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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포스코의 기업정신과 조선화인열전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보가 진작부터 있기는 하였으나 장맛비는 예상보다 일찍 시작되었고, 포스코갤러리를 향하여 형산대교를 건너 갈 즈음에는 운전이 불편할 정도로 많은 양의 비가 쏟아졌다.그래도 마음은 조선의 명작들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도 정겹게 느껴졌다.포스코 창립 51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포스코미술관에서 고미술특별전을 열었는데, 창립 반세기를 지나 미래 백년기업을 향한 재도약의 원년을 기념하고자 마련한 것이다.기업시민을 표방한 포스코의 어젠다와 청렴과 여민(與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조선의 선비정신이 서로 맞닿아 있음을 기획의 축으로 심혈을 기울인 전시였다.이 특별전에 출품된 80여점의 작품 중 백미 45점이 ‘조선화인열전’ 이란 타이틀로 재구성되어 포항에서 전시된다.포항의 시 승격 7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아 포스코갤러리에서 포항시민을 위하여 전시를 마련하였으니, 조선시대의 진품명작을 우리고장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경북에서는 처음 열리는 귀한 전시에 설레는 마음으로 빗속을 달려 개막식에 참석한 것이다.우리역사에서 미술문화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조선후기의 대가 겸재, 현재, 관아재 등 삼재와 단원, 혜원, 오원의 삼원, 그리고 추사, 호생관, 석파에 이르기까지 거장들의 진품명작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이 포스코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실현되었다.지방에서는 처음 열리는 이 전시의 성사를 위하여 포스코갤러리 담당자들이 소장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였고, 효과적인 전시를 위하여 벽면을 보강, 재구성하였음은 물론 보안을 위한 CCTV 20개를 추가로 설치하였고, 인력을 보강하여 휴일에도 경비원을 배치하기로 하였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가입하는 보험료만도 엄청난 수준이다.이 작품들은 주로 개인소장인데, 소장자들은 임대료보다는 포스코의 기업정신과 공신력, 그리고 담당자들의 정성에 동의하여 흔쾌히 임대에 응했다고 한다.전시장을 한 바퀴 돌아본 감동은 애초의 큰 기대보다도 훨씬 더 컸다.중심에 자리 잡은 추사의 ‘연호사만물지종’이라 쓴 작품은 추사체 특유의 힘과 창의적 구성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걸작이었으며, 중국그림의 임·모에서 벗어나 조선의 그림을 창시한 겸재의 ‘계산서옥도’ 진품이 발길을 오래 붙잡았고, 당대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불리던 강세황의 담백한 ‘산수’와 ‘포도’그림은 만나기 어려운 귀한 작품이었다.석파의 예술성 넘치는 편액 ‘취은산방’은 대원군이 정치인이기 이전에 분방한 예인이었음을 웅변해주었고, 다산의 놀라운 작품은 당대의 대학자일 뿐 아니라 뛰어난 명필이었음에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어 작품 하나하나마다 발길을 떼기가 어려웠다.추사의 걸작 ‘부작란’을 연상케 하는 아들 상우에게 시범을 보인 난(蘭) ‘시우란(示佑蘭)’이 중국 특별전에 출품되어 볼 수 없게 된 아쉬움도 이 전시의 스토리를 더욱 풍성하게 한 요소가 되었다.이 전시는 7월 30일까지 이어지며, 이 기간 동안 ‘옛 그림 이야기’ 등의 내용으로 시민강좌도 개최할 예정이라 하니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포항시민 모두가 감상하여 ‘법고창신’하는 문화시민의 소양을 갖추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2019-06-27

수행평가 이대로 괜찮은가?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후략)”정부가 바뀌면서 국민들에게서 잊힌 노래 중 하나다. 노래가 잊히면서 노래가 기념하는 날의 의미도 특정 세대의 기억과 일부 박물관에만 존재하는 날로 변해 버렸다. 분명한 건 이 날이 지금처럼 쉽게 잊혀서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산가족이 그렇고, 또 이 날의 상처 때문에 지금까지도 힘들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이 나라에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민족상잔(民族相殘)의 최대 비극 한국전쟁!그런데 이 날이 잊히고 있다. 정확히 말해 정치인들에 의해 이 날의 의미가 국민들의 머리와 마음에서 지워지고 있다. 정치인들은 적(敵)의 개념까지 바꾸면서 한국전쟁 전범(戰犯)의 눈치를 보고 있다. 그런 정치인들의 입방정 때문에 참전군인 가족 앞에서 북쪽을 찬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시대가 변해도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현 정부 들어 정치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정의와 원칙을 외치고 있다.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 두 단어가 무기처럼 등장했다.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면 이들만 제시하면 그 누구도 더 이상 말을 못한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남쪽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정의와 원칙을 칼같이 적용하면서, 이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북쪽에 대해서만은 이 나라 정부와 정치인들은 정말 관대하다는 것이다. 이런 정부에 있어 한국전쟁과 관련된 올바른 역사 교육이 가능할까?남북관계 개선도 좋고, 다른 뭐도 다 좋지만 그 전에 한국전쟁을 일으킨 쪽의 진정한 사과(謝過)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야 말로 역사 인식을 같이 할 수 있는 최소한 도리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여는 출발점이 아닐까? 우리 역사 교육이 걱정이다.그런데 걱정은 이것만이 아니다. 교육이야기를 몇 년째 쓰고 있지만 단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써 본 적이 없다. 교육의 가장 기본은 학생 행복이다. 하지만 우리 학생들의 행복(幸福)지수는? 학생이 학교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교육 현실은? 안타까운 마음에 행복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욕구가 충족되어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막상 뜻을 찾고 보니 행복이라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의 뜻에서 ‘만족과 기쁨’ 즉 행복의 조건이 ‘욕구 충족’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욕구의 의미를 찾았다.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바라고 원함” 과연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얻거나 바라고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문제는 그 대상이 누구이냐는 것이다. 교육의 주체를 흔히 ‘학생, 학부모, 교사’라고 한다. 이들 교육 주체들의 욕구가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지금 정치판처럼 이 나라 교육 주체들의 욕구는 모두 다르다, 거기다 정부의 교육 욕구까지도!최근 자사고 재지정이 이슈이다. 전북의 한 학교가 이미 기준에서 미달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 교육 관계자는 “설립 취지에서 벗어나 ‘입시 중심고’가 된 이들 학교를 폐지하고 일반고로 전환해 고교 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이유에서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실소가 나왔다. 대한민국 학교 중에서 “입시 중심 학교”가 아닌 곳이 어디인지를 따져 묻고 싶었다.지금 학교는 또 입시를 위한 평가 시기다. 그런데 큰 문제는 학생들의 평가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학생들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겠다는 수행평가들이 오히려 학생들에게 더 큰 시험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좋아 과정중심 평가이지 지금 학교들은 기말고사까지 서술형 평가를 한다고 또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다. 수행평가를 포함하여 서술형 평가를 없애달라는 국민청원을 넣겠다는 학생들의 생각에 필자는 적극 동감한다.

2019-06-25

대구소년회와 벽동사(碧瞳社)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대구는 서울과 평양에 이어 1920년대 초부터 그 활동이 두드러진 곳으로 몇몇 선구자적인 서양화가들에 의해 근대 서양화단 형성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이들 서양화 도입기 1세대 화가들을 중심으로 당시 대구화단을 이끌어간 영과회(零科會)와 향토회(鄕土會)의 회원들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화가(畵家)라기보다는 근대 서구문화를 지역에 소개하고 보급하는 선구자적인 지식인으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쳤다.대구 근대화단의 대표적인 서화가 석재 서병오는 교남서화연구회(嶠南書畵硏究會)를 통해 근대화단 형성과 후진양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이여성, 이상정, 서동진, 김호룡, 배명학, 박명조, 김용준, 최화수, 이상춘, 이갑기, 이인성, 김용조, 서병기 등 다양한 서양화가들의 활동은 영과회와 향토회의 미술그룹 활동으로 이어졌다. “서양화 연구단체인 향토회의 활동은 대구서양화단의 기록적인 성사임은 물론 조선 미술계의 일익에 커다란 기염을 토하는 사건으로 출범했다”는 당시 신문기사처럼 당시 우리나라 화단의 화두였던 ‘향토색론’을 성실히 실현한 향토회의 활동은 단순히 지역성을 가진 미술그룹의 활동이 아닌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배출해 내는 산실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대구 작가들의 부각은 이러한 미술그룹들의 적극적인 활동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1922년 제1회 교남시서화전(嶠南詩書畵展)과 함께 1927년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마련되었던 영과회 창립을 시작으로 대구 근대화단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대구미술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수동적 근대문화의 수용으로 인해 적잖은 문제점을 낳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이다. 일본인 미술그룹인 자토회의 활동과 대구 화가들의 찬조출품 배경, 영과회 해체 이후 조직되어졌던 과료회의 출현과 진보적 좌파경향의 예술인들의 활동내용, 나아가 향토회가 한국 서양화단에 끼친 영향과 회원들의 작품 활동 규모 등 아직까지 정확한 자료와 수집된 추가 자료들이 전무하고, 선행 연구자들의 연구결과에만 의존해 나가고 있는게 대구근대미술사의 현실이다.필자는 최근 당시 발행된 신문보도들을 통해 당시 대구미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과 활동들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다. 1924년 대구소년회(大邱少年會) 주최로 개최된 ‘대구아동자유화전람회’를 통해 당시 대구가 미술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5세부터 17세까지 유아부와 소년부로 나눠 마련된 전람회는 새롭게 건립된 조양회관에서 마련되었다. 서동진, 이상정, 최윤수, 나지강 등 심사위원 명단을 통해 전시회 규모와 성격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은 1927년 지역 미술·음악·문학인들과 소년작가·화가들이 함께 마련한 영과회 창립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에 앞서 1923년 창립된 벽동사(碧瞳社)는 대구에서 활동 중이던 서양화가들의 연구단체로 그 존재와 의미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이상정, 황윤수, 박명조, 이여성, 정용택, ○○○ 등으로 구성된 회원들은 미술연구와 창작을 목적으로 월 1회 정기 모임과 전람회 개최를 통해 지역미술인구 저변확대를 주도했다. 단체의 규칙을 좀 더 살펴보면 매월 정기적인 회비 납부와 완성된 작품의 보관을 통해 전문적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는 1920년 후반 서동진에 의해 개설된 대구미술사(大邱美術社)와 1936년 남산병원에 문을 연 이인성양화연구소(李仁星洋畵硏究所)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어졌다. 대구는 이처럼 대구 서양화 1세대 화가들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대구·경북을 ‘한국 근대미술의 메카’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이제 선배 화가들이 만들어 놓은 명성과 영애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재 대구·경북미술을 지켜 나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몫이라 생각된다.

