로부터 이야기를 듣기까지는 육체적 상처 정도로 생각했다. 주변의 반응도 필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답답해진 연수생들이 강사에게 답이 무엇인지를 직접 물어보았다. 강사는 계속해서 강의실의 분위기만 살폈다. 여기저기서 생각한 답을 말하는 목소리보다는 답답함에 짜증이 난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달걀 껍데기에 상처 받은 사람은 지금 목소리를 높이고 계신 바로 여러분입니다.” 갑자기 강의실 분위기 싸늘해졌다. “여러분 말고도 있습니다. 집에서 아침밥으로 계란 프라이가 나왔는데 거기에 아주 작은 달걀 껍데기가 같이 나왔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강의실이 술렁이었다. 그냥 먹겠다는 사람들과 상황에 따라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는 등 여러 가지 반응이 나왔다. 반응을 지켜보던 강사의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물론, 아침상을 차려준 사람의 정성을 생각하며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껍데기에 마음을 상하여 아침부터 험한 말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마음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긍정적으로 마음을 쓰는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상황에서 부정적인 것부터 먼저 생각을 하고 표현합니다.”필자의 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만약 필자였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보았다. 굳이 말은 하지 않았더라도 불쾌감은 들었을 것이고, 만약 그때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분명 불쾌감을 말로 표현했을 것 같았다. 결국 필자가 달걀 껍데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었던 것이다.강사의 설명에 많은 연수생들이 격한 공감의 표시를 보냈다. 강의는 계속 이어졌다. 패턴은 똑같았다. 얼음 한 조각에 상처 받는 사람, 물 한 모금에 상처 받는 사람 등 사소한 것에 상처를 받는 유형에 대해 강사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비슷한 상황에 대한 자극이 이어지면서 연수생들의 연수 태도도 바뀌었다. 강사는 ‘자리바꿈’이라는 용어로 마음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였다. 마음의 상처는 결국 자리바꿈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결론에 필자는 많은 반성을 하였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줄기차게 이야기 했지만, 정작 필자는 이 역지사지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최근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일본의 경제보복 역시 자국 이익에만 눈멀어 자리바꿈을 하지 못한 일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고, 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를 며칠 째 계속 쏘아대는 북쪽 또한 이 자리바꿈에 문제가 있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자리바꿈의 문제는 국내 교육계에도 있었다, 바로 자사고 폐지!강의 내내 강사의 접근방법이 필자에게는 너무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필자 또한 달걀 껍데기와 관련된 여러 상황을 겪었을 텐데 왜 사람의 태도는 보지 못했는지 강의를 듣는 내내 필자의 획일적인 사고방식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필자의 생각 방식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데 오래 생각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강사가 필자의 잘못된 사고방식에 대해 정확히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기 계시는 교감 선생님들은 교사, 학부모, 학생과 대화하실 때 ‘직책’으로 대화 하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이제 ‘나’ 라는 사람으로 이야기를 해보세요.”교감 자격 연수를 마치면서 필자는 ‘달걀 껍데기’를 가슴에 품었다, 2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자리바꿈’이라는 가치가 필자의 마음에 꼭 부화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2019-08-07

허(虛)와 실(實)

박상영대구가톨릭대 교수오래 전, 구비문학 채록을 위해 읍면 단위의 시골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중 한 곳에서 귀한 손님 왔다며, 수박, 옥수수 등 온갖 음식들을 한 상 가득 차려 내던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푸짐한 시골 인심에 다들 즐거워하던 바로 그때, 갑자기 꼬꼬댁 꼬꼬 하면서 온 동네가 다 떠나갈 듯 요란스러운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닭장으로 가 보니 세상에 암탉이 작은 초란 하나를 낳고서 날개 죽지까지 푸덕거리며 어찌나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던지. 큰 달걀을 여러 번 낳은 닭들은 오히려 우는 동 마는 동 하는데, 알 하나 낳았다고 저 난리치는 것 좀 보라던 할머니 말씀이, 당시 공부하던 우리들에게 산 교훈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옛말에, ‘내허외식(內虛外飾)’이라는 말이 있다. 속이 비었으니 겉이라도 화려하게 꾸미려 한다는 뜻으로 허언장담하거나 허장성세하는 사람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실 빈 수레는 요란한 법이다. 속이 꽉 찬 수레는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육중하면서도 둔탁하다. 그 둔탁함에는 뭔가 모를 무게감이 있다. 반면, 속 빈 수레의 바퀴 소리는 덜컹덜컹 어찌나 가볍고 요란한지 모른다. 그 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그것도 모르고, 빈 수레를 끄는 사람들은 자기 수레가 최고라고 떠들어댄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논어』 위정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기가 최고인 양, 소위 ‘척’ 하는 빈 수레가 너무도 많다. 대충 수박 겉핥기로 스캔한 지식을 자신의 것인 양 자신감으로 무장하여 떠들어대는 강사·교수들, 스스로도 잘 모르기에 투자해서 손해 보지 않으려 하면서 남들에게는 대단한 정보인양 얘기하며 투자를 강요하는 상인·기업가들, 서민들의 생활은 경험도 안했으면서 마치 잘 아는 양, 선거철마다 떠들며 민심을 얻으려는 정치인들 등. 이들 빈 수레들이 내는 소리로 인해 귀가 아플 정도이다.그 뿐만이 아니다. 빈 수레들은 자신의 빈 것(虛)을 포장하는 데에 온갖 열정을 쏟아 붓는다. 빈 수레를 가득 채울 노력 대신에 어떻게 하면 그 빈 수레의 겉을 페인트칠 해 황금 수레로 포장할까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매달 납부해야 할 카드 값, 할부금, 빚 등으로 등골이 휘어지는데도 줄곧 번쩍거리는 명품백과 옷, 보석들로 치장하고 다녀야 직성이 풀리고, 사회적 지위가 이 정도이니 좋은 차는 몰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며, 학군 좋은 곳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아야 그나마 격이 높아진다고 생각하기에 어떻게든 그러한 곳에 살려고 아등바등한다. 그래야 남들이 무시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스스로 마치 ‘황금 수레’가 된 양 착각을 한다.옷이 아무리 명품이면 무엇하랴. 그 옷을 입은 사람이 명품이어야 하는 것을. 인생사가 그렇다. 속이 꽉 찬 사람은 절대 자신을 과대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러지 않아도 남들이 알아준다. 설사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한들, 크게 개의치 않는다. 누가 뭐래도 내면이 실하기에 스스로가 떳떳하며, 그 떳떳함이 남을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한 사람은 그 허함을 무엇인가로 끊임없이 채우려 한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허해지기에, 그 허함의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는 사람도 있다.인생은 참으로 짧다. 이 짧은 한 평생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이요, 몫이겠지만, 이제부터라도 虛를 감추는 데 아낌없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보다는 내면의 實을 가다듬는 데 보다 큰 열정을 쏟아 부어 보면 어떨까? 황금 칠을 한 수레는, 시간이 지나면 벗겨지기 마련이나, 황금 자체를 실은 수레는 그 빛과 무게가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2019-08-06

