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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꾼일까 뱅이일까

영화 ‘꾼’포스터. 어떤 고기에 ‘어’를, 어떤 고기에 ‘치’를 붙일까. 전하는 말로는 비늘 있는 고기는 ‘어’를, 없는 고기는 ‘치’를 붙였다는데, 그러면 문어는 ‘문치’로, 오징어는 ‘오징치’로 불러야 맞지 않을까. 사람도 ‘이치’ 또는 ‘저치’라고 부르는데, 비늘이 없다고 그러는 것일까.세상은 천태만상이다. 온갖 사물이 한결같지 아니하고 모양·모습이 각각 다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천 가지 모습과 만 가지 형상이다. 성질과 습성도 모두 다르다. 그래서 우리말은 사람을 단지 ‘사람’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적당한 접미사를 붙여 그러한 사람을 지칭한다.사기꾼, 나무꾼, 협잡꾼, 모사꾼, 지게꾼, 노름꾼, 모주꾼, 정치꾼, 잠꾼, 구경꾼, 춤꾼, 짐꾼, 일꾼‘꾼’은 직업적인 일이나 전문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러한 일이나 행위를 전문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의 뜻을 더하여 명사를 만드는 말이다. 영화 ‘꾼’은 사기꾼을 비롯한 이런저런 꾼들의 암투가 펼쳐지는데, 우리 사회에 근사한 이름으로 암약하는 ‘꾼’을 잘 그려냈다.‘바리’는 어떠어떠한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 등이다.꼼바리 : 성질이 좀스럽고 인색한 사람.샘바리 : 샘이 많아 안달하는 사람.어바리 ; 어리석고 멍청한 사람.하바리 : 품위나 지위가 낮은 사람.발바리 : 중요한 볼일도 없이 경망스럽게 이리저리 잘 돌아다니는 사람.뒤듬바리 : 어리석고 둔하며 거친 사람.뒤틈바리 : 어리석고 미련하여 하는 일이 찬찬하지 못한 사람.트레바리 : 이유 없이 남의 말에 반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뒤뚱발이 : 걸음을 뒤뚱거리며 걷는 사람.딸깍발이 : 신이 없어 마른날에도 나막신을 신는다는 뜻으로, 가난한 선비를 일컬음.삼천발이 : 삼천발잇과의 극피(棘皮)동물.앙가발이 : 다리가 짧고 굽은 사람.쥐엄발이 : 발끝이 오그라져 디뎌도 잘 펴지지 않는 발. 또는 그런 사람.‘배기’는 그 나이를 먹은 아이, 무엇이 들어있거나 차 있는 것’의 뜻 또는 특정한 곳이나 물건을 나타내는 말이다.(두)살배기, 가짜배기, 공짜배기, 귀퉁배기, 나이배기, 대짜배기, 댓살배기, 진짜배기, 육자배기, 알짜배기, 양코배기, 언덕배기, 고들빼기, 구석빼기, 대갈빼기, 머리빼기, 악착빼기, 얼룩빼기, 억척빼기, 앍족빼기, 앍작빼기, 앍둑빼기, 얽둑빼기혀짤배기 : 혀가 짧아서 ‘ㄹ’ 받침을 똑똑하게 소리 내지 못하는 사람.과녁빼기 : 조금 떨어져 똑바로 건너다보이는 곳.얽적빼기 : 얼굴이 얽적얽적 얽은 사람.꽈배기, 뚝배기, 알배기, 학배기, 낮배기, 밥빼기, 코빼기, 얽빼기, 재빼기‘박이’는 무엇이 박혀 있는 사람이나 짐승 또는 물건, 무엇이 박혀 있는 곳 또는 더하거나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는 뜻이다.금니박이, 네눈박이, 외눈박이, 덧니박이, 소박이, 옥니박이, 외톨박이, 차돌박이‘뱅이’는 그것을 특성으로 가진 사람이며, ‘쟁이’는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 또는 그러한 습성을 지닌 사람을 뜻한다.가난뱅이, 건달뱅이, 게으름뱅이, 너털뱅이, 비렁뱅이, 안달뱅이, 앉은뱅이, 얼금뱅이, 장돌뱅이, 좁쌀뱅이, 주정뱅이, 허튼뱅이, 헌털뱅이, 풍각쟁이, 트집쟁이, 핑계쟁이, 안달쟁이, 개구쟁이, 심술쟁이, 욕심쟁이, 자랑쟁이, 멋쟁이, 뚜쟁이, 관상쟁이, 그림쟁이, 글쟁이, 글품쟁이, 닦이쟁이, 뜸쟁이, 마술쟁이, 미두쟁이, 풍수쟁이, 월급쟁이나는 어디에 해당하는가. 가만히 생각해보자. 글을 쓰니까 글쟁이, 돈이 많지 않으니까 가난뱅이, 혼자 잘 지내니까 외톨박이, 가끔은 속 좁게 행동하니까 꼼발이, 좁쌀뱅이, 남의 흠을 들추니까 트집쟁이, 잘난 척도 하니까 자랑쟁이이다./김이랑 수필가·문학평론가끝

2021-12-29

길짐승일까 날짐승일까

불가에서 중생(衆生)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살아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중생의 뜻은 두 갈래로 분화되었는데, 하나는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해탈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또 하나는 발음이 ‘짐승’으로 변해 사람을 제외한 동물만을 가리킨다.하늘을 나는 짐승은 ‘날짐승’, 땅 위를 기는 짐승은 ‘길짐승’이다. 들에 사는 짐승은 ‘들짐승’이며 물에 사는 짐승은 ‘물짐승’, 산에 사는 짐승은 ‘산짐승’이다. 집에서 키우는 짐승은 ‘집짐승’이며 한자어로는 가축(家畜)이다. 이들을 통틀어 금수(禽獸)라고 하는데, ‘禽’은 날짐승이며 ‘獸’는 길짐승이다.우리말은 짐승뿐만 아니라 그것의 새끼도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붙였다. 사람으로 치면 ‘어린이’라고나 할까,풀치 : 갈치 새끼.강아지 : 개 새끼.망아지 : 말 새끼.고도리 : 고등어 새끼.간자미 : 가오리 새끼.꽝다리 : 조기 새끼.능소니 : 곰 새끼.개호주 : 호랑이 새끼.꺼병이 : 꿩 새끼.애소리 : 날짐승의 어린 새끼.초고리 : 매 새끼.병아리 : 닭 새끼.솜병아리 : 알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솜털 같은 병아리.서리병아리 : 서리가 내릴 즈음 알에서 나온 병아리.숭어/모쟁이, 조기/깡다리, 농어/껄떼기, 멸치/잔사리, 명태/노가리, 노래미/노래기, 누치/대갈장군, 방어/마래미, 웅어/모롱이, 잉어/발강이, 민어/암치, 상어/전데미, 전어/전어사리암소의 배에 있는 송아지를 ‘송치’라고 불렀다. 길짐승에게 사람처럼 태명을 붙인 이유는 소를 가족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밭을 갈고 수레를 끌고, 농사에 가장 큰 노동을 담당하는 소는 사람과 가장 밀착된 교감이 있었다. 그래서 농부들은 소를 사람처럼 소중하게 여겼다.동부레기 : 뿔이 날 만한 나이가 된 송아지.부룩소 : 아직 길들이지 않은 송아지, 엇부루기.하릅송아지 : 태어난 지 1년 된 송아지.불강아지 : 몹시 여윈 강아지.찌러기 : 성질이 몹시 사나운 황소.푿소 : 여름에 생풀만 먹고 자라 힘을 잘 못 쓰는 소.애돝 : 한 살 정도 된 돼지.햇돝 : 그 해에 태어난 돼지.짐승은 새끼를 여러 마리 낳는다. 한 태에서 낳은 새끼 가운데 제인 먼저 나온 놈을 ‘무녀리’라고 불렀다. ‘門열이(문+열+이)’ 즉 문을 열고 나왔다는 뜻으로 발음 그대로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무녀리는 산도를 연다고 안간힘을 써서 그런지 다른 새끼들에 비해 몸이 약하다고 한다. 그래서 좀 모자라는 듯한 사람을 빗대어 비유하는 말로도 쓴다.날짐승도 아니고 들짐승도 아닌 짐승이 있다. 닭과 오리인데, 둘은 멀리 높이 날지 못하거니와 걷거나 뛰는 동작도 서툴기 그지없다. 저리 굼떠서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은데, 멸종되지 않고 종족을 보전하고 있다. 사람에 의해 길러진 ‘길짐승’으로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사람이 짐승의 생태에 개입한 건 개가 처음이라고 한다. 집짐승화되면서 개는 야성을 버리고 주인에게 아양을 떠는 동물이 되었다. 천적이 우글거리는 야생에 비하면 집은 먹이와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니, 주인에게 충성을 표시하는 습성이 길러진 것이다.개들은 주인을 보면 배를 발랑 드러낸다. 포유류는 신체에서 배가 가장 약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강자에게 배를 드러내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주인은 나를 죽이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행위이다.애완견은 야생에서 살지 않아도 되니, 죽어라 뜀박질할 일도 없다. 천적의 눈을 피해 숨거나 몸을 움츠릴 일도 없다. 사람에게 재롱을 떨면 되고 예쁘게 보이면 된다. 그래서 사람과 함께 사는 개는 새끼를 낳을수록 예쁘고 귀엽게 진화한다. 요즘 반려동물을 보면 다 그렇다.야생에서 살 자유를 포기한 집짐승과 야생에서 마음껏 살아가는 들짐승, 둘 중 누가 행복할까.생뚱맞은 말 같지만, 이는 인간에게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교칙, 규칙, 윤리, 도덕에 길들여진 존재인 인간, 밥줄을 쥔 ‘센놈’에게 아양을 떨어야 하고 잘 보여야 하고 더러는 충성을 서약해야 한다. 이렇게 살라고 태어난 목숨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모든 속박을 끊고 산들바다로 떠나 원시의 자유를 누린다.어느 바닷가에서 닿아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면 속이 탁 트인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날짐승을 보면 시원하고 유려한 날갯짓을 카메라에 담는다. 자유를 향한 동경 한 컷이다./수필가·문학평론가