2019-06-20

감성팔이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인격의 형성에는 이성에 못지않게 감성(感性)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감성과 이성은 상반되는 개념이지만, 그 둘이 적절히 조화될 때에만 정상적으로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서적 반응을 처리하는 뇌의 전두엽 부위가 손상되어 감성이 마비되면 기억이나 언어, 운동, 시각 등 다른 기능이 멀쩡해도 정상적으로 의사결정을 못하고 엉뚱한 말이나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는 사실이 실험으로 밝혀졌다. 공감능력의 결핍으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못 느끼는 사이코패스나, 분노조절이 안 되어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는 사람의 경우도 감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범람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그중 효과적이다. 상품의 광고는 물론 개인이나 단체의 사업 홍보에도 감성적 접근이 우선으로 채택되는 이유다. 휴대전화 하나로 언제 어디서나 온갖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디지털시대에는 이성보다는 감성의 비중이 커지는 경향이다. 논리적인 사고나 판단보다는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선전이나 선동에 휩쓸리기 쉽다는 얘기다.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정보들이 넘쳐나는데 세상이 더 각박하고 삭막해지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말초적인 감각이나 자극하는 것은 마치 바닷물로 해갈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들이켜 봐야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처럼 오히려 감성의 피폐를 가져올 뿐이다. 맑은 우물물 같은 감성이라야 근본적으로 마음의 갈증을 해소하는 대책이 될 것이다.어떤 상품이 가진 성능이나 실용성도 감성의 포장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상품가치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감성적 접근을 상품 마케팅의 주요 전략으로 삼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전략이 지나쳐서 실질과는 동떨어진 과대포장이나 허위광고가 되어서는 ‘감성팔이’라는 오명과 함께 불신과 외면을 받게 된다. ‘감성’에다 ‘팔이’란 접미사를 붙인 이 말은, 소기의 목적달성을 위해 일부러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연출을 비꼬는 말이다.상업적 마케팅을 위한 감성팔이는 결국 소비자들의 비난이나 외면으로 끝날 일이지만, 정치권에서 자행되는 감성팔이는 그 미치는 여파가 상당히 심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치적 판단이나 결정은 국가의 명운이 걸린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경제와 국방의 문제를 감성팔이로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퍼주기식 복지, 강성노조에 영합하는 정책 등은 감성팔이식 포퓰리즘의 혐의가 다분하다.좌파들 중에서는 세기적인 명장면이라고 감격해하는 이들도 있지만,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의 나무다리 연출도 결국은 감성팔이밖에는 남은 것이 없지 않는가. 북한의 김정은이 왜 핵을 포기하지 못하는지, 결국 핵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하려면 어떤 전략과 정책이 가장 적절한지, 냉철하고 엄정하고 치밀한 분석과 판단과 전략이 요구되는 것이지 감성놀음이나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우리 민족의 일반적인 성향은 이성적이기보다 감정적이라고 한다. 정이 많다거나 정에 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감정적이라는 얘기다. 그만큼 감성팔이가 잘 먹혀드는 기질이라는 얘기도 된다. 국민을 선동하고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치권에서 자행되는 감성팔이는 심각하게 사실의 호도나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런 선동이 역사의 흐름을 파탄의 길로 돌려놓을 수도 있다는 걸 베네수엘라 같은 외국의 사례에서 보게 된다.역사의 평가는 역사학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역사적 평가에도 좌우가 갈릴 수 있지만 정부가 나서서 한 쪽을 편드는 건 분명한 잘못이다. 현재의 정부가 할 일은, 지난 일을 자꾸만 들추고 뒤집는 게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위해 전심전력 최선의 정책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일이다.

2019-06-19

학교와 마을의 상생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산자연중학교 바로 옆 학교 진학을 위해 주택을 준비하신다면 신축급 전원주택 추천합니다.”학교 기사를 검색하다 의외의 내용을 보고 필자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그 당혹감은 곧 묘한 기대감으로 변했다. 비록 큰 광고는 아니었지만, 학교가 상업광고에서 불특정 다수 소비자들을 설득시키는 중요한 논리로 사용된다는 것은 학교 입장에서는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산자연중학교가 소재한 마을의 모습을 학교가 개교한 2014년도와 비교해 보았다. 필자는 의미 있는 변화 몇 가지를 발견했다. 제일 큰 변화는 마을에 새 집들이 여러 채 생긴 것이다. 학교 소재지 마을은 슈퍼는 물론 네온사인 하나 없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하루에 시내버스가 아침, 점심, 저녁 세 번만 운행하는 마을이라고 하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런 마을에 세련된 디자인의 집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분명 큰 변화다. 이런 집들 때문인지 마을의 이미지도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밝은 이미지로 바뀌고 있다.마을의 이미지 변화는 마을 주민들의 삶의 변화로 이어졌다. 학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면 마을은 곧 어둠에 잠겼다고 한다. 분명 그 때는 해가 넘어가기도 전에 마을길엔 인기척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곧 침묵의 마을로 변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주경야주(晝耕夜奏)! 이 말은 필자가 지금 학교 소재지 주민들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낮에는 들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으신다. 그리고 밤에는 학교에 오셔서 색소폰 등을 배우신다. 비록 고된 농사일에 힘이 드시지만, 거의 매일 저녁 학교에 오셔서 레슨도 받으시고, 또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시다 기쁘게 댁으로 가신다.2017년 대안학교 우수프로그램 일환으로 시작한 마을 색소폰 연주단은 올해로 3년째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어르신 연주단은 마을과 학교, 그리고 교육청 행사에도 참가할 정도로 연주 실력이 우수하다. 지난 5월 8일에는 지자체 경로 효 잔치에 초대되어 연주를 하였다.마을 색소폰 연주단의 평균 연령은 60대 중반을 넘는다. 그러다보니 연주도 연주지만 연주단원들의 활동 모습은 주변 마을 어르신들께 큰 희망을 주고 있다. 그래서 학교에는 연주단 가입에 대한 문의가 1년 내 끊이지 않는다. 비록 신청하신 모든 분께 기회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내년에는 제일 먼저 연락을 달라는 어르신들의 목소리에서 필자는 힘을 얻는다.산자연중학교에는 마을 색소폰 연주단 이외에도 서예, 수영 등 마을 어르신들과 학생들이 함께 배우는 특성화 프로그램들이 있다. 또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은 학기별 1회 이상 어르신들을 모시고 세대 공감 여행을 떠나는데, 여행단의 모습에 많은 관광객들이 박수를 보내주신다.필자는 산자연중학교와 오산리 마을의 관계는 상생(相生)의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산자연중학교 교육공동체 모두는 마을이 학교와 학생들을 잘 키워주셨고, 또 앞으로도 더 잘 키워주시리라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께 더 잘 하려고 노력한다. 마을 어르신들 또한 조용하기만 하던 마을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어주는 학교와 학생들에게 늘 감사함을 포현하신다. 학교가 마을이고, 마을이 곧 학교인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그리고 산자연중학교!“재미삼아 무차별 폭행” 또래 숨지게 한 10대 4명 ‘살인죄’ 적용 검토! 참으로 아프고 슬픈 이야기이다. 학교 현장에 인성교육이 의무화된지 오래이지만, 인성교육 시간에 비례하여 학생 사건은 더 잔혹(殘酷)해지고 있다. 과연 우리 교육은 바로 가고 있는 게 맞을까? 삭막해져만 가는 학교 현장! 마을과 학교가 함께 행복한 산자연중학교의 마을 학교 프로그램을 다른 학교들도 벤치마킹해보면 어떨지 제안해 본다.