데자뷔, 고난의 행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북한은 1990년대 중후반에 혹독한 기근을 겪었다.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었다. 북한은 이때를 ‘고난의 행군’시기로 규정한다. 고난의 행군이란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던 김일성이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혹한과 굶주림 속에서 100여 일 간 행군을 했다는 데서 나온 말인데, 1995년부터 극심해진 경제난에 따른 체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벌인 캠페인의 구호로 쓴 것이다.당시 아사자의 수는 발표 기관에 따라 수십만에서 수백만으로 격차를 보이고 있으나, 국내외 시민단체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증언한 내용에 따라 3백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저들은 사회주의 시장의 붕괴, 잇단 자연재해,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열강들의 대북 고립·봉쇄·압살 정책을 주요 원인으로 꼽지만, 체제유지와 선전을 위한 각종 건설사업과 핵·미사일 등 무기개발에 경제력이 집중된 것도 그에 못지않은 요인이었다.북한의 1990년대 대기근은 1995년의 대홍수로 촉발되기는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만성적으로 누적된 식량문제가 더 큰 원인이었다. 북한이 1997년 6월 유엔에 보고한 자체 경제평가에 따르면 1인당 GNP가 1989년 911달러를 정점으로 하강국면에 접어들어 1995년에는 239달러에 불과했다. 북한경제는 홍수피해 이전에 이미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 식량사정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1993년에는 식량자급률이 58.7%를 기록할 정도로 심각한 식량난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100만t 정도가 부족했던 식량난은 1990년대 초에 200만t으로 늘어났고 이처럼 누적된 식량난이 자연재해를 계기로 악화되면서 대재난을 초래했던 것이다.현 정부 들어 한국의 경제도 악화일로다. 청년실업자는 늘어나고 문을 닫는 자영업자가 속출하는 것에 이어 지난 일분기 GDP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백색 국가)에서 제외되는 경제보복까지 목전에 두고 있다. 화이트 리스트란 일본 정부가 물자, 기술, 소프트웨어 등 전략물자를 수출할 때 관련 절차를 간소하게 처리하도록 지정한 물품 목록을 의미한다. 일본은 수출의 효율성을 위해 우방국을 화이트 리스트 국가로 지정해 우대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안보상 우호국 성격인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할 경우 물품뿐 아니라 지식·기술 교류도 제한될 수 있다. 일본의 이번 조치로 수출입뿐 아니라 양국 기업 간의 기술 협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다. 현재 한국과 일본은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다양한 기술·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일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기술을 이전받아왔지만 2000년대 들어 일본 기업과 다양한 수평적 기술제휴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전기·전자와 철강, 기계 등 분야에서 대기업 간 기술제휴 등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만약 화이트리스트 제외가 현실화되면 이 같은 기술교류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이 정권의 대응태도에 기시감이 있다. 이 판국에 국채보상운동이니 죽창가니 이순신의 열두 척 배니 하는 황당한 소리가 나오는 것은, 마치 북한이 정책의 실패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과 불신을 ‘미제 승냥이들’과 ‘남조선 괴뢰도당’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으로 덮으려는 것과 닮아 보인다. 북한은 지금 핵무기를 포기하면 모든 규제를 풀고 원조를 하겠다는 제안을 거부하고 또 다시 고난의 행진 운운하고 있다. 체제와 제 목숨의 부지를 위해서는 수백만 인민의 목숨쯤 희생해도 좋다는 저의가 엿보인다.치열한 국제경쟁의 시대에 낙오하지 않으려면 독불장군으로는 안 된다. 다른 불순한 저의가 없다면 나라경제와 국익을 팽개친 감정적 대립은 국가의 경영자들이 할 짓이 아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서로 윈윈하는 우방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최선일 것이다.

2019-08-01

얘들아, 그럴 수 있어!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최근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와의 이야기에서 뭔가 달라진 것을 발견했다.“딸, 휴대폰 좀 그만하시지.” “아빠, 그럴 수 있어.” “따님, 조금 일찍 일어나시는 게 어떨까요?” “아버님, 그럴 수 있습니다.” “딸, 책 좀 읽으실까요?” “아빠, 그럴 수 있어요.”이상했다. 예전 같으면 필자가 묻는 것에 대해 분명한 말투로 이유를 말했을 텐데 최근에는 너무 짧았다. 그리고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필자는 호기심이 생겼다. 딸아이의 대화법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그런지? 그래서 관찰을 해 보기로 했다. 관찰 결과 아이는 많은 상황에서 같은 말 패턴을 사용하고 있었다.필자는 왜 그런 말을 쓰는지 물었다.“유행이야. 그것도 몰랐어?” “혹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니?” “……!” 아이는 생각을 했다. 기다려 주었다. 필자도 ‘그럴 수 있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조금 막연했다. 아이의 생각도 길어졌다.필자는 길어지는 만큼 아이의 생각이 깊어지기를 바랐다. 독자 여러분은 “그럴 수 있어.”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시간이 지나도 명확한 의미가 떠오르지 않았다. 필자는 검색을 해보았다. 검색 능력이 떨어지는 필자인지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가 필자를 보고 있었다. 아이가 “아빠,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다 겨우 하나 찾았다.“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사람을 보는 인식, 사람의 행위를 읽어내는 지혜를 기르게 한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넉넉한 긍정’이라 할 수 있다.” (박인기 ‘그럴 수도 있지!’중에서)“인간성에 대한 넉넉한 긍정”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아이는 이 정도의 의미까지 생각했을까? 한동안 생각을 하던 아이가 친구와 약속이 있다면서 급하게 일어섰다. “무슨 뜻인지 알았어?” 아이가 “아빠, 그럴 수 있어. 놀다올게.”라고 말하며 바람보다 더 빠르게 문 밖을 나섰다.그런 아이를 항해 필자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그래, 그럴 수 있어!”이번 주 라디오 사연에는 중복되는 내용이 많았다. 그것은 방학을 앞둔 학부모들의 사연이었다. 저마다 걱정들이 한 가득이었다. 방학 동안 세 끼를 어떻게 차려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연에서부터 매일 전쟁을 치를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는 내용까지 소재만 다를 뿐 방학을 걱정하는 마음은 같았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필자는 “그럴 수 있어.”를 되뇌었다.과연 전쟁 같은 방학은 누굴 위한 것일까? 학생? 학부모? 교사? 그것도 아니면 다른 누구? 필자가 보기엔 학생과 학부모들을 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학생과 학부모 둘 다 방학 스트레스가 엄청 심하니까! 그럼 교사는? 교사들은 최소한 학생과 학부모가 느끼는 정도의 스트레스는 없으니까 나름 방학의 수혜자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우리 교육계에서 참 바뀌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방학이다. 방학을 잘 보내는 이론적인 방법들은 많다.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는 가정은 얼마나 될까? 맞벌이가 보편화 되어 있는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더더군다나 이론적인 방학 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맞벌이 학부모들은 사교육에 의존한다. 아니면 될 수 있으면 많이 학교에서 실시하는 방학 중 방과 후 수업에 아이를 보낸다. 그러니 방학 중 제일 바쁜 곳은 사교육 현장일 수밖에 없다.서로를 이해는 공감 능력을 기르는 방학,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갈등 공감 능력과 갈등 조정 능력을 기르는 방학이 되자고 하고 싶지만,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차마 말을 할 수가 없다. 차선책으로 “그럴 수 있어(요)!”라는 말을 상황에 맞게 써볼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 방학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나마 덜하지 않을까!

2019-07-31

낭독과 암송

김현욱 시인소리 내어 글을 읽는 음독(音讀)에는 낭독(朗讀), 낭송(朗誦), 낭영(朗詠) 등이 있다. 음독이 자기 혼자서 소리 내어 읽는 것이라면, 낭독은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을 전제로 한다. 글의 정서나 운율, 이미지를 음성으로 전달하는 것이 낭독이다. 낭독은 혼자서 또는 같이, 순서를 정해서, 배역을 정해서 읽을 수 있다. 낭독 전에 글의 내용과 정서, 운율, 분위기 등을 파악하여, 듣는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음성의 높낮이, 길고 짧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전평론가 고미숙 씨의 낭송의 달인-호모 큐라스에 따르면, 큐라스는 케어(care)의 라틴어로, 배려, 보살핌, 치료를 뜻한다. 고씨가 말하는 낭송은 책을 소리 내어 읽는 ‘낭독’이 아니라 ‘암송’하는 것이다. 암송은 암기와 다르다. 암기가 음소거 상태에서 의미 단위로 텍스트를 먹어 치우는 것이라면, 암송은 소리로 텍스트를 몸 안에 새기는 행위다. 고씨는 “낭송이란, 존재가 또 하나의 텍스트로 탄생하는 과정이다. 낭송을 일상화하면 자연스럽게 쾌락에 미혹되지 않는다”라면서 “낭송이 공부와 우정을 북돋우고 나아가 삶까지 바꾸는 독서법이자 양생법이다.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서, 혹은 직장 동료의 결혼식장에 갔다가 니체나 스피노자, 공자나 연암 박지원의 문장을 듣게 된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선물이 되지 않을까.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친구나 동료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우정을 나눌 준비가 된 것이다. 그게 바로 신체와 소리의 힘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2019년 6월 14일, 문재인 대통령이 스웨덴의 의회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신뢰’ 주제 연설에서 시 낭송을 했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고 하는 고장에서는, 그 중립국에서는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는 나라.”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 1’을 낭송한 것이다. 1969년 서른아홉 나이에 요절한 신동엽 시인은 대표적인 한국의 참여 시인이다.올해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이 여름방학을 맞아 학급 장기자랑에서 트로트 가수 홍자의 ‘상사화’를 불렀다. 방과 후 수업에서 배웠던 우쿨렐레 연주나 댄스를 자랑하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요즘은 미스트롯에 나왔던 트로트를 부르는 게 유행이란다. 안타깝지만, 동요는 교실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학생들의 장기자랑은 아이돌 춤을 흉내내거나 가요, 랩이 대세다. 심지어 모 프로그램에서는 선생님들이 우스꽝스러운 변장을 하고 아이돌 춤을 추는 게 미덕인 것처럼 비춰진다.신영복 교수의 담론에는 초등학생들과 시 암송을 하는 선생님이 나온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시를 암송했다고 한다. 그중 한 아이가 학교에서 소풍을 갔는데 장기자랑 시간이었다고 한다. 역시나 아이돌 춤과 유행가가 대부분이었다. 드디어, 그 아이 차례가 되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 아이는 윤동주의 ‘서시’를 암송했다.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 아이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고 한다.2008년 죽장초등학교와 상옥분교장에서 근무하면서 아이들과 시를 암송했다. 보름에 한 편씩 아이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시를 암송했다. 아이들의 부모님도 동참했다. 가을에 학급 시 암송 발표회를 열었다. 시 암송을 해보니 수많은 선현이 ‘암송’의 위대함을 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임종식 경상북도 교육감이 시 암송을 즐겨 하고 관심이 많다고 한다. 학급에서 학교에서 시 암송, 시 낭송 콘서트가 우후죽순 생겨나길 바란다.

