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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디어 위너

강길수수필가영문 이메일을 받았다. 어마어마한 내용이다. 만일 사실이라면, 나는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다. 정말 행운의 소식이면 좋겠다.이메일은 영문 ‘디어 위너(Dear Winner)’로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당첨자’라니, 우선 기분이 좋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내용을 대충 살폈다. 내 이메일 주소가, 올해 자사의 이 메일 프로모션에 당첨되어 축하한단다. 당첨금이 원화로 환산하니 무려 150억 원이나 되었다. 일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체 내용을 빨리 알기 위해, 인터넷의 영문번역기에서 전문을 우리말로 바꿔보았다. 따로 추첨에 참여하거나, 티켓을 끊을 필요는 없단다. 단지 이름, 주소, 나라,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만 답신으로 보내면 된다고 했다.기분이 이상해졌다. 번역문을 읽으며 ‘스팸’, ‘피싱’ 같은 단어들이 함께 떠올라서다. 스팸문자, 스팸메일, 보이스피싱 등 사기(詐欺)나 범죄에 이용되는 통신수단에 당했다는 보도나 사례들을 많이 보았다. 우리 집도 보이스피싱을 몇 차례 겪은 적도 있다. 그러니 은연중에 스팸이나 피싱에 대한 대응력이 생겼으리라.스팸메일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이면 좋겠다는 바람(望)도 마음 한구석에서 명지바람으로 일었다. 달콤한 유혹이다. 이율배반이다. 햄릿 증후군이기도 하겠다. 머리로는 아닌 줄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끌리는 심리상태를 또 경험한다.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이 조화롭다면, 스팸메일이란 판단이 들었을 때 지웠어야 했다. 내 속물근성이 이 이메일 앞에서 또 이빨을 드러내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속 갈등을 한다.“그래, 다른 이들도 같은 사례가 있나 찾아보자!”내부 갈등의 타협안이 제시되면서, 내 손가락은 저절로 웹사이트를 뒤지고 있었다. 작년에도, 올해도 똑같은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는 사람의 글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작년 것은 금액이 올해보다 적었지만, 올해 것은 금액도 같았다. 전자는 상담을 받는 것이고, 후자는 어떤 카페에 올린 글이다. 후자의 경우, 끝에 독자들과 댓글을 주고받으면서 결국 답신 메일을 보내고 말았다는 게시자의 고백도 있었다.쓴웃음이 났다. 이성과 감성이 이런 상황에서도 싸운다.“이봐! 스팸메일이 맞잖아? 괜히 헛꿈을 꾸었어. 시간도 버리고….”“잠시 행복했잖아? 그러면 된 거지. 뭘 그리 따지고, 불평하는 거야?”처음 복권을 사던 날이 떠올랐다. 주택복권이다. 아마도 70년대 중반쯤이었을 거다. 확실한 날짜를 알려고 일기장을 한참 뒤졌으나, 못 찾았다. 아마 회식을 마치고, 얼큰한 기분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으리라. 회식 중 동료들과 복권에 대해 갑론을박하다가 ‘복권은 바로 행운 부르기’란 말에 이끌려, 난생처음 100원짜리 주택복권 두 장을 손에 쥔 날이다. 술기운에, ‘이 복권으로 내 집을 살 것이다!’라며 의기양양하게 발길을 뗐었다. 조금 걷다가 어느 순간, ‘나도 그만 사행성 탁류에 휩쓸리고 말았구나!’ 하고 깨달으며, 하룻저녁에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기억이다. ‘근면, 자조, 협동’의 역동적 사회 구조 안에서, 그 시절 내 눈엔 복권은 사행성의 징표일 뿐이었다.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젠 복권을 사행성 징표나, 노름같이 보는 시각은 사라졌다. 어떤 지인은 투자라며, 봉급을 타면 내 기준엔 제법 많은 일정 금액의 복권을 샀다. 문제는 ‘디어 위너’처럼 공적 복권을 사칭한 스팸메일 등, 사기를 치기 위한 정보가 횡행한다는 사실이다. 4차 산업 시대니, 5지(G)시대니 하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사회의 정보기술 환경에 따라가기도 힘든 현대인들이다. 그들이 스팸이나 피싱 같은 사기에 시달리는 상황에 놓인 것은 대체 무얼 말해주는 걸까.“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말이 있다. 인간과 생명은 아니, 만물은 이 말처럼 살고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우주 안 모든 존재의 존립 양상이 어찌 보면, ‘죽기를 각오하고, 모든 힘을 다하여 살고 또,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을 다잡아야, ‘친애하는 당첨자’처럼 달콤한 사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진정한 ‘디어 위너’만 있는 세상이 그립다.

2020-09-09

낭만에 대하여

배문경 수필가가을은 축제가 많은 계절이다. 축제기간 동안 경주는 능위에 늙은 느티나무가 멋진 봉황대에서 여러 행사가 있다. 금요일 저녁마다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가수들을 초청해 콘서트를 연다.이번 초대 가수는 최백호다. 그가 온다는 광고는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달력에 큼직하게 표시하고 함께 갈 동생과 약속도 해두었다. 기다리는 며칠 동안 여고생이라도 된 듯 설렘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 나를 누가 보았다면 발이 10센티는 붕 떠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리라.당일, 봉황대로 향하는데 소나기가 쏟아졌다. 갑작스런 비에 놀란 사람들이 제법 긴 줄을 서서 편의점에서 나처럼 우의를 샀다. 이런 큰 공연을 앞두고 비라니, 그만 힘이 쏙 빠졌다.도착했을 무렵 사람들이 천막 안과 빗속에서 우의를 입은 채 기다렸다. 멋진 공연을 기대해서인지 비를 핑계 삼아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그가 나타날 무대를 응시했다. 무대에는 연주자들이 악기를 조율하고 개그맨이 싱겁게 시간을 메우느라 너스레를 떨었다.초록의 능, 비로 짙어진 봉황대에 조명이 들어왔다. 순간 환상이 펼쳐졌다. 굽은 나무와 어우러진 왕릉을 배경으로 나타난 반백의 사내, 그는 오랫동안 보아온 지인처럼 자연스런 모습으로 등장했다. 박수와 함성이 쏟아지고, 가을비도 쏟아지고, 이전의 음악에서보다 더 부드러워진 그의 목소리가 관객들의 머리 위로 축복같이 쏟아졌다.얼굴에 내리는 것이 빗물만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깊은 노래의 울림을 통해 빚어진 눈물은 무수한 감정들의 찌꺼기들을 녹아내리게 했다. 날마다 차곡차곡 쌓여 무게를 가늠할 수 없던 스트레스와 인연이 만든 희로애락이 더 짙은 애수를 자아냈다. 이후 점점 가벼워지며 콧노래를 부르다가 다시 뜨거운 빗물이 흘러내렸으니 노래의 힘은 대단했다. 삶의 부스러기들이 한꺼번에 잘게 부서져 공중분해 되는 느낌이었다.그는 트로트가 대세였던 시절에 포크 록발라드로 인기를 끌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발표하며 우리에게 다가왔고, ‘영일만 친구’로 가수상을 받았다. 싱어송라이터가 드물던 시절에 독특한 창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노래를 읊조렸다. 라디오 DJ로도 활동범위를 넓힌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시대를 넘어 아직도 사랑을 받고 있다.그는 정규교육에서 썩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부 잘한 친구들은 지금 퇴직해서 놀고 있다며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초로의 사내. 스스로 노래 속에서 새처럼 구름처럼 자유로워지는 그를 보았다. 무대가 끝나갈 즈음, 빗물이 그의 눈에도 흘러 들어간 모양이다. 그가 천막의 기둥에 슬쩍 기대서서 간주곡 사이사이에 먼 곳을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가 외로운 것처럼 그도 비 오는 날, 그림자조차 없이 하나로 서있었다.청바지가 아직도 잘 어울리는 일흔의 그가 아흔에도 노래를 부르겠단다. 박수가 쏟아졌다. 가수에 대한 응원이자 나의 내일에 대한 응원이다. 내 나이가 그의 나이가 되었을 때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낭만적이다. 마지막 곡은 역시 ‘낭만에 대하여’였다. 그의 노래 위로 꽃가루가 흩뿌려졌다. 도라지 위스키의 알싸한 향기가 우리 주위를 감쌌다.낭만, 그것은 영화이거나 음악이거나 답답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줄 그 어떤 것이다. 다양한 악기가 내는 미묘한 울림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달콤함, 이 모든 것이 낭만이었다. 나이만큼 어쩌면 우린 잃어버린 과거, 잊혀 진 과거의 추억, 인생이 뭔지 알 나이가 된 사람들의 낭만이었다.오늘 낭만에 대한 그의 노래를 들었다. 짧은 단상과 그의 팔짱을 끼고 옆자리에서 한 컷 찍는 영광도 얻었다. 무르익은 가을밤의 축제에 감사했다. 궂은 비 내리던 날,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느껴보는 낭만이다.

2020-09-02

아버지가 낚은 사랑

정미영수필가이른 새벽, 흥해 용연지에 도착했다. 새벽바람의 기척으로 해가 물속에 풀어지자, 졸고 있던 물고기들이 햇귀와 타전을 시작했다. 물빛 그리움 하나 가슴에 구겨 넣고 찾아왔더니, 내 마음에 곰비임비 막혀 있던 응어리들이 무게를 덜어냈다.수풀 사이에서 한 아저씨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물속을 응시한 채 꼼짝 않고 앉아 있어 조심스레 가까이 가보았다. 그물망에 작은 물고기 서너 마리가 파닥거렸다. 은빛 물고기를 바라보는데 문득 친정아버지가 떠올랐다. 검게 탄 얼굴로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 붕어를 낚던 생전의 아버지 모습이 오롯이 겹쳐졌다.어느 해 여름, 어머니가 갑상선 수술을 받았다. 어린 남매를 건사하고 병수발은 물론 집안일까지 모두 아버지의 몫이었다. 그즈음 아버지의 낚시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를 따라 간간히 절에 다녔던 아버지는 이전까지 낚시를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수술한 어머니에게 참붕어가 약이 된다는 소리를 듣고는 곧장 가느다란 낚싯대를 빌려왔다.나는 펄떡이는 노르스름한 붕어를 아버지가 직접 낚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아버지가 달랑 낚싯대 하나만 챙겨들고 집을 나서는 날이었다. 나도 따라가겠다며 떼를 썼다. 위험해서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버지의 손을 얼른 잡았다.낚시터에 다다랐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두세 번 지나자 제법 넓은 저수지가 나타났다. 저수지는 한가로웠다. 산그늘에 물빛이 더욱 짙어 보이는 곳이 있었고, 햇살이 비쳐 물비늘이 반짝이는 곳도 있었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 몇 장이 물살에 일렁거렸다.아버지는 나에게 낚시를 할 때는 조용히 있어야 된다고 했다. 하지만 신신당부의 말도 내게는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왜 떠들면 안 되느냐고, 물 위에 떠다니는 저 새 이름은 무엇이냐고…. 묻다가 지치면 동요를 불렀다. ‘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 노래는 끝없이 이어졌다. 알고 있는 노래를 다 부르고, 다른 노래가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불렀다.그때쯤이면 저수지는 다시 고요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따라 아버지와 나뿐이었다. 나는 소금쟁이가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것을 열심히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이따금 나에게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묵묵히 찌를 바라보며 낚시질만 했다.한참 지났다. 아버지는 작은 물고기는 물에 도로 놓아주고, 손바닥 크기의 붕어들만 집에 가져왔다. 붕어를 손질해서 찜통에 넣고 푹 고았다. 가스 불 옆에서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행여 넘칠세라 정성을 다했다. 비린내가 나면 어머니가 먹지 못할까 봐 참기름을 듬뿍 넣고 들깨가루도 넣었다.“참붕어 국물은 약이라고 하더라. 식기 전에 후딱 마셔라.”“부처님을 믿는데….”“내가 붕어 잡기 전에 부처님께 약속했다. 당신 약으로만 쓴다고.”핼쑥한 얼굴의 어머니는 뜨거운 국물을 쉬엄쉬엄 마셨다. 아버지의 낚시질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집안에는 붕어 고는 진한 냄새가 배다시피 했다. 그 덕분인지 어머니는 차츰 건강을 회복하였다.저 낚시꾼도 예전의 아버지처럼 누군가를 위해 고기를 잡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재미 삼아 낚시질을 하는가. 가까운 나무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간 저수지에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그 때 아버지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흘러가는 구름에 근심을 실어 보내고, 불어오는 바람에 고단함을 딸려 보냈을까? 나는 깊은 물속을 들여다보며 아버지와 나만의 또 다른 추억 조각들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퇴적된 기억들이 한순간 튀어 올라 수평선 밖 허공을 맴돌았다. 순간 내 가슴 가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고였다.용연지의 바람이 내 마음을 눈치 챈 듯 잔잔하게 윤슬을 일으키며 흘렀다.

