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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의 반격

등록일 2019-02-06 19:35 게재일 2019-02-0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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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어머니 뜻대로 분칠하는 바람에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르고 근 50평생을 살아왔잖아요? (중략) 그깟 병원장이 뭐라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허깨비가 된 건 같다고.”

‘캐슬’의 절규 중 하나이다. 50대 잘 나가는 의사의 절규. 비록 ‘캐슬’은 종료 되었지만 아직도 허깨비라는 말이 메아리가 되어 귓가를 맴돈다. 의사이면서도 성공에 눈멀어 자신의 딸을 죽게 한 마마보이의 절규이지만, 그 절규의 깊이는 남다르게 보였다. 그 절규가 필자의 내면 깊숙이 잠자고 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흔들어 깨웠다.

“당신 얼굴이 뭔데요? 어머니 아들, 예서 아빠, 내 남편, 주남대 교수. 그거 말고 당신 얼굴이 뭐가 더 있는데?”

“강준상이 없잖아, 강준상이!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캐슬 부부의 대화이다. 앞의 말은 오로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전형적인 이 나라 부모의 마음이다. 그리고 뒤의 말은 드디어 자아정체성에 대해 눈뜬 외로운 영혼의 모습이다. 정말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한서진(예서 엄마)처럼 대답할지 모른다.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하고 누구의 아들, 누구의 엄마 아빠로 산다면 우리는 가까운 시일 내에 강준상(주남대 교수)이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울부짖는 다음의 절규를 똑같이 들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랑 제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요.”

유명 대학 병원의 차기 병원장 후보라면 외형적으로는 분명 성공한 인생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강준상은 울부짖음으로 말하고 있다. 분명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다. 그리고 외형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도 사회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사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런데 불편한 진실은 그런 사람들보다 성공 도착증(倒錯症)에 빠져 사람으로서 가져야 될 기본 소양도 못 갖춘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강준상의 절규를 인용한 이유는 잘못된 인생을 사는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부모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과연 나는 어떤 부모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면 자식들로부터 강준상보다 더 큰 원망을 들을 지도 모른다.

“당신도 욕심내려 놔. 예서 인생하고, 당신 인생은 다른 거야.” 울부짖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강준상이 아내 한서진에게 한 말이다. 필자는 지난 주 거리(距離)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이 나라 사람들은 부모, 그 중에서 학부모가 되는 순간 거리감각을 잃어버린다. 특히 자녀와의 거리 관계에서는 자녀를 자신과 동일시 해버린다. 그래서 자녀의 의중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녀를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 한다. 그러는 순간 아이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로봇이 되어 부모가 입력한 명령어대로 움직인다. 아이들이 자신의 말대로 완벽하게 원격조정될 때 부모들은 자신들이 정말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강할수록 아이들의 개성은 빠른 속도로 죽어간다. 그리고 결국엔 빈껍데기만 남는다. 그 모습을 드라마는 놓치지 않고 극적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혹 아이들의 절규가 들리는가!

“어머니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해서 학력고사 전국 1등까지 했고, 어머니가 의대 가라고 해서 의사 됐고, 어머니가 병원장 되라고 해서 그거 해보려고 기를 쓰다가 내 새끼인지도 모르고 혜나 죽였잖아요. (중략) 날 이렇게 만든 건 어머니라고요. 지 새끼도 몰라보고 출세에 눈이 멀어 그까지 병원장이 뭐라고. 낼모레 쉰이 되도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놈으로 만들어 놨잖아요. 어머니가….!”

위의 절규는 필자가 뽑은 캐슬의 최고의 절규이다. 필자는 이 장면을 보고 심장이 멎는 듯 했다. 과연 필자의 아이들은 물론 학생들이 필자에게 이렇게 따지고 들면 필자는 과연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캐슬의 절규가 곧 현실이 될 것 같은 생각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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