2019-07-30

요술 의자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만 원을 주고 의자 하나를 구입했다. 행사장 같은데 흔히 쓰이는 접었다 폈다 하는 철제의자다.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면서 바람 좋고 그늘 좋고 경치 좋은 곳에 놓고 앉아서 한참씩 쉬곤 한다. 그게 그런데 신통력을 가졌다. 그 의자에 앉기만 하면 그곳이 바로 내 별장이고 산천초목이 다 내 정원이 된다. 그 의자 하나로 나는 도처에 별장을 둔 갑부가 되었다. 이게 그냥 농으로 하는 허튼소리가 아닌 줄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여름철에는 주로 들로 나간다. 들판을 가로질러 난 고가철로 그늘이 여름 한 철 내 별장이다. 요술의자만 갖다 놓으면, 수백만 평 정원이 딸린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별장으로 갖게 된다. 사방이 탁 트인 들판 한가운데는 어디선가 살랑바람이라도 불어오게 마련이다. 정 바람이 없으면 부채질이라도 하면서 여름의 한가운데 앉아있는 맛도 나쁘지가 않다.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서 지구생태계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일 중에 이렇게 계절의 한가운데로 지나가는 일 말고 더 중요한 게 뭐겠는가. 사람이 가장 절실하게 살아가는 일도 바로 그렇게 온몸으로 계절을 사는 일이 아니겠는가.초록 물결 넘실대는 여름 들판 위로 잠자리들이 난다. 한두 마리가 아닌 수백 수천 잠자리들이 군무를 펼친다. 가만히 보면 먹이활동이 아니라 놀이로서의 비행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드넓은 여름 들판에서 펼쳐지는 한바탕 생의 페스티발인 셈이다. 삶이 곧 놀이고 잔치라는 걸 보여준다. 눈부신 태양과 산들바람, 초록들판 말고는 아무것도 더 필요가 없는 잔치마당이다. 영겁의 세월 속에서 백년을 산다 한들 그 역시 찰라 일진대, 잠시 살다가는 잠자리들의 군무에서 생의 환희를 본다.유명 여배우의 자살에 이어 이름 있는 한 정치인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간에 충격을 주고 있다. 그 여배우는 영화의 개봉과 드라마 출연을 앞두고 있었고, 정치인의 경우 한때 정권의 실세로까지 올랐다가 지금은 비록 낙선을 한 처지지만 왕성하게 방송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객관적으로는 자살을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하였는지 모두가 의아해 하는 일이다.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국가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고 한다. 최근 몇 십년간 자살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고속의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급변하는 경쟁사회 속에서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좌절감이 심해진 것에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팽배한 물질만능주의가 정신적인 가치보다 우위를 차지하여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하고 공동체적 삶의 와해로 인한 인간관계의 단절과 고립감이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들판 한가운데 앉아서 산들바람을 맞으며 잠자리들이 나는 걸 보면서 문득 삶이란 게 무엇이며 무엇이 가장 절실한 삶의 조건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할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대부분 사회적인 조건 때문이다. 스스로 만든 사회로부터 받는 온갖 압박과 고통과 수모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삶의 기본조건은 그러나 사회적인 조건 이전에 햇빛과 공기와 물과 토양 같은 자연의 조건이 우선이다. 그런 조건들의 충족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누릴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곧잘 잊는다. 저 잠자리들의 군무가 보여주는 생명의 환희랄까 존재의 충일 같은 것 앞에서 인간의 사회적인 조건은 오히려 사소한 것이 될 것이다.가진 게 남보다 적거나 명예나 지위가 비천해도 그게 그렇게 절박한 열등감이나 좌절감의 이유일 수는 없다는 것, 그런 인식의 전환이 바로 요술의자다. 이것이 황당한 소리로만 들린다면 당신은 지금 자승자박 탐진치의 질곡에 묶여있는 신세다. 인식의 전환이 삶을 바꾼다.

2019-07-25

400년 전의 눈으로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통영 세병관이다. 수차례 와보았던 장소이고, 그때마다 설명을 들었던 터라 필자는 교감 자격 연수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홀로 앉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쪽 귀는 문화관광해설사 방향으로 열어 놓았다. 설명의 앞부분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귀의 일부만 놔두고 마음을 거두고 다른 일을 했다.시원하게 불어오는 통영 바닷바람이 잔뜩 힘이 들어간 눈을 달래어 줬다. 이젠 힘을 빼고 살아도 된다는 바람의 속삭임에 눈꺼풀은 속절없이 내려왔다. 간간이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어쩌면 이순신은 지금 시대에 더 필요한 영웅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목숨 바쳐 지켜낸 이 나라가 아직도 일본에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신다면 ‘어떤 마음이실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생각의 끝에 죄송함과 부끄러움이 겹쳐서 일어났다.“이제부터는 등을 편하게 기대시고 왜 세병관을 이곳에 지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세병관이 처음 지어질 때는 당연히 앞에 보이는 건물들은 없었겠지요. 400년 전의 눈으로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 통즉구(通卽久) 구즉생(久卽生)이라는 말을 소개드리면서 저의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나라 발전을 위해 큰 교육을 하시는 교감 선생님이 되세요. 장마의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통영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400년 전의 눈’이라는 말에 필자의 눈이 번쩍 떠졌다. 해설사의 말이 수십 년 동안 필자를 답답하게 구속하고 있던 편견과 선입견 등을 단번에 날려줬다. 필자의 눈 앞 있던 복잡한 현대 건물들이 하나둘 지워졌다. 그러면서 400년 전 이순신께서 내려다보신 통영의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눈이 시원해졌다. 최근 며칠 동안 무겁기만 하던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세병관(洗兵館)의 뜻에 대해 다시 찾아보았다. “하늘의 은하수를 가져다 피 묻은 병장기를 닦아낸다.”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세병관! 평화를 지키기는 가장 큰 힘은 상대보다 더 강한 힘을 갖기 위해 늘 노력하는 것이라는 이순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지만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는 신념으로 두려움을 떨쳐낸 이순신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이순신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스스로에게 말문이 막혀버린 필자는 생각을 전환하기 위해 주역에 나온다는 궁즉변(窮卽變 궁하면 변하고) 변즉통(變卽通 변하면 통하고) 통즉구(通卽久 통하면 오래가고) 구즉생(久卽生 오래가면 살아남는다)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 말의 핵심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뜻을 가장 잘 실천하는 것이 자연이다. 그래서 자연은 끊임없이 변한다. 변화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연은 인간들의 이기적인 욕심이 만들어낸 자연 파괴라는 대참사에도 끄덕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들을 위로하고 지켜주고 있다.뉴스는 5호 태풍이 온다고 야단이었다. 뉴스의 선동에 인간들은 한 술 더 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자연은 달랐다. 자연은 겸손한 자세로 태풍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수백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세병관은 분명 자연의 모습이었다. 출발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필자는 세병관의 너른 품을 좀처럼 떠날 수가 없었다.우리 사회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인간의 이기심, 정치인들의 탓하기, 옆 나라의 막무가내 떼쓰기, 그리고 교육! 다른 것들은 몰라도 교육을 하고 있는 필자이기에 세병관을 떠나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었다. “우리 교육은 변화할 수 있을까?” 그랬더니 딸아이의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아빠 내 친구 이번 여름 방학에 학원 다섯 개나 다닌다.” 우리는 언제 아이들의 눈으로 교육을, 그리고 방학을 볼 수 있을까? 지워졌던 현대식 건물들이 더 어지럽게 세병관 앞을 흐렸다.