2020-08-26

살아내기

강길수수필가얼마나 아팠을까. 나 같으면 까무러쳐 깨어나지도 못했을 테다. 그런데도 다시 몸을 추스르고, 연녹색 맑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의젓해 보인다. 도대체 생명이 무엇이기에, 저토록 억척스러운가.며칠 전 땀을 훔치며 이 곁을 지나갈 때다. 방금 풀을 베었는지 향긋한 풀냄새가 팔월 상순 대낮의 더위를 봄 나비 날개처럼 팔랑팔랑 날려버렸었다. 이 녹지 곁을 하루에 두서너 번은 지나다닌다. 출퇴근과 점심 먹으러 갈 때 다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엔 주로 자전거로 오가지만 그 외의 철엔 걸어서 지나간다.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을 초지로 만든 곳이기에, 자라나는 아이들과 푸른 녹지가 잘 어우러져 저절로 관심을 끌었다. 지금 팔월 초순인데, 내 기억엔 올해 벌써 두 번째 전체 풀베기를 하였다. 교장 선생님이 바뀌었는지 학교 관리가 아니라면 해당 행정기관의 배려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지난 늦봄, 오월 하순께도 풀을 베어냈었다. ‘아직 가을은커녕 채 여름도 되지 않았는데, 웬 벌초인가. 이상하다.’고 그때 생각했었는데 두 달여 만에 또 베어냈다.풀베기를 시킨 이들은, 녹지를 더 깔끔하고 아름답게 유지 관리하기 위해서 베었을 것이다. 하지만 잎과 줄기가 한해살이인 잔디, 쑥, 클로버, 민들레, 개보리 그리고 이름 모르는 외래종들로 어우러진 풀밭이다. 내 생각엔 베지 않고 그냥 한해를 다 살도록 놔두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기도 좋을 것이다. 자연은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지 않은가. 어릴 때 산골에서 자라나며 겪은 삶은 그야말로 있는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것이었다.풀들은 영문도 모르고 한순간 땅 위 몸이 댕강 잘려 나갔다. 그 고통과 상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풀들은 몸을 여미고 재기(再起)를 시작한다. 잘린 경계면 아래 잔디 잎은 끝이 조금 마르며 그대로 자라나고, 곁엔 봄 새싹 같은 순이 다시 돋아난다. 지난 늦봄 벌초를 당했을 때도 풀들은 슬픔을 이겨내고 곧바로 녹지에 정갈한 연록 새봄을 연출하였었다. 오가는 이들과 운동을 하거나 쉬는 사람들, 나아가 날아드는 참새, 까치, 비둘기, 애완견까지 즐겁게 해 주고도 남았다. 특히, 아침 출근길에 새 고사리손마다 동녘햇빛 머금은 영롱한 이슬을 앙증스레 쥔 풀들의 영접을 받는다는 것은, 나에겐 생명의 본모습을 만나는 행운의 시간이다.한여름에 몸 잘린 풀들은 또 하나의 새봄을 이 녹지에 공연하려는 준비가 한창이다. 새싹이 여름의 더위를 잘 이겨낼지 모르지만, 몸을 여미는 모습을 보노라면 틀림없이 한여름의 새봄을 선물할 것이다. 그리되면 나는 한 해에 세 번의 봄 새 생명을 만나는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될 터다. 비록 날씨 탓에 이슬 머금은 모습은 못 만날 지라도 한여름에 새싹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한데, 왜 풀들의 고통 앞에서 내 마음이 달떴던 것일까. 호모사피엔스 이래, 조상 대대로 연연히 풀을 먹으며 살아온 사인인 까닭일까. 제 뜻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결정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예초기의 무서운 날에 몸이 반 토막 난 상황. 그 황망함은 보이지 않고, 보려고도 애쓰지 않지 않았는가. 내가 풀이라면, 두 번씩이나 몸이 잘려 나간 처절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고해의 세상에 무에 미련이 있어, 또다시 살아가려 한단 말인가.마음의 눈에 풀들이 다시 살기 위해 새마을사업이라도 하듯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땅속 물을 빨아들이고, 공기의 이산화탄소를 붙잡아 몸의 탄소동화작용 공장을 가동한다. 설비에서 연록 새잎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새잎은 모양을 갖추며 고사리손이 된다. 손은 땅을 솟아오르며 새봄을 부른다. 공장 가동 소리가 아카샤 기록(Akashic records) 동영상으로 이렇게 저장되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들은 사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살아낸답니다.”라고…. 그랬구나! 풀들이 아름다운 것은, 삶을 살아가지 않고 살아내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몸이 몇 번을 잘리거나 훼손당해도 또 일어서고, 새로 태어나는 삶을 바지런히 살아내고 있었던 거야.올여름 녹지에 태어날 새봄 고사리손엔, 아마도 하늘 빗물이 송골송골하겠지….

2020-08-19

밤바다 산책

윤영대수필가요즈음 중부 지방에는 폭우로 내리붓는 장맛비에 온통 물난리인데 여기 포항은 연일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계속되고 열대야가 밤잠을 못 이루게 한다. 코로나19로 답답해진 마음에 밤바다를 거닐고 싶어 영일대 해수욕장으로 산책을 나가본다. 바닷가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아파트를 나서면 벌써 시원한 바닷바람이 얼굴에 와 닿고, 골목길 빠져 해변 도로를 걸어보면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예년 같으면 방학에 피서철이라 발 디딜 틈도 없을 인파가 저 바닷가 파도처럼 일렁일 텐데…. 멀리 까만 바다 끝에 반짝이는 불빛은 호미곶인지 떠 있는 배들인지 정답게 다가오고, 수평선에 떠오른 보름달은 바다와 거리두기를 하는지 구름 마스크를 쓰고 하늘 높이 떠 있다.넓은 모래밭에는 젊은이들이 쏘아 올리는 불꽃 터지는 소리와 물가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산책길에는 가족끼리 또는 연인끼리의 걸음들이 모두 가볍고 길가에 앉아 서로 속삭이거나 혼자 생각하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도 해변의 낭만이다.사람들과 섞여서 천천히 걷다가 모래밭으로 내려서면 마르고 푹신한 느낌이 좋다. 아예 신고 간 샌들을 벗고 맨발로 걸으니 사각거리는 모래의 감촉이 아스팔트 길에 잊어버린 발바닥의 촉감을 찾아준다. 내친김에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용히 밀려오는 밤바다의 물결 소리가 종일 TV 소리에 지친 나의 귀를 간지럽히고, 두 발에 전해오는 차가움은 가슴으로 올라와 온몸의 열기를 식혀준다.바닷물에 세족(洗足)을 하니 생각난다. 8월 4일은 음력 6월 15일, 유두절(流頭節·유둣날)이다.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이라 동쪽으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나 폭포수에 몸을 씻고 머리를 감고 친척들과 떡이나 전을 먹으며 유두잔치를 하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고 병이 없다는 신라 때 명절인데 잊혀져가는 옛 풍습이 아쉽기만 하다. 그러고 보니 영일만으로 흘러들어 오는 형산강이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라 ‘잘 됐구나’ 하며, 오늘 저녁 유둣날의 기분에 한껏 젖어보았다.바닷물에 발 담그고 돌아서서 해변 야경을 보니 알파벳과 외래 이름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어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요즘 해외여행이 발 묶여버린 마음에 언젠가 가봤던 기억의 어느 외국 해변 풍경을 그리며 그곳에 와있노라고 상상해보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모래밭에는 매년 만들어 놓는 모래 작품들도 볼거리다. 섬세하게 쌓아 올린 이름난 건축물 조각상 앞에서 흐르는 불빛 따라 즐겁게 사진을 찍는 모습 또한 행복해 보인다. 발의 모래를 털고 다시 길로 올라오면 즐비한 스틸아트 작품들이 포항의 얘기를 들려주는 듯 밤의 산책을 즐겁게 한다.해변 끝에서 높고 좁다란 방파제에 올라 운동하러 나온 주민들의 씩씩한 발걸음을 따라 끝까지 걸어 가본다. 빨간 등대 불이 깜빡이는 어둠의 배경은 7, 80년대 형산강의 기적을 만든 포스코, 옛날 그 힘찬 용광로의 불꽃은 다 어디로 갔는지 옛 함성을 반추하듯 초대형 전광판의 글자가 길게 늘어져 지나간다. 나는 그 전광판에 새기고 싶다. ‘포항의 영광을 되찾자.’ 그리고 등대 벽에 낙서한 연인들의 마음을 읽으며 통통거리며 들어오는 고깃배의 만선을 빌어본다.돌아오는 길, 200여 그루의 곰솔 숲 앞을 걸으면 풀잎 지붕의 둥근 테이블마다 바닷바람을 쐬며 술이나 음료수를 마시며 이야기를 즐기고 있는 모습도 흥겹다. 그런데 모든 공연이 금지된 버스킹 무대에는 할머니 몇 분이 손주들 재롱을 즐길 뿐이다. 모래밭에 줄지은 천막은 비어있는 듯하지만 길가 술집과 커피숍은 그래도 젊은이들로 북적이는데 실내 금연이라 밖에 모여 피워대는 모습도 안쓰럽지만 그들이 버린 꽁초가 쓰레기 더미와 함께 하얀 애벌레처럼 밤길에 나뒹구는 광경은 하루의 마음을 정리하며 밤 산책하고 돌아오는 마음을 무겁게 한다.영일대 누각에 올라 보석처럼 반짝이는 해변의 불빛을 가르며 내 달리는 제트보트의 날렵한 질주를 눈에 담고 집에 돌아와 폭포수처럼 틀어놓은 샤워기로 젖은 땀을 씻고 유둣날의 복을 빌어본다. 남은 말복에 더위 먹지 말기를…. 지난 7일이 입추(立秋), 벌써 가을이 오는가 보다.