2019-06-18

‘떠나감’의 미학

박상영대구가톨릭대 교수·국어교육과얼마 전의 일이다. 서로 살기 바빠 한동안 보지 못했던 지인 한 명이, 간만에 대구에 들를 일이 있다며 차나 한잔 하자고 불러내었다. 오랜 만에 보았는데 대뜸 한다는 이야기가, 그 동안 지극정성으로 사랑한 남편이, 다른 여자가 생겨서 떠나가겠다고 선포를 하더라는 것이다. 애를 셋이나 낳아 애지중지 키웠더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냐며, 먹고 살만하니 그런다고 기가 막힌다며 하소연하던 그 앞에서, 나는 유자차 한 잔을 들이키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고 살거라.”신경숙의 소설 ‘깊은 슬픔’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때, 사랑으로 인해 아파하고 슬퍼하던 많은 청춘들의 심금을 울렸던 이 문구. 사랑하면 잡아둘 법한데, 왜 떠나보내라고 하는 것일까?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옛 고전 시가에도, ‘떠나감’을 받아들이지 못한 예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떠나는 임을 향해 적극 매달리며 잡으려는 여성(‘서경별곡’), 서러운 마음 꾹 누르며 보내니, 가는 듯 다시 돌아오라며 여운을 남기는 여성(‘가시리’),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죽는 남편 따라 같이 죽는 여성(‘공무도하가’), 자신의 유혹을 거절한 채 갈 길 떠나는 남성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는 여성(‘맏딸애기 노래’) 등.이는 비단 여성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요, 남녀 간의 문제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실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친구 사이 등 인간만사가 모두 떠나감-남겨짐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떠나감이 있으면 다가옴이 있고, 다가옴이 있다면 떠나감도 있는 법이다. 애초에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오롯이 내 것이기만 한 것이 어디 있었던가. 살면서 잠시 ‘내 것’이 되었던 것일 뿐. 죄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잠깐 ‘빌린 것’들일 뿐이지 않는가 말이다. 인생사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인 것을. 헌데, 그것을 ‘내 것’이라 여기고 집착하고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룬다면, 이는 잠시 ‘빌린 것’에 스스로를 가두는 꼴이 아니고 무엇일까? 옛 여류 수필가 중, 1769년(영조 45년) 10월 13일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김삼의당 부인이 있다. 그는 2살배기 셋째 딸을 잃어버리고 쓴 제문(‘哭第三女文’)에, 이렇게 적었다. ‘생이든 죽음이든 사람이 다 한번은 겪는 것이다. 수명이나 천명은 사람이 반드시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바이다. 대저 어찌하여 살면 기쁨이요, 죽으면 슬픔이 되는가.’라고. 그리하여 ‘나는 너의 죽음을 애석해 하지 않고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고.딸의 죽음 앞에서 이토록이나 담담하게 슬픔을 풀어낼 엄마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김 부인이 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많은 정이 쌓인 후 어느 날 아침 죽는다면 더욱더 아플 것이니 차라리 그 전에 죽어버린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역설을 통해, ‘떠나감’에 집착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보여준다. 누군가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은, 결코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림’과 ‘절망’, ‘아픔’과 ‘슬픔’, ‘고통’과 같은 지독한 감정들을 겪고 난 후에 찾아오는 평온함, 그 속에서 ‘비움’을 채워갈 시간이 주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떠나감’의 핵심은, ‘떠나가는 주체’가 남겨진 자의 가슴팍에 아로새기는 상흔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주체’가 타자의 ‘떠나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간 스스로 집착하고 있던 것들을 떠나보내는 연습에 있다. 그 연습이야말로 다름 아닌, ‘떠나감’의 진정한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연습 과정은 비록 뼈를 깎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할 지라도, 종국에는 스스로의 영혼을 성숙시키는 과정이자 언젠가 떠나간 빈자리를 채울 ‘새로움’을 위한 준비기간일 터이기 때문이다.

2019-06-13

누가 돌을 던지나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물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예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뭔가를 쓰고 있다가 그들이 자꾸 다그치자 일어나서 “너희들 중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앉아 땅바닥에 낙서(?)를 했다.그 말을 듣고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여자를 끌고 왔던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여자 혼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예수는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여자가 없다고 하자 “나도 너를 정죄(定罪)하지 않겠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했다.이상은 기독교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자는 매춘부인가 본데, 아마도 당시에는 매춘에 대해서 모세의 율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매춘부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은 일이고, 용서를 하라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라는 것인즉 예수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시험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문재인 정권은 시작부터 ‘적폐청산’을 기치로 내걸었다. 지난 정권을 적폐로 규정하고 전 대통령들을 비롯하여 국정원장, 장관, 검찰청장 그리고 대법원장과 재벌총수들까지 온갖 꼬투리를 잡아 처벌하는 청산(?)을 단행했다. 적체된 폐단을 일소하겠다는 명분이야 그럴듯하지만, 문제는 그 적폐를 규정하고 척결하는 주체가 누구이고 어떤 잣대를 가졌느냐 하는 것이다. 외계인들이 와서 하는 일이 아닐진대, 누가 누구를 적폐로 몰고 처단을 하는 지에 대한 논란이 없을 수가 없다.소위 ‘촛불혁명’ 세력의 지지와 성원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원래가 41%의 득표로 탄생한 정권인데다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다시 과반수 이상이 찬성을 하지 않는 정권이니 그것을 절대적인 명분이랄 수는 없는 일이다.더구나 지금처럼 좌우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대립이 첨예한 시국에선 한 쪽의 주장이나 명분은 편파적일 수밖에 없고 대립과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하게 마련이다.좌파들이 장악한 정부에서는 우파정권의 행위들 거의가 적폐로 보일진대, 나중에 우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면 지금 좌파정권의 적폐청산 행위 역시 적폐로 몰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나라의 모든 부서와 기관은 물론 언론과 여론까지 장악을 하려고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는 예수의 심판이야말로 적폐청산의 전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적폐청산은 지난 일들을 모조리 들춰내어 저들의 잣대로 재단하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정권의 적폐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이제부터는 폐단을 짓지 않겠다는 결의와 다짐을 실행하는 일이다.과거청산을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준 지도자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을 들 수 있다. 반정부 투쟁을 하다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고 27년간이나 옥고를 치렀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결성하여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과거청산’을 단행했다. 지난 시절 인권차별 반대투쟁을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들도 잘못을 뉘우치면 사면하는 정책으로 흑백간의 오랜 갈등과 충돌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것이다.그와는 반대로 저들이 마치 정의의 사도인 양 무소불위로 권력을 휘둘러 상대를 적폐로 몰아가는 이 정권의 오만과 독선은 도를 넘은지 오래다.

2019-06-12

염치(廉恥) 교육부터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금요일에 고숙상(姑叔喪)이 있어 기차로 서울을 다녀왔다. 비가 와서인지 세상은 온통 흐렸다. 사람들의 표정은 말 그대로 잿빛 하늘이었다. 마치 기차는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우울의 섬으로 데리고 가는 것 같았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눈을 뜨고 있으면, 우울(憂鬱)에 감염되어 더 큰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아 눈을 감아버렸다.그런데 그것이 실수였다. 눈을 감는 순간 모든 감각이 청각으로 집중되었다. 필자의 귀엔 비속어들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번 들어온 비속어들은 귀에서 나갈 생각을 않았다. 여러 지역의 어조들이 혼합된 비속어들은 심한 말 멀미의 원인이 되었다. 좀처럼 멀미를 하지 않는 필자이지만, 더 이상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악몽에서 깨듯 눈을 번쩍 떴다.필자는 눈을 뜸과 동시에 눈 뜬 것에 대해 후회하였다. 필자의 눈엔 초로(初老)의 한 신사가 당신 앞자리에서 비속어로 통화를 하고 있는 이십대 초의 젊은이에게 정중하게 통화 소리를 줄여줄 것을 부탁하는 모습과 세상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아버지 연배 되는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젊은이의 모습이 동시에 들어왔다.당황한 것은 부탁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당신의 짐을 챙겨나가 버렸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차가 종착역인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 자리는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 대신 젊은이의 비속어가 자리를 떠난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 크게 객실 안을 점령하였다. 필자를 비롯하여 많은 승객들이 있었지만, 비속어를 멈출 수는 없었다. 공공질서를 지켜줄 것을 당부하는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승무원이 몇 번 다녀가고서야 젊은이의 염치(廉恥)없는 통화는 끝이 났다.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필자 뒤편에서 코를 빨아들이는 소리와 함께 비속어가 날라 왔다. 누구와 대화하는 것도 아닌데 코를 흡입할 때마다 그 사람은 욕을 했다. 습관인지 불편함에 대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욕하는 주기는 점점 짧아졌다. 정말 대략난감이었다. 다른 승객들은 하나둘씩 이어폰을 꺼냈다. 그리고 기차 안 현실과 담을 쌓았다. 불행하게도 필자에겐 이어폰이 없었다. 필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면 “어쩔 수 없는 건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글귀를 주문처럼 외우는 버릇이 있다. 이번엔 주문이 통하지 않았다.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욕 멀미 때문에 펼쳐 놓은 책장은 넘어가기를 거부하였다.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착을 알리는 기내방송을 기다리는 것과 휴대전화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후자를 선택하였을 경우 더 강력한 후회를 하게 됨을 필자는 알고 있지만, 이미 손은 인터넷에 접속하고 있었다. 숨진 7개월 영아, 6일 동안 방치! 인천 도심 카페서 흉기 살인 사건! 김원봉 언급 후폭풍 갈 길 바쁜 정국에 이념 논쟁 불똥!갑자기 사람들의 눈총이 필자에게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주변을 살피다가 필자는 깜짝 놀랐다. 필자는 필자도 모르게 비속어를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비속어를 멈추려고 했지만, 조금 전 기사들 때문에, 특히 김원봉에 대한 기사는 오히려 더 심한 비속어를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현충일에 시장에서 뵌 어느 아저씨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한국 전쟁 때 우리 아버지 죽인 놈들은 왜 한 마디도 사과를 안 하는지 모르겠다.”많은 단어들이 현 정부 들어 사라졌다. 그 중 대표적인 말이 염치(廉恥)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남북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관용구가 있다. “염치와 담 쌓은 사람(놈)” 자신들의 정치 잇속을 위한 말잔치는 이젠 그만 두고 제발 염치부터 좀 차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기차는 욕을 권하는 사회에 필자를 내려주었다.