2019-07-24

‘다름’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는 경우

홍은영 대구가톨릭대 교수·교양교육원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관련 담론과 연구는 이미 많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단일 민족 신화와 동화주의 다문화 정책에 대한 비판은 많은 사회구성원들의 동의를 얻고 있다.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이 남편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영상’은 공분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가해자의 엄중한 처벌을 촉구하는 국민 청원이 잇따르고 있다.필자 역시 가해 남편의 무자비한 폭행과 폭력 영상을 접할 때, 오랜 기간 피해여성이 겪었을 공포와 두려움을 생각하며 강력한 법적 처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 남편이 경찰에 긴급 체포되면서 했던 말(“평소에 말대꾸를 한다.”, “맞을 짓을 해서 때렸다”, “언어가 다르니깐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하니깐 그것 때문에 감정이 쌓였다.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이에 대해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은 필자를 더 분노하게 하였다. 언론은 남편의 말을 ‘변명’으로 해석하고, 이에 관련하여 가해 남편을 비난하며 글로벌하게 한국 망신을 하고 있다는 등 많은 댓글이 달려있다.필자는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가 단지 폭력적인 특정 남성의 문제와 ‘변명’으로 축소하기보다, 한국 사회가 결혼이주여성을 포함하여 많은 소수자들이 겪는 인권유린, 공포, 가정폭력, 성차별, 인종차별을 사회구조적 문제로 파악하고 ‘다름’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동하는 권력 기제를 간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왜냐하면 그 가해 남편의 말은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나름의 폭력적인 ‘논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사람들을 피부색, 민족적·인종적 출신, 언어, 성, 종교 등의 이유로 구분 짓고 규정하는 것은 차이를 만들고, 이러한 차이의 구성은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 안에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된다.나는 타자를 어떻게 지각하고 동시에 나의 자아상은 어떠한가?가해 남편은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을 동질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생각도 비슷하다고 간주하는 ‘우리’가 아닌 ‘그들’로 간주하고, 그 다름은 ‘자연스럽게’ 공격적 감정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또한 여성을 종속적인 위치에 놓고 자신의 말에 순종해야한다는 발언에서 가정 폭력을 당연한 행동으로 착각하는 남편의 무지와 젠더의식의 결핍을 엿볼 수 있다.이주 사회에서 이주민에 대한 상(像)은 일상생활, 미디어, 정치, 교육 등의 영역에 따라 정형화되어 재현되고 있다.예를 들어 열악한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살아가는 이주민을 시혜 대상으로 표상함으로써 경제적 지원과 온정적인 지원정책이 정당화되고 있다.이러한 주류 집단의 타자관은 이주민을 학습능력이 부족한 결핍의 존재로 규정하는 것에 기인한다. 이때 이주민은 온갖 다문화 정책의 효율적인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객체화’되고 있는 반면, 정책을 계획하는 다수사회의 구성원은 주체의 위치에 자리매김하게 된다.이러한 타자화는 특히 결혼이주여성을 가부장제와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인한 불쌍한 피해자로 보거나 ‘돈을 받고 결혼을 선택한 못사는 나라 출신의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에서도 나타난다.한국 사회 내에 작용하는 법제도와 병행되는 관습적인 차별적 담론과 시선은 그들을 공식적인 국민으로서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이렇게 볼 때 한국 사회는 동질적인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자기동일적이지 못한 이질적 속성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거나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자신의 타자관을 지속적으로 반성할 필요가 있다.

2019-07-23

반일감정과 과거청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인류의 역사는 전쟁사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지배해온 역사다. 그리고 역사는 늘 승자의 편이었다. 전쟁에서 많이 이긴 자가 영웅이고 위대한 정복자였다. 그들이 건설한 대제국이 인류의 찬란한 유산이 되었다. 하지만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이어서 흥망성쇠의 부침이 또한 역사였다.고조선이나 고구려가 융성했던 때를 제외하면 우리는 늘 약소국이었다. 오랜 세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왕의 책봉을 받는 등의 굴욕을 당했다. 일곱 차례나 몽골의 침탈을 당했고 청나라에는 항복까지 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래도 나라가 아주 없어지지는 않고 이어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고 민족의 저력이었다.일본의 침략을 받은 것도 약육강식의 하나였다. 임진왜란은 일본을 통일하고 서양으로부터 신식무기인 조총을 들여와서 전투력이 강력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듭되는 사화(士禍) 등으로 부패하고 나약해진 조선에 대해 상대적으로 힘의 우위에 놓이게 되자 침략의 야심을 드러낸 거였다. 1910년 한일합방에 따른 식민통치 역시 조선의 국력이 쇠약해 일본과의 힘의 균형이 깨어진 때문이었다.침략전쟁과 식민통치 기간 중에 일본이 저지른 살상과 파괴와 약탈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원한으로 치자면 불구대천의 원수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강대국이 되어 받은 만큼 되돌려 준다 한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힘으로는 독립을 할 수 없었음에도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을 하는 바람에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1965년에 열린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의 타결은 박정희 대통령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야당과 재야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것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미래에 대한 강한 의지와 비전이 없이는 결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정을 당시에 발표한 특별담화문에서 이렇게 밝혔다.“지난 수십 년간 아니 수백 년간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말살하였고, 그들은 우리의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그들은 우리의 재산을 착취했습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어느 모로 보나 불구대천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는 이 각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당시 한일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제시한 것은 과거청산, 호혜평등의 기본관계 설정과 청구권 문제, 어업협정 문제, 60만 재일교포 처우 문제, 문화재 반환 등이었다. 물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굴욕외교라는 반대가 거세었지만 그때 받아낸 유무상의 8억 달러로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등의 국가기간산업에 투입하여 산업화의 기반을 다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의 우리나라 수출의 총액이 고작 1억 달러 남짓이었으니 그것이 얼마나 요긴한 종자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요즘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위안부 문제의 재(再)거론과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위자료지급 판결에 노골적인 경제보복으로 맞서는 일본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이 영 불안하다. 가뜩이나 불황인 나라살림에 얼마나 큰 타격이 있을까 걱정들인데, 나라 경제는 아랑곳없이 반일감정이나 부추겨 대결구도로 가려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이런 결과를 고의로 자초한 게 아니라면 감정보다는 국익을 앞세우는 현명한 판단과 대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2019-07-18

그림의 떡, 백년 교육정책!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너무 뻔뻔한 어느 교육자의 이야기이다. “이번 자사고 운영평가가 경쟁 위주의 고교교육과 서열화된 고교체제의 정상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이런 뻔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 말을 한 사람들은 그래도 교육 관료라고 하는 사람들인데, 그 누구보다 이 나라 고등학교 교육 현실을 잘 아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런 뻔뻔한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필자는 교사라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거짓말 대신 차라리 좀 솔직해지면 안 될까? 대통령 공약(公約) 사항 중 하나이고, 자신들 또한 정치 이념을 가지고 교육 수장이 된 만큼 자신의 정치 이념에 맞지 않기 때문에 폐지한다고. 차라리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국민들의 충격이 좀 덜 하지 않을까!자사고 폐지를 두고 녹음한 것처럼 똑같은 논리를 펴고 있는 정치 교육자들의 말에서 군내가 나는 것 같다. 대한민국 자체가 서열화 된 학력에 의해 만들어진 신(新)계급주의 사회인데, 자사고를 폐지한다고 해서 정말 “경쟁 위주의 고교교육과 서열화 된 고교체제”가 정상화 될까. 정말 이렇게 믿는 것일까? 만약 자사고를 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교 교육이 정상화가 안 된다면 그 때는 지금 상처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는 누구 보상 해 주나?왜 자사고 폐지가 교육을 위한 순수한 정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누군가를 위한 정치적 수단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드는 이유는 또 왜일까?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분명 자사고 폐지에 대한 이상한 논리 때문이다. 경쟁 위주의 고교교육, 서열화 된 고교체제! 이 두 가지가 자사고를 폐지하는 가장 큰 이유이라는데, 이 문제는 자사고만의 문제일까?지난 주 대부분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1학기말 고사가 치러졌다. 교사들은 부단한 연구를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한 함정(陷穽) 문제들을 만들었다. 아마도 교사들은 함정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뿌듯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학교 선생님들의 열정을 아는 학생들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교육 현장에서 몇날 며칠 밤을 하얗게 불살랐다.여기까지만 보면 우리 교육이 참 이상(理想)적인 것처럼 보인다. 좋은(?) 문제를 만들기 위해 연구하는 교사와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교육의 속사정은 이상과는 전혀 다르다. 이상(理想)도 이상(異常)이 되는 것이 한국 교육 현실이다.시험이 전부인 대한민국 교육! 시험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이 나라 시험은 분명 나쁘다. 왜냐하면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한 경쟁시험이니까! 줄 세우기가 왜 나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나라의 줄 세우기 시험은 오로지 상위 학교 입시 자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에 잘 못 된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은 시험이 끝나는 순간 그토록 고생해서 공부했던 시험을 보기 위한 지식들을 깔끔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그럼 시험이 끝난 이후의 학교 모습은 어떨까. 물론 모든 학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많은 학교들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수업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업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잘 해야 시험 점수를 확인하는 정도에서 수업은 끝날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두꺼운 체육복 등을 입고 추울 정도로 시원한 교실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하교 이후에는 학원에서 밤늦도록 공부 할 것이다.고교 교육 정상화를 위해 자사고를 폐지한 교육 정치 관료들도 분명 이런 고등학교 현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나라 고등학교 교육에서 대학교 입시를 위한 경쟁을 제외하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교육백년지대계교(敎育百年之大計),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다.