2021-12-15

잠을 자야 꿈을 꾸지

사람이 잠을 자는 시간은 하루 8시간 정도이다. 인생의 1/3이나 잠을 자는 셈이다. 백 년도 못 사는 유한한 삶에서 그만한 시간을 무의식으로 보낸다니, 낭비도 이러한 낭비가 없다. 잠만 없다면 얼마든지 인생을 즐길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고단한 우리네 인생에서 잠만큼 달콤한 것이 없다.우리말은 잠도 여러 갈래로 나누었다.때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나누고 깊이에 따라 나눈다. 모양에 따라 비유해 이름만으로도 잠자는 모습이 그려진다. 잠의 종류를 음미해보면 다시 느끼게 된다. 어느 언어가 이처럼 세밀하고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우리말의 표현력은 알면 알수록 놀랍다.개잠 : 개처럼 머리와 팔다리를 오그리고 옆으로 누워 자는 잠.겉잠 : 겉눈을 감고 자는 체하는 잠. 선잠.괭이잠 : 깊이 들지 못하고 자주 깨면서 자는 잠. 노루잠.굳잠 : 아주 깊이 드는 잠. 귀잠.그루잠 : 깨었다가 다시 드는 잠. 두벌잠.꾀잠 : 거짓으로 자는 체하는 잠.꿀잠 : 꿀맛처럼 달콤한 잠. 단잠.나비잠 : 어린아이가 반듯이 누워 두 팔을 머리 위로 벌리고 자는 잠.낮잠 : 낮에 자는 잠.노루잠 : 자다가 자꾸 깨어 깊이 들지 못하는 잠. 괭이잠.늦잠 : 아침 늦게까지 자는 잠.단잠 : 깊이 달게 자는 잠. 곤하게 든 잠.도둑잠 : 자지 않아야 할 시간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자는 잠.도적잠 : 자는 시간이나 곳이 아닌데, 사람의 눈을 피하여 살짝 자는 잠.돌꼇잠 : 누운 자리에서 빙빙 돌며 자는 잠.두벌잠 : 한 번 들었던 잠이 깨었다가 다시 드는 잠. 개잠.등걸잠 : 옷을 입은 채 아무 데서나 나뒹구는 잠.말뚝잠 : 앉은 채로 자는 잠.발칫잠 : 다른 사람의 발치에서 자는 잠.발편잠 : 발을 죽 펴고 편안하게 자는 잠.밤잠 : 밤에 자는 잠.사로잠 :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는 잠.새벽잠 : 새벽에 깊이 드는 잠. 아침잠.새우잠 : 새우처럼 모로 누워 몸을 구부리고 자는 잠. 시위잠.선잠 : 깊이 들지 않은 잠. 겉잠. 여윈잠. 수잠.속잠 : 깊이 든 잠.수잠 : 깊이 들지 않은 잠. 선잠. 여윈잠.시위잠 : 활시위 모양으로 웅크리고 자는 잠. 새우잠.아침잠 : 아침에 자는 잠. 새벽잠.안잠 : 남의 집에서 그 집 일을 해 주고 그 집에서 자는 일.여윈잠 : 깊이 들지 못한 잠.온잠 : 밤새 온전히 자는 잠.이승잠 : 병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줄곧 자는 잠.쪽잠 : 짧은 틈을 타서 불편하게 쪼그리고 잠깐 자는 잠.칼잠 : 비좁은 방에 여러 사람이 잘 때, 한쪽 어깨만 바닥에 대고 옆으로 길게 뻗어 자는 잠.풋잠 : 잠든 지 오래지 않아 깊이 들지 않은 잠.한뎃잠 : 한데서 자는 잠.한잠 : 한창 깊이 든 잠.헛잠 : 자는 체하는 잠.늘 불안한 노루처럼 자는 잠, 눈은 감고 귀는 살아 있어 고양이처럼 자는 잠, 자리가 비좁아서 모로 누운 칼처럼 자는 잠, 꼿꼿하게 박힌 말뚝처럼 앉아서 자는 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등걸처럼 자는 잠, 실을 감고 푸는 돌꼇처럼 빙빙 돌며 자는 잠, 나비처럼 팔다리를 활짝 벌리고 자는 잠, 이처럼 우리말은 비유가 살아 있어 말만 들어도 어떻게 잤는지 알 수 있다.- 쟤는 얼마나 피곤한지 등걸잠을 자더라.- 노루잠을 잤어.- 쪽잠이라도 청하세.- 한뎃잠 잤더니 삭신이 쑤시네.잠은 때와 곳을 가리지 않는다. 때에 따라 새벽잠, 아침잠, 낮잠, 초저녁잠, 밤잠이다. 곳에 따라 집 밖에서 자면 한뎃잠, 바깥잠, 남의 발치에서 자면 발칫잠이다. 목적에 따라 속이려면 헛잠, 꾀잠, 시간에 따라 나누어 자면 쪽잠, 두벌잠, 토막잠, 깊이에 따라 괭이잠, 단잠, 꿀잠, 풋잠, 여윈잠이다. 말만 들어도 잠을 잘 잤는지 못 잤는지 알 수 있다.잠을 잘 여유가 많지 않은 세상이다. 잠을 줄이며 공부해야 하고 잠 안 자고 일해야 한다. 그래야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모자라는 잠을 채우려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하는데, 피로가 쌓였을 때 눈꺼풀은 역기보다 더 무겁다. 운전하다가 아주 가벼운 눈꺼풀조차 들어 올리지 못해 영원한 잠에 빠지기도 한다.잠은 삶을 건강하게 하는 생물학적 장치이다. 언제 어디서든 잠을 잘 수 있으면 좋겠다. 일상의 스위치를 끄고 눈을 감아야 꿈을 꿀 것이 아닌가. 인간은 꿈꾸는 동물이고 꿈을 먹고 사는 동물이므로. /수필가·문학평론가

2021-12-01

눈 내린 날 우리는

우리네 강산은 아름답다. 봄에는 새파란 잎과 들꽃, 여름에는 짙은 녹음과 바다가 펼쳐진다. 가을에는 온 산에 단풍, 겨울이면 하얀 눈이 세상을 덮는다. 사계절이 순환하고 계절마다 자기 풍경을 펼치는 자연이 있어 우리네 삶도 다채롭다.함박눈 : 함박꽃 송이처럼 굵고 탐스럽게 내리는 눈. 가루눈.싸라기눈 : 빗방울이 갑자기 찬바람을 만나 얼어서 떨어지는 쌀알 같은 눈.가랑눈 : 조금씩 잘게 내리는 눈.눈설레 : 눈과 함께 찬바람이 몰아치는 현상.도둑눈 : 밤에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살그머니 내린 눈.떡눈 : 물기를 머금어 떡처럼 척척 달라붙는 눈송이.살눈 : 얇게 내리는 눈.설밥 : 설날에 오는 눈.숫눈 : 눈이 와서 덮인 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눈.길눈 : 한 길이 되도록 쌓인 눈.눈석임 : 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 스러짐.소나기눈 : 폭설.자국눈 : 발자국이 겨우 날 정도로 적게 온 눈.잣눈 : 잔 자쯤 온 눈.풋눈 : 초겨울에 약간 내리는 눈.우리에게는 눈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첫눈 내리는 날 어디서 만나자. 손톱에 들인 봉숭아 꽃물이 첫눈 오는 날까지 남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꿈은 눈처럼 순수했다. 꿈은 눈 녹듯 눈석임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날까지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다.‘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첫눈 오는 날 만나자/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팔짱을 끼고/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더러 사먹기도 하면서/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첫눈 오는 날 만나자/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아침에 일어나면 창문에 성에가 하얗게 끼어 있었다. 뙤창문을 입김 호호 불어 닦아, 바깥을 내다보면 밤새 도둑눈이 함박 내려 마당이 온통 하얬다. 문을 열면 낯설고 환한 세상이 펼쳐졌다. 바깥으로 나가 신발을 신고 처마를 나설 때, 숫눈 위에 차마 첫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뽀드득 한 발 뽀드득 두 발, 발자국을 찍는 감촉이 참 좋았다. 그렇게 첫 발자국은 길이 되었다. 발자국은 사립문을 지나 고샅으로 나가 이웃과 이웃을 이었다.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공터에 모였다. 눈을 수박만하게 뭉쳐 굴렸다. 이쪽으로 굴리고 저쪽으로 굴리고, 눈덩이는 점점 커졌다. 힘에 부쳐 더 굴릴 수 없을 때, 다시 눈을 뭉쳐 굴렸다. 굴린 눈덩이가 적당히 커지면 큰 눈덩이 위에 올렸다. 헌 양은 대야를 씌우고 숯덩이로 눈코입을 만들고 솔가지를 꺾어 수염으로 붙였다.집집마다 골목마다 눈사람이 섰다. 곰방대를 물고 담배 피는 할아버지 눈사람, 큰 냄비를 쓰고 나무 창을 든 병정 눈사람, 이제 걸음마를 뗀 자식 같은 눈사람, 자기 멋대로 생긴 눈사람, 참말이지, 할머니 같고 동생 같고 가족 같았다. 밤새 추위에 떨까 봐 목도리를 둘러주기도 했다.서너 명씩 패를 짜서 눈싸움을 했다. 눈을 뭉치고 던지고 날아오는 눈뭉치를 피하다가 눈 위에 나동그라졌다. 그렇게 뒤섞여 뛰어놀면 어느새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평소 쌓인 감정을 실어 눈덩이를 던지기도 했다. 눈싸움, 눈사람, 눈썰매, 눈미끄럼틀, 함께 뛰어놀면 묵은 감정은 다 날아가고 개운한 웃음만 남았다.눈 오는 날에는 아이고 어른이고 다 순수해졌다. 눈밭에서 뒹구느라 옷을 다 버려도 어른들은 나무라지 않았다. 마음껏 뛰어놀아야 크고 또 그렇게 저절로 커야 사람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추위를 이기고 체력을 키우는 데 그만한 놀이가 없었다.종일 뛰어놀았으니 몸이 나른했다. 아랫목에 누워도 눈밭에서 뛰어놀던 그림이 지워지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면 잠도 꿈도 눈송이처럼 포근했다. /수필가·문학평론가