2019-06-11

뿌리 이야기

서수백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과2년 전부터 학생들과 단편소설 한 편을 필사하고, 낭독하고, 생각을 나누는 활동을 해 오고 있다. 사실 나는 소설을 잘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감성이 매우 부족하다. 그래도 한때는 학내 문학 공모전에 당선도 해 보고 ‘문학소녀’라는 간지러운 말도 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감성은 잃어버리고 ‘팩트(fact)’와 ‘실용성(utility)’만을 중시해 온 듯하다. 학생들과 소설을 읽기로 한 것은 처음에는 권유에 따른 것이었고 이후엔 자연스러운 내 의지였다. 솔직히 사실과 실용을 중시하기 때문이라는 건 핑계일 뿐이고 소설을 읽지 않은 건 순전히 독서에 대한 내 게으름 탓이다. 어떤 장르를 읽든 독서를 통한 배움은 참 크다는 생각을 다시금 한다. 올 5월에 네 번째 소설로 김숨 작가의 ‘뿌리 이야기’를 읽고 있다. ‘이상문학상’ 대상이라는 거창한 타이틀 때문에 이 소설을 읽기로 한 것은 아니다. 소설 ‘뿌리이야기’를 통해 우리 시대 ‘뿌리 뽑힘’에 대한 연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과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것을 나누는 것에 대한 가치는 더욱 확신이 들었다.작가는 길가에 심겨진 나무가 먼 타국에서 옮겨져 온 것이라는 말에서 이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작가는 나무가 느꼈을 뿌리 뽑힘에 대한 공포를 생각했다고 한다. 다소 비약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작가는 노인들이 살던 집에서 죽음을 맞지 못하고 요양원이나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 뿌리가 뽑힌 불행한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작가와 그의 작품에서 사람에게 ‘뿌리’가 무엇이고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뿌리이야기’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포도나무 뿌리는 천근성이야. 태생적으로 뿌리를 깊게 내리는 나무가 아니지. 뿌리 뻗음이 얕아서 땅 표현 가까이 뿌리를 내리지. 포도나무 뿌리가 그악스러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지.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까 거머리처럼 땅 표면에 달라붙어서 옆으로 옆으로 산란하게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거야 (중략) 호두나무 같은 심근성 나무는 뿌리를 깊이, 단순하게 내리지. 당신을 처음 봤을 때 심근성 나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어떤 포도농장들은 포도나무들 사이사이에 민들레나 토끼풀 같은 잡풀을 심기도 한다는 걸 그는 모르는 듯했다. 포도나무가 물을 얻으려 잡풀과 경쟁하느라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천근성인 포도나무 뿌리가 태생적인 기질을 거스르고 땅속 깊이 내리면 생산량은 줄어들지만 품질이 좋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을. 수평을 지향하는 천근성 식물과 수직을 지향하는 심근성 식물을 밀식하면 뿌리의 모양과 성장 특성이 달라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심근성 식물만 심었을 때는 경쟁하듯 키 재기를 하면서 서로를 도태시킨다는 것을. 천근성 식물만 심었을 때는 영역을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말려 죽인다는 것을.”소설 속 남녀주인공들이 하는 이 말에서 우리 시대의 모습이 떠오른다. 뿌리를 내리려는 사람, 뿌리를 내리지 않으려는 사람, 뿌리를 뽑는 사람과 뿌리 뽑힘을 당하는 사람이 섞여 사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 그리고 얼마 전 난민 인정을 받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4개월 이상을 노숙하고 있다는 앙골라인 루렌도 가족 생각도 났다. 그러나 나 역시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낄 뿐이다. ‘뿌리이야기’에서 천근성(淺根性)을 심근성(深根性)으로 변화시키는 전략으로 양질의 포도를 수확하는 포도농장 사람들의 지혜가 필요하다. 천근성의 나무와 심근성의 나무가 함께 공생할 수 있는 책임감과 연대감을 새삼스레 되새기게 된다.

2019-06-10

한국전쟁과 종군화가단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6월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한 호국보훈의 달이다.1950년 6월 25일 남한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이 자행됨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군인 26만 명과 민간인 100여 만 명의 희생자가 생겨난 민족의 대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3년 동안 치열하게 펼쳐진 전투와 고단했던 피난민들의 삶은 현대사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민족 간 아픔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의 화가들은 좌·우익으로 구분되어지는 이념적 분쟁에서 오는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다채로운 이념 활동과 종군활동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하지만 한국전쟁 60여 년이 지나도록 정부는 종군화가단의 규모와 활동, 그리고 명단에 대해 정확한 자료를 아직까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종군화가들의 주 활동 무대였던 대구의 행적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필자는 한국전쟁 중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군화가들의 활동을 부분적으로 살펴본다.전쟁 중 그림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군인과 민간인 사기앙양을 담당했던 ‘종군화가단’ 창설에 관한 논의는 1950년 9·28 수복 후 대한미술협회 위원장 고희동과 부위원장 장발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때 정훈국 미술대 소속 화가들이 이미 전쟁에서 활발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종군화가단은 1951년 1·4 후퇴 때 대구에서 본격적으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국방부 정훈 국장이었던 이선근과 육군대위였던 최일에 의해 결성되어, 중진급 화가 10여 명이 참가했다.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는 1951년 5월경 대구 아담다방에서 육군 정훈감 박영준 중령의 주선으로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육군 ‘종군작가단’을 발족했으며, 단장 최상범과 부단장 김송을 비롯해 정비석, 방기환 등 수십 명이 참가했다. 그런데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 펴낸 자료에서는 동양화, 서양화, 조각, 선전미술 부분에 속했던 미술가들의 인명을 열거하였다. 이들 명단은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과 겹쳐지는 내용이다. ‘공군미술대’는 공군본부 작전부 소속으로 1950년 11월 서울에서 창설하여 초대 대장으로 장발을 선임했지만, 1·4후퇴 때 그가 미국으로 가버리자 백문기가 대장 역할을 맡았다고 전한다. 당시 공군본부는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연극분야도 같은 성격의 조직을 결성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하며 공군을 따라 대구로 내려온 미술가들은 백문기를 비롯해 부대장인 정창섭과 대원으로는 장운상, 권영우 등이 서울미대 재학생으로 구성되었다.한편 대구에서 1950년 5월 문총경북지부결성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이윤수가 위원장이 되어 지부결성을 추진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이내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7월 문총구국대 경북총조직위원회가 구성되고 대구문화극장(한일극장)에서 문총구국대경북지대를 결성해 지대장에 이효상을 추대하고 이윤수, 김진태, 최계복, 백락종 등이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8월에는 중앙문총구국대와 문총구국대경북지대가 합류해 경북지대 주최로 8·15 기념행사를 만경관에서 개최하기도 했다.대구는 한국미술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하며, 한국전쟁 중 한시적이었지만 임시수도와 피난지로서 우리나라의 주요 작가들이 삶을 영위했던 터전이었다. 더불어 피난 온 미술인들과 지역 화가들은 백척간두에 놓인 조국을 지키기 위한 구국정신으로 종군과 선전활동을 활발히 펼치기도 했다. 호국의 달을 맞아 조국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2019-06-06