2020-08-12

포항우체국, 추억을 갈무리하다

정미영수필가포항우체국 풍경이 역동적이다. 우편번호를 찾는 눈길과 주소를 쓰는 손길이 분주하다. 오고가는 발길이 끊어지지 않자 우편물은 자루 가득 담긴다. 분분한 사연들이 제비 떼처럼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문득, 며칠 전 읽었던 신문 기사가 떠오른다. 포항우체국은 1905년 6월 9일 연일임시우편소로 개소한 이래 올해 115년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포항우체국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오랜 세월동안 소식을 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든든하게 수행하고 있다.사람들의 모습을 눈여겨본다. 상기된 얼굴로 편지를 들고 있는 그들에게서 달콤 쌉싸래한 표정이 느껴진다. 떨어져 지내는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지금 이 시간, 그들 누구도 타인처럼 낯설지 않다.학창 시절, 집집마다 전화기가 놓여 사람들이 드문드문 편지를 쓸 때에도, 나는 편지 쓰는 일에 열심이었다. 친구가 바닷가 고향 마을로 되돌아갔기 때문이었다. 편지는 전화가 없는 친구와 나를 이어주는 소통의 끈이었다.친구는 도시로 이사를 왔다. 배를 탔던 아버지가 풍랑에 휩싸여 돌아가셨기에 어머니가 포구에서 힘들게 일했다. 하지만 접힌 삶은 곧게 펴지지 않았다. 도시 공장에 나가면 수월하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먼 친척의 말을 믿고 옮겨왔다.전학 온 친구는 반 아이들과 서먹서먹했다. 나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두 살 많고 늘 무표정이었기 때문에,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새 학기가 되어 내가 부반장이 된 직후였다. 부반장에게 솔선수범을 기대했던 선생님은 친구와 짝이 되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데면데면한 내 행동은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았다.어느 날, 수업을 마친 뒤였다. 친구는 나에게 자신의 집에 가지 않겠느냐며 조심스레 물었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친구의 단칸방에 들어갔을 때, 나는 한쪽 구석에 놓인 앉은뱅이책상 위의 불가사리들을 보았다. 친구는 여러 조각으로 잘라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불가사리가 마음에 들어 모았다고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는 불가사리를 닮은 것 같다. 불가사리는 단단한 석회질 속에 싸여 있지만 몸이 수분으로 되어 있다. 친구는 겉으로 강한 척했지만, 속으로 눈물을 가득 담고 있었는지 모른다. 빽빽한 가시를 지닌 불가사리처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표정이라는 딱딱한 가시를 달고 살았던 것이리라.친구의 어머니는 건강이 나빠졌다. 바다에서 나고 자랐던 어머니는 고향이 그리웠을 수도 있다. 결국 모녀는 바닷가 마을로 돌아갔다. 이제 겨우 서로의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는데…. 나는 그 후로 바닷가 소식 들려올 때면 친구를 생각하며 편지를 썼다.우정(郵政)은 우정(友情)을 이어주는 끈끈한 조력자였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닐 때에도 편지지 가득 낱말을 쏟아 부었다. 메마른 현실에 물꼬가 트이지 않을 때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 속이 후련했다. 삶의 목표가 흔들릴 때마다 마음을 내뱉고 나면, 옅어지는 의지가 다시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친구 또한 사연을 옹골지게 적어 나에게 보냈다. 마을버스를 타고 읍내 우체국에 나와 편지를 부치면, 젊은 가장으로서 짊어졌던 생활의 무게가 조금은 줄어든다고 했다.열려진 창문으로 노을빛이 찾아든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졌는데도 여전히 우체국 안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어쩌면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부치면서, 발신자와 수신자가 동일인이 아닌 사실에 감사할 수도 있다. 안부를 건네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인가.포항우체국에서 모처럼 추억을 갈무리한다. 흘러간 세월에 아랑곳없이 편지 행간에 스며있던 의미를 떠올리니 가슴 한 자락이 따스하다. 기억을 넘나드는 진실한 편지 하나 품고 있으니 살아가는 힘이 된다.나는 지금, 포항우체국 창가에 서서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띄운다.

2020-08-05

광복이의 3+1 뽀뽀

강길수수필가광복이의 첫 거울 뽀뽀가 삼삼하다. 동영상 안 거울에 비친 녀석의 얼굴 모습이 마음을 종잡을 수 없게 한다. 콕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온갖 느낌이 한순간에 파도로 몰려오니 말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이, 마음 밭에서 죽순처럼 돋아난다.동영상을 켜기 전 정지 화면은 이렇다. 녀석은 왼발을 쪼그리고 오른발은 주저앉은, 반 쪼그려 앉은 자세를 거울 앞에 취하고 있다. 얼굴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향하고 있다. 그 표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천진하면서도 진지하다는 말밖에 더할 수 없다. 왼손은 손가락을 펴서 거울에 대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를 반쯤, 검지는 다 폈다. 나머지 세 손가락은 오므리고 검지가 거울에 비친 얼굴을 가리키고 있다.동영상을 켰다. 녀석은 얼굴을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로 가져가 조심스러운 첫 뽀뽀를 한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입맞춤이다. 첫 뽀뽀의 느낌이 어땠을까. 비주얼로는 자기 입술이었으나, 막상 입술에 닿은 것은 딱딱하고 찬 유리면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녀석. 그래선지 두 번째 뽀뽀는 다소 세게 거울에 다가간다. 이번에는 입술뿐만 아니라 코까지 거울 유리에 콕 부딪친다. 조금 놀랐는지, 일순 멈칫한다. 울지 않으니 안 아프나 보다. 의아한 듯 녀석이 두 눈을 한 번 껌뻑인다.곧이어 세 번째 뽀뽀를 ‘응.’ 소리와 함께한다. 마음 깊이 즐거운가 보다. 그리곤 오른손가락으로 무슨 표식을 하는 듯하며 거울 앞에 주저앉아, 거울의 자기를 향해 몸을 움직이며 옹알이를 한다. 다시 허리를 숙이며 오른손 검지를 펴 거울에 댄다. 중얼거리듯 낮은 소리를 내면서 두 이마를 마주 댄다. 이어 노래 부르듯 뭔가 속삭인다. 다시 주저앉아 허리를 들썩이며 노래 같은 옹알이를 한다. 거룩해 보인다. 녀석은 거울 속의 자기를 친구로 알까. 아니면 자신을 알아보는 걸까.녀석은 잠시 거울 속의 자기를 응시하며 무언가 중얼거리다가, 첫 뽀뽀 때와 같은 자세로 다시 예의 진중(珍重)한 뽀뽀를 한다. 뒤풀이 인가보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무슨 소리를 내며 엄마 앞으로 돌아선다. 동영상은 여기서 끝이다. 녀석은 이 거울 놀이에서, 어떤 비밀을 보여준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삼세번 뽀뽀하고, 잠시 즐거워하다가 다시 한 번 뽀뽀를 한 뒤 자리를 뜨는 행동 양식 곧, 3+1 방식의 자기 뽀뽀. 꼭, 무슨 메시지를 담아서 내게 보내는 것만 같다.녀석은 무슨 마음으로 거울에다 뽀뽀했을까. 그것도 3+1 뽀뽀를…. 제 엄마가 발달 단계상 거울 놀이의 시기이기에, 녀석 앞에 커다란 거울을 놓아주었단다. 한데, 거울 앞에 앉은 녀석의 얼굴 표정이나 몸, 손발의 행동, 동작이 어른인 내 눈에는 전혀 노는 것 같지 않다. 장난기도 안 보인다. 어느 신실(信實)한 구도자(求道者)가 거울을 대할 때의 모습이 저럴까. 내 상상과 언어 능력으로는 도저히 제대로 표현하거나 묘사할 수 없는 장면을 녀석은 연출하였다.태명이 광복이인 이 녀석은 둘째 손자다. 첫돌이 아직 한 달 반 정도 남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발달단계로 보더라도 유아기다. 그러니 녀석의 표정이나 동작, 행동, 소리 등은 거의 본능 곧, 천부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시기이리라. 그렇다면 사람이 자신을 오롯이 만나는 일은, 원래 저렇듯 진지하고, 즐거운 일이란 말인가. 다 큰사람이 거울 앞에서 하는 양태(樣態)는 천태만상일 터. 어떤 성인이 거울을 두고 광복이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면, 그는 아마 나르시시즘에 빠졌으리라.두 살 위인 녀석의 사촌 형 태극이도, 영아 시절 삼세번 반응을 통해 내게 겨레의 삼세번 문화 메시지를 주었었다. 천지인 삼태극사상이 녹아든 삶, 하늘을 섬기고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온 우리네의 모습 말이다. 뒤이은 광복이 녀석의 삼세번 더하기 한 번의 메시지는, 한 번 더 확인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계약서를 쓰고, 서명날인으로 확인하듯이…. 그리고 ‘우리 겨레의 삼세번 문화의 근원은, 영유아들의 본능적 교감 반응과 옹알이 같은 놀이에서 왔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따른다.마음 하늘에, 북극성이 유난히 밝다.

2020-07-29

짜장면

윤순옥수필가한 끼 식사를 해결할 간단한 방법을 찾는다. 아무리 찾아봐도 배달음식만한 게 없다. 습관적으로 메뉴를 훑어보고 결국 짜장면을 주문한다. 짜장면은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면 문득 생각나는 음식이기도 하다.버스를 타고 싶던 때가 있었다. 하루 왕복 두 번, 집 앞 신작로를 지나는 버스에는 안내양이 있었다. 한손을 밖으로 내밀어 차 옆구리를 탁탁 치고 ‘오라이’ 하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출발했다. 차를 타고 읍내에 다녀온 친구들이 먹은 자랑, 본 자랑을 늘어놓으면 부러움에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기다리며 마음만 실어 보낼 뿐이었다.초등학교 4학년 여름이었다. 어머니는 사촌언니에게 물려받은 옷 보자기를 풀어 그중 작은 옷을 골라주며 입기를 재촉했다. 갑자기 왜 옷을 갈아입어라하는 것인지 영문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더니, 외출 준비를 마친 아버지를 따라 나서라는 것이었다. 머뭇거리다 아버지 뒤를 따랐다. 우리는 내리막을 지나 정류장에서 멈췄다. 정류장 앞에는 구멍가게가 있었고 그곳에서 담배를 팔았는데 그것 때문인가 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와 있는 시간이 불편해 멈춰 있기 보다는 차라리 걷는 게 나을 듯싶었다. 침묵의 시간이 한참 동안 흐르고 마을 어귀에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가 도착하자 아버지는 타라는 손짓을 했다. 얼떨결에 버스에 올랐다.아버지가 어렵고 무서웠다. 평소 말씀이 없으셨던 분이 예의에 어긋난 행동에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단을 맞지 않으려고 행동을 조심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존재가 느껴져 신경을 써야했다. 아버지 머문 자리도 돌아서 다닐 정도였다. 궁금했지만 도저히 어딜 가는지 여쭈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동네를 몇 개나 지났을까 색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친구들이 말했던 곳으로 짐작되는 말 탄 장군 동상이 보였다. 동상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 길이 나 있었다. 상주읍내를 처음 본 나는 사방으로 난 길도, 우리 동네 집들과 다른 건물도, 오고가는 사람도 신기할 뿐이었다. 버스가 데려다 놓은 곳은 내가 본 가장 큰 세상이었다.그토록 원하던 버스를 타고 읍내에 갔는데도 즐겁지가 않았다. 그즈음 가난한 집 아이들을 식모로 보낸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친구 언니가 도시에 가서 식모살이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차를 타고 읍내까지 온 것을 보면 분명 큰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조마조마하고 무서웠다.아버지 뒤에 바짝 붙었다. 아버지는 시장에 들러 몇 가지 물건을 샀다. 그리고 붉은 천이 바람에 너풀거리는 붉은 집으로 들어갔다. 벽지도 붉고 등도 붉은 집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켰다. ‘짜장면’ 이라는 말에 불안함도 잠시 잊고 친구들이 먹었다는 음식을 상상했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까만 것이 번들거렸다. 까만 음식이라더니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 사이 아버지는 짜장면을 비벼서 내 앞으로 밀면서 말씀하셨다.“오늘 네 생일이지 많이 먹어라.”아,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어디로 나를 보내려는 것 아닌가하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그날은 잊고 있던 내 생일이었다. 산골에서 생일은 덤덤하게 보내기 일쑤였고 운이 좋아 삶은 달걀이라도 먹는 날은 최고였다. 열한 살 생일은 특별했다. 처음으로 버스를 탔고 처음으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짜장면을 먹은 날이었다.짜장면 한 그릇을 비우던 날, 마주 앉은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때를 훌쩍 넘긴 시각이라 아버지 배도 쪼그라들었을 텐데, 배고픔도 잊고 자식만 먹이던 가난한 아버지를 헤아릴 수 없었다. 어른이라고 배고픔이 없었을까. 부모가 되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었던 심정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배고팠을 아버지를 떠올리면 지금도 알끈한 것이 마음이 편치 않다.짜장면 한 그릇은 두고두고 펼쳐 볼 선물 보따리요, 아버지를 향한 내 눈물 보따리다.