2021-11-17

따스하고 착한 별빛 명상

어둠이 내리면 천지가 깜깜한 시절이 있었다. 골목을 밝히는 가로등도 휘황한 네온사인도 없었다. 사람의 집 영창에 비친 은은한 불빛이 전부였다. 그래서 여름밤 개울가에 나가면 개똥벌레가 지천으로 날아다녔다.그런 날, 먼 산 너머에는 어김없이 별똥별이 긴 빗금을 그으며 떨어졌다. 별똥별이 떨어지면 흙이 되고 그 위에 금싸라기 은싸라기 별꽃이 피고 개똥벌레가 날아가 하늘의 별이 된다고 믿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 신화는 깨졌지만 밤하늘에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주렁주렁 열려있다.개밥바라기 : 해가 진 뒤 서쪽 하늘에 반짝이는 별, 금성으로 개 밥을 줄 때쯤 뜬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늑대별 : 천랑성(天狼星)이라 불리운다. 狼은 늑대이며 큰개자리의 시리우스별이다.닻별 : 북두칠성 아래 카시오페이아 자리를 일컫으며 모양이 닻을 닮았다고 하여 닻별이다.무저울 : 혜성 꼬리에 나란히 있는 두 개의 별.미리내 : 남북으로 강물처럼 흐르는 별의 군집.별똥별 : 유성.붙박이별 : 북극성으로 지구의 자전축 위에 있어 위치가 변하지 않는다.살별 : 긴꼬리를 끌고 도는 혜성으로 꼬리별이라고도 한다.샛별 : 금성으로, 새벽에 뜨면 샛별, 저녁에 뜨면 개밥바라기별이다.싸라기별 : 싸라기처럼 잘게 흩어진 별. 잔별이라고도 한다.어둠별 : 어둠이 짙어진 후 서쪽 하늘에서 반짝이는 금성을 말한다.여우별 : 날씨가 궂을 때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별.짚신할아버지 : 독수리자리의 견우성이다. 모양이 짚신을 삼는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하늘의 해달별은 지구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해는 에너지를 주고 달은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고 별은 길잡이가 된다. 인간에게 해는 희망을 주고 달은 휴식을 준다. 반짝이는 별은 꿈을 준다.“어둠은 별을 낳고 별은 명상을 낳는다. 칠성별, 플레이아데스 그리고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밤마다 줄기차게 윙크를 보내는 무수한 별자리들, 별은 암흑 속에서 제 몸을 태워 존재를 증명하고, 빛은 수 억 광년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온다. 그리하여 티끌만한 내 존재에 관한 명상에 불을 댕긴다.끝을 알 수 없는 시공간, 은하계 한 모퉁이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 가운데 지구에 사는 숱한 사람 중에 한 점, 나는 누구이며 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길을 찾는 존재론적 질문에 종교는 천당과 지옥으로 말하고 철학은 에둘러 말할 뿐, 별에서 와서 별로 간다는 신화만큼 희망을 주는 이야기는 없었다.”(김이랑 수필 ‘별’ 부분)별을 사색한 글이다. 작가는 별을 보며 ‘반짝인다’는 단세포적 인식에 그치지 않는다. 별을 바라보며 망망한 우주에서 티끌만한 자신의 존재를 사색하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라는 명상에 닿는다. 이처럼 별은 인간에게 숱한 영감을 준다. 그래서 인간은 밤하늘 별자리에 숱한 이야기를 걸어놓았다. 칠성신화, 견우와 직녀, 별자리마다 전설이 있다. 이러한 신화적 상상은 감수성 예민한 사람을 통해 문학이 되었다.“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소리 별 그림자그 물로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 나면굴뚝 가까이 내려오던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사람들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도종환 ‘어떤 마을’ 전문)별은 밤하늘에만 뜨지 않는다. 어둠이 내리고 사람의 마을 집집마다 불을 켜면 그 또한 별 하나 뜨는 일이다. 멀리서 보면 그 별은 군집을 이루어 하나의 별자리가 된다. 시인은 사람들은 착하고 별들은 따스하다고 표현한다.별을 세다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참 많았다. 별 하나에 단짝 친구가, 별 둘에 좋아하는 사람이, 별 셋에 언젠가 별빛처럼 나를 향해 달려올 사람이, 별 넷에 작년 이맘때 하늘로 가신 어머니가, 별 다섯에 이런 사람이, 별 여섯에 저런 사람이….해와 달은 하나이기 때문에 모두가 공유한다. 하지만 별은 무수하므로 너와 내가 다툼 없이 나누어 가진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그래서 사람들은 너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겠다고 ‘뻥’을 쳤다. 그 ‘뻥’은 지금도 마음이 착하고 따스한 사람에게는 반짝이는 진실이다. /수필가·문학평론가

2021-11-03

우리말에 녹아있는 우리네 삶

우리말은 어느 나라 말보다 감각적이다. 동작, 모양, 상태 등을 음으로 나타내는 소리글자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자음과 모음의 음운 체계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글 자모의 결합으로 표현하지 못할 음이 없을 정도이다. 우리말은 보이는 모습은 물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까지 가장 닮은 음으로 나타낼 수 있다.미쁘다, 미덥다, 살갑다, 얄궂다, 퀭하다, 애틋하다, 아련하다, 아스라하다, 시큰둥하다, 뾰루퉁하다, 아늑하다, 청승맞다, 달짝지근하다, 살뜰하다, 얼큰하다, 거나하다, 허우룩하다, 푼푼하다. 진득하다, 삼삼하다, 함초롬하다, 새초롬하다, 늙수그레하다 등, 우리말 형용사는 다른 언어가 흉내조차 못 내는 표현이 수두룩하다.몽총하다 - 융통성 없이 새침하고 냉정하다.- 박력이 없고 대가 약하다.- 부피나 길이가 좀 모자라다.‘몽총’이라는 어감을 음미해보자. ‘몽’에서 ‘몽땅하다’가 연상되고 ‘총’은 사물에서 튀어나온 오라기로 꼬리 또는 ‘짧다’가 연상된다. 또한 ‘시치미’가 연상된다. 그래서 시치미 떼듯 새침하게 굴거나 길게 이어가지 못하거나 좀 모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얼마나 기가 막힌 표현인가.가다, 오다, 먹다, 뛰다 같은 동사는 동작을 나타내므로 외국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형용사는 다르다. 우리말은 상태를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내기도 하는데, 그 비유를 곱씹어보면 참 재미있다.- 눈 : 눈이 높다, 낮다. 눈 밖에 나다, 눈 코 뜰새 없다, 눈에 익다, 눈에 밟힌다, 눈 빠지게, 눈 뜨고 코 베간다.- 코 : 큰코 다친다, 코를 납작하게, 콧방귀, 콧대가 높다, 코 꿰다, 콧대를 꺽다.- 귀 : 귀가 얇다, 귀 따갑게, 귀가 뚫린다.- 입 : 입이 걸다, 입이 야물다, 입을 맞춰두다, 입안에 혀처럼 감긴다, 입방정을 떨다.- 목 : 목 잘린다, 목 빠지게 기다린다, 목구멍에 거미줄치랴,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간 : 간이 크다, 작다, 간이 부었다, 간이 떨린다, 간을 빼준다.- 손 : 손이 크다, 손이 작다, 손이 검다, 손 털다.- 발 : 발이 짧다, 발이 길다, 발이 넓다. 손발이 맞다, 발이 빠지다, 발목 잡히다.- 다리 : 양다리 걸치다, 남의 다리 긁는다, 한 다리 건넌다.- 어깨 : 어깨에 힘 주다, 어깨 너머로 배우다, 어깨(깡패).- 머리 :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러한 표현은 문장에서 주어의 상태를 나타내지 않는다. ‘눈이 높다’는 수준이 높은 것에만 관심을 두고 여간한 것은 시시하게 여길 만큼 거만하다는 뜻이다. ‘콧대가 높다’도 비슷한 뜻이다. ‘귀가 얇다’는 속는 줄도 모르고 남의 말을 잘 믿는다는 뜻이다. ‘발이 길다’는 음식 먹는 자리에 우연히 가게 되어 먹을 복이 있다는 뜻이다.이러한 말을 곱씹어보면 표현이 매우 직접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목이 빠지게 기다렸으니 얼마나 간절했다는 말인가. 배 터지게 먹다, 박 터지게 싸우다, 목 터지게 부르다, 눈 빠지게 보다, 쌔 빠지게 일하다, 배꼽 빠지게 웃다, 뼛골 빠지게 고생하다, 등이 이런 갈래의 말이다.이러한 말은 비유의 묘를 잘 살린다. 상태를 사람의 실제 행위로 표현해 본뜻 이외의 뜻을 은유로 나타낸다. ‘간이 크다’는 간의 크기만 말하는 게 아니다. ‘대담(大膽)하다’라는 형용사를 실제 사물로 비유한 문장이다. ‘애(창자)가 끓다’, ‘염통에 털이 나다’,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간이 떨어질 뻔하다’, ‘손끝이 맵다’, ‘입이 야물다’라는 표현도 이와 같은 비유이다.쌀쌀한 가을 이맘때면, 외롭고 허전해서 옆에 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러한 마음을 우리는 ‘옆구리가 시리다’로 간단하게 표현한다. 잘 먹고 마음 편하게 사는 상태를 우리는 ‘배부르고 등 따시다’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우리말 관용어에는 직유가 풍성하고 은유가 넘친다.우리말은 우리 민족성의 보고이다. 은근, 풍자, 해학 같은 민족의 정서가 고스란히 말에 실려 속담이 되고 관용어가 되었다. 다채로운 정서 또한 형용사와 부사의 발달로 나타났다. 우리말은 우리네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수필가·문학평론가