교육과 나눔, 그리고 지구 Ⅳ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작년 겨울에 눈이 거의 안 왔어요. 그러다 보니 땅이 매우 메말라졌고, 물을 준다고 줬지만 한계가 있었어요. 겨울 가뭄을 이기지 못한 나무들은 결국 말라죽었어요. 기후변화가 너무 심해요. 정말 이대로 가다간 학생들이 애써 가꾸고 있는 사막화 방지 숲 조성 작업이 헛수고가 될 수 있어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지구는 되돌릴 수 없는 환경재앙에 빠질 거예요.”2019년 5월 사전 답사 때 작년까지 심은 나무들의 발육상태를 살피는 필자에게 NGO 단원이 해 준 말이다. 한 눈에 봐도 2017년과 2018년에 심은 나무들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1년이라는 시간 차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2017년에 심은 나무들의 발육상태가 확실히 좋았다. 하지만 2018년에 심은 나무들 중에는 아직 땅의 허락을 받지 못한 나무들이 꽤 있었다. 그래도 학생들의 땀과 정성을 기억하는 상당수의 나무들은 끝까지 뿌리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필자는 2018년 1월 답사 때를 기억한다, 눈이 나무를 덮을 정도로 왔던 그 때를. 그 때는 나무가 동해(凍害)를 입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필자의 생각이 짧았다. 많은 눈 때문인지 2017년에 심은 나무들 중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무는 불과 4그루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2019년 5월 답사 때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메마른 대지, 그리고 쉼 없이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 결국 2018년에 심은 나무들 중에서 15%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필자는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른 조림 지역에는 나무 생존율이 50%도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뿌리가 안착한 나무들은 본격적으로 하늘을 향해 길을 내기 시작함은 물론 녹색의 푸른 잎들을 가지마다 풍성히 달았다. 나무들이 만들어 낸 건 외형적인 성장만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나무들은 혹한(酷寒)과 혹서(酷暑), 그리고 한해(旱害)를 모두 이겨내고 학생들을 기다렸다. 기다린 건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은 서로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5월 27일, 드디어 학생들과 나무들의 1년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생명 사랑 나눔의 숲’조성 장소로 이동할 때만 하더라도 모래 바람이 엄청 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도착하기 얼마 전부터 모래 바람도 숨을 죽이고 학생들과 나무들의 만남을 지켜보았다. 학생들의 연이은 탄성 소리! 그 소리는 열악한 조건을 너무도 잘 이기고 자신들을 기다려 준 나무들에 대한 감사함의 인사였다. 나무들 또한 매년 오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자신들을 찾아 온 학생들에게 푸른 웃음으로 답하였다. 나무를 향해 달려가는 학생들과 그 학생들을 푸른 품으로 맞이하는 나무들의 모습은 그대로가 한 편의 영화였다. 영화 제목은 ‘교육과 나눔과 지구 Ⅳ!’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 등으로 땅은 점점 딱딱해지고 있어 나무를 심기 위한 구덩이 파기가 매년 어려워지고 있다. 가끔씩 바로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는 모래바람은 학생들의 사기를 꺾어 놓기도 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지구를 푸르게 가꾸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만발의 준비를 하고 올해도 예정된 700그루의 나루를 다 심었다.(총 식재 수 1천800그루) 그리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다음의 표지판을 사막화 방지 조림 사업장에 설치하였다.“이 숲은 대한민국 산자연중학교 학생들과 울란바토르 쎈뽈 초등학교, 존모드 쎈뽈 초등학교 학생들이 몽골 사막화 방지를 위해 2017년부터 조성하고 있는 숲입니다. 학생들의 푸른 땀이 사막에 생명의 물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샘이 큰 생명의 강줄기를 만들어 세계를 푸른 생명이 넘치는 대자연의 공간으로 만들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이어 갈 푸른 지구에서 지구인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2019-06-04

혼자 조용히 읽기(SSR)

김현욱 시인“당신이 아무리 큰 부자일지라도 그래서 금은보화가 넘쳐날지라도 결코 나보다 부자가 될 수는 없어요. 내겐 책 읽어 주는 어머니가 있으니까요.” 스트릭랜드 길리언의 ‘책 읽어 주는 어머니’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 읽어 주는 어머니를 가졌다는 건 아이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저절로 책을 좋아하게 되는 아이는 거의 없다. 누군가는 아이를 매혹적인 이야기의 세계로 끌어들여야 한다. 누군가는 아이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오빌 프레스콧의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아버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 읽어주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졌다는 건 이 세상을 다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다.흑인 학자이며 하버드에서 강의하고 있는 로날드 페르구손은 ‘학교 내에서 볼 수 있는 인종 간의 성취도의 차이’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페르구손은 연구 결과를 이렇게 정리했다. “진짜 문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진 부모 역할의 차이에 있다.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실력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 원인인 것은 분명하다.” 페르구손에 따르면, 흑인 가정에서는 전통적으로 학업을 교사의 몫으로 보는 반면, 백인 가정에서는 부모가 아이의 학업에 좀 더 깊이 개입한다.연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학교에 진학하기 훨씬 전에 이미 가정에서 읽기를 포함한 학업 성적의 씨앗이 뿌려진다는 말이다. 부모가 텔레비전보다 책을 가까이하고, 도서관에 아이를 데려가며, 책을 자주 읽어 줄수록 아이의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 모든 조사 자료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을 확인시켜 주는 결과일 뿐이었다.1979년 ‘하루 15분, 책 읽어 주기의 힘’을 출간한 짐 트렐리즈에게는 어린 시절 책을 읽어 준 아버지가 있었다. 그때의 느낌과 추억을 아련하게 간직하고 있던 그는 마찬가지로 아버지처럼 자녀에게 매일 밤 책을 읽어 줬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많은 아이들이 책 읽기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이유가 부모와 교사에게 있음을 깨달은 트렐리즈는 자비로 이 책을 냈다. 그 후 트렐리즈의 책은 스테디셀러에 올랐고, 전 세계의 교실 풍경까지 바꿔 놓았다. 특히, 일본에서는 지금도 2만여 개가 넘는 학교가 매일 아침을 책 읽기로 시작하고 있다.많은 부모들이 자녀교육에 대해 노심초사하지만 어릴 때부터 침대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사실, 읽기는 모든 학습의 기초요 주춧돌이다. 책 읽기와 학업 성취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수많은 통계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읽기가 교육의 중심이고, 읽기가 최우선이다. 읽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에게도 책 읽어주기는 맞춤 처방이다.책 읽어주기를 통해 책 읽기에 흥미를 느낀 아이들에게는 혼자 조용히 책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 SSR(sustained silent reading)이 바로 그것이다. 책 읽어주기에서 자연스럽게 혼자 조용히 읽기(SSR)로 가면 아이의 독서지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다.독서교육 전문가 맥크라켄의 연구에 따르면 혼자 조용히 읽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교실이나 가정에서는 15분 정도가 적당하다. 물론, 아이의 상태나 상황에 따라 교사나 부모가 적절하게 조정한다. 둘째, 아이가 스스로 읽을 책을 선택한다. SSR 시간 전에 읽을거리를 고르고, SSR 시간에는 다른 책으로 바꾸지 못한다. 교사나 부모가 아이의 성향이나 흥미를 파악해 재미있는 책을 권할 수도 있다. 셋째, 아이가 SSR를 할 때 교사나 부모도 반드시! 책을 읽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넷째, 일체의 독후감, 독후 활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SSR을 절차나 결과물, 성적에 연관시키지 않는다. 책 읽어주기의 최종 도착지가 바로 SSR이다.