2019-07-17

인(忍)·인(仁)·인(人)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어교육과얼마 전 갓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방실 웃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어느 정도의 직책을 얻은 후배 한 명이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다. 늘 둥글둥글 살아왔던 후배였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같이 일하는 직장동료들이 너무 못살게 굴어 도저히 참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이가 가장 어린 데다 싱글이라는 이유로, 잡다한 업무는 당연히 모두 그의 몫으로 여길 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마저 일기도 했다는 것이다.업무 몰아주기는 물론, 직장 내 따돌림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끼리 고소·고발하고, 네가 옳니 내가 옳니 하는 아웅다웅은 이제 너무나 식상할 정도다. 그래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큼의 칼부림정도가 나면 모를까, 더 이상 이런 건 이슈거리도 아닌 세상이 되었다. 심지어 그것이 인간사라며, 직장스트레스 증후군을 앓는 이들을 오히려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찍기도 한다.이는 비단 직장에서만의 문제도 아니다. 학교에서도 소위 ‘왕따’, ‘은따’를 당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10대들의 비율이 해마다 늘고 있다. 집단의 횡포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여지없이 밟아서 사회적 약자들을 공동체의 테두리 밖으로 쫓아내는 또 하나의 어긋난 ‘권력’행사다. 최근 노인이나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지센터 직원들의 횡포와 눈가림, 직위와 직권을 남용해 대학원생들을 착취하는 교수들, 하청업체 직원이라는 이유로 오만불손하게 행동하며 거들먹거리는 대기업 인사들 등. 우리 주위에는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또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수자의 권익을 짓밟고 있는지 모른다.인간관계에서, 남들과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억울함’이 생겨나고 ‘분노’가 싹튼다. 이러한 분노는 심지어 범죄 행위로 이어지거나 스스로의 건강을 해치기까지 한다. 위나라 때, 시문에 뛰어난 조식(曹植)이라는 인물은, 일곱 걸음 걷는 동안 시를 짓지 못하면 벌을 주겠다는 질투 많은 권력자 형 조비(曹丕) 때문에, 울음을 삼키며 ‘칠보시(七步詩)’를 지었다. ‘콩대를 태워 콩을 삶으니/솥 안에서 콩이 눈물 흘리네/본래 같은 뿌리에서 났건만/어찌 이리 심하게 들볶는고’라고. 결국 조식은 시달리다 못해 울화병으로 죽었다.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은 늘 이렇게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늘 이야기하듯,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다. 어제 강자였다고 해서, 오늘 강자가 되라는 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약자가 또 내일의 약자가 되라는 법도 없다. 힘이 센 개가 늘 큰 밥그릇을 먼저 차지했는데, 힘이 약한 개가 늘 밀려 제대로 먹지 못하니, 이를 불쌍히 여긴 주인이, 오히려 힘없는 개 밥그릇에 더 많은 음식을 주자, 어느새 비실비실하던 개가 더 크게 자라, 큰 개가 제 밥그릇을 기웃하니 쾅하고 짖어대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만사가 그런 것이다.맹자의 ‘고자(告子)’ 장구(章句)편에는 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 할 땐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려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어지럽게 하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 담금질 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그 기국(器局)과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맹자의 구절대로, 현재의 힘듦은, 더 큰 일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담금질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담금질 과정은 뼈를 깎는 고통이 수반되기에 인간의 인내(忍)를 시험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담금질이 되고 나면, 웬만한 일들은 웃으며 넘길 수 있게 된다. 참고 또 참으며 인(忍)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널리 보는 안목과 어짊(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忍)은 무작정 참는 것이며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갈고 닦는 과정에서 인(仁)을 얻는 것이자, 나아가 각양각색의 인간(人)을 이해하는 토대이기도 한 것이다.

2019-07-16

대구 근대미술 연구의 중요성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1922년 대구·경북 서화가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는 일제강점기 서구의 개방정책에서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 계승발전시키며 지역 서화계의 교류와 교육을 위해 개설된 기관이다. 서화 교육을 담당하는 강습소 역할 외에 서화 전람회와 강연회를 개최하고, 서화를 상설로 전시할 수 있는 전시관 등을 설립하려는 취지로 활동을 이어간 교남시서화연구회는 당시 ‘서화(書畵)’와 ‘미술(美術)’이라는 두 단어가 주는 시대적 변화를 단편적으로 보여주었다. 서구미술문화를 대표하는 서양화보다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서화를 통해 계승하려는 노력을 이어나갔다.서구미술의 대표적인 표현양식인 서양화는 1900년대 초반 일본에서 서양미술을 익히고 귀국한 한국인 화가들에 의해 본격 이루어졌지만, 그 이전 각 지역에서는 이미 활동했던 일본인 화가들의 활동이 적잖은 자극이 되었다. 학교 교육과 미술공모전 출품을 위해 보급되기 시작했던 서양화가 일본인들에 의해 교습되는 것은 단순한 기술 전수를 넘어 문화를 통한 이념과 의식의 확산이라는 점이 식민체제하에서는 더 큰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화가 석재 서병오는 앞서 교남서시화연구회를 결성하고 영남지역 서화인들과 애호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미술 단체 운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지역서양화가 1세대라 할 수 있는 이여성과 이상정 등과 함께 서양화 보급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922년 5월 대구부청(당시 경상북도청) 내에 위치했던 뇌경관(賴慶館)에 ‘교남시서화연구회전’을 개최해 대구 전통서화의 현주소와 발전 가능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3년에는 대구의 청년 지도자였던 이여성, 정운해, 서건호, 서병인 등이 마련한 ‘대구미술전람회’에서는 대구 서양미술의 본격적인 발표장이 되었다. 이 전시는 당시 지역 미술인들이 주도한 대구 최초의 서양화 전시였다.서성로에 있었던 노동공제회관(구 은사관)에서 열린 전시회는 새로운 미술 양식을 감상하며 배울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관람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이러한 반응 때문이었을까. 1923년 12월 이상정과 이여성, 황윤수, 박명조, 정용택, 그리고 경북 청도의 부호였던 상계도가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위해 ‘벽동사(碧瞳社)’를 설립한다. 이는 교남시서화연구회와는 또 다른 근대미술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육을 위해 대구 문화인들과 지역 유지들이 조직한 교육기관으로 연구소의 위치는 서성로(서성정 1정목 89번지)에서 운영되었다. 이곳은 이상정 본가 옆에 위치해 있었으며, 백부 이일우가 설립한 사설도서관 ‘우현서루’가 인근에 있던 곳이었다. 일본인 상가들이 운집해 있던 북성로와 대조를 이룬 지역으로 대구문화와 정신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대구 근대기 미술교육은 서울, 평양 등 타 지역과 달리 선진화된 미술교육기관을 통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대구미술계는 제전, 선전에 다수의 특선을 내고 있어 경성 다음으로 평양, 부산보다 압도적 우수함에도 아직 미술 단체가 없이 다만 내지인들의 대구미술협회와 조선인 측의 향토회라는 미미한 존재였던 바-’ 라는 1941년 당시 매일신보 기사처럼 대구는 한국의 서양화 도입기에 서울과 평양의 근대화단 형성기와 같은 시기에 활발한 미술 활동이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뒷날 이인성의 ‘양화미술연구소’와 서병기의 ‘향토회 미술연구소’ 등을 설립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 근대기 서화와 미술이라는 시각예술 장르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 대구미술은 지역예술인들의 화합이 주는 절대적 가치를 승화시켜 대구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오늘날 한국현대미술의 구심점 역할로 이어지고 있다.

2019-07-14

예산에 젠더 감수성을 더하다!