2021-10-20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10개

해마다 한글날을 앞두고 이런저런 행사가 열린다. 한류가 세계의 문화를 주도하는 시대에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행사는 바람직하다. 언론도 우리말의 우수성을 알리는 기사를 싣는다. 그러고는 우리말을 사랑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튿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외래어가 넘치는 기사를 남발한다.“리어에는 센티멘탈하고 절제된 바디 위에 스포티한 느낌을 살린 투 라인 테일램프를 적용하였으며, 리어 펜더의 숄더 볼륨에 포인트를 준 낮고 와이드한 프로파일과 쿠페형 루프 끝단에 위치한 고정형 리어 윙 스포일러로 하이 퀄리티한 EV 이미지를 강조했다.”국산 승용차를 소개하는 기사인데, 번역체를 구사하고 영어를 많이 쓴 이유를 물어보니 고급스러움과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란다. 반대로 보면 한국어로 쓰면 저급스럽고 신뢰감이 떨어진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의식은 거리의 간판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말의 우수성을 모르는 사람은 영어는 고급스럽고 세련되었다는 편견에 빠져있다.우리말은 동사를 중심으로 하는 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동사가 발달했고 그에 따라 형용사도 발달했다. 예를 들어보자.- 달리다, 내닫다, 치닫다, 내달리다, 치달리다, 내리달리다- 돌다, 휘돌다, 맴돌다, 에돌다, 겉돌다, 공돌다, 나돌다, 감돌다, 떠돌다, 베돌다, 싸고돌다, 장돌다, 통돌다, 헛돌다, 계면돌다- 서다, 추서다, 벋서다, 못서다, 엇서다, 뒤서다, 갈서다, 나서다, 대서다, 다가서다, 돌아서다, 들어서다, 갈라서다, 가로서다, 곤두서다, 곧추서다, 내려서다, 넘어서다, 따로서다, 올라서다, 일어서다, 빕더서다, 비켜서다, 물러서다, 앞장서다, 물구나무서다달리다, 돌다, 서다, 하나에 그치지 않고 움직임의 상태에 따라 세분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증명으로, 우리말은 표현하지 못할 움직임이 없을 정도다.“우리말은 표음문자다. 대상의 움직임이나 상태 그리고 성질 등을 음성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도록 발달했다. 특히 형용사와 부사에서 도드라지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풍부한 감성과 관련이 있다. 한국어에서 형용사는 고유어 비중이 높다. 표현 또한 다양하여 우리말의 특성을 잘 반영한다. 이러한 점에서 형용사는 ‘한국어다운’ 어휘로 꼽힌다. 풍부한 표현력, 아름다운 어휘, 묘사와 상징이 풍부한 ‘소릿말’이 적재적소에 활용되기 때문이다.”(김이랑 ‘문장의 문학적 메커니즘’부분 발췌)미쁘다, 예쁘다, 참하다, 어여쁘다. 탐스럽다, 살갑다, 밉살맞다, 푸르데데하다, 푸르뎅뎅하다, 푸르죽죽하다, 푸르스름하다, 누르스름하다, 가무스름하다, 불그스레하다, 동그스름하다, 가느스름하다, 야트막하다, 나지막하다, 자그마하다, 나직하다, 달콤하다, 달짝지근하다, 우락부락하다, 얼룩덜룩하다, 울긋불긋하다, 알쏭달쏭하다, 시시껄렁하다, 시금털털하다,동사가 풍성하면 이를 수식하는 형용사도 이처럼 발달한다. 상태를 나타내는 우리말은 풍성하다. 어감으로 실제를 연상할 수 있다. 감각적이면서 감성적인 표현은 형용사에도 넘치는데 특히 흉내말에서 도드라진다. 우리말은 흉내말을 무한대로 만들어낸다.찰랑찰랑, 자박자박, 넌출넌출, 알록달록, 어슬렁어슬렁, 어우렁더우렁, 붉으락푸르락, 퐁당퐁당, 방긋방긋, 두리번두리번, 바람만바람만, 왁자지껄, 헐레벌떡, 그냥저냥, 개발괴발, 곤드레만드레, 미주알고주알, 아옹다옹, 알콩달콩, 얼렁뚱땅, 오순도순, 허겁지겁, 흐슬부슬, 흐지부지, 흥청망청, 얼씨구절씨구….우리말 동사는 움직임이 살아있다. 형용사는 모양을 그대로 어감으로 살린다. 그래서 생동감이 넘치고 상태도 실감이 난다. 이는 표음문자의 특성이지만, 그 특성을 잘 살려 표현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언어 사용자인 우리이다. 이처럼 풍성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만들고도 외국어를 고급스럽다고 여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김수영(金洙暎·1921~1968) 시인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수필에서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낱말로 꼽았다. 시인이 살던 시대의 언어라서 지금 우리에게 약간 덜 친근하지만, 외래어 홍수에 휩쓸리는 오늘의 언어를 돌아보라는 성찰을 준다.한글날, 일 년에 한 번쯤이라도 주변을 돌아보며 우리말을 찾아보시라. 그러고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10개를 꼽아 보시라./수필가·문학평론가

2021-10-06

고생대로 가는 길

“아빠, 오늘도 무사히!”갱도 입구에 안전을 기원하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갱도로 한참 들어가면 탄맥을 따라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갈래마다 더는 들어갈 수 없이 막힌 곳이 있는데, 바로 막장이었다. 광부들은 삽과 곡괭이로 석탄을 캐며 더 깊이 길을 냈다.덕대 - 남의 광산에서 계약을 맺고 채굴권을 얻어 광물을 캐는 사람.간드레 - 광산의 갱 안에서 불을 켜서 들고 다니는 카바이드를 연료로 하는 등.선산부 - 막장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후산부 - 석탄을 갱 밖으로 운반하는 광부.동바리 - 갱도를 떠받치는 통나무.쫄딱구덩이 - ‘작은 구멍’이란 뜻으로 영세탄광 또는 하청탄광을 일컫는 은어. ‘쫄딱’은 규모가 작고 망하기 쉽다는 의미.개청부 - 하청탄광 광부들을 비하해 부르는 표현.스데바 - 난장 잡부.햇돼지 - 신입 광부.열갱이 - 일에 능하지 못하고 둔한 광부.선탄장 - 석탄 더미에서 돌을 골라내는 작업장.“검은 황금을 찾아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던 시대, 탄광촌에는 들도 길도 온통 까맸다. 송사리, 버들치가 유유히 노니는 강은 그림책에나 나오는 풍경이며, 금모래가 반짝이는 강은 동요로나 부르는 노래였다. 개울도 까맣게 흘러 아이들이 풍경화를 그릴 때면 검정 크레파스도 초록만큼 닳았다. 산하를 뒤덮은 석탄이 해맑은 동심까지 까맣게 물들였던 것이다.”- 김이랑 수필 ‘검은 강’ 중석탄이 있는 곳은 고생대 지층이다. 광부들은 하루에 한 번 고생대와 현생대를 오갔다. 고생대 지층 막장에서 갱 바깥 현생대로 나오면 광부들은 먼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연기 한 모금 길게 뿜어낼 때, 살아서 나왔다고 안도했다. 그래서 광산촌 사람에게는 하지 말아야 할 금기도 많았다.- 출근할 때 다녀오겠다고 인사하지 않는다.- 출근하려고 집을 떠날 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꿈자리가 사나우면 출근하지 않는다.- 탄광일 나가기 전 까지는 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여자가 그릇을 깨면 출근하지 않는다.- 출근할 때 머리 위로 까마귀가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 부부싸움 후 갱내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침을 먹을 때 밥그릇이 엎어지면 출근하지 않는다.- 광부가 출근할 때 여자가 앞길을 가로지르지 않는다.출근할 때 인사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고 믿었다. 집을 나선 뒤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두려움을 이겨냈다. 흉몽을 꾼 날이면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일당을 주었는데, 이를 ‘마른공수’라고 했다. 나쁜 꿈자리도 공식 결근 사유로 인정했다.금기를 잘 지켜도 사고는 자주 터졌다. 갱내 곳곳에 목숨을 위협하는 요소가 도사리고 있어 언제 어디서 누가 다치고 목숨을 잃을지 몰랐다. 발파하거나 갱도가 붕괴되거나 지하수가 터지거나 유독가스가 폭발해 많은 광부가 갱내에 갇혔다. 바깥 동료들은 며칠 밤을 새면서 구조작업을 했고 동료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럴 때면 온 동네가 한꺼번에 초상을 치렀다.갱내가 정비되면 다시 채굴에 들어갔는데, 광부들은 갱내에 죽은 동료의 영혼이 떠돈다는 것을 느꼈다. 발파할 때, “○○야, ○○야, ○○야, 나가자, 발파다, 나가자”며 망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른 뒤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렸다. 이는 자신이 죽은지 모르고 갱내를 떠도는 영혼을 갱 밖으로 인도하는 진혼의식이었다.순직한 광부의 아내는 보상금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딱히 갈 곳이 없는 여성은 그대로 남았는데, 어린 새끼들 데리고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고 해서 탄광에서 특별히 배려했다. 갱에서 올라온 석탄 더미에서 석탄과 잡석을 가려내는 일을 주었다. 이러한 여성 광부를 ‘선탄부(選炭婦)’라고 불렀다.개발독재 시절, 국가는 광부들을 국가의 동력을 캐는 ‘산업전사’라며 한껏 치켜올렸다. 하지만 그 말로는 좋지 않았다. 늙은 광부에게 남는 것은 폐 속에 탄광 한 구덩이었다. 숱한 광부가 진폐로 가쁜 숨을 쉬다가 삶을 마감했고, 석탄밥을 먹고 자란 아들딸이 검은 기억을 잊지 못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 살고 있다.그 자리는 이제 흔적만 남았다, 갱도가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던 자리에 지금은 카지노와 위락시설이 밤이면 불야성을 이룬다. 카지노가 문을 열면 일확천금 눈먼 돈을 캐려는 광부들이 줄지어 들어간다. 또 다른 막장이다./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9-22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문명의 붕괴’ 표지. 아나바다 운동을 벌인 시절이 있었다. 아나바다는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받아 쓰고 다시 쓰자는 준말인데, 20세기 말,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IMF 구제금융 사태를 이겨내려고 사람들이 펼친 운동이다. 사람들은 쓰지 않는 물건을 서로 바꾸고, 교복이나 교과서를 물려 주고 장난감과 동화책은 서로 나누었다.구두쇠 - 돈이나 재물을 쓰는 데 몹시 인색한 사람.노랑이 - 속이 좁고 인색한 사람을 비유로 일컫는 말.자린고비 - 아니꼬울 정도로 인색한 사람을 앝잡아 이르는 말.수전노(守錢奴) - 돈을 모을 줄만 알고 쓰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인색한(吝嗇漢) - 아까워서 나눔에 인색한 사람.구두쇠는 ‘굳다’와 ‘쇠’가 결합한 말이다. ‘굳다’는 무엇을 헤프게 쓰지 않아 남는다는 뜻이며 ‘쇠’는 돌쇠나 마당쇠처럼 사람 이름에 붙는 접미어다.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는 격언처럼 함부로 돈을 낭비하지 않고 아껴 쓰는 사람이다. 벽쇠, 벽보 또는 구두배기라고도 한다. 세간에서 말하는, 구두 뒤축이 닳을까 봐 쇠를 박아 신었다는 데서 유래하지 않았다.자린(73BC吝) - 고약하고 인색한 마음, ‘절인’이라는 말을 음만 따서 한자로 적은 말이다.고비(考59A3) - 지방을 쓸 때 현고학생(顯考學生)과 현비유인(顯59A3孺人)을 쓰는데, 한 자씩 따서 돌아가신 부모를 가리키는 말로 쓴다.자린고비의 어원에는 일화가 있다. 옛날 충주 땅에 부자가 살았는데 그는 제사를 지낼 때마다 지방(紙榜)을 새로 쓰지 않았다. 한 번 쓴 것을 기름에 절인 뒤 해마다 그것을 다시 썼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지방은 불에 태워 없애는 것이 관례인데, 종이 조각을 아끼려고 기름에 절여 두고두고 쓰니 얼마나 짠돌이겠는가, 그 사람을 일컬어 ‘절인고비’라고 불렀는데, ‘절인’이 변하여 ‘자린’이 되고 사람들은 그를 ‘자린고비’라고 불렀다는 설이 전한다.짠돌이, 짠순이, 짠지, 굳짜, 깍쟁이, 꽁생원, 좀팽이, 수전노(守錢奴), 인색한(吝嗇漢), 알뜰하다, 살뜰하다, 알토란 같다 같은, 아낌에 관한 낱말이 우리네 삶에 녹아 있는다.연산군은 채홍사(採紅使)라는 관리를 두고 조선 팔도의 미녀들을 뽑아 기녀로 삼았다. 이들을 운평(運平)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의 수가 1천 명이 넘었다. 이들 가운데 인물이 빼어나고, 가무(歌舞)에 능한 운평을 뽑아 궁궐에 살게 했다. 이들이 흥청(興淸)으로, 흥청에게 녹봉과 몸종을 주었고, 그 가족에게 집과 땅을 주었다. 임금의 총애를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천과(天科)흥청, 반천과(半天科)흥청, 지과(地科)흥청으로 서열을 매겼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장녹수이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말았는데, 연산군이 쫓겨나며 생긴 말이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고 전한다.지구에 닥친 기후위기가 심각하다. 곳곳에 지진, 해일, 폭우, 태풍 등 예전과 그 양상이 다르다. 인류는 그동안 지하에 묻힌 석탄, 가스, 석유 등을 뽑아 물 쓰듯 썼다. 화석연료에 불을 붙여 숱하게 태웠으니 지구의 기온이 오르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인류의 기술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지구가 뜨거워지면 인류는 멸망한다. 물질문명이 주는 편리에 취해 흥청망청하는 사이에 벌어진 현상이다.제레드 다이어몬드의 ‘문명의 붕괴’는 문명의 붕괴와 그 원인을 탐색한 책이다. 문명의 붕괴를 초래하는 요인은 환경파괴, 기후변화, 적대적인 이웃, 우호적인 이웃과의 교역, 이런 문제를 대하는 자세이다. 이 다섯 가지는 복합적으로 작용해 문명의 붕괴를 가속한다. 저자는 환경 파괴 문제를 가장 위협적으로 보았고, 그중에서 산림 파괴를 가장 중대한 원인으로 꼽았다.지구의 나이는 45.5억년이다. 뜨거운 혼돈의 시간을 지나 대지와 대기가 안정을 찾고 이후 생명이 탄생해 번성과 멸종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지구 곳곳에 멸종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로 추리해 보면 그동안 현재의 인류와 비슷한 문명이 번성하다가 붕괴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문명을 이룬 생명체가 멸종하면 빌딩이나 다리 같은 문명의 흔적은 대략 백만 년이면 완전히 지워진다고 한다.한 번 무너진 지구의 균형이 다시 안정되려면 몇백 또는 몇천 만년이 지나야 한다. 지각이 몇 번 뒤집히고 지구가 리셋(reset)되면 다시 생명체가 태어난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인류문명 같은 문명이 몇 회나 흥청(興淸)했다가 망청(亡淸)했을까./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9-08