2019-06-03

긍정과 감사

강성태 서예가·시조시인눈부시게 푸르고 아름다운 오월이다. 날씨가 화창하고 계절이 아름다워서일까? 가정의 달 오월에는 유난히 기념일도 많고 테마적인 행사가 흔하다. 그러한 기념일이나 행사의 대부분은 사랑과 감사, 은혜와 존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한 날에 살가운 인사를 건네거나 감사의 선물을 주고 받는 등 소소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사람 사이를 한결 친밀하게 하고 세상을 더욱 밝고 향기롭게 만들고 있다.긍정과 배려, 사랑과 감사의 마음에서 싹트게 되는 따스하고 감동적인 사연들. 긍정과 감사는 행복의 원천이다. 또한 배려와 사랑은 나눔과 실천을 통해 더 큰 긍정과 행복을 안겨준다.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알고 쏟아준 사랑에 감사를 전하며 존중과 보은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얼마나 뭉클하고 정겨운 일인가! 진정한 나눔은 타인에게서 비롯되듯이, 누군가를 위해 나의 가진 것을 나누고 봉사하다 보면 나눔으로 인해 얻게 되는 나의 기쁨이 더 커지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배려하며 나눔을 실천했을 때 진정한 보람과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따뜻한 나눔은 세상을 밝고 넉넉하게 만들며 더욱 활기차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어지게 한다.감사는 너그러운 부드러움으로 잔잔하게 파동을 일으키는 미덕의 어머니이다. 긍정과 감사, 사랑의 마음으로 대한 밥은 썩지도 않았다는 실험결과가 말해주듯이, 사람에 대한 관심과 칭찬, 감사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기쁨과 감사가 많아지고 사랑이 가득해지면 그 자체가 곧 행복이고 만족이며 보람인 것이다. 그래서 감사를 나누면 행복이 되고 행복을 나누면 감사가 오는 것이다.이 모든 것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매사에 적극적이다. 2002년 미국의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낙관주의자가 비관주의자에 비해 심신건강도 양호하고 긍정적인 태도가 신경계와 면역계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조절시켜 건강과 장수에 도움을 줬다고 한다. 또 스트레스를 덜 받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릴 확률도 낮았다고 한다. 이처럼 매사에 긍정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크고 많은 긍정과 감사를 불러일으켜 성취와 만족감을 느끼게 해준다. 결국 긍정적인 정서와 자신감, 감사의 마음은 호기심과 창의성을 일깨워 잠재능력을 발달시키고, 일과 건강에 있어서 긍정의 에너지가 작용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인생의 변화란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주위의 작은 것부터 살피고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심했던 가족들, 고맙다고 표현 못한 동료들, 내 얘기만 전하려 했지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 삶의 작지만 소중한 가치들을 인식하며 무관심했던 사람들과의 진정성 있는 소통을 통해 긍정과 감사, 사랑의 마음을 나눈다면 이 세상이 한결 밝아지지 않을까?내가 소중하면 남도 소중한 법이다. 이념이나 견해의 대립 속에 나의 관념이나 주장만 고수하고 선과 악, 득과 실만 따지는 편중된 사고와 배타적인 논리는 시민사회 전반에 갈등과 퇴보의 해악만 끼칠 따름이다. 시대의 가치와 변화의 격랑이 심해져도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인정하고, 상호이해와 배려로 다름과 틀림 속에 ‘차이’를 존중하며, 상생으로 협력해나가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 바탕에 긍정의 습관과 감사의 마음을 깔아야 함이 중차대하겠지만.지금 가지고 있는 것,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할 때 우리는 보다 행복한 삶에 다가갈 수 있다. 긍정과 배려로 사랑을 실천하고 베풂과 나눔 속에 함께 누리는 감사의 온기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9-05-30

“선생님이세요?”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몽골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지금은 기내 서비스로 저녁이 제공되고 있다. 비행기 후미에 앉은 필자의 순서가 되었고, 승무원이 필자에게 물었다.“선생님이세요?” 필자가 세상에서 제일 부끄러워하는 말이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티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학생들과 함께 앉아 있기에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했다. 혹시나 학생들이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나 않았는지 여러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필자에게 돌아온 답은 전혜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너무 감사해요!” 승무원은 특유의 친절 미소로 필자를 놀라게 했다. 필자의 놀란 모습에 대한 답을 승무원은 바로 해주었다. “학생들이 너무 착해요. 인사를 너무 잘 해요. 기내식을 받는 학생들 모두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해요.”이 말을 듣는 순간 모든 힘듦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선생님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음을 필자는 처음으로 느꼈다. 승무원이 지나가고 필자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어폰을 끼고 저마다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혹 학생들이 왜 비행기를 탔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실 분이 계실 것 같아 잠시 말씀을 드린다.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은 2016년부터 급속한 사막화로 환경 재앙 지역으로 변해가고 있는 몽골에서 생태계 복원을 위한 “생명 사랑 나눔의 숲”을 조성하고 있다. 작년까지 1천100그루의 나무를 사막화 방지 마지노선인 몽골 아르갈란트 솜 지역에 심었으며, 올해는 700그루를 심을 계획이다. 그리고 2021년까지 총 5천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을 예정이다.모두가 놀이동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날 때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은 지구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몽골 사막으로 간다. 한 번 즈음은 불평도 할 법 하지만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를 아는 학생들은 밤 비행기의 피곤함 정도는 참을 줄 안다. 또 자신들을 위해 봉사해 주시는 많은 분들에게 기쁘게 감사 인사를 한다. 중학생! 중2병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때로는 방황의 정점에 있는 시기!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가 있다는 것을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이 보여주고 있다.그런데 필자는 몽골이 가까워질수록 걱정이 앞섰다. 왜냐하면 5월 사전답사 때 본 진상(進上) 한국인들 때문에! 필자는 매번 답사 때마다 술에 취한 대한민국 관광객들을 본다. 그들의 추태는 같은 나라 말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만든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호텔 복도에서의 고성방가는 기본이고, 격한 취중 싸움은 덤인 한국 관광객들!이들의 연령은 제한이 없다. 답사 중에도 필자는 진상 취객들 때문에 마음을 졸였지만, 답사를 마치고 출국 심사를 받을 때는 조바심에 속이 다 타버렸다. 왜냐하면 술에 취해 인사불성(人事不省) 된 한국 대학생들 때문에. 흘러내리는 체육복을 입고 몸도 못 가릴 정도로 취한 그들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유발했다. 직업병 때인지 출국 심사장을 통과한 필자는 심사장을 나와서 한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위태위태한 대학생들이 출국장을 모두 통과한 다음에야 그들을 따라 탑승구로 갔다. 비틀거리는 대학생들, 그들의 모습은 분명 정치 혼돈에 빠진 한국의 모습이었다. 그들을 보면서 필자는 교사로서의 무한 책임감을 느꼈다.도착을 알리는 기내 방송에 필자는 손을 모았다, 제발 이번만큼은 술에 취한 진상 한국 관광객들을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이 보지 않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역시 바람은 바람으로 끝났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시간은 5월 28일 02시! 장소는 몽골의 어느 호텔! 700그루의 나무를 심기 위해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힘들게 구덩이를 파고 돌아온 학생들, 그 학생들의 단잠을 깨우는 술에 취한 한국 관광객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몽골 전체를 흔들고 있다.

2019-05-29

스승의 진정한 미덕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1년 중 기념일이 가장 많은 달은 당연 오월인 것 같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날’, ‘부부의날’, ‘근로자의날’과 함께 ‘발명의날’, ‘방재의날’, ‘바다의날’ 등 다양한 기념일들이 한 달을 정신없이 만들고 있다.필자는 유통업체에 근무하다보니 그중에서 어린이날은 가장 손이 많이 가고 바쁜 행사준비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올해도 꼬마화가들의 그림 잔치인 어린이 미술대회가 무사히 마무리되고 긴 한숨을 내쉰다. 4∼5월만 되면 어린이날 기념행사와 축하공연 준비에 쫓겨 생활하다 보면 어린이날 뒤에 이어진 어버이날은 늘 정신없이 지나가 버리는 것 같다. 그리고 며칠 후 다가오는 스승의 날은 비교적 여유를 되찾으며 기념일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 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 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 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학창시절 이맘때면 늘 불렀던 노래처럼 스승은 마음속에 늘 어버이로 자리매김해오고 있다. 아마 이런 감정은 필자만의 혼자 생각은 아닐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시절 담임선생님부터 대학 은사님, 사회생활을 하면서 모시게 되었던 선생님까지 인생을 살아오며 진정한 스승은 참 많은 것 같다. 그분들은 학문을 가르쳐주며 인성을 일깨워주기도 했고, 더불어 인생을 스스로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를 전해주셨다. 일찍 세상을 떠나 제자들의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잊혀진 분들이 계시는가 하면 아직까지 제자들의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시는 참스승도 계신다. 그분들이 계시기에 늘 감사하고 행복하다.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스승으로서 최고의 미덕은 창조적인 표현과 지식을 통해 학생들을 일깨우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단순히 학문을 전달하는 선생님보다는 학생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창의적인 사고와 행동을 스스로 할 수 있게 자극과 격려를 전해주는 현대의 교육법이 진정한 선생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현대사회는 세계화, 정보화, 고도의 기술화, 다양화가 가속화되어 지식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인간의 창의적 사고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인간의 지적능력을 정의하던 기존의 방식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개인의 적성과 소질, 특기 등 계발을 통해 창의성 신장과 창조적 표현능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서 ‘창의성’이란 단순한 능력이나 성질이 아닌 복합적인 성질이 하나로 통합된 것을 말한다.즉 앞으로 현대사회가 기대하는 진정한 교육은 창조적인 인격형성에 공헌할 수 있는 것으로 발전해 나갈 것을 시사하고 있다.현대교육은 이처럼 우리가 흔히 세계로부터 분리, 독립되어 있다고 여기는 개인에 한정되어 있으며, 자아(ego)를 극대화하는데 초점을 둔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른바 개별 주체로서의 자아실현이다.다시 말해 인간의 내면에 지니고 있는 천성, 곧 타고난 소질과 성품을 보호, 육성하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아가 교육을 받는 피교육자가 가지고 있는 ‘성장하는 힘’, ‘창조적 능력’을 계발시켜 줌으로써, 그 자발성과 창조성을 충분히 조장시켜 자립을 키워주는 것을 의미한다.오늘날 현대사회에서 교육목적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그 목적하는 바가 변화되며 설정해 왔지만 교육 그 자체가 정의하는 바대로 인간을 인간답게, 사회와 국가에 바람직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였다.다가오는 스승의 날을 맞아 현대교육의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2019-05-23