박은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개발실장1995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유엔 세계여성대회에서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전략이 주요 의제로 채택되면서 해외 선진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많은 성과를 거두며 추진하여 왔다. 성평등 정책 추진에서는 예산을 편성하고 지출하는 성인지적 관점이 필요하다. 예산은 정부가 진정으로 어떤 정책을 수행할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정책도구이며, 정책의 우선순위를 나타내는 단적인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예산배분이 성별로 형평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국가재정법을 개정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성인지예산제도란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효과를 고려하여 국가나 지방 재원이 성평등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자원 배분의 과정을 의미한다.성인지예산제도의 도입 경위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부터 여성단체를 주축으로 지방자치단체 예산의 성인지적 분석을 시작하였고, 국회여성위원회에서 2002년 10월 성인지적 예산편성 및 자료 제출 촉구 결의안을 의결하였다. 그 후 제2차와 제3차 여성정책기본계획에 성인지적 예산정책이 포함되고, 기획예산처에서는 2003년부터 이 요구를 부분적으로 반영하여 왔다. 국가재정법이 개정되면서 2006년 준비과정을 거쳐 2010년부터 회계연도 성인지예산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시행되었다. 국가재정법 개정을 통해 성인지예산제도가 추진됨에 따라 지방재정법을 개정하였고, 지방자치단체는 2013년부터 성인지예산서와 결산서를 작성하여 지방의회에 제출하고 있다. 성인지예산제도는 여성을 특별한 이해집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부 정책, 프로그램에 젠더 이슈를 반영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인지예산제도는 성평등한 자원배분의 과정으로 전체예산액을 증가하거나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예산내에서 성평등한 방식으로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렇다면 성인지예산제도는 왜 중요한가? 첫째, 성인지예산제도는 성불평등 문제와 무관해 보이는 예산사업이라도 의도하지 않게 성불평등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성불평등을 예방하고자 하는 제도이다. 모든 정책은 도민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특정 성(性)에 대한 차별의도를 가지지는 않지만, 성별차이와 조건을 반영하지 않을 경우 균등한 혜택이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재정의 균형 있는 배분을 통해 여성과 남성의 다른 역할과 책임에 따른 정책의 상이한 효과를 고려하여 예산을 편성함으로써, 정책의 만족도를 향상시키고 효율성을 보장할 수 있다. 둘째, 자원분배의 경제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성인지예산제도는 성평등을 고려한 예산 편성 및 집행을 통해 사회·경제적 비용을 감소시키거나 편익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는 성인지예산제도가 가지는 특징으로 여성과 남성의 다른 요구에 다르게 대응하여 재원을 배분하기 때문에 낭비 없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셋째, 국가 재정의 투명성을 강화할 수 있다. 예산의 편성, 심의, 집행, 평가 등 모든 예산과정에서 정책효과를 고려하고, 공공지출의 정확한 기록과 성별분리 통계, 객관적인 정보의 제공을 요구함으로써 예산에 대한 투명성이 확보될 수 있다. 넷째, 모든 예산의 성평등 효과를 분석하고, 적절한 대안을 모색함으로써 성평등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현실화할 수 있다.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정책대상의 욕구도 다양해지고 있다. 반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과정은 보수성을 띠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정책 효과가 반감되어 정책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사회변화에 따라 정책도 발전되고 향상되어야 할 것이다. 최고의 품질은 여성과 남성의 요구와 관점에서 판단되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으며, 남녀의 요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성인지예산제도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된다.

2019-07-11

개인숭배와 상징조작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사람들은 대다수가 특정 대상을 숭배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종교적 신앙이나 절대군주를 신성시 하는 것에서부터 아이돌그룹이나 스포츠스타에 열광하는 것까지 숭배의 형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심리적인 근원을 따지자면 원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개인숭배’는 1877년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정치적 용어로 쓰였는데,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할 때 차용한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독재자를 우상화하고 떠받들어 모시는 개인숭배는 주로 일인독재 체제의 장기화에 따라 대중들을 선동하는 상징조작을 통해 이루어진다. 대중매체 등을 통한 광고나 선전 등으로 이상적이고 영웅적인 이미지를 만들거나 신성한 느낌까지 불어넣어 숭배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정치적이나 종교적 목적 말고도 요즘에 와서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를 내세워 상업적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연예인들이나 스포츠스타들의 숭배는 스트레스의 해소나 대리만족 등의 순기능이 있지만, 정치나 종교 지도자의 우상화하는 경우에 따라서 인류의 역사를 바꿀 만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인류 역사의 거의 모든 군주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개인숭배를 위한 상징조작을 해왔다. 고대 이집트나 로마, 잉카, 아즈텍 같은 제국들의 유적을 보면 얼마나 엄청난 규모로 군주의 신격화가 이루어졌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절대군주에 대한 개인숭배는 근세에 오면서 점차 약화되는 추세였으나 20세기에 와서는 독일의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소련의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들의 전체주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전체주의 정권이 급진적인 사상에 따라 사회를 변혁하려고 할 때 만들어지는 숭배 현상은 혁명적인 변혁을 주도하는 지도자에 대한 상징조작을 통해 이루어진다. 일개 평민 출신이었던 히틀러가 선동전문가 괴벨스에 의해 위대한 지도자의 이미지로 변신하는 과정은 바로 상징조작의 위력을 잘 보여준다.개인숭배와 상징조작이라면 북한을 빼놓을 수 없다. 독재자의 상징조작과 민중의 우민화가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예가 바로 북한의 경우다. 북한 체제의 원조인 김일성에 대한 상징조작은 해방 직후 소련의 로마넨코 사령관이 북한 지도자들에게 김일성을 가장 뛰어난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북한의 지도자로 내세우면서부터다. ‘조선로동당력사연구소’에서 발간된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에는 김일성이 축지법을 써서 하늘을 날고, 모래로 쌀을 만들며, 가랑잎을 타고 대하를 건너는 등 신출귀몰의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다. 15년간 10만여 회 전투를 벌여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얘기도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에 걸쳐 김일성의 우상화를 빼고는 논의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사회주의권의 대표적인 독재자인 스탈린이나 모택동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절대적인 개인숭배가 이루어졌다. 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한 구조물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북한 주요 도시에 세운 70여 개의 대형 김일성 동상을 비롯해 곳곳에 널려있는 흉상과 석고상을 합치면 3만5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김일성의 우상화는 혈통과 가족에 까지 확대되어 증조부 김응우는 셔먼호사건을 해결한 인물이고 아버지 김형직은 3·1운동을 이끈 사람이라고 역사의 날조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조작된 절대권력은 결국 패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가 증명하는 결말이 아닐까.정보를 실어 나르는 각종 매체가 날개를 단 디지털시대에는 상징조작이 훨씬 더 손쉬워졌다. 정치권에서는 당연히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려 들기 마련이다. 어떻게 각종 매체를 장악하고 여론을 선도하느냐에 정치적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매한 군중들이 정보의 진위를 구별하지 못하고 불순한 상징조작에 부화뇌동하다보면 망국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도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2019-07-10

어린이를 위한 성교육

이수원계명대 교수·유아교육과어릴 적 필자가 병원놀이를 할 때 주로 맡던 역할은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였다. 돌이켜 보면 필자가 성장하던 지역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의사 역할을 하는 남아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잔소리하고 놀이 상황을 이끌어 나가면서도 결코 의사 역할을 맡지 않고 간호사 역할을 했던 것 같다.성 고정관념에 따라 어떤 장난감으로 어떤 놀이를 할 것인지를 선택한다. 성 고정관념은 만 2세부터 부분적으로 나타나며 만 4세 이후에 정점에 달한다. 때문에 아이가 걸음마를 하는 순간부터 유연한 성역할 관념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남아가 주로 사용하는 놀잇감과 여아가 주로 사용하는 놀잇감을 함께 제공하여 성별에 의해 놀이가 구별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유연한 성역할 관념을 지원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남아에게는 독립성, 성취, 경쟁을 기대하고 여아에게는 나눔과 배려, 순응을 기대하는 부모의 태도도 아이에게 성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한편, 취학전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성별에 따라 신체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호기심을 갖는다. 대부분의 경우, 또래 이성의 신체가 자신의 신체와 다르기 때문에 갖는 단순한 호기심이다. 하지만 아이가 초등학교 재학 중인 형으로부터 이성 또래를 성적으로 괴롭히는 방법이나 음란한 이야기를 배운 경우 유치원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동안 화장실에서 남아가 여아를 성적으로 놀리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 성 교육이 학교나 유치원에서만 할 수 없고 학부모의 협조가 필요하여 남아의 성적인 놀림을 학부모에게 알렸더니 여아의 학부모는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지만 남아의 학부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회에서 성 피해자는 여성만이 아니며, 성별을 넘어서서 누구도 성 범죄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남아든 여아든 모두 성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어린이를 위한 성 교육 방향을 두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성 교육의 핵심은 생명의 소중함이다. 생식기를 함부로 남에게 보이거나 만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생식기는 아기를 출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잉태하는 기능이 있는 만큼 생식기를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이에게 전달할 성교육의 핵심 메시지이다. 둘째, 성 교육의 내용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무엇이며 어떻게 도움을 구하는가이다. 아이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여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모를 수도 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도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를 모를 수도 있다. 때문에 낯선 사람뿐만 아니라 친척이나 친구가 내 몸의 일부를 보여 달라는 요구는 잘못된 것이며 이 때 단호하게 “안돼!”라고 거절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곧바로 가까운 경찰서나 담임교사, 부모에게 이 일을 알리도록 지도하자. 내가 베푸는 호의나 도움을 상대가 원치 않을 때에는 더 이상 호의도 도움도 아니다. 성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원치 않는 성적인 놀림을 멈춰야 하며 상대가 멈출 수 있도록 단호하게 말하는 것 또한 익힐 필요가 있다. 아이가 성에 호기심을 가질 때 아이를 꾸짖거나 수치심을 주기 보다는 궁금증이나 고민을 표현할 수 있도록 수용적인 분위기가 필요하다. “나 어떻게 태어났어?”라는 아이의 질문에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단다.”라는 대답은 성 문제를 덮고 감추는 일일 것이다. 대신, 있는 그대로 대화할 것을 권한다. 아이가 어리다면 출생 과정을 단순하게 설명하며 아이가 성장할수록 출생과 관련된 과학 정보를 첨언할 수 있다. 평소 부모가 아이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 아이가 성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성별을 넘어서서 존엄한 인격체로 보기를 연습한다면 아이 세대의 사회는 지금보다 더 건전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9-07-08