들꽃이 피는 자리

뒷산에 생강나무꽃이 노란 꽃을 터트리면, 매화, 개나리, 진달래…, 산과 들에는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줄지어 들꽃이 피어난다. 만화방창 봄꽃이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나면 여름꽃이 듬성듬성 벙근다. 가을이면 늦을세라 이질풀, 쑥방망이, 구절초, 국화가 한 시절 만발한다. 겨울이면 산에는 눈꽃이 피고 우리집 유리창에는 성에꽃이 핀다.긴산꼬리풀, 두메고들빼기, 갈퀴현호색, 선괭이눈, 매발톱, 뱀톱, 모싯대, 노랑갈퀴, 층층이꽃, 큰까치수염, 큰뱀무, 노랑투구꽃, 고깔제비, 각시붓꽃, 가래수염, 가지꼭두서니, 개망초, 개별꽃, 검정말, 갯패랭이, 금낭화, 금불초, 기린초, 꼬리조팝나무, 꽃마리, 꽃무릇, 나도개감채, 꽃방망이, 꽃기린, 꽃다지, 꼬리풀, 꿩의바람꽃, 노랑어리연, 노랑물봉선, 노인장대, 노린재나무, 노루오줌, 둥근잎꿩의비름, 들바람꽃, 둥굴레, 돌쩌귀, 동의나물, 딱취, 만주바람꽃, 딱지꽃, 모데미풀, 모래지치, 메꽃,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 바위솔….들꽃 이름을 음미해 보면 깜찍하고 재미있다. 어김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잘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색깔, 모양새, 특징 등을 발음에 그대로 살렸다. 들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 같이 독특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앙증맞고 깜찍한 꽃다지, 샛노란 점박이 얼굴로 땅바닥에 착 달라붙은 쇠비름, 돌돌 말린 꽃대가 사르르 풀어지면서 방글대는 하얀꽃마리, 오동통한 잎 사이로 노랑별을 뿌려놓은 돌나물, 꽃잎이 노란 바람개비처럼 빙글대는 물레나물, 하늘 향해 좁쌀을 내뿜는 냉이, 대롱 끝에 하얀 별사탕을 피운 쇠별꽃, 올망졸망 방싯대는 금싸라기 은싸라기 웃음을 바라보면 절로 마음이 애틋해진다.”(김이랑 수필 ‘함백산의 봄’ 중)제비꽃은 제비가 날아올 때 피는 꽃이다. 오랑캐꽃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봄 춘궁기가 되면 북쪽 오랑캐가 내려와 백성을 괴롭혔다.그래서 제비꽃이 피면 오랑캐가 내려오고 제비꽃 뒷모양이 머리 테를 드리운 오랑캐 뒷머리와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숱한 외침을 받은 수난의 역사가 꽃말에 들어있는 것이다.옛날옛날 강원도 산골짜기 암자, 스님이 부모를 잃은 아이를 데려와 함께 살았다. 어느 날 겨울나기를 미처 못한 스님이 먹을 것을 구하러 어린 동자승을 암자에 홀로 남겨두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런데 눈이 많이 내려 암자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모른 동자는 추위와 배고픔을 참으며 스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동자는 끝내 앉은 채 굶어 얼어 죽고 말았다.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하자 스님은 서둘러 암자로 갔지만, 동자는 죽은 채로 마당 끝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스님은 동자승을 바로 그 자리에 곱게 묻어 주었는데, 이듬해 여름, 무덤가에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났다. 한여름이 되니 마을로 가는 길을 향해 동자의 얼굴처럼 붉은 꽃이 피어났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꽃을 ‘동자꽃’이라고 불렀다.옛날옛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밭을 매던 중, 시어머니가 볼일을 보러 풀숲으로 들어갔다. 볼일을 다 본 시어머니는 늘 그랬듯이 옆에 잡히는 호박잎을 손에 잡고 뒤처리를 했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손에는 호박잎이 아니라 며느리 밑씻개가 잡혔다. 가시 돋친 잎으로 뒤처리를 했으니 얼마나 따가웠을까. 시어머니는 “몹쓸 놈의 풀, 꼴 보기 싫은 며느리년 볼일 볼 때나 손에 잡힐 것이지”라고 원망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들꽃이 보고 싶은 날, 들로 나가 들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직이 물어본다. 너는 왜 피느냐고, 그러면 꽃은 그냥 웃기만 한다. 되물으면 그냥 바람에 흔들리기만 한다. 가만히 가만히 생각해보면 들꽃은 그냥 피지 않는다. 산에 피든 들에 피든 음지에서 피든 마음속에서 피든, 꽃은 다 피어야 하는 까닭이 있다.“별똥별 떨어진 자리에는 노란 민들레가 핀다. 노루가 오줌을 눈 자리에는 노루오줌꽃이 피고 제비가 똥을 눈 자리에는 제비꽃이 핀다. 장끼와 까투리가 사랑을 나눈 자리에는 꿩의바람꽃이 핀다. 사무친 그리움이 진 자리에는 상사화가 벙글고 애달픈 사연이 깃든 자리에는 찔레꽃이 핀다. 서러움 북받치는 자리에는 눈물꽃이 터지고 기쁨 넘치는 자리에는 웃음꽃이 핀다.”(김이랑 수필 ‘함백산의 봄’ 중)할머니 무덤에는 할미꽃이 핀다. 구절양장 한숨 쉬며 넘는 고갯마루에는 구절초가 핀다. 신선이 노닐다 떠난 자리에는 배롱나무꽃이 피고, 범이 낮잠 잔 자리에는 꽃범의꼬리가 핀다.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노루목 넘을 때 아버지의 등에는 소금꽃이 핀다.이 땅에 사는 민초는 마음을 들꽃에 담았다. 그리하여 들꽃이 피는 자리에는 사람의 마음이 피고 마음이 피는 자리에는 들꽃이 핀다./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8-25

옛집, 그 그리움의 정경들

참한 색시 얻어 새끼 낳고 알콩달콩 살 거라고 초가삼간 오막살이를 마련했다. 처음 가진 내 땅이라 마음이 뿌듯해 여기까지 내 영역이라고 줄을 긋기는 좀 그랬다. 지게를 지고 들로 나가 돌을 져 날랐다. 하나 둘 쌓아 나지막이 두르다 보니 돌담이 되었다.입구를 비우니 뭔가 허전했다. 지게를 지고 낫을 들고 뒷산으로 갔다. 싸리나무를 추려 한 짐 지고 와 얼기설기 엮었다. 입구에 말뚝 하나 박고 거기에 엮은 것을 붙이니 싸리문이 되었다. 내 집에 잡귀가 들지 말라고 뾰족한 가시가 많은 엄나무도 얹었다. 늘 비스듬히 서 있다고 해서 사립문(斜立門)이라고 불렀는데, 말이 문이지, 사립문은 손님을 막아서지 않았다. 바깥에서 슬쩍 밀면 제가 먼저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집만 있다고 살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양식을 얻으려면 비탈을 개간해 밭을 만들고 봄이면 논밭을 갈아야 했다. 장날 장터에 나가 대장간에 들러 농기구를 샀다. 생활에 필요한 도구는 나무나 풀 등을 잘라 손으로 만들었다. 솜씨야 있을까만 손으로 만들면 얼기설기한 대로 살림이 되고 투박한 대로 도구가 되었다.따비 - 쟁기보다 작고 보습이 좁게 생겨, 풀뿌리를 뽑거나 밭갈이를 하는 데 쓰는 농기구.보습 - 쟁기나 극젱이의 술바닥에 맞추는 삽 모양의 쇳조각.극젱이 - 쟁기와 비슷하나 보습 끝이 무디고 술이 곧게 내려감(굽정이).써레 - 갈아 놓은 논의 바닥을 고르거나 흙덩이를 잘게 부수는 데 쓰는 농기구.써레뭉둥이 - 써레의 몸이 되는 나무.고무래 - 곡식을 그러모으거나 펴거나, 밭의 흙을 고르는 데나, 아궁이의 재를 긁어내는 데 쓰는 ‘丁’자 모양의 기구.쇠스랑 - 땅을 파헤쳐 고르거나 두엄, 풀 무덤 따위를 쳐내는 데 쓰는 갈퀴 모양의 농기구.미 - 김을 매거나 감자나 고구마 따위를 캘 때 쓰는 쇠로 만든 농기구.슴베 - 칼·호미·괭이 따위의 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부분.괭이 - 땅을 파거나 흙을 고르는 데 쓰는 농기구(날의 모양에 따라 가짓잎괭이, 삽괭이, 수숫잎괭이, 토란잎괭이).여우호미 - 삼각괭이.도롱이 - 짚이나 띠 따위로 촘촘히 엮어 비 오는 날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망태기 - 가는 새끼나 노 따위로 엮어 만든 그릇.낫, 삽, 갈고리, 조리, 멍석, 삿갓, 쑤세, 깔판, 부지깽이, 똬리, 물동이, 뒤주, 주걱, 화로, 곰방대, 굴대, 채, 됫박, 나막신, 짚신, 목침, 풍로, 남포, 등잔, 돗자리, 요강, 물레, 함지박, 광주리, 코뚜레.“새끼 짊어지고 고개를 넘어 닿은 두메, 햇살 맑은 언덕에 터를 다진다. 나무를 잘라 뼈대를 세우고 흙을 이겨 벽을 쌓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돌을 모아 나지막한 담을 두른다. 가지 닮은 나무 둘 맞대 지게를 만들고 기다란 나무를 낫으로 툭툭 잘라 바지랑대를 세운다. 싸리나무 한 줌 묶어 어지럽게 흩날리는 생각을 쓸어내고, 수수대궁 두엇 꺾어 내면에서 재채기를 일으키는 먼지를 털어낸다. 댕댕이덩굴로 멍석을 짠 다음 그 위에 앉아 말린 옥수수자루로 삶의 뒷면에서 자분거리는 가려움을 긁어도 본다”(‘너와집’/ 김이랑 수필에서 발췌)가을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깨나 콩을 널었다. 뙤약볕에 깨와 콩이 잘 마르면 도리깨를 휘둘러 내려쳤다. 타닥타닥 알곡은 깍지 밖으로 튀어나와 멍석 위에 떨어졌다. 알곡이 다 떨어지면 빗자루로 쓸어 키 위에 담았다. 키를 들고 까불면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곡은 키 위에 떨어졌다. 곡식에 섞인 검부러기가 나비처럼 날아간다고 하여 이를 나비질이라고 했다.이른 새벽부터 가을마당에 탈곡기가 돌아갔다. 와랑와랑 자욱한 먼지를 피우며 나락을 털어내면 고사리손도 한몫 거들었다. 나락은 가마니에 담겨 곳간에 차곡차곡 쌓였다. 아버지가 쌀 한 가마니 지고 장에 간 날, 아이들은 종일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날 저녁 밥상에는 드물게 소고기국이 올랐고 달각딸각 수저 부딪는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초가집 용마루를 하얀 달빛이 쓰다듬을 때, 고봉밥을 다 비운 아이들이 투정을 부리다가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이들 불룩한 배를 한 번씩 쓰다듬고는 툇마루로 나갔다. 자식을 배불리 먹였다는 포만감에 아버지는 막걸리 한 잔 들이켜며 고단한 하루를 위무했다.사립문은 단지 드나드는 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좋은 기운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며 이른 아침 사립문을 열었다. 행여 자식이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풍년초 한 대 태우며 사립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아버지는 밤마실 나간 식솔이 다 들어오고 나서야 사립문을 닫았다.지금은 사람도 풍경도 과거로 떠나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그 기억의 조각들은 머릿속에 남아 있다.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면 사립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환영처럼 어른거린다. /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8-11