5월 학교 편지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오랜만에 음성만 들었어도 너무 반가웠는데…(중략) 무심히 흘러간 세월 속에서도 그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네.(중략)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험한 가시밭길 헤쳐 온 지난날 생각하며 열심히 또 열심히 하시게. 아울러 계획하고 추진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날마다 보람으로 마음 가득하길 멀리서 기원하겠네. 어제 우연히 버려진 신문 속에서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과 귀한 글(마을이 있는 학교) 잘 읽었네. 글 속에 담겨진 그 아름다운 소망이 산자연중학교에서만이라도 꼭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겠네. 고맙네.”고등학교 은사(恩師)님으로부터 온 장문의 문자 메시지이다. 몇 년째 안부를 몰라 5월이 다가오면 걱정이 더 컸던 은사님과 올해는 다행히 연락이 닿았다. 선생님께서는 건강하시다는 말씀과 함께 그동안의 근황에 대해 알려주셨다.그리고 마지막에 “요즘은 교육청에서 지원을 해주는가?”라며 학교 상황에 대해서 물어보셨다. 선생님께서는 교육청의 지원 없음에 대해 늘 안타까워하셨다. 그 안타까움은 대한민국 중학생이면서도 교과서마저 자비로 사서 공부해야 하는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에 대한 걱정에서 기인(起因)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필자는 죄송할 따름이었다.“선생님, 아직은 교육청의 지원이 없지만 학교급식법 개정안 등 대안학교 지원에 대한 분위기가 마련되고 있습니다.” 필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의 짧은 탄식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모든 선생님들께서 열심히 하고 있으시니 분명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소식 있을 걸세!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 그 마음만 잃지 마시고 최선을 다 하시게!” 지금의 필자를 있게 한 선생님만의 희망 가득한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였다.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던 필자의 20대, 그 어둡고 길기만 하던 20대의 험로를 필자가 꿋꿋이 헤쳐나 갈 수 있도록 불 밝혀주신 바로 그 등대와도 같은 말씀이셨다.2년여의 걱정을 떨쳐버리는 은사님과의 통화가 있은 다음 날 아침,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한 제자가 걱정 되셨던지 선생님께서는 위에 인용한 장문의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필자는 꼭 말씀드리고 싶었던 감사한 마음을 답장으로 보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다시 낳아주셨습니다. 낳아주신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지금의 제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중략) 늘 선생님께서 심어주신 뜻을 생각하며 더 열심히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생님! 다시 한 번 제가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필자는 은사님(전 경주문화고등학교 허상수 교장 선생님)을 생각하면 늘 고등학교 1학년 때가 떠오른다. 그 때는 문과(인문계)와 이과(자연계) 선택을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하였다. 수학을 좋아했던 필자는 큰 생각 없이 이과를 선택했다. 당시 국어선생님이셨던 은사님께서는 계열 선택 이후 매 시간 들어오셔서 문이과 선택에 대해 손을 들게 하셨다. 필자는 당연히 이과에 계속 손을 들었었다. 다섯 번째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필자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그리고 필자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문과를 추천해주셨다. 만약 그때 선생님께서 계시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필자는 있을 수 없다. 필자는 지금까지의 선택 중에서, 또 앞으로의 선택 중에서도 그때의 선택만큼 최고의 선택은 없다고 확신한다.필자는 확신에 찬 그때의 선생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필자는 그 모습을 닮은 교사가 되기 위해 교직을 선택하였다. 하지만 나름 노력한다고는 하고 있지만, 은사님의 근처에도 못가고 있다. 필자에겐 그래도 기억할 선생님이라도 계신데, 지금 우리 학생들은 어떨까? 감사함과 꿈이 부재한 교육계의 월급쟁이밖에 되지 않는 지금, 은사님과 학생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2019-05-22

개정교육과정과 지방 차별

조현명시인·대동고 교사현 시행중인 2015 개정교육과정이 도입 된지 2년째다. 벌써 현 고2 학생들이 선택형과정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 학교현장의 혼란스러움은 이루 말 할 수 없다.문·이과를 폐지하고 통합과 융복합을 내세운다. 그런데 정작 과목 선택의 문제에 들어가면 문·이과 폐지라기보다는 더 수많은 계열로 세분화한 듯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현재 경북의 경우 자원의 제약으로 몇 개의 트랙을 나누어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는 학교가 많다. 이럴 경우 문·이과 통합이나 융복합은 의미를 잃는다. 자원이 풍부한 서울경기 일원의 학교는 다양한 교육과정을 갖추고 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것으로 지방은 특히 경북은 학생 선택형 교육과정으로 인해 중앙과 차별되기 시작했다.진로에 대한 강요는 큰 문제점이다. 개정교육과정은 1학년에서 선택과목에 대한 안내를 하면서 진로선택을 빨리해야 유리하다고 안내한다. 대학 4학년이 되어도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학생도 많고 진로를 바꾸는 학생도 많은 우리나라에서 고1에 진로를 정하고 선택과목을 정하여 맞추라니 매우 폭력적이다. 여러 가지를 탐색해보고 체험해보면서 개척능력을 신장해가는 것이 진로교육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인데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진로선택과목이 학생부종합전형과 관련되어 잘못선택하면 불이익이 주어질 거라는 불안감만 늘어가고 있다.프로젝트수업이나 토론 수업 등 학생참여중심의 다양한 수업의 혁신을 가져올 것, 과정중심의 평가로 학생들의 역량을 평가하고 능력을 기르는 방향으로 갈 것, 등 긍정적으로 보이는 내용은 많으나 정작 간과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중앙과 지방의 차이와 도시와 농촌의 차이 등을 고려하지 않은 발 빠른 도입이다. 무조건 바꾸라고 해도 쉽게 바꿔지지 않는 가치와 내용이 있다.정책이 잘 정착되어 열매까지 거두려면 국민 대다수의 여건이 따라갈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서울과 경기는 고교학점제를 후내년 2022년에 도입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지방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맹모삼천이라는 정신이 살아 있는 우리나라에서 중앙으로 전학시키려는 부모가 많이 나올 게 뻔하다. 개정교육과정의 도입과 고교학점제의 시행으로 상당히 중앙과 지방의 차이가 심화될 것으로 보여 걱정이다.학생들을 미래 4차 산업 혁명에 대비할 융복합인재로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성숙치 못하고 부모가 해주는 것 외에는 스스로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이끌어 주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길러야 한다. 선택과목으로 심화교육을 하기보다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힘을 길러주는 기본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복잡한 시대에 교육은 더욱 단순해져야 인재를 길러 낼 여유가 생길 것이다. 세상을 이해할 문리를 틔워줄 국어 영어 수학시간을 줄이고, 선택과목 심화과목을 늘려 배우면 미래인재가 된다는 발상은 뜬구름이다. 기본교육에 충실해야 미래인재가 길러진다.또한 학교 현장의 피로도가 증가하고 있다. 현재의 시스템만 해도 교사들이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새로운 교육과정이 도입되면서 교사가 더욱 어려워진다. 가르쳐야할 과목수가 늘어나고 더군다나 그 내용 또한 생소한 것들이 많아 어떤 내용을 가르쳐나가야 할지 걱정인 내용이 대다수이다. 그렇다고 교사 인원을 늘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교육연수 또한 매우 부족한 편이다.지금까지의 교육과정에 대한 기조는 철회할 수 없다하더라도 연장선상에 있는 교교학점제 도입에는 속도 조절을 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부작용이 많은 정책은 오랜 준비를 거쳐 시행하지 않으면 결국 실패할 것이다.