2020-07-22

1년 후에 받은 엽서

윤영대수필가온종일 내리던 장맛비가 살짝 그치고 창 넘어 들어오는 바람이 왠지 시원해서 오랜만에 마을 뒷산을 산책하고 싶었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려다가 우편함을 보니 엽서 같은 것이 있기에 뭘까? 하고 꺼내보니 색다른 엽서다. POST CARD 글자 옆에 전자우표가 붙어있고 보내는 사람은 ‘外洞휴게소에서 河78A4’(하영-나의 아호)이고 받는 사람도 우리집 주소에 내 이름으로 되어있다. 내 글씨, 내가 보낸 엽서다. 어! 내가 언제 경주 외동휴게소를 갔었지? 이상하여 뒷면을 보니 휴게소 사진 옆에 간단한 글이 있다. ‘비 내리는 남해여행, 고속도로 위 휴게소가 예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동행하는 친구들도 좋고, 모두 즐겁다. 2019년 7월18일’어! 작년이네. 그런데 왜 1년 후 이제야 오지? 아, 생각난다. 작년 이맘때 친구들과 남해여행을 떠났던 기억이 떠오른다. 포항-울산 고속도로를 달려 남해 독일마을을 돌아보려는 여행이었지. 휴게소에 잠깐 들러 커피 한잔하며 둘러보니 마침 입구 쪽에 ‘1년 후에 받아보는 편지함’이 있기에 엽서 한 장을 얻어 간단히 적어 넣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뜻밖의 엽서를 받고 보니 그날이 새롭다. 소인(消印)을 살펴보니 발송일이 2020.07.08.이고 470원의 요금도 찍혀있었다. 나는 그냥 지나는 마음으로 써넣었는데 그것을 모아두었다가 잊지 않고 돈 들여 1년 후에 보내 주다니 외동휴게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겠다.그러고 보니 이러한 1년 후 받은 엽서의 기억은 또 있다. 몇 해 전 거실 탁자 위에 제주도 풍경의 그림엽서가 한 장 있기에 익숙한 풍경이라 그냥 선전물이겠거니 하고 제쳐 두었는데 다음날 다시 정리하다가 언뜻 보니 나의 글씨였다. 그 해는 제주여행이 없었는데 의아했다. 세계자연 경관 7대 명소를 돌며 서귀포의 물결을 본다는 찬사에, 보내는 사람은 ‘제주올레길7번’이고 받는 사람은 ‘아내에게’로 적혀있었다. 그 당시도 1년 전에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을 가서 한 바퀴 돌았었는데, 그때 보낸 엽서가 집안 구석 어디 돌아다니다가 이제 나타났구나 하고 대수롭잖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엽서를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쓴 날짜는 11월13일인데 소인은 11월6일로 되어있다. 우체국 소인은 틀림없을 텐데 내가 1주일을 잘못 알았나? 다시 뒷면을 보았더니 아래쪽에 다음과 같이 인쇄되어있었다. ‘1년 후에 보내는 편지-서귀포 대륜동 주민자치위원회’.그제야 또렷이 생각났었다. 서귀포 7번 올레길을 걸어 외돌개를 지나 내려오는 개울 옆에서 만난 빨간 우체통과 안내판, 그곳에 비치된 엽서에 사연을 써넣으면 1년 후에 보내 준다는 설명을 읽고서 설마 하면서 써넣었던 기억이 새로웠었던 적이 있다.1년 후 받아보는 느린 엽서가 아니어도 여행지에서 나에게 보낸 또 다른 엽서들도 내 기억 속의 여정을 되새기게 한다. 울산 간절곶에서 일출을 보고 해변 바위 위의 커다란 빨간 우체통에 넣었던 행복엽서도,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다가 지친 몸을 쉬며 장터목 산장에서 부친 단풍엽서도 받아보았고, ‘토지’의 숨결을 찾아 원주문학기행을 갔을 때 박경리문학공원 북카페에서 적어 보낸 감사엽서도 있다.이러한 엽신(葉信)을 보내는 취미는 해외여행 때도 만끽하고 있다. 관광하는 도시마다 거리의 기념품점이나 우체국이 보이면 그림엽서를 사서 그날의 여행에서 본 것 느낀 것들을 간단히 적어 부치고, 어떨 땐 호텔카운터에 부탁하거나 가이드에게 맡겨두면 고맙게도 잘 보내 주었다. 내가 즐기는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이러한 나의 취미를 잘 알고 있는 딸과 아들도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 가끔 삽화까지 그려서 그곳의 관광엽서를 보내온다. 그러면 나의 마음도 따라서 그 여정을 훑어가곤 한다.‘1년 후에 받아보는 편지’를 보내 주는 느린우체통은 누가 어떻게 매일매일 써넣어지는 엽서를 모아두었다가 꼭 1년 후에, 그것도 우편요금을 부담하고 보내 주는 것인지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와서 기억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받아보는 한 장의 타임캡슐은 지난 흔적을 따라 두 번째의 여행을 하게 한다.해 질 무렵 조용한 산길을 내려오는 나의 손에는 1년 전에 찾은 남해 보리암의 석불이 조용히 미소짓고 있다.

2020-07-15

시대 징표 바라보기

강길수수필가등산길에 뭔가 이상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데도 땅거미가 내릴 것 같이 주위가 시나브로 어스름해지니 말이다. 오후 네 시가 지났지만 하지라는 날을 고려하면 있을 수 없는 징표(徵標)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알아볼 마음을 먹지 않고 덤덤하게 넘어갔다. 밤에 인터넷에서 오늘 오후 부분일식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숲속에서의 징표가 그 의미를 찾으며 의문이 풀렸다.부분일식 징표였는데 내가 너무 무심히 지나치고 말았다는 자각이 뒤따랐다. 어릴 때만 하더라도 시골에는 라디오도 흔치 않았다. 날씨예측도 징표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늘, 구름, 바람, 공기의 습한 정도, 동물이나 곤충들의 행동, 몸의 반응 같은 것들을 이용했다. 방법도 어떤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전승되는 도제제도(徒弟制度)인 풍습을 통해 저절로 습득되었다. 나아가 생활 전반에 징표와 관련되 이루어지는 일들이 많이 스며있다. 해몽, 사주팔자 풀기, 택일, 작명, 점(占), 풍수지리 등 다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올해 내게 다가온 시대의 징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바라본다. 우선 봄꽃들이 예전과 비교해 더 화려하게 피어올랐었다. 진달래꽃, 개나리꽃으로부터 벚꽃, 라일락꽃, 이팝꽃, 조팝꽃, 장미꽃, 아카시아꽃, 찔레꽃, 인동초꽃에 이르기까지 내가 만난 꽃들은 겉모양은 확실히 화려했었다. 하지만 일부러 꽃들 근처에 가도, 가끔 꽃에 코를 대고 맡아 보아도 향기가 안 나거나, 전과 비교해 훨씬 줄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또한 기후 탓인지 혹은 마음 탓인지, 봄꽃들이 무엇에 쫓기듯 허겁지겁 피어나고 지는 것만 같아 보였다.왜 그럴까.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말 꽃들이 향기를 잃어가든가, 아니면 내 후각이 나이 들면서 무디어져서 향내를 맡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다. 후자의 영향도 없지 않겠으나, 아무래도 전자에 해당하는 것 같다. 양봉하는 친척이 올해엔 꿀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말을 들었으니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식물들이 사람에게 보내는 징표는 과연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 리우협약 등 기후변화에 대한 지구촌의 인식은 제법 오래 된듯하나 피부에 와 닿는 대책이 시행된다는 소식은 별로 듣지 못했다.해로운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일부 사람의 흡연, 과음, 마약 투여 같은 습관처럼 이 시대 지구촌은 물질문명의 편리성에 중독되고 만 것은 아닐까. 생명의 어머니 지구가 곳곳에서 이상기상 현상이나 지진, 동물, 식물, 곤충 나아가 코로나19 같은 전염병 등을 통해 신음의 징표를 내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책임을 져야 할 우리 인간은 외면하며 사는 현실이다. 물질문명에 유착한 정치적 경제적 패권, 자국 이기주의, 거대 자본의 횡포 같은 욕망에 최면 되어 있다. 현 인류문명은 과녁도 없이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화살이 우리를, 지구촌을 어느 과녁에다 맞출지 두렵기만 하다.우리나라의 산업화 이전 세대들만 하더라도, 농촌에서는 전 근대적 농사일을 하며 자연 친화적 또는 로하스(LOHAS)족 같은 삶을 경험했다. 보릿고개의 고단하고 힘든 시기였지만 자연을 알고 자연 안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기에, 비록 엥겔지수는 높아도 행복도(幸福度)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았었다 싶다. 어촌이나 산촌도 농촌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터이다. 품앗이를 기반으로, 한 동네가 한 가정처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사는 공동체였기 때문이리라.손자가 둘이다. 맏이 가정의 세 돌을 앞둔 큰손자, 둘째 가정의 갓 돌 지난 작은 손자가 그들이다. 해맑게 자라나는 손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에서 또 하나 가장 행복한 기간을 보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전에 느끼지 못하던 불안과 걱정이 앞선다. 자연과 국가사회의 시대 징표를 바라보면, 아이들의 미래가 어찌 될지 좌불안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구환경 변화에다 정권의 무모한 좌편향 정책, 북핵, 코로나19 등에 볼모잡힌 우리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도무지 헤아릴 수 없어서다. 만일 어버이들의 잘못으로 저 아이들이 불행해진다면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부디 예측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주기를 정부와 정치권에 간절히 바란다.