어린 날의 신석기 시대

인류문명은 돌로 시작되었다. 앙코르와트, 모아이 석상, 스톤헨지, 피라미드, 마추픽추 등 돌의 문명은 지구 곳곳에 존재하고 또 발굴되고 있다. 세계 고인돌의 반, 약 3만 개 정도가 우리나라에 있다. 강화, 화순, 고창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우리나라에는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이 많다. 예천 금당실마을, 군위 한밤마을, 고성 학동마을, 무주 지전마을, 아산 외암 민속마을, 제주 하기리, 산청 남사예담촌, 돌담길이 이웃과 이웃을 이었다. 돌담길에는 마을 사람들의 수고로운 땀이 배어있고 이웃과의 정이 높다랗게 쌓여있다.“마을 사람들은 이웃과 담을 쌓은 게 아니다. 여기서부터는 내 영역인데, 줄을 긋기는 뭐해서 강가에 나가 돌멩이를 지고 왔다. 남정네는 지게에 지고 아낙은 머리에 이고 돌을 날랐을 거다. 불콰하게 흥이 나야 힘을 쓰지.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도 빠지지 않았을 거다. 돌 하나, 돌 둘, 돌 셋, 돌 넷…, 쌓다 보면 이웃과의 정은 돌담보다 더 높이 쌓였을 거다. 집은 등을 지고 있어도 마음은 마주 보았을 거다.” (박채현 ‘발밤발밤 옛돌담길’ 일부 발췌)우리네 생활 곳곳에 돌의 문명이 있다. 납작 동그란 돌 두 개를 포개 어처구니를 달아 돌리면 맷돌이다. 돌을 오목하게 파면 돌절구며, 땅에 묻고 그 위에 발로 디디는 방아를 걸치면 디딜방아다. 돌을 평평하게 깎아 그 위에 빨래를 놓고 두드리면 다듬잇돌, 툇마루 아래 놓고 신발을 가지런히 놓으면 댓돌이다. 얕은 개울을 가로질러 걸음에 마침맞게 놓으면 징검돌이다.닻돌 - 나무로 만든 닻을 가라앉게 하기 위해 매다는 돌.돌확 -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누름돌 - 물건을 꾹 눌러두는 데 쓰는 돌(웃깃돌).돌못 - 돌을 다듬어 박은 말뚝.곱돌 - 촉감이 매끈매끈하고 기름 같은 광택이 나는 돌.꽃돌 - 자연 암석에 무늬가 들어있는돌.홍예(虹霓) - 무지개, 아치형으로 높이 두른 돌.징검돌, 짱돌, 주먹돌, 몽돌, 선돌, 난돌, 든돌, 조약돌, 납작돌, 뾰족돌, 푸석돌, 곱돌, 숫돌, 받침돌, 디딤돌, 섬돌, 주춧돌, 김칫돌, 걸림돌, 박힌돌, 쐐기돌, 머릿돌, 온돌, 공깃돌, 아랫돌, 윗돌, 막돌, 아름돌, 강자갈, 콩자갈, 흰자갈….돌의 문명은 정겨웠다. 디딜방아 돌절구 속을 휘젓는 어머니의 손은 어찌나 날랬는지, 발로 디딜방아를 밟는 아버지와 궁합이 절로 맞았다. 두둑 두둑 두두두두 두두두두 어머니가 방망이로 다듬잇돌 두드리는 소리는 어찌나 흥겨웠는지, 철퍽 철퍽 방망이로 빨랫돌 위에 놓인 빨래 두드리는 소리는 어쩐지 슬프게 들렸다.해가 뜨면 돌담 너머로 나팔꽃이 기지개를 활짝 폈다. 한낮이면 돌확에 고인 물에 하늘구름이 내려와 노닐었다. 저녁이면 하루 항해를 마친 신발들이 댓돌 위에 가지런히 정박해 휴식에 들었다. 밤이면 따뜻하게 데워진 온돌 위에 누워 잠들었다.아이들에게는 ‘작은돌 문화(小石文化)’가 있었다. 서넛이 모이면 공깃돌을 받았고 짝꿍을 정해 소꿉놀이를 했다. 돌로 쑥을 찧어 납작한 돌에 올리고 쌀알처럼 생긴 꽃을 오목한 돌에 담아 밥상을 차렸다. 마을 어귀 징검돌 위에서 가위바위보로 먼저 건너기 놀이를 했다. 아랫각단 철이는 돌에 마음을 담아 순이에게 슬며시 건네주고 도망갔다.비석치기는 웃음이 넘쳤다. 처음에는 돌을 던져 상대의 비석을 맞춰 넘어트리는데, 단계가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진다. 발등에 올리고 양 무릎에 끼고 엉덩이에 올리고 가슴에 올리고 머리 위에 올리고 양손으로 귀를 잡고 다가가 떨어트려 비석을 넘어트린다. 몸을 비틀고 어기적거리고 절룩거리고…, 돌을 떨어트리지 않으려는 그 몸짓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웃느라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다.Y자 나무를 잘라 고무줄을 묶으면 새총이 되었다. 강가에 나가 작고 동그란 돌을 모아 쏘는 연습을 했다. 큰돌 위에 깡통을 올려놓고 맞추기 놀이를 했는데, 쏘고 쏘기를 거듭할수록 잘 맞추었다. 닦은 기량을 믿고 나무 위에 앉은 새를 겨누었다. 그런데 참새를 맞추었다는 자랑은 있어도 그 증거로 참새를 가져온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요즘에는 어디를 가도 돌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시골 아이들조차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긴다. 돌멩이 몇 개로 함께 노는 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문화는 변하는 것이라지만 그래도 함께 부대끼며 정을 나누는 또래문화가 사라진다는 안타까움은 두고두고 남는다.코흘리개 때, 돌을 가지고 논 경험이 있으신가. 그렇다면 당신은 현대문명을 사는 신석기인이다. /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7-28