포항철길숲을 거닐며

강성태 서예가·시조시인장마가 주춤한 지난 휴일 새벽, 모처럼 포항철길숲을 찾았다. 새들의 지저귐 속에 심호흡하듯 아침 공기를 들이키며, 효자동에서 옛 포항역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포항철길숲은 2015년 4월 KTX포항역이 흥해읍 이인리로 이전됨에 따라 남게된 철도 유휴부지를 시민친화공간으로 만드는 도시숲 조성사업으로 생겨났다. 지난 5월초, 옛 포항역에서 효자교회까지 4.3㎞ 구간의 철길숲이 준공됨에 따라 그 이전에 도시숲으로 조성된 서산터널 북측의 2.3㎞ 구간과 함께 6.6㎞의 도심 내 폐선부지가 아름다운 숲길로 태어나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이러한 철길숲은 산책로와 자전거도로를 기반으로 어울누리길, 활력의 길, 여유가 있는 띠앗길, 추억의 길, 엄마랑 아가랑 태교의 길 등 5개의 테마로 이뤄져 있다. 군데군데 옛 철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곳곳에 다양한 시설물, 조형물, 스틸 아트작품 등을 조경과 어우러지게 설치해서, 역사, 문화, 자연이 살아 숨쉬고 여가와 휴식, 유희와 운동을 즐길 수 있는 복합적인 시민 소통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포항철길숲은 숲(Forest)과 철길(Rail)의 합성어로 ‘포레일(Forail)’이라고도 부른다. 철길숲이 만나는 효곡동, 대잠동, 양학동, 용흥동, 덕수동, 우현동, 우창동까지 길게 이어지는 옛 철길 주변에 풀과 꽃, 나무를 심어 띄엄띄엄 작은 숲을 이루고 벤치나 정자, 그늘막 등의 쉼터와 운동기구를 중간중간에 설치해 걷고 뛰고 뒹굴거나 쉬다가 가볍게 운동도 하고 얘기도 나누는 등 시민들이 마실 나가듯이 철길숲을 즐겨 찾고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조성돼 있다.철길숲에는 이색적인 테마와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그 중에 2017년 3월 8일부터 현재까지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은, 철길숲 조성공사 당시 200m 지하 굴착 중 분출된 천연가스에 불꽃이 옮겨 붙어 24시간 계속 타오르고 있어 불과 빛의 도시 이미지에 다채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 음악분수, 댄싱프로미너드, 효자갤러리, 한터마당(버스킹 공연장), 오크정원, 유아놀이숲, 기억의 숲, 기다림의 정원, 벽천, 계류, 장미원 등이 나들이객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음악분수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으로, 여름철 하루 10여회 가동하는 음악분수, 스크린분수의 물줄기 사이를 신나게 오가며 즐기는 아이들로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방장산 산자락을 휘돌아가는 활력의 길 중간쯤에는 시민들이 경작하는 그린웨이 도시텃밭이 있고, 양학건널목을 지나면 옛 간이역의 자취인양 막사 모양의 회랑이 오른쪽으로 길게 설치돼 있다. 40여 년 전 통학길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애환서린 양학간이역이 이렇게 변모되다니 감회가 새롭기만 했다.서산터널에서 충혼탑과 수도산으로 연결되는 덕수공원을 지나 유성여고까지는 2011년 1단계로 조성된 도시숲길답게 무성해진 숲과 가로수가 시원하게 펼쳐져있다. 산비탈 언덕진 곳에는 벽천(壁泉)이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완만한 풀밭에서는 계류(溪流)가 황토길과 데크로드 사이로 잔잔하게 흐른다. 전나무와 벚나무 가로수 한 켠에 장미원이 있고 새소리와 솔내음이 맑게 깔리는 그곳은 엄마랑 아가랑 태교의 길로 철길숲 북쪽 끝자락이다.보물찾기 하듯 철길숲 이곳저곳을 살피며 쉬엄쉬엄 거닐다 보니 어느새 두어 시간이 흘렀다. 100여 년 동안 기차가 주택가를 달리던 철길이, 이제는 자연과 도시를 잇고 소통과 문화가 피어나는 희망의 길로 거듭났다. 도심공원이 부족한 포항으로서는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을 품은 도시는 사람을 모이게 하고, 문화가 바탕이 된 도시는 꿈을 꾸게 된다. 철길숲을 잘 가꾸고 보듬어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고 지진 여파로 지친 마음을 달래며, 위락과 치유의 시간을 갖는 쾌적하고 행복한 숲길이 됐으면 좋겠다.

2019-07-04

삶의 질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한 재벌가 사람들의 ‘갑질’ 논란이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엄청난 부를 가졌으면 마냥 여유롭고 자적(自適)하게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사실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분노조절장애라 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남들에게 패악질을 해대는 모습을 TV화면으로 보면서 자못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불만과 분노의 화신이 되게 하였는지.재벌회장 집안이면 많은 사람들이 선망의 눈길로 바라볼 만큼 경제적 풍요나 사회적 지위가 최상류층이다. 그런데 그것이 삶의 질이나 만족도에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어서 세간에 적지 않은 충격파(?)를 일으켰다. 재물도 지위도 아니라면 무엇이 만족도 높은 양질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가.삶의 질을 말할 때는 흔히들 물질적 조건을 우선으로 꼽는다. 헐벗고 굶주리는 삶이라면 질을 따질 여유조차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삶의 질에 비례하는 조건도 아니고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넘치도록 많이 가졌음에도 만족을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소박한 것으로도 만족한 사람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사회적 지위나 명예도 삶의 질을 결정하는 조건으로 들 수 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만족감이 덜한 것이 보통의 인심이다. 그래서 돈을 주고 사서라도 지위와 명성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도 물질적 부와 마찬가지로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높은 지위나 만인이 환호하는 스타덤에 오른 사람도 우울증에 걸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이다.결국 자존감의 문제인 것 같다. 부의 축적이나 지위나 명예를 얻으려는 것도 자존감을 높이려는 수단이 아닐까.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을 줄인 말로,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재물과 지위, 명예가 자존감을 높여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곧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재벌이나 고관대작들 모두가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는 아니지 않는가.경쟁에 이겨서 남보다 많이 차지하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자부심을 가질지언정 자존감을 높일 수는 없다. 진정한 자존감이란 나누고 배품에서 오기 때문이다. 많은 재물이나 높은 지위는 그만큼 나누고 베풀었을 때 비로소 가치와 보람을 갖는 것이다. 오로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재물과 남에게 군림하기 위한 지위는 손가락질이나 받기 마련이지 자존감을 높여 주지 않는다. 재물과 지위를 내세워 갑질이나 일삼는 자들을 누가 존중하겠는가. 남에게 존중 받지 못하는 자존감은 자만심일 뿐이다.앞의 그 재벌가 가족은 자존감이 별로 없는 사람들인 것 같다.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남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남에게 지탄받을 짓을 한다는 건 자신을 천대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것에 걸맞게 아랫사람들에게 너그러이 베풀고 살았더라면 진심어린 감사와 존경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보람과 자존감도 한층 높아졌을 것이다. 남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을 때 느끼는 뿌듯한 존재감이야말로 자존감의 바탕이 되는 것이므로.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것도 삶의 질을 높이는 요소가 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도 있지만,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인문학적 교양의 바탕이 되는 지성과 감성의 향상을 위한 공부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것은 또한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2019-07-03