2020-07-08

내일은

윤순옥수필가코로나19 감염증 재확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인지 확진환자가 늘고 있다. 며칠 잠잠하던 코로나 관련 뉴스를 보면서 일상으로 돌아가려나 싶어 한껏 부풀었던 기대가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최초 환자 발생으로부터 4개월이 훌쩍 지나도록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평범한 일상은 더욱 기약이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이토록 간절한 일이 될 줄이야. 자유롭던 만남이 꿈결같이 아득하다.사람이 그리워 텔레비전을 켠다. 화면을 통해 만나는 사람이 반갑다.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을 즐기지 않는 내가 드라마를 챙겨보고 토크쇼를 보며 웃는다. 일면식도 없는 연예인들의 가정사도, 연애사도 마치 가족 일처럼 즐거워 웃고, 안타까워 눈물짓고, 억울해서 화가 난다. 쇼 호스트의 하이 톤에 이끌려 홈쇼핑을 시청한다. 마실 다니듯 쇼핑 채널 몇 개를 돌다보면 필요한 물건이다 싶은 걸 만나게 된다. 매진 임박에 휴대폰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받는 도중에도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서둘러 주문하기를 누르고, 결제를 끝내고, 확인 메시지를 받은 다음에야 안심이 된다.텔레비전을 보면서 충동구매가 늘었다. 입을거리, 먹을거리, 생활용품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여러 번 고민하고 구입하던 습관이 변한 것인지 안사면 후회할 것 같은 상품도 정작 받아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하기 쉬운 음식은 어쩔 수 없지만 옷이나 생활용품은 교환이나 반품을 하게 된다. 우리 집 택배가 증가하는 이유 중 하나다.딩동! 초인종 소리는 늘 반갑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달려간다. 택배기사가 최근 우리 집에 오는 일이 많아졌단다. 특히 이 번 주는 하루도 빠짐없이 들렀다며 오래 드나들면서도 필요 없는 말을 삼가던 그가 몇 마디의 말과 함께 땀 냄새를 남기고 사라진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기세가 멈출 줄 모르면서 택배 물량이 급증했고 급기야 배송 날짜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었다. 이 시국에 나까지 한몫 했으니…. 제 발 저리 듯 뜨끔 한다.며칠 전, 이른 한여름 더위가 찾아왔다. 침구를 시원한 것으로 바꾸기로 했다. 설 명절 때 다녀가고 집에 오지 못 했던 큰아들이 기말시험 끝나고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뒤라, 큰아들 방을 정리할 때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방을 돌며 침대 커버와 요를 교체하고 보니 아쉬움이 남는다. 칙칙한 요에 눈이 간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침대 요 두 장을 또 주문했다.주문할 때 들뜬 마음은 풍선 바람 빠지듯 하는 것인지 며칠을 깜빡 잊고 지냈다. 카카오톡 알림이 울린다. ‘안녕하세요. 윤순옥님 자연염색 60수 침구 업체 이브리다 입니다.’로 시작하는 택배 지연 안내문이다. 발송 처리된 건들이 현재 택배 사에서 이동 움직임이 없어 하루나 최대 삼 일 정도 지연된다는 사실을 알린다. 기다릴 마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일일이 연락하게 되었고, 꼭 상품으로 보답하겠다는 다짐을 보태고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까지 남긴 후 긴 글이 끝이 난다. 행동이나 말이 과하다 싶으면 불편한 순간을 넘기기 위한 제스처인 경우가 많은데 관계자의 글 곳곳에서 진심이 묻어난다.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은 가장 큰 위로이며 희망이다. 지금 우리는 끝도 모르는 긴 터널을 달리고 있다. 답답하고 불안한 상황을 이해와 인내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바이러스와 가장 가까이서 고군분투하는 의료진, 방역관계자, 그리고 안전한 일상을 위해 방역수칙을 준수하는 국민들 모두 툭, 건드리기만 해도 참고 있던 것들이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 택배 지연에 따른 침구업체에서 보내온 글을 고객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로 여길 수 있으나 내가 받은 문자에 담긴 것과 같은 작은 진심들은 유래 없는 위기 상황을 이기는 힘이 된다. 여린 빛을 내지만 결국 그 한줄기 빛이 모여 긴 터널을 뚫고 나가는 동력이 되리라. 내일은 밝은 태양 아래 말끔한 얼굴로 너와 내가 마주 서 있기를 소망한다.

2020-07-01

우리집 잡초

윤영대수필가6월 초에는 집안에 큰일이 있어서 시골집에 자주 가지 못했다. 시골이라지만 포항시 북구 기계면 외곽에 마음의 쉼터로 마련한 조용한 한옥이다. 마당은 잔디가 곱게 깔렸고 담을 따라 아름드리 돌로 아름답게 둘러싼 작은 화단에는 많은 나무와 꽃들이 자라고 있는 곳이다.어저께 비가 온 후, 단오날도 다가오는지라 마음도 정리하고 집도 살필 겸 갔었다. 더위가 성큼 온 듯한 날씨에 읍내를 지나 작고 조용한 마을의 골목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사롭지 않은 잡초들의 환영이 눈에 띈다. 좁은 골목 끝 내가 손수 만든 나지막한 대문 앞에 서니 빨간 줄장미와 분홍색 찔레꽃이 반긴다. 마당에 들어서면 앞뜰의 소나무 순은 쑥 자라있고 집 뒤의 뽕나무, 대나무들이 엄청난 잎새들을 자랑(?)하며 지붕을 덮고 있다. 차를 마당 한편에 세우고 제일 걱정이었던 채소밭부터 살피니 다행히 고추와 상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마당 한쪽에 취미 삼아 일군 서너 평 정도의 밭에 비료도 많이 주지 않았는데 잘 자라주어 고마웠다. 그런데 밭이랑에는 흙이 보이지 않고 무언가 풀들이 가득하다. 가까이 가보니 채소밭의 골칫거리 쇠비름과 바랭이가 신나게 번지고 있었다. 아! 이놈들부터 뽑아야겠다 싶어 서둘러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부터는 잡초와의 전투다.우선 고추밭 이랑부터 호미를 들고 들어가 낮게 기어 다니는 쇠비름을 뽑았다. 비 온 뒤라 쉽게 뽑혔다. 한 소쿠리 정도 뽑아버리려니 작고 두툼한 잎과 튼실한 줄기가 어렸을 때의 밥상이 생각난다. 돼지풀이라고 하는 쇠비름은 ‘밭에서 나는 생선’이라 할 만큼 오메가3가 풍부하여 많이 먹으면 생명이 길어진다고 장명초(長命草)라고 한단다. 옛날에는 봄여름 나물 무침으로 먹었지만 지금 우리 집에는 아직 못 먹는 잡초이려니…. 또 종기 치료에도 좋고 끓인 물을 바르면 습진과 무좀에도 좋다고 하여 약으로 보관하려 하다가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바로 옆에는 맑은 햇살을 받아서인지 상추가 풍성하게 잎을 펼치고 있어 아내가 즐겁게 한 잎 한 잎 따고 난 후, 나는 고랑 사이에서 줄기의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바랭이를 뽑았다. 마당 잔디 사이에 가끔 듬성듬성 나 있는 것은 잘 뽑히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푸석한 밭 흙에서는 쉽게 뽑혀 다행이다. 그야말로 잡초의 대명사인 바랭이는 한국 원산인 한해살이풀로 가축의 사료로 쓰이지만 눈과 귀를 밝게 하고(明耳目) 폐를 맑게 하는 약재로도 쓰인다고 한다.허리 굽혀 땀 흘려 다 뽑고 나서 좀 쉬려고 마루에 앉으니, 앞쪽 화단의 낮은 키 나무들 사이에 튼실한 줄기와 거친 잎 위에 핀 노란색과 보라색 꽃이 눈에 들어온다. 몸통은 닮고 얼굴은 다른 엉컹퀴와 방가지똥이다. 꽃은 둘 다 수수하게 예쁘고 잎에는 가시가 있다. 예쁜 자주색 꽃을 피운 엉컹퀴는 잎의 가시에 찔리고 고약한 느낌이 나는 이름 때문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잎도 줄기도 비슷하고 가시가 있는 방가지똥은 민들레와 닮은 노란색 꽃을 야생화 사진을 찾아보고 이름을 알았다. 또 ‘피를 멈추고 엉기게 하는 풀’ 엉컹퀴는 줄기 속이 차 있고 어린잎은 나물로 먹고 관절염에 좋은 약용으로 쓰이며, 방가지똥의 줄기는 비어있고 어린잎은 역시 나물로 먹고 간에 좋은 약재로 쓴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맞은편 화단의 모과나무 앞쪽에는 뽑히지 않고 쭉쭉 자라고 있는 참나리 한 무리가 있다. 점박이 주황색 꽃잎을 뒤로 말아 재껴 웃고 있는 듯한 모습이 백합 닮았고 뿌리는 약재로 쓰인다기에 야생화의 자격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이렇듯 텃밭에 성가신 잡초도 화단에 제멋대로 자리 잡는 야생화도 깨끗한 정원에는 필요 없는 식물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의 몸을 살리는 유용한 약재라고 하니 쓸모없는 풀과 꽃들에게도 각자의 존재 가치가 있으리라.골목 안쪽부터 집 안뜰까지 자라는 돌나물-내 어릴 때는 돈나물이라 했다- 은 봄에 뜯어 생나물로 무쳐 먹었고, 화단 귀퉁이에서 무릎까지 자란 인진쑥은 한 움큼 잘라서 묶어 황토방 벽에 걸어두었다. 향기도 있지만 벌레들이 싫어한단다. 뽑아내는 잡초들도 이름 모를 야생화들도 그들이 품고 있는 약용으로서의 가치로 보면 모두 소중하다. 나의 시골집 마당은 잡초들로 가득한 작은 한약재 텃밭이다.

2020-06-24

지식

강길수수필가쪽지가 잘 나오지 않는다. 앞선 이들은 한 번에 잘도 집어내던데, 나는 그러지 못하다. 아마도 다른 쪽지들보다 깊게 꽂혀있거나, 약하게 뽑았을 것이다. 두 번째 당겨도 역시 마찬가지다. 당황스러워지며 뒤에서 기다리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왼손 엄지와 검지에 힘을 더 주어 뽑아낸다. 세 번 시도 끝의 성공이다.삼세번 당겨 손에 잡은 불혀 모양의 연녹색 성령칠은(聖靈七恩) 낱말쪽지…. 어느 은혜를 선택했을까 아니, 주어졌을까. ‘코로나 19로 모두가 어렵게 사는 지금 내게 긴요한 은총은 무얼까’하고 마음이 자문하지만, 미사 중에 열어볼 수가 없다. 공지사항 시간에 보리라 마음먹고, 궁금증도 함께 담아 매일미사 책갈피에 넣어 둔다.미사 끝자락, 공지사항 시간이다. 책갈피의 쪽지를 꺼낸다. 이른 봄, 돋아난 지 얼마 안 된 연록 생강나무 잎을 닮은 성령칠은 쪽지다. 불혀와는 어울리지 않는 색깔이란 생각이 스친다. 두 겹으로 접어져 있다. 색종이에 낱말을 써넣고 접어서 불혀 모양으로 오린 것이다. 연록 불혀를 살짝 연다. 왼쪽 면의 “지식”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다시 접어 책갈피에 꽂는다. 집에 가 자세히 보리라 마음먹는다.미사가 끝났다. 신부님과 교우들의 작별 인사를 안고 집으로 향한다. 올핸 왜 ‘지식’을 받았나 하는 의문이 오는 동안 뇌리를 맴돈다. 명색이 글도 쓰는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하라는 건가. 아니면, 얕은 지식에 기대어 교만하지 말라는 경고인가 등등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드디어 집 거실이다. 찬찬히 성령칠은 쪽지를 연다. 왼쪽 면에, “지식”이란 굵고 큰 글자 아래 “(scientia)”라 씌어있다. 오른쪽 면에는 “신앙감, 믿어야 할 진리와 허위를 식별하는 은혜.”라고 적혀있다.미사 끝 무렵 처음 확인 때 들었던 생각과는 다른 내용이다. 물론,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는 그 옛날 고교 시절의 교리문답 내용과 이후 받았던 여러 교육을 통해 가진 지식에 대한 관념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핵심내용이 ‘식별’이란 점에서 거리감이 느껴진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식의 개념과는 차원이 다르다. 즉,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나 ‘사물, 상황에 대한 정보’가 사회에서 말하는 지식의 내용일 테니까 말이다.오히려, 철학에서 말하는 ‘객관적으로 확증된 판단의 체계’와 내용이 일맥상통해 보인다. 인식의 총체나 정보에 따라 판단하고 진리와 거짓을 식별하여, 그것을 믿고 받들며 살게 하는 힘이 지식 곧, 시엔티아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또, 진리는 신앙적 내용뿐 아니라 온 세상을 품을 것이므로, 진실도 그 안에 자리함이 마땅하다. 즉, 지식은 신앙적 진리뿐 아니라 사회적 진실도 당연히 식별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식과 관련하여 어찌 살고 있는가.한마디로 성령의 은혜로 주어지는 지식과는 별개로 살아왔다. 공부도, 직장 일도, 신앙생활도, 사회생활도 식별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믿어야 할 진리와 믿지 않아야 할 거짓을 구분하려 들지 않았다. 다다익선처럼 ‘나와 가정과 사회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는 것이라면, 윤리 도덕 내지 신앙적으로 꼬치꼬치 따질 필요가 없지 않은가’하는 생각으로 살아 온 것이다.진실과 거짓을 식별하는 지식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 어떨까. 지난 4·15총선 부정선거 의혹만 하더라도, 언론이 담합이라도 한 듯 보도치 않아 국민의 알 권리는 유린당하는 현실이다. 동일한 모집단의 사전투표 결과가 본 투표와 달리, 거의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기이한 통계적 패턴을 보이며 여당에 표를 몰아주었다. 또, 비례대표의 정당별 득표율과 정당별 의원당선자 수의 비율이 상식 밖으로 차이가 났다. 경영학을 배웠던 내 통계적 소견에 비추어 보아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선거 결과다. 이러한 팩트가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는 연유는 무엇일까. 나도, 국민들도 지식에 근거한 식별의 눈을 크게 뜨고 살아가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지식의 은혜가 온 세상에 내려, 진실과 거짓이 제대로 식별되면 좋겠다.