2019-05-21

여성정책 변화, 준비는 기회일 것이다

박은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개발실장‘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이 있다. ‘위기’와 ‘기회’는 다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것이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번영기를 이끌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인생에서 성공하는 비밀은 다가올 시간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다”로 사전 준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유비무한을 이야기한 많은 리더들도 준비를 강조했으며, 특히 미국 여성 방송인인 오프라 윈프리는 “행운이란 준비와 기회가 만나는 것이다”라고 말하여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이처럼 현재 삶이 고단하고 주변 환경이 척박할지라도 스스로의 실력을 착실히 쌓으면서 미래를 준비하면 좋은 기회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렇다면 지역여성정책은 변화에 무엇을 준비하고 고민해야 하는가? 그동안 지역의 여성정책은 중앙의 여성정책 지침에 따라 일률적으로 정책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여성들의 사회·경제·문화·생활 욕구를 반영한 풀뿌리 지역생활 밀착형 여성정책을 성실하게 준비하지 못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각종 성차별적 관행, 가사 및 육아에 대한 부담 등으로 인해 성별 직종분리, 그리고 성별 임금격차, 고위·관리직에의 여성진출 미약 등 경제활동의 질적인 측면에서 많은 취약점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여성정책은 여성 복지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다가 1980년대 들어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여성정책 형성 이후 사회적 구조적 변화에 따라 여성의 역할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점검과 준비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첫째, 가족구조의 다양화이다.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이혼율이 증가하며 1인가구가 늘어나고 있으며, 다문화 가족도 증가되었다. 여성의 고령화 현상에 따른 여성노인의 사회적 소외문제도 커지고 있으며, 가족에 대한 새로운 개념 형성과 가족 간의 새로운 역할 정립과 생애주기별 맞춤형 여성정책이 필요하다. 둘째, 세계화에 따른 여성참여 확대이다. 남녀평등 사상을 보편화함으로써 양성평등이 국제사회의 주요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사회변화와 문화의 다양성, 더불어 전반적인 사회 민주화와 인권 문제에 관심이 커져서 보다 더 평등 의식이 확산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보다 미래지향적이고 변화에 대응하는 여성정책 수립이 꼭 필요하다. 셋째, 제4차산업혁명시대, 여성의 역할 증대이다. 점차 남녀 간에 노동의 질적 차이가 줄어들고, 서비스 경제화가 더욱 심화될 것으로 판단된다. 단순한 관리가 아니라 개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변화에 대응하는 조직 원리가 요구됨으로써 섬세한 지도력이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책환경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여성능력 향상과 인력 활용에 적극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야 한다.현재까지도 많은 정책들은 여전히 여성의 전통적 역할을 전제하거나, 전통적 역할에서 나오는 욕구에 과도하게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더 나아가 여성과 직접 관련된 법안, 가족 및 아동과 관련한 의제들은 성인지적인 접근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비율 역시 증가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인력의 활성화와 사회참여의 기회가 없이는 국가는 물론 지역사회의 경쟁력을 기대할 수가 없다고 본다. 지역발전의 원동력은 남녀가 공동으로 사회발전에 참여하고 책임을 분담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 지역사회 저변의 뿌리 깊은 성별 간 차별의식과 관행을 개선하고, 성불평등과 평등전략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공될 것이며,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기회일 것이다.

2019-05-16

스승의 날 없는 5월 학교를!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폭풍 같은 시험이 휩쓸고 간 5월 학교! 덤불처럼 이리저리 나뒹구는 시험지들이 교실이 사막임을 증명해준다.학생들의 수많은 밤을 앗아간 시험! 휴지통에 처박힌 시험지들은 학생들의 한(恨)이 서린 몸부림을 꼭 기억하라고 시위를 하고 있다. 시험 시간이 끝나면 바로 사라지는 시험용 지식들에 우리는 왜 그토록 목숨을 거는 걸까? 불모의 땅 사막으로 변해가는 교실! 과연 우리는 사막 같은 교실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또 무엇을 배울까? 분명한 건 지금 학교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믿음, 행복, 소통, 배려, 존중 등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언젠가부터 교육계를 비롯한 사회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위에 나열된 단어들이지만, 학교 현장에는 불(不)자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교육계엔 불신(不信), 불행(不幸), 불통(不通), 불안(不安), 불만(不滿) 등만이 가득하다. 교육 감독 기관에서는 자유학기제, 미래역량을 키우는 학생 참여형 수업 확대, 과정중심 평가 확대 등 교육을 살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지만, 그 효과는 “글쎄요?”다.상처는 만질수록 덧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현 우리 교육계의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 교육계는 낯선 정책들로 큰 혼돈에 빠졌다. 어떤 정책이든 내용이 나쁜 것은 없다. 문제는 그 정책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묻고 싶다, 과연 우리 교육현장은 학생 참여형 수업과 과정중심 평가 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필자가 보기에는 학생들은 둘째치고라도 교사와 학부모, 우리 사회가 아직 준비가 많이 덜 된 것 같다. 말로는 학생들의 능력과 소질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일류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시험 성적으로 많은 것이 결정되는 게 우리 사회이다. 사회가 이렇다보니 학부모와 교사도 시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어쩌면 집과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시험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학교에 무슨 희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상당수 학부모들은 학교를 단지 졸업장을 받기 위한 통과의례 장소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에겐 학교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정말 어쩌다가 공교육이 이 지경까지 왔을까? 공교육은 심각한 문제의 늪에 빠졌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제를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인식부터 잘못되었다. 그러니 제시된 해결책들은 모두 오류투성이다. 해결책이 오히려 더 큰 혼돈을 야기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교육계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와버렸다.그러면서 교육계는 주인을 잃고 말았다. 아니 주인이 공교육을 떠나버렸다. 주인 없는 교육계를 점령한 세력은 정치꾼들이다. 정치꾼들은 경제 논리로 교육계를 자신들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난도질 하고 있다. 그들에 의해 오늘도 학교는 삭막한 정치판으로 변해가고 있다.삭막한 학교와는 달리 5월의 자연은 거리마다 아카시 향으로 가득하다. 달달한 아카시 향만으로도 사람들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감사의 달 5월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런데 학교는 그마저도 못한다. 정말 누구 하나 환영하지 않는 스승의 날 때문에 교사, 학생, 학부모 모두가 고통을 받고 있다. 학교 현장에서 사라진 말 중 하나가 사제(師弟)라는 말이다. 사제가 없어진 마당에 스승의 날이 과연 필요할까? 학교에 대한 불신만 키우는 스승의 날을 기념일에서 과감히 삭제하면 어떨까? 그러면 조금이라도 학교에서 숨을 쉴 수 있지 않을까? 스승의 날에만 하는 형식인 감사 인사가 아니라 평소에 교육 주체들이 서로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하는 문화를 만들면 어떨까?

2019-05-15

스마트세상은 모두에게 환영받을까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얼마 전 지역 공무원 대상 특강에서 있었던 일이다. 언제나처럼 강의에 온통 열정을 쏟아 부은 후 방전된 상태로 걸어 나오는데, 수강생 한분이 본인 담당 업무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았다.심사를 일주일 정도 앞둔 마을 공동체 혁신 사업 건에 대해 스마트시티로 연계 가능한 부분이 있을지 의견을 듣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강의 중에도 얘기한 스마트시티의 특성을 다시 설명드리며, 일정이 너무 촉박해 보이니 이번에는 당초 계획대로 진행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지만 거듭 부탁하시는 통에 시간을 내어 도움을 좀 드리기로 했다.준비된 내용을 받아서 동료 교수님들과 함께 꼼꼼히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목표로 잡은 아이템은 스마트 기술의 활용과는 거리가 멀었고, 심사를 며칠 앞둔 상황에 방향을 바꾸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당장은 도움이 안 될 것이 분명했지만 향후에라도 참조하시라는 뜻으로, 우리가 가진 솔루션 목록을 보내드렸다. 잠시 후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 도움에 대한 감사의 인사나 후일을 기약하는 말씀을 기대한 내 기대와는 달리 목록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고 대부분 ‘시기상조’인 것같다는 부정적 의견만이 돌아왔다.반응이 예상된 일이었지만 나는 고민에 빠졌다. 스마트시티는 그렇게 카탈로그를 넘겨보며 남이 만들어 둔 기성품을 쇼핑하듯이 쉽게 단숨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문제와 혁신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가진 시민과 전문가가 팀을 이루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가야 하는 혁신활동 그 자체라는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감해졌다. 다음 강의에서는 이점을 한 번 더 강조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바로 스마트시티를 비롯한 첨단 기술 기반 산업의 본질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어떤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의 잠재력만을 보고 먼저 받아들이거나 투자를 하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현재의 방식을 최대한 유지하기를 원하고 따라서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는 소극적, 방어적이 된다.첨단 기술 기반의 창업 기업들을 ‘벤처’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신기술의 등장 초기에는 그 산업적 파괴력을 예견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이런 경우의 선제적 실행이나 투자는 일종의 모험이라 할 수 있다.모험에 따른 실패의 가능성 때문에, 먼저 움직이는 것이 항상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설익은 첨단기술의 실패사례는 세계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한때 화려하게 등장하여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사라진 개인휴대용단말기(PDA), 넷북, 3D TV의 실패와 몰락은 겨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실제로 첨단제품의 시장 성숙도 곡선 상에는 소위 얼리어답터의 성공 다음에 따라오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는 것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그러나 만약 그 예상이 적중한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 먼저 움직인 모험적 성향의 사람들은 그 혜택을 먼저 누리고 많은 수익을 올린다.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다시 짜며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후발 주자들과의 격차를 더 벌여 간다. 한편 그 가치가 확인된 후에야 비로소 움직이는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누군가가 치밀하게 짜 놓은 판과 복잡한 규칙에 맞추어 따라가느라 그 혜택을 누리거나 수익을 얻을 기회도 현저히 줄어든다.변화의 바람은 언제나 거세고 차갑다. 휘몰아쳐 오는 바람 앞에서 이솝우화 속 나그네처럼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방어하려는 본능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금세 바람이 그치고 약속한 듯 따뜻한 해가 비치는 것은 동화 속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옷깃만 부여잡고 해가 비칠 날만 기다리는 것은 변화무쌍한 4.0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잘 살펴서, 필요하다면 돌아서서 그 바람을 이용할 줄도 아는 현명한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2019-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