어링불 해돋는길 보릿골 연자방아집

언제부턴가 개나리 진달래 민들레 아파트는 가난한 집들의 주소가 되었다. 날뫼고을 양지마을은 쫓겨나고 비산동 선 캣슬 타운이 들어섰다. 보릿골 푸른 이랑은 커플이 부킹 골프를 엔조이하는 그린 필드가 되었다. 금수강산엔 엘레강스하고 럭셔리한 로열패밀리가 산다.도시 곳곳에 저택(?)들이 위용을 자랑한다. SK뷰, 롯데캐슬, 더샾, 아이파크, 자이, 힐스테이트, 에버빌, 블루밍, 파크드림, 까사밀라, 부티크시티, 푸르나임, 코보스카운티, 위브 더 제니스, 마린 시티, 골든 스위티, 센터시티 등이다. 자연스럽게 이룬 마을이 아니라 건설사의 상업주의가 낳은 마을이다. 고급스러움만 강조한 이름으로 감성은 없고 자본주의 냄새가 짙게 묻어난다.e편한세상, 꿈에그린, 푸르지오, 내안愛, 뜨란채, 안아주 등은 우리말로 지은 이름이다. 편안한 집, 꿈에 그리던 집, 푸른 집, 아내처럼 사랑스러운 집, 뜰 같은 집 한 채, 안아주는 집, 그 뜻을 음미해보면 편안하고 포근하고, 따뜻한 인본주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호려울마을 - 마을이 산에 둘러싸여 호리병 같고 금강과 어우러졌다. 호리병+여울범지기마을 - 땅 모양이 누워있는 범을 닮음.도램마을 - 땅 모양이 황소의 고삐를 닮음.수루배마을 - 수로가에 논배미가 있는 들에서 따온 이름.둔지미마을 - 둔전으로 부치던 밭이 있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가재마을 - 마을의 중심에서 한쪽 가장자이에 있는 골짜기에서 따온 이름.세종시는 우리말 명칭을 전용하는 도시다. 그래서 한글을 창제한 정신에 맞게 순우리말로 마을 이름을 지었다. 어질고 덕행이 높은 행정지역이라고 어진동, 주민들이 다정하게 잘 살라는 뜻으로 다정동, 생생하고 산뜻한 느낌으로 살라고 새롬동, 아름동, 고운동, 도담동, 새뜰마을, 한뜰마을, 새샘마을 등이다. 정감이 있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명으로 잘 살린 경우이다.분당의 마을 이름도 우리말이 많다. 아름마을, 푸른마을, 정든마을, 장미마을 샛별마을, 양지마을, 이매촌, 아름마을은 사람도 마을도 아름다울 것 같고 푸른 마을은 마음이 늘 푸를 것 같다. 정든 마을은 쉽게 마을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 비록 아파트 단지이지만 이름에 사람의 감성이 살아 있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고운가.밤두둑마을 - 밤나무 열매가 늘 두둑하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한밤마을 - 큰 밤이 많이 열린다고 해서 붙인 이름.무섬마을 - 물 위에 뜬 섬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동피랑마을 - 동쪽 벼랑이라는 뜻.가마솥 해저놀 - 태평양 지형 사전에 등재된 우리말꽃신 해저놀 - 남극 지형 사전에 등재된 우리말김제 - 볏골, 과천 - 돋할, 공주 - 고마나루, 고양 - 한뫼, 강릉 - 하슬라, 울산 - 울뫼, 광주 - 빛고을, 인천 - 미추홀, 부산 - 가마뫼, 초량동 - 새뛰, 수유리 - 무넘이, 함안 - 아라, 포항 - 어링불, 양수리 - 두물머리, 춘천 - 봄내, 전주 - 온고을, 안성 - 새밝골, 안산 - 노루목, 하회마을 - 물돌이, 안동 - 고타야, 수원 - 물골, 판교 - 널다리, 부여 - 소부리, 보령 - 한내, 무안 - 물아혜, 논산 - 놀뫼일제 강점기, 일본이 조선의 지도를 제작하려고 국토를 조사하면서 지명을 한자로 바꾸었다. 그래서 발음도 편하고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이 대부분 한자화되고 말았다. 우리말 지명에는 거기에 얽힌 사연이 있고 역사가 있고 함께 살아온 민초들의 정서가 녹아있는데, 모두 말살해버린 것이다.강원도 정선 숙암리에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가 있다. 사람의 몸짓과 강원도 사투리가 섞인 이름인데, ‘가슴으로 안고 돌고 등을 지고 돌고 다람쥐가 한숨 쉬며 넘는 바위’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말할 것 없고 날랜 다람쥐도 지나가기 어려운 바위를 말한다. 강원 정선 여량에 ‘김달삼 모가지 잘린 골’이 있고 대전 유성에 ‘도야지 둥그러 죽은 골’이 있다. 우리 산하를 살펴보면 이러한 지명이 적잖이 있다.한 달에 몇 번 우편물이 온다. 보낸 이의 주소를 보면 대부분 000아파트 000동 000호이다. 규격화된 건물, 계층화된 이름, 고유성은 없는 회색빛 주소를 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콘크리트 냄새가 담긴 주소가 아닌, 자연스럽고 정감이 실린 주소가 적힌 편지를 받아보고 싶다.빛고을 해넘이길 푸른 언덕배기 감나무집 김아무개어링불 해돋는길 보릿골 연자방아집 한아무개고타야 낙동길 물돌이마을 앵두나무집 류아무개/수필가·문학평론가 김이랑

2021-07-14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우리네 동화에서 선녀가 입은 옷이 ‘날개옷’이다. 날개옷은 인간에게 꿈의 옷이다. 몸에 무거운 옷이 아니라 하늘을 날 수 있도록 가벼워지는 옷이니, 기능으로 보나 깃털 같은 멋으로 보나 이보다 좋은 옷이 또 있을까 싶다.돌이나 명절이 다가오면 우리네 어머니들은 때때옷을 지었다. 설날에 입는 때때옷은 ‘설빔’이라고 했다. ‘빔’은 ‘비음’의 준말로 꾸민다는 뜻을 가진 ‘비오다’라는 옛말에서 유래했다. 돌빔, 설빔은 옷치레로 꾸밈과 멋을 예절로 여긴 우리네 전통문화이다. 한복을 가만히 음미해보면 우리네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있다.어머니의 손은 참 바지런했다. 저녁밥을 지어 먹이고 설거지가 끝나면 또 일감이 있었다. 사위는 어둡고 방을 밝히는 것이라고는 호롱불뿐이다. 고된 노동에 어깨가 무겁고 눈이 감겨도 어머니는 바늘에 실을 꿰었다. 흐린 호롱불 옆에서는 실 끝이 단박에 바늘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침침한 눈을 비비고 다시 실 끝에 침을 묻혔다. 실을 쥔 손끝에 힘을 주고 바늘귀에 맞추면 자꾸만 빗나갔다. 그렇게 몇 번이고 되풀이해 마침내 실을 꿰었다. 아이들이 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그리며 어머니는 한 땀 한 땀 바느질했다.색동저고리, 풍차바지, 까치두루마기는 남자아이 때때옷이다. 여자아이 때때옷은 색동저고리, 다홍치마, 까치두루마기며 장식으로 머리에 굴레를 씌우거나 댕기를 들였다. 때때옷을 다 갖추어 입힌 뒤에는 남녀 아이 모두 타래버선을 신겼다.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솔기마다 한 땀 한 땀 담긴 때때옷이야말로 이 누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이다.섶 - 저고리에서 앞부분과 뒷부분이 겹쳐지는 부분.앵삼 - 어린 사람이 생원(生員)·진사(進士)에 합격한 때 입던 연둣빛의 예복.돌띠 - 어린아이의 두루마기나 저고리의 긴 옷고름.사모 - 고려말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벼슬아치들이 쓰던, 검은 사붙이로 만든 예모.깨끼 - 고려말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벼슬아치들이 쓰던, 검은 사붙이로 만든 예모.떨잠 - 부인들 예장에 꽂는 비녀의 하나(떨새를 붙인 과판 같은 것).떠구지머리 - 조선시대 왕비와 왕세자빈 등이 예장할 때 사용한 머리모양.여여머리 - 조선시대 상류층 부인들이 예장용으로 크게 땋아 올린 머리모양.새앙머리 - 예전, 여자아이가 예장(禮裝)할 때 머리털을 두 갈래로 땋은 머리.스란치마 - 폭이 넓고 입으면 발이 보이지 않는 긴 치마.대란치마 - 조선시대 궁중에서 비(妃)·빈(嬪)이 대례복(大禮服)에 입는 치마.대슴치마 - 조선시대 왕실 및 상류사회의 여자들이 정장할 때 입은 속치마.진동 - 저고리의 어깨선에서 겨드랑이까지 폭이나 넓이.수눅 - 버선 등의 꿰맨 솔기.도투락 - 어린 여자가 드리는 자줏빛 댕기.까치두루마기 - 아이들이 까치설빔으로 입는 오색 옷감으로 지은 두루마기.동정 - 한복 저고리 깃 위에 조붓하게 덧대는 흰 헝겊 오리.도련 - 두루마기나 저고리 자락의 끝 둘레.배래기 - 한복의 옷소매 아래쪽에 물고기의 배처럼 불룩하게 둥글린 부분.아자문, 거들치마, 말기치마, 배자, 철립, 액주음, 단령, 끝동, 고대, 배래, 대님, 동정, 쾌자, 마고자, 단속곳, 속속곳, 다리속곳, 너른바지.한복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흔들린다. 걸을 때는 펄럭이고 바람이 불면 물결처럼 출렁인다. 여인네의 치마는 수양버들처럼 하느작거리고 남정네의 하얀 두루마기는 풀잎처럼 사부작거린다. 넉넉한 품과 옷을 입은 모양새에 면마다 부드러운 주름이 더해져 한복은 아름다운 동적 선형미를 가진다.색상은 한복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민족성을 잘 드러내는 흰색은 가공하지 않아 순수하고 자연스럽다. 거기에 천연색을 더하면 더욱 다채로워졌다. 연한 옥색이나 하늘색, 옅은 회색 등으로 명도를 높이면 은은함 색감이 멋의 깊이를 더했다. 오방색을 기본으로 하는 색동 한복은 원색대비의 절정을 보여준다.새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속에 나부낀다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한 번 구르니 나무 끝에 아련하고두 번 거듭 차니 사바가 발아래라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김말봉 ‘그네’한복을 잘 차려입고 걷는 부부를 보면 마음이 나긋해진다. 선남선녀가 나란히 낮게 나는 것 같아서다. 이제 하늘은 비행기를 타고 날 수 있으니, 가벼운 한복을 차려입고 하느작하느작 나비처럼 온누리를 느긋하게 비행하는 것도 삶의 멋이 아닐까 싶다./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6-30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사람은 살면서 통과의례를 여럿 치른다. 관례, 혼례, 상례, 제례 그리고 각종 의식 등인데, 의례마다 나름의 절차가 있다. 절차는 의식에 의미를 더하거나 참가자의 마음을 담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행위는 상징성을 띠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치르는 의복과 도구를 보면 인간의 기원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상례는 사람으로서 마지막으로 치르는 의식이다. 다른 의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가 되는 사람이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는 점이다. 망자는 술을 마실 수도 없고 노래할 수도 없다. 춤을 출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다. 자신을 위한 의식에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상례는 남은 자들의 의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상여는 상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망자를 장지까지 모시는 도구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에 타고 가는 가마이다. 저승으로 가는 길만큼은 대궐 같은 집에 꽃가마를 태워주겠다는, 남은 자가 못다한 슬픈 의지의 표현이다. 이렇듯 상여에는 많은 장식물이 달린다.상주는 형편에 따라 상여를 2, 3층으로 올려 누각 형태로 만들기도 한다. 상여 맨 꼭대기에는 청룡, 황룡으로 용마루를 올렸다. 용마루 중앙에 해태를 탄 인물상을 만들어 장식했는데, 이는 삼천 년을 산다는 삼천갑자 동방삭이다. 동방삭은 저승사자로 망자를 좋은 곳으로 모시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용마루 위에는 꼭두, 동자 동녀, 시종, 시녀 등을 올렸다. 극락조, 봉황새, 도깨비 등도 그려 넣었다. 이들은 악귀로부터 망자를 보호하고 망자가 가는 길을 보필한다.인물꼭두는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과 재주를 부리는 관대꼭두가 있다. 악공은 대금, 괭과리, 소고, 나발, 바라를 들고 있는 모형이다. 관대꼭두는 재인으로 재주를 넘거나 익살스러운 동작으로 사람을 웃기며 풍악을 맡거나 가창을 하는 사람 모형이다. 인물 외에 동물꼭두도 있다. 새나 짐승인데, 닭은 새벽을 알려주기 때문에 음귀를 쫓는 역할이며, 닭볏은 벼슬을 상징한다.상여는 일련의 행렬이 있다. 방상씨(方相氏)가 맨 앞에서 귀신을 쫓고 영구를 인도한다. 다음에는 명정(銘旌)으로,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관직·성씨를 기록한 깃발이다. 이어서 혼을 모시는 가마인 영여가 따르고, 그 뒤를 축문을 읽는 축관(祝官)이 공포(功布)를 들고 따른다. 공포는 관(棺)을 묻을 때, 관을 닦는 삼베 헝겊이다. 뒤를 이어 상여가 가고 좌우에 삽(7FE3)이 나란히 간다. 삽은 사자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염원을 담은, 나무로 만든 부채이다, 맨 뒤에 상주와 빈객이 길게 따른다.“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랏차 ~ 어호우북망산천 가는 길에 미련일랑 다 놓고 가소, 어허야 ~ 데헤야”상여소리는 요령잡이가 선창하면(메김소리) 상여꾼이 후렴으로 응답한다(뒷소리). 가사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서 망자에 따라 즉흥으로 지어 불렀다.상여는 가다가 서기를 반복한다. 다리를 만나면 또 멈추고, 보내는 사람은 차마 못 보내, 떠나는 망자는 차마 못 떠나, 장지까지 그렇게 가다사 서면서 서로 이별의 시간을 가진다.용마루 - 상여 맨 꼭대기에서 앞뒤를 가로지르는 나무.용수판 - 용마루 앞과 뒤를 받치는 판.병아리못 - 머리가 병아리 모양의 나무 못.상여꽂이새 - 상여에 꽂는 새 모양의 장식.앞소리꾼 - 선소리에서 메김소리를 메기는 사람. 주로 요령잡이가 맡는다.요령잡이 - 상여가 나갈 때 요령을 들고 가는 사람.메김소리 - 노래를 주고받을 때 한 편이 먼저 부르는 소리.뒷소리 - 메김소리를 받아 부르는 소리.자진상여소리 - 장지에 거의 다 와서 산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소리.달구소리 - 하관 뒤에 무덤을 다지면서 부르는 소리.달구질(회다지) - 무덤 위에 흙을 쌓고 발로 밟아 다지는 일.상주가 취토하면 석회를 섞은 흙을 한 자쯤 채우고는 다진다. 보통 3번 내지 5번 정도 행한다. 상두꾼들이 상여 맬 때 썼던 연추대나 대나무를 가지고 선소리꾼의 소리에 발을 맞추며 돌면서 봉토를 다진다. 다지는 발의 박자에 맞춰 달구소리를 불렀다. 달구질은 봉분에 나무뿌리나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다지는 행위지만, 삶의 애증도 미련도 다 내려놓고 가라는 기원도 들어있다.요즘 장례식장 분위기를 보면 슬픔을 억누르고 할 말을 참는다. 곡소리도 듣기 어렵다. 하지만 전통 장례는 반대이다. 슬픔을 표출하고 할 말을 한다. 못다한 마음을 가누지 못해 가슴도 친다. 문상객도 상주와 가족의 슬픔을 부추겨 마음껏 울게 한다. 그래야 남은 자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린다. 그러고 보면 전통 상례가 더 인간적이다.전통 상례는 남은 자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망자의 다음세상을 축원하는 종합예술이었다./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6-16