2020-06-17

화초를 들이며

윤순옥수필가봄맞이 행사를 하는 동네 꽃집에서 화초를 골라보았다. 욕심을 내다보니 주인이 끼워준 꽃까지 합해 열 개가 넘었다. 발렌타인자스민, 스투키, 산세베리아, 크로톤 등 이름표 하나씩을 달고 꽃집 직원 품에 안겨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설레고 반가웠다.새 식구를 들이면서 베란다 터줏대감들을 구석으로 밀어냈다. 봄이 다 가도록 연분홍 꽃을 피우던 삼단 철쭉, 노르스름한 줄이 예뻐 자꾸 눈이 가던 관음죽, 한결같은 모습에 내가 특히 좋아하는 군자란도 예외가 아니었다.새로 들인 화초에 정성을 쏟느라 하루가 바빴다. 아침저녁으로 물때를 살피고 햇빛을 쫓아 베란다에 들락거렸다. 그 때문인지 홍콩야자는 잎이 풍성해지고, 꽃기린, 제라늄도 꽃망울을 터뜨려 내 애정에 보답했다. 새 식물에 전념하는 사이 구석으로 밀려난 화초에 차츰 물주는 일도 잊었다. 햇빛 한 줌이 귀해도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그렇게 봄이 무르익었다. 주인의 홀대에도 오래 된 화초들은 제 빛을 내고 있었다. 피울 꽃은 피우고 키울 잎은 키웠다. 아차! 싶었다. 새 화초를 보는 즐거움에 빠져 그것들에 소홀했던 사실을 깨달았다.수도꼭지를 틀었다. 기분 좋은 포만감으로 호스가 꿀렁거렸고 줄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에 막힌 것이 터지듯 시원했다. 그동안의 일을 만회라도 하듯 옛 화초에 오래 물을 주었다. 물줄기에 군자란 잎이 흔들리자 잎과 잎 사이에 희끗한 것이 드러났다. 꽃대였다. 꽃망울을 만들기 시작한 어린 꽃대가 숨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주황색 탐스러운 봄을 안겨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꽃망울을 보니 더욱 미안하고 감격스러웠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슬렀다. 호들갑스러운 내 모습과 달리 언제나 조용히 꽃대를 피어 올리는 군자란은 과연 이름값을 하고도 남았다.화분 배치를 새로이 했다. 화분 끄는 소리, 낑낑대며 내 뱉는 거친 내 숨소리까지 겹쳐 시끄러웠다. 식생이 비슷한 종류별로 자리이동이 끝나자 비로소 모두 제자리에 든 듯하였다. 마치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해 보였다. 내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마음 따로 몸 따로 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진한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전기 포트에 적당량 물을 붓고 끓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사람의 일이라고 다를까. 오래 알던 사람을 군자란 밀어내듯 했더라면, 상황을 떠 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친구들은 식물을 두고 마음 쓰는 나에게 또 한마디 던질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균형이 깨지면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라, 걷잡을 수 없이 흘러 되돌릴 기회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겠는가. 생각에 잠기는 동안 전기 포트에서 신호음이 울렸다.원영 스님의 책 ‘삶이 지금 어딜 가느냐고 불러 세웠다’를 손에서 놓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즈음 나는 바쁜 일상에 쫓겨 방향도 목적지도 잊은 채 달리고 있었다. 그때 만난 책 한 권이 멈추면 안 될 것 같던 나를 멈추게 했다. 한두 번 보고 들은 말이 아니었을 텐데 ‘삶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대목에서 멈칫했다.책 읽기를 멈추고 나를 보았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내 모습과 마주했다. 욕심에서 비롯된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래 전부터 해왔던 과외 일을 줄이는 것이었다. 학생들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고 새 일을 하면서도 붙들고 살았다.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하나 둘 내려놓기 시작하면서 진짜 소중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삶의 지혜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닌가 보다. 지혜를 얻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새로운 것에 눈이 팔려 소중한 무언가를 놓치진 않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시간을 다시 가져봐야겠다.어느새 봄도 지나고 초여름 햇살이 베란다에 가득 내린다.

2020-06-10

물값

윤영대수필가아파트 생활을 하다 보면 편리한 점이 많다. 매달 우편함에 꽂혀있는 관리비 명세서를 가져와서는 거의 내용을 살펴보지 않고 모아 두지만 관리비는 자동이체되어서 이제는 거의 무관심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나대로의 가계부를 정리하며 생활에너지 사용에 대한 부분만 살펴보고 있다.가계부에는 아파트관리비 부분이 있고 그 항목에는 전기, 수도, 가스 및 통신료 등이 있다. 우리 집의 생활에너지 사용 추이를 알아보겠다는 것인데 전기는 전력량(KWh)과 요금, 수도는 사용량(t)과 요금, 가스료와 통신료는 금액만 적어나가고 있다.그중에서 수도료,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만 사용하는 물값을 보니 계절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1년 내내 월 1만원 내외이다. 물론 부부 둘이 사는 생활이라 해도 물값 1만원은 너무 싸다고 생각된다. 고급 커피 두 잔 값도 안 된다. 그 물값으로 한 달 동안 먹고 설거지하고 세수하고 목욕하고 화장실 쓰고 세탁도 하고 베란다 청소에다 화분까지 물 주고…, 사용량은 10톤 내외라니 그야말로 ‘물값’이다. 그렇다고 마구 풍족하게 쓰자는 것은 아니다. 생수병 1ℓ에 500원 정도이니, 만약 생수로만 생활한다면 10톤은 1ℓ의 만 배, 돈으로 500만 원… 엄청난 금액이다. 생수 물값이 금값이다.우리나라 수돗물 급수현황을 보면 지자체들의 수원지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포항시는 ‘맑은물 사업본부’에서 하루 약 230만 톤을 생산하고 1인당 450~500ℓ를 소비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1인당 평균 물 사용량은 약 280ℓ로 유럽국가들의 2배 수준이라고 하고, 이 중 가정용이 약 180ℓ라고 하니 포항 시민들은 생각보다 많이 쓰는 모양이다. 그리고 요금체제는 가정용, 일반용, 대중탕용 등으로 나누지만 가정용은 20톤까지는 톤당 585원이고 이후에는 누진세가 적용된다고 한다. 우리 집의 경우 계산을 해보니 포항 평균의 반 정도밖에 쓰지 않아서 다행이다.생각해보니 먹고 마시는 식수로서의 양은 얼마 되지 않고 환경을 깨끗이 하는 데 많이 쓰고 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화장실 수세식 변기의 경우를 보면 하루 대소변 5회를 이용한다고 봤을 때 1회 10ℓ 정도라면 1일 50ℓ, 즉 1일 사용량의 약 1/4, 참 많이 쓴다. ‘돈을 물 쓰듯이 한다.’ 더니 화장실 대소변처리에 수도요금의 1/4을 쓴다는 거다.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금수강산이라 물 맑고 깨끗하여 어릴 적만 해도 집에 깊은 샘이 있어 두레박으로 퍼서 마셨고, 산과 들에 흐르는 물도 그냥 마셨다. 수돗물도 그대로 마실 수 있는 축복을 받은 나라다. 외국에 나가 보면 수돗물도 제대로 마실 수 없는 나라도 많다. 그러나 중금속 검출과 공업단지의 페놀 유출 등 환경 오염사건으로 인해 수돗물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고, 수돗물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인지 정수기를 갖추는 가정도 늘어나고 있다.생수의 국내판매가 공식 허용되기 시작한 90년대 초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이나 계곡의 깨끗한 샘물을 찾아다니며 마셨다. 나도 산행을 겸해서 경주 토함산, 흥해 천곡사, 안강 사방약수까지 먼 길을 큰 물통을 들고 물을 뜨러 갔었다. 물론 공짜였다. 대동강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얘기하면서 “누가 물을 돈 주고 사 먹냐?”하며 웃었는데, 요즈음은 계곡물도 팔고 바닷물도 판다. 생수 개발이 보편화 되어 암반수, 심층수 등 종류도 300여 종이 넘고 외국산 생수도 들어와 있다. 이제 물까지 수입해서 먹는 판이다.요즘 코로나 사태로 국제원유가가 배럴당 20달러까지 하락했다고 하니 1ℓ 150원 정도이고 세금 등을 제외한 순수 휘발유 가격은 1ℓ 520원 정도로 생수 값과 거의 같다. 물론 수돗물값에 비할 수는 없다. 예전에는 중동지방에서는 물값이 원유가보다 엄청 비싸다는 말을 듣고 엉뚱한 생각도 해봤다. 수백만 배럴의 원유를 싣고 오는 대형 유조선의 일부를 수조로 개조해서 중동에 빈 배로 갈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맑은 물을 싣고가서 팔면 비싼 원유값 일부라도 보충할 수 있을 것 아니냐? 라고….우리나라는 알려진 것과 달리 ‘물부족 국가’는 아니라고 하지만 물은 언제나 아껴 써야 한다. 목욕탕에서 물을 줄줄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짜증이 난다. “풍족하게 쓰시되 낭비하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참 좋다. 아무리 물값이 싸다 해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2020-06-03