자유학년(기)제의 덫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안녕하세요. 먼저 접수부터 도와드리겠습니다. 전라도에서 오셨습니까?”지난 주 토요일 장맛비가 내리는 와중에 산자연중학교에서는 2020년 전입학 전형을 위한 설명회가 열렸다. 작년까지는 120명이 넘는 전국 각지의 학부모께서 학생들의 행복 교육을 찾아 학교로 오셨다. 학부모의 간절한 마음을 안 하늘은 매년 좋은 날씨를 내려주었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장마가 늦어지면서 2014년 설명회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비가 내렸다. 기상청은 200㎜를 예보했다. 일기예보가 틀리기를 기원했지만, 하늘은 새벽부터 세찬 빗줄기를 쏟아부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설명회 시작 시간인 2시가 가까워질수록 빗줄기는 약해졌고, 급기야 2시를 전후해서는 잠시 비가 그쳤다는 것이다. 날씨 때문인지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설명회장의 분위기는 예전과 달랐다. 12시 전후로 운동장에 차들이 많이 찼던 예전과 달리 1시 30분이 지나도 열 대 안팎의 차들만이 운동장에 점처럼 서 있었다.그래도 산자연중학교 교사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 희망에 대한 답을 하늘이 먼저 주었다. 1시 30분이 지나면서 비가 잦아들었고, 그것을 신호로 차들이 꼬리를 물고 들어왔다. 접수를 위한 줄이 서고, 선생님들도 바빠졌다. 다과를 준비해 둔 식당이 가득 찼고, 이곳저곳에서 상담이 진행되었다. 접수대에서 참석자 현황이라고 적힌 쪽지가 왔다. 93명이라는 숫자와 함께 학년별 참석자 현황이 적혀 있었다. 메모를 읽는 와중에도 차들이 계속 들어왔다.시작을 앞두고 접수대로 가서 집계 현황을 파악했다. 필자는 접수된 주소를 보고 많이 놀랐다. 서울, 인천, 경기, 부산까지는 그래도 지금까지 계속 보던 지역인데, 이번에는 광주, 익산과 같은 전라도 지역의 주소가 보였기 때문이다. 억수 같은 장맛비를 헤치고 오셨을 그 분들의 정성과 간절함을 생각하며 필자는 스스로 각오(覺悟)를 새롭게 하였다.말이 학교 설명회지 산자연중학교 학교 설명회는 전국에서 오신 학부모님들과 함께 ‘희망 교육’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이다. 그래서 필자는 산자연중학교에 대한 정보보다는 자녀 교육에 도움이 되는 교육 이야기를 더 많이 준비한다. 이야기는 언제나 현 교육에 대한 반성과 사과로 시작한다. 필자는 참회(慙悔)의 마음으로 “근대 교육을 재판합니다”라는 외국 영상을 제일 먼저 튼다. 아래 내용은 영상 내용 중 일부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상략) 시대에 역행하는 교실에서 자신의 재능은 발견하지도 못한 채 자신이 바보같다고 생각하고 쓸모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더 이상의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학교를 법정에 세워 기소합니다. 창의성을 죽이고, 개성을 죽였으며, 지적으로 학대해왔습니다. 학교는 오래 전에 세워진 기관이며, 이제 시대에 뒤떨어져 있습니다 (하략)”동영상을 보는 내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탄식과 한숨 소리에 필자는 다시 죄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영상의 내용이 틀리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치적 입맛대로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들을 없애려는 교육감들, 아니면 “모든 아이는 우리 모두의 아이”라고 하면서 대안학교 학생들은 빼고 있는 교육부 장관이라도 나서서 동영상의 내용이 잘못 되었다고 반박해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이 나라 교육 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위증(僞證)은 못할 것이다.1시간 30분가량의 설명회 시간은 필자에겐 새로운 다짐의 시간이 된다. 설명회가 끝나면 학부모님들과 개별 면담을 한다.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중학교 재학생 학부모님들의 참석률이 높았다. 그 분들의 하나같은 얘기는 자유학기(년)제에 대한 성토(聲討)였다. 물론 모든 학부모들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달콤한 자유학기(년)제 이후에 더 살벌해지는 학교 이야기를 교육 당국은 꼭 들어야 할 것이다.

2019-07-02

사이코패스 스마트와 미래를 함께할 수는 없다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어느 일요일 저녁, 우리 집에는 근처 사는 일가가 모여 휴일식사를 마친 후 이야기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단란함도 잠시, 예고 없이 찾아온 응급 상황에 온 집이 발칵 뒤집혔다. 뇌혈관 수술 이력이 있는 이종사촌이 좀 체한 것 같다며 부산을 떠는가 싶더니 갑자기 쓰러져버린 것이다. 구급차에는 이모를 대신해 직전 전조증세부터 계속 지켜본 내가 동승하기로 했다.평소 위기에 잘 무너지지 않는 강한 ‘멘탈’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나는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환자의 상태와 쓰러지기 전 상황, 처음 증세가 시작된 후 개략적인 시간, 환자의 병력과 수술 시기, 최근 담당의사 진료 시점까지 찬찬히 설명하며, 이동 중 구급요원들의 처치를 도왔다. 그러나 나의 ‘강철 멘탈’과 인내심은 응급실에 도착한 직후부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응급실에서 보호자는 제 정신이 아니다. 접수를 하려는데, 환자의 주민번호는커녕 생년월일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스템이 그렇게 친절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언성이 높아졌다. 우여곡절 끝에 접수를 마치고 들어가자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는 나를 알아본 구급요원이 나를 사촌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환자는 응급실 내 깊숙이 자리한 ‘소생실’ 안에 누워 있었다. ‘소생’이라는 단어와 삽관까지 한 모습을 본 나는 거의 패닉 상태가 되었지만 응급실 의료진들의 질문공세는 계속됐다. 지금 되짚어보니 응급환자의 보호자는 처음 119에 전화할 때부터, 구급요원들, 응급실 접수 담당자, 그리고 응급실 내 의료진에 이르기까지, 기억하기도 끔찍한 그 상황을 곱씹으며 적어도 네다섯 차례 혹은 그 이상 설명을 되풀이해야 한다. 경황 중에도 나름 침착하게 같은 얘기를 네 번 다섯 번 반복해서 설명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던 내 인내심은 ‘쓰러진 시간이 정확히 몇 시 몇 분이냐’는 당직의사의 질문 앞에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선생님, 가족이 쓰러져서 경황없는 마당에 어떻게 시분까지 정확히 기억하지요?”다행히 환자는 며칠 입원 후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고, 가족들에게 그날의 일은 트라우마가 아닌 하나의 해프닝으로 기억됐다. 그제야 고군분투하는 의사선생 앞에서 입 밖으로 내지 않고 혼자 삼킨 내 그 다음 말이 떠올랐다. ‘집안에 무슨 블랙박스라도 설치해 뒀어야 하나요? 내가 무슨 인공지능 로봇도 아니고…’그러고 보니 스마트폰과 우리집 홈 스피커 속 인공지능 ‘그녀’들은 그 순간 뭘 하고 있었을까? 평소에는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들려주거나 TV채널을 바꿔주겠다며 주인 비위를 맞추려하고, 간혹 가족들의 대화중에 자기를 부르는 줄 착각해 불쑥 나서 성가시기까지 한, ‘빅**’, ‘시*’, ‘지*’, ‘아*’라는 이름의 그녀들 말이다. 4차산업혁명시대의 기대주 인공지능은 정작 주인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바로 그 순간에는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작년 MIT에서 ‘사이코패스 인공지능’이 개발되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 ‘사이코’의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이름을 딴 ‘노먼’ 이야기다. 노먼은 잘못된 정보를 흡수한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태어난 실험적 존재였다. 인공지능에게 어두운 데이터만 가르쳤더니 심리검사에서 ‘죽음·살인’만 떠올리고 반사회적 성향을 보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지켜보며 듣고 있었을 터인데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 침묵을 지킨 인공지능 그녀들의 모습은 얼핏 그 사이코패스 인공지능을 연상케 한다.사이코패스 인공지능이 탄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인간다운 행동요령과 기술을 열심히 가르쳐 주어 미래를 함께해도 좋을만한 제대로 된 파트너로 키워내어야 한다. 1인 가구 비율이 30%에 육박하는 지금, 어쩌면 그 인공지능이 쓰러진 환자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보호자가 되어줘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9-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