하얀 오월

강길수수필가마르첼리노….오월을 어떻게 지내고 있나. 삼월인가 했더니 눈 깜짝할 새 사월이 가고, 오월도 하순에 접어들고 있다. 연녹색 나무가 순식간에 신록으로 변해 눈앞에 넘실댄다. 자연은 예나 다름없이 묵묵히 제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나의 오월은 어디를 걷고 있는지 헷갈린다.가만히 올봄을 되돌아본다. 내 봄은 별과의 만남으로 시작되었지 싶다. 춘분이 한 달가량 남은 날이었지. 가로수 보호대 사이를 비집고 올라와, 사뿐히 내려앉는 별을 보듬고 세상을 비추는 새 생명을 만난 거야. 대낮 땅바닥에서 하얀 별빛을 온 누리에 비추는 앙증스러운 존재, 바로 별꽃 말이야. 삼월이 되자 벚꽃에게 자리를 양보한 듯 보였지만, 낮은 곳에서 여전히 반짝이는 별이었다.마르첼리노.환하게 거리를 밝힌 벚꽃을 사열(査閱)하는 멋도, 그 아래 보도를 걸어보는 행복도 올핸 누리지 못했다. 코로나19의 위력에 짓눌려, 엄두도 못 내다 드라이브 스루 한 번으로 만족해야 했거든. 화무십일홍이라 하듯 벚꽃의 화사함도 요정처럼 사라져 버리더구나. 뒤이어 줄 서서 피어난 조팝나무꽃이 사월을 밝히기 시작했지. 공조팝나무에 탐스러운 등불이 켜지고 덩달아 산조팝나무도 신록 사이에서 등대같이 빛났다. 하지만 무심한 나는 별빛도, 등불도, 등댓불도 느끼려 하지 않았다. 그사이 계절의 수레는 나를 두고 오월로 도망치고 말았지. 사람들이 마스크를 낀 채, 다른 이를 피하며 총총 지나가는 출근길 모습을 만나며 걷던 오월 어느 아침이었어. 문득, 하늘을 쳐다본 내 눈에 이팝꽃이 하얀 신부(新婦)처럼 달려드는 게 아니겠나. ‘아, 벌써 이렇게 되었어!’ 혼잣말을 되뇌며 반갑게 쳐다보았지. 그러고 보니 ‘하루에 한 번은 하늘을 바라보자’던 그 옛날, 한 문우와의 다짐도 잊고 살아온 게야.마르첼리노.하얀 오월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이팝꽃 앞에서 하얀 오월을 알아채게 된 게야. 삼월에 활짝 핀 하얀 별꽃에 이어 조팝꽃들과 이름 모르는 꽃들이 하얀 사월을 밝게 비추어주었지. 하지만, 내 눈엔 사람들의 하얀 마스크만 들어 올 뿐이었어. 무딘 마음이 하얀 삼, 사월을 외면한 게지. 왜 한눈에 모든 것을 알아보지 못할까. 정말 육신의 눈은 마음이 함께 하지 않으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인가.올봄, 이곳엔 줄곧 하얀 이팝꽃이 유난히도 많고 탐스럽게 피어났다. 철길 숲은 물론, 고속도로 진입 가로, 터널 앞의 고속도로 분리 화단, 고향 가는 국도변에도 하얀 꽃들이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어. 그 옛날 보릿고개 시절, 사람들은 이팝꽃을 보며 배고픔을 달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간직한 꽃. 아이러니하게도 보릿고개를 물리친 지금, 사람들은 더 많은 이팝꽃을 만난다.마르첼리노.하얀 방호복의 전사(戰士)로 무장한 방역진과 의료진…. 코로나19 방역과 치료의 전선(戰線)에 출전하여, 고군분투하는 그들 모습이 일상으로 스며든 봄을 살아온 우리들. 왜 올봄은 하얀 오월이 끝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보일까. 백의민족이라도 다시 일깨우려 함인가. 혹시, 우리가 백의민족의 혼을 잃기라도 한다는 하늘의 계시란 말인가. 거짓과 선동에 찌들어, 불의와 정의를 식별하지 못하고 생활의 불안에 내몰려 사는 동안, 조상들이 섬겨온 하늘과 땅을 멀리한 것은 아닌가. 나, 너 할 것 없이 우리 사회는 하얀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가슴을 짓누른다.곳곳에 장미꽃이 붉은 얼굴을 한껏 열어젖히고, ‘그대 내게 와서 사랑의 오월을 누려보라’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삼월과 사월을 관통한 하얀 오월은 침묵과 외면, 무시와 강행의 카르텔을 덮어쓴 장미의 유혹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물러서지도 않는다. 뒤이어 피는 하얀 찔레꽃과 하얀 꽃들이 쏘는 푸른 레이저광선이, 장미 아가씨의 삿된 유혹에 취할 때가 아니라고 일깨워 주고 있기에…….하얀 오월은, 잃을 수 없는 너와 나의 희망이다.하얀 오월은, 잃을 수 없는 너와 나의 희망이다.

2020-05-27

마늘과 어머니

이순영수필가마늘을 얻었다. 김장철도 지났고 햇마늘이 날 때도 아닌지라 잠시 망설이다가 받았다. 한손으로 들어도 빈 바구니 같았다. 푸석푸석 먼지가 나는 마늘 한 접을 집으로 가져와 베란다에다 두고 며칠 밤을 지냈다. 빨래를 널고 청소를 하면서 눈에 띌 때마다 근심덩어리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갈무리를 해 두어야만 될 것 같았다. 미루어두면 버려야 할 형편이 될 일은 뻔했다. 친정어머니가 생각났다.어머니는 김장철이 되면 집에서 가꾼 마늘을 틈이 날 때마다 햇살이 잘 드는 마루에 앉아 장만하셨다. 깐 마늘을 수북하게 모아 두었다가 김장양념장을 만들 때쯤이면 마당 귀퉁이 감나무 아래에 있는 돌절구에 마늘을 찧으셨다. 지난 초겨울에도 어머니의 마늘 까는 일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 양이 줄어든 것과 방안에 앉아서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통에 마늘을 찧는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어머니의 성품은 때로는 온화하셨고, 때로는 매우 강직하셨다. 이런저런 모습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신문지를 활짝 펼치고 마늘을 깔 준비를 했다.두고 보니 이 많은 마늘을 언제 다 손질할까. 긴 한숨이 나왔다. 받아오지 말걸, 식구도 적은데, 곧 햇마늘이 나올 터인데…. 친정에 가지고 가서 어머니께 맡길까. 그러려면 오고가는 시간과 머무는 시간을 합하면 서너 시간은 걸릴 텐데. 그 정도면 내가 혼자서 모두 손질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야, 나는 어머니를 뵙고 오는 즐거움이 있어 좋고, 어머니는 심심해하던 차에 일거리가 생겼다고 반가워하실 지도 모르지….나만의 계산법으로 나에게 돌아올 득과 실을 따지면서도 깐 마늘을 담을 그릇과 껍질을 담을 비닐봉지를 챙겨서 옆에 두었다. 어머니가 하신 것처럼 쭈그리고 앉아 마늘을 까기 시작했다. 볼품없이 말라 푸석거리던 껍질 속에서 하얀 마늘이 보석처럼 발라져 나왔다.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며 시작한 일인데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자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려왔다. 어깨와 목덜미, 손목이 뻐근해지고 눈도 따가웠다. 온몸이 뒤틀리는 것 같았지만 하얀 마늘이 통에 소복하게 모아지는 재미는 쏠쏠했다. 그릇 위에 봉긋하게 솟은 하얀 보석들을 쓰다듬으니 촉촉한 속살이 내 손바닥을 간질였다.한편 비닐봉지 속에는 흙이 묻은 뿌리와 버썩 마른 껍질들이 가득해졌다. 부풀어 오른 봉지를 손등으로 누르자 풀썩 내려앉았다. 붕긋하던 봉지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자, 몇 해 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벽에 기대어 가만히 앉아 계시던 어머니. 마당이며 부엌과 방, 집 안팎 어느 한 곳도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윤기가 흐르게 하시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변신은 믿어지지 않았다. 불러도 대답 없이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시고 사람을 보면서도 아무런 표정이 없으셨다. 때로는 한참동안 두 눈을 힘껏 감으시고 입을 꾹 다물고 계시기도 했다.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으시니 마치 그림 같았다.너무나 낯선 어머니였다. 바스라질 것만 같아 어머니를 부둥켜안을 수조차 없었다. 어머니 옆에 가만히 앉아 어머니처럼 벽과 천장을 바라보며 가슴앓이만 했다. 그러기를 몇 개월이 흐른 뒤 멈추었던 어머니의 시간은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조금씩, 아주 조금씩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어머니는 마치 아기 같기도 하고 때로는 천사 같기도 했다.삶을 온전히 바쳐서 우리들을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귀로(歸路)로 향하셨지만 나는 어머니께 해 드린 것이 없다. 오늘도 오랜 시간을 쭈그리고 앉아서 해야 하는 힘든 일을 어머니께 맡기려고 하지 않았던가.네 시간도 더 걸려서 마늘은 모두 갈무리가 되었다. 비록 껍질은 불태워지더라도 알맹이는 적재적소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마늘이 함유하고 있는 성분을 따져서 무엇 하리. 음식에 향과 맛을 더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건강에 이로움을 주면서도 그 형태를 잘 드러내지 않는 마늘, 그 품성이 꼭 어머니 같다.

2020-05-20

가정의 달, 오월

윤영대수필가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나고 예수가 부활한 성령의 달이라 해도 코로나에 묶여버렸던 ‘잔인한 달 4월’은 지나갔다. 시인 엘리엇은 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우는 4월’을 잔인하다 했을까? 봄비에 깨어난 뿌리의 힘으로 라일락 꽃향기 퍼드러진 앞뜰에는 계절의 여왕 오월이 화려한 옷을 입고 왔는데….나뭇잎은 어린아이의 손과 같이 부드럽고 하늘은 가끔 빗줄기를 뿌려 대지는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형산강변에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고 초하의 들머리에는 농부가 밭을 갈고 씨 뿌리는 계절, 여름을 준비하라는 입하가 있고 보리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소만도 기다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번 5월에는 윤4월도 덤으로 끼어 있어 결실을 응원하는 태양도 천천히 하늘을 돈다.최근 서울 이태원 클럽을 일대로 다시금 코로나19 확산세가 퍼지는 상황을 묵인할 수는 없지만 계절의 여왕이 화려한 옷자락을 펼치며 우리 국민의 침착하고 현명한 방역 태도에 함빡 미소를 보내줄 것이다. 이제부터는 더욱 촘촘한 ‘생활 속 거리두기’ 실천으로 서로를 돌보며, 나들이에 나서더라도 긴장의 끈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숫자 5는 다섯, 발음으로는 ‘닫고 서다’ 즉 밝은 세상으로 솟아난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한 오월에는 우리들 마음에도 밝고 아름다운 날들을 가꾸어야 하리라.시골집 작은 텃밭에 상추씨도 뿌리고 고추 모종도 심으니 손바닥 만한 채소밭에도 생기가 돈다. 마을 뒷산 기슭의 하얀 아카시아꽃이 꿀벌을 모으고 하얀 꽃들이 쌀밥을 닮았다는 이팝나무 가로수는 5월에 눈이 내린 듯 신기하다. 하얀 수국, 하얀 찔레꽃, 흰 장미…. 온통 하얀 꽃 잔치다. 지난달 알싸한 향기에 한 소쿠리 따서 삶아 먹었던 가죽나무 순과 엄나무 순도 벌써 새로운 가지를 하늘로 뻗어가고 있다.오월은 뭐니 뭐니 해도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있고 성년의 날, 부부의 날도 있다. 모두가 감사와 사랑의 의미를 담아 선물을 주고받고 봉사와 기부라는 마음의 가치를 더 높이고 싶은 날들이다.어린이날에는 아직도 학교 가지 못하는 아이들 손을 잡고 푸르른 들과 산으로 또 강과 바닷가로 나들이하며 티 없이 맑은 영혼을 길러 줬을 테다. 점점 핵가족화되는 사회현상에서 옛과 같은 부모님들의 체온을 느끼지 못하니 어버이날이나마 소담스러운 선물 마련하여 찾아뵙고 가족의 정을 느꼈을 것이다.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40여 년을 교직에 몸을 담고 보니 스승의 날에 대한 감회가 깊다. 학생들은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음료수랑 작은 선물도 책상 위에 놓고 갔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선물을 주지도 받지도 말자’라는 희한한 말 속에 선생님에게는 꽃 한 송이도 드리지 않는다는 서글픈 현실에 교사는 오월이면 우울해지고 교단은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사제간의 사랑은 부모 사랑만큼이나 소중하다. 참된 가르침과 배움이 진정 사랑인 것이다.성년의 날은 셋째 주 월요일. 만 19세가 됨을 축하하며 독립된 인격체로서 대해주고 그에 따른 사회구성원의 책무를 다하도록 하는 날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남자에게는 갓을 씌워주고 여자들에게는 비녀를 꽂아주는 관례와 계례 등의 성인식을 치루었지만 요즘은 몇몇 곳에서만 한다니 되돌아볼 일이다.21일 부부의 날은 화목한 가정을 위해 2007년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으며, 둘(2)이 합쳐 하나(1)가 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어쨌든 사회의 출발은 가정이니 이혼율이 증가하는 요즘 새로운 사회가정교육이 필요하리라 본다.또 있다. 입양의 날, 11일이다. 한 가정이 한 명의 아동을 입양해 새로운 가정(1+1)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로 정했다고 한다.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 나라’를 위해 지난 10년간 100조원을 투자하고도 미혼모를 보는 사회의 인식 탓인지 해외입양 세계 4위- ‘아동수출국’이라는 부끄러운 인권후진국 오명을 빨리 벗어야겠다는 것이 가정의 달 5월을 맞는 또 다른 바람이기도 하다.감사의 달 오월에는 마음을 담은 손편지를 써서 잊고 있었던 지인들에게도 보내고 싶다.

2020-05-13

같지만 다른 봄

강길수수필가마스크를 쓰고 철길 숲 산보에 나섰다. 봄을 타는지 몸이 나른해서다. 늘 가던 코스 따라 초등학교를 가로지르려 열린 문을 들어섰다. 교사(校舍) 앞 화단에 선 매실나무는 열매가 토실토실 도토리만큼이나 컸다. 옆의 능금나무에는 하얀 꽃잎이 자태를 뽐내며 일부 꽃은 지고 있다. 어느새 봄이 매우 짙어졌다.저만치 떨어진 주차장에 승용차 한 대만 외롭다. 사람이라곤 그 앞으로 쓰레기 정리하는 분 한 명뿐이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휴일이면 제법 많은 이들이 운동장을 걷거나, 녹지의 쉴 곳에서 삼삼오오 이야기꽃이 피어나곤 했었다. 이 교정(校庭)은 주민들의 운동과 휴식, 소통의 공간이었다. 한데, 지금은 텅 비었다.웬일인지 입구 반대편 출구의 문이 잠겨 있다. 전엔 문이 없던 곳인데 최근 설치되었다. 화급하다면 넘어갈 수 있을 높이의 자바라 차단문이다. 하지만, 평상시는 사람이 해선 안 될 행동이다. 철길 숲에 가려면 할 수 없이 돌아가야 한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오늘은 그냥 학교 구내를 몇 바퀴 돌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한적한 봄 교정을 이것저것 바라보며, 그들과 마음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도 쏠쏠하다.교사 한 바퀴를 돌고 운동장 쪽으로 향했다. 왼쪽 나무 곁 잔디밭을 굴렁쇠 형으로 동그랗게 파 엎어 잔디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뒤집어 놓았다. 뒤집힌 잔디 뿌리와 흙이 이랑, 파인 자국은 고랑이 되었다. 클로버의 증식을 막기 위한 조처임을 금방 알아챘다. 클로버는 졸지에 커나갈 자기 땅을 차단당하고 말았다. 이 숨 막히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버는 짙은 녹색 봄옷을 바람에 팔랑이며 나비로 춤추고 있다. 둘러보니 잔디밭 다른 쪽에도 그렇게 차단한 곳이 여러 군데다.저 클로버들은 결국 죽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작업자가 뽑아내거나, 제초제의 공습을 받을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곳은 클로버를 뜯거나 캐낸 흔적도 보인다. 자연의 뜻과 사람의 뜻이 상충하는 현장이다. 자연은 잔디와 클로버가 어우러져 한 땅에 사는데, 사람의 눈과 마음은 그 아울림을 용납할 수 없나보다. 잔디와 클로버가 어우러져 사는 모습도 달리 보면 아름다울 수 있을텐데 말이다.문득 우리나라와 지구촌의 지금 모습도 바로 저렇다는 마음이 들었다. 코로나19의 전염을 막으려 나라 간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고, 국민에게 사회적 격리의 삶을 강제하고 있다. 그 확진자들은 병원이나 시설에서 격리치료를 받거나, 자택격리를 당하며 산다. 미 감염자도 외출 시 꼭 마스크를 쓰고, 사람 모인 곳 안가기, 사회적 거리 두기, 손 씻기 등의 실천을 요구받고 있다. 귀여운 우리 두 손자도 꼼짝없이 자기 엄마들과 집에 갇혀서 이 봄을 지낸다.벚꽃이 피었을 때, 세 살짜리 손자 녀석과 그 아빠와 인근 주택단지에 조성된 벚꽃 길을 처음 드라이브 스루를 한 적이 있다. 차창 밖으로, 예전과 같지만 다른 봄이 와락 달려들었다. 이어, 드라이브 스루로 테이크아웃 커피를 사는 장면도 처음 겪었다. 주일예배를 자차 안에서 드리는 교회도 있다. 코로나19 감염검사도 워킹 스루 방법으로 한단다. 분명 자연은 같은데. 사람이 다른 봄이다.잔디밭에 만들어진 클로버 차단 이랑과 고랑이, 꼭 우리 사회와 지구촌에 만들어진 전염 차단 망(網)으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가. 코로나19란 괴상한 전염병 확산이 정말 박쥐에서 비롯된 자연현상일까. 만에 하나, 사람이 만든 것이 개입되어 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포스트 코로나19 시대를 우리가 어찌 살아내야 할지 깊은 걱정이 앞선다.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본다. 시시각각 짙어지는 신록에 생명의 오라(aura)가 뿜어 나오고 있다. 첨단과학 시대를 사는 인류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코로나19 격리의 올봄을, 그 불행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의료진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방역 당국의 부단한 노력 덕분에, 좋은 봄날 신록의 교정을 걷는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있다. 그분들이 마냥 고맙다.

2020-05-06

봄, 홀로나기

이순영 수필가홀로 봄을 즐기는 나날에 익숙해지려고 한다. 연일 ‘코로나19’라는 얄궂은 바이러스 확산으로 일터에도 나가지 못하고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아파트 승강기 안에도 손소독제가 놓여졌고 손이 자주 닿는 부분은 항균비닐로 덮였다. 수일 전에는 국가에서 정해주는 날 약국 앞에 줄 서서 기다리다가 마스크도 샀다.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도시 같다. 이럴 때는 혼자 있는 것이 편하다.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참 많다. 그 가운데 독서만한 즐거움이 또 있을까. 적당한 게으름을 부리며 찻잔을 들고 서재에 든다. 그동안 손길을 기다리던 책을 펼치면 금세 책속으로 빠져든다. 책이 나를 기다렸고, 내가 책을 그리워했으니 그 만남이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책은 나에게 잊혀져가는 기억들을 되살려주고, 또한 새로움을 선물한다.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통해 지혜의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수많은 문자들과 밀어를 나누다보면 하루가 기차처럼 지나간다.봄이다. 언 땅에서 아기손톱 만 한 새순들이 고개를 내밀고, 나목도 푸른 물 머금어 촉촉할 것이다. 바위 틈사이로 흐르는 개울물도 봄소식 전하느라 종종걸음일 게다. 외출이다. 차를 운전해서 집을 나서자 지척에 매화가 벌써 지고 있다. 개나리, 조팝꽃, 유채꽃, 복사꽃, 벚꽃들이 봄이 왔다고 함성이다. 산천은 넓은 도화지에 연둣빛으로 밑그림을 색칠하느라 한창이다. 눈부신 계절이다. 꽃길을 따라 바다로 향한다. 행복은 이런 것이리라. 홀로 다닐 수 있는 자유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 모두 건강하고 편히 쉴 내 집이 있으니 더 바라면 욕심이겠지. 창문을 열자 바다향이 상쾌하다. 그런데 놀랍다. 이런 광경 처음 본다.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해안 길에 자동차 행렬도 길다. 코로나로 인한 낯선 풍광이다. 불안한 미래와 답답한 마음을 떨치고 바다 같은 일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리라. 선진국이라고 알려진 서방과 유럽에서도 코로나감염으로 사망자가 1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고 한다. 환자를 보살피는 의료진이 감염되어 사망하기도 하니, 공포의 도가니 같다. 뿐만 아니라 국제 항공기들이 멈추었으며, 도서관과 박물관은 폐쇄되었다. 학교와 광장, 길거리에는 인적이 뜸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전쟁’이 연상된다. 해안 길을 돌아 들녘이 이어지는 길로 달린다.찬란한 봄날, 고향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조문은 받지 않는다고, 나지막이 이야기하던 동무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긴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식사 준비하랴, 식탁 정리하랴, 옷매무새 가다듬으랴…. 종종걸음으로 출근하는 일상. 일터에서 만나던 다양한 사람들, 퇴근길에 벗들과 차 마시며 길을 걸으며 웃음꽃 피우곤 했던 평범한 시간들에 감사한다.들녘에 부지런한 농부들은 씨앗 뿌릴 채비가 한창이다. 배나무를 매만지며 봄맞이 준비를 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배나무도 베어졌고 아버지도 떠나셨지만 그 흔적은 배 밭에 서성인다. 양지 바른 곳, 불러도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아버지께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다가 아무 말 없이 잔디사이에 돋아있는 잡초를 뽑는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나의 언행들을 주워 담듯이. 한참을 그러고 나서 돌아보니 아버지의 마당이 듬성듬성하다. 원형탈모 앓는 머리 같아 마음이 아리다. 호미를 내려놓고, 크게 숨을 마신다. 산자락 공기가 참 맑다. 무덤가 마른 덤불 속에 돋아나는 쑥이 눈에 띄었다.여린 쑥을 한 움큼 뜯었다. 보드랍다. 향긋하다. 온몸으로 스며드는 봄이다. 봄을 한 아름 안고 와 집에 펼쳤다. 봄 동산이 되었다. 쑥국을 끓였다. 숨어있던 연둣빛이 환하다. 빛깔로 향기로 집안이 봄의 궁전이다. 봄을 먹는다.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을 때마다 허리를 굽힌다. 내 안에 있던 어두움은 사라지고 화사한 봄이 되었으면 좋겠다. 코로나로 인해 지구촌 곳곳에 ‘침묵의 봄’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침묵의 늪에서도 새싹이 돋아나고 꽃도 피고 열매 맺힌다. 나는 오늘도 나의 놀이터에서 홀로 희망을 찾는다. 꽃만큼 어여쁜 새순들이 지천이다.

2020-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