대보름날 망우리야

불의 문명이 찬란하다. 원자력 발전소, 석탄 발전소가 곳곳에 있어 어디를 가든 휘황한 네온사인과 화려한 조명이 세상을 밝힌다. 텔레비전, 전자레인지, 컴퓨터, 자동차, 누구나 불의 문명을 구가한다. 하지만 지하에 묻혀 있어야 할 화석연료가 열로 바뀌면서 빙하가 녹고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고 미세먼지가 창궐해 숨통을 조인다. 문명의 역습이다.화마(火魔)의 습격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체르노빌 폭발 사고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데, 대지진으로 일본에서 원전이 폭발해 주변이 온통 방사능으로 뒤덮였다. 일본 정부는 폐발전소의 오염수를 처리하지 못해 바다에 버리겠다고 선언했다. 방사능에 피폭된 사람들은 통계에도 잡히지 않은 채 죽어가고 있다. 재앙이 재앙을 낳는 것이다.밥을 하고 쇠를 녹여 쟁기를 만들던 인류의 불장난은 문명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화약으로 폭탄을 만들고 핵발전소를 지어 전기를 생산하고 우라늄을 농축해 핵폭탄을 만드는 불장난은 문명을 한 방에 파괴한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체르노빌, 이라크전, 후쿠시마, 사고가 나면 통제하지 못할 기술을 남용한 대가이다. 무모하게 불장난하는 자에게 불은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있다.우리에게 불의 기억은 따뜻했다. 아궁이, 부뚜막, 구들, 아랫목, 호롱불, 화롯불, 군밤, 군고구마…, 모두 온기를 지닌 낱말이다.대보름날이 다가오면, 버려진 깡통을 주우러 다녔다. 못으로 깡통에 구멍을 숭숭 뚫고 철사를 이으면 불통이 되었다. 깡통 안에 불이 붙은 나무를 넣고 빙빙 돌리면 내 머리 위에도 보름달이 떴다. 오른팔로 돌리고 왼팔로 돌리고 거꾸로 돌리고, 몸도 따라 돌다 어지러워 머리도 빙글빙글 돌고,망우리 망우리야 대보름날 망우리야가난한 살림살이 달님처럼 부풀어라별똥별 별똥별아 밤하늘에 별똥별아오늘은 별비되어 머리위에 쏟아져라밤이 새카맣게 타도록 쥐불놀이를 하다가 불통을 하늘로 던졌다. 불통은 긴 불꼬리 날리며 떨어지고 별똥별이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러고 나면 화톳불 곁에 모여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었다. 지직지직 화톳불을 꺼지면 얼굴에 검정을 묻힌 도둑고양이처럼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꿈에 집에 불이 났고 오줌을 누어 시원하게 불을 껐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지랑대 높이 지도 한 장 올렸다.불땡 - 화력(불땀).불질 - 아궁이 등에 불을 때는 일 또는 총·포 등을 쏘는 일.알불 - 재가 섞이지 않은 불씨.불목 - 온돌방 아랫목의 가장 따뜻한 자리.부삽 - 아궁이나 화로의 재를 치거나 불을 담아 옮기는 데 쓰는 작은 삽.잉걸불 - 장작에 불이 붙어 이글거리는 모습을 일컫는 말.후림불 - 불똥이 튀어 번지는 불, 비화(飛火).불머리 - 불길의 위쪽 부분.부넘이 - 아궁이 안쪽 구들 아래로 불이 넘어가는 고개.화톳불 - 한데서 장작을 모아놓고 태우는 불.소줏불 - 소주를 너무 마셔 코에서 알콜 기운이 푹푹 나오는 현상.모깃불 - 모기를 쫓기 위해 풀 따위를 태워 연기를 내는 불.불땀머리 - 나무가 자랄 때 남쪽을 정면으로 향했던 부분.불소나기 - 불똥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부지깽이 - 불을 땔 때, 불을 헤치거나 끌어내거나 하는 데 쓰는 막대기.아궁이에 장작을 때면 나중에 잉걸불이 남는다. 발갛게 달아오른 숯을 화로에 가득 담아 방안에 놓으면 차가운 외풍이 물러갔다. 화롯불에는 알밤이 빠지지 않았다. 알밤 한 톨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며 식구가 둘러 않았다. 잘 익은 밤을 까며 도란거리는 이야기는 따뜻하고 정겨웠다. 호롱불 아래 앉아 해진 양말을 깁던 어머니는 밤 한 톨 먹고도 배가 부르다며 손사래를 쳤다.“태백산 기슭을 어슬렁거리는 겨울바람은 호랑이보다 무서웠다.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찬바람은 어찌나 매서운지,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먼 산길을 구불구불 걷다 보면 아랫목 생각이 굴뚝같았다. 소년들은 화톳불을 피우고는 그 위에 돌멩이를 올렸다. 돌멩이가 뜨거워지면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온기 한 줌이 얼마나 소중한지 온몸으로 느낀 추억 한 토막이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차가운 세상으로 나갔을 때 36.5°의 체온을 지키기 위한 연습이었다.”(김이랑 수필 ‘구들’부분 발췌)여름밤에는 모깃불이 타닥타닥 잔별을 튀기고, 겨울에는 밥그릇이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당에는 호야등이 환히 밝히고, 방안에는 호롱불이 그림자를 흔들고, 고기 잡는 개울에는 관솔불이 비추고, 골짜기에는 서리한 강냉이 구워먹는 화톳볼이 타오르고, 보슬비 오는 날에는 앞산에 도깨비불이 번쩍거리고,불을 적절히 쓰던 시절의 불장난은 따뜻했다./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6-02

물의 말씀

물은 산소와 수소의 결합이다. 산소는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 반응으로 만들어진다. 수소는 빅뱅 때 만들어졌다. 별이 폭발하면서 흩어진 산소가 우주를 떠도는 수소와 만나 물이 된다. 물은 대우주의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가 만들어낸 물질이다.물은 곧 생명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 물이 있다. 인간도 어미의 뱃속에서 물의 막(羊水)에 싸여 신체를 갖춘다. 세상에 태어나서도 물을 떠날 수 없다. 멱감고 물장구치고 고기 잡고 빨래하고, 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다.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하고 그러다가 지치면 냉수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가뭄이 들면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 간절히 물을 원하고, 물과 함께 누려온 삶의 정서는 많은 언어를 낳았다.윤슬 -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물너울 - 넓은 물에서 크게 움직이는 물결.물마루 - 바닷물의 마루터기, 곧 멀리 보이는 수평선의 두두룩한 부분.물무늬 - 물결처럼 어른어른하는 무늬.물이랑 - 물이 넘실거려서 물의 표면이 밭이랑처럼 된 것.물비늘 - 햇빛을 받아 수면이 반짝이며 잔잔하게 이는 물결.물여울 - 강이나 바다에서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물장구 - 헤엄칠 때 발등으로 물 위를 잇따라 치는 일.물거울 - 거울 삼아 모양을 비추어 보는 물.물보라 - 물결이 바위 따위에 세게 부딪치거나 솟구칠 때, 사방으로 흩어지는 잔 물방울.물방귀 - 물밑에 있던 공기가 물 위로 떠오르면서 꾸르륵 꾸르륵하며 내는 소리.나비물 - 세숫대야에 담겨 가로로 퍼지게 끼얹는 물.추깃물 - 송장이 썩어서 흐르는 물.물수제비 - 둥글고 얇은 돌을 물 위로 스치듯이 튀기어 가게 던졌을 때, 생기는 물결 모양.고지랑물 - 썩어서 된 더러운 물.쇠지랑물 - 비 온 뒤 썩은 초가지붕에서 떨어지는 쇠지랑 빛깔의 낙숫물.햇물, 헛물, 샘물, 맹물, 물결, 물꽃, 밀물, 썰물, 물꼬, 구정물, 도랑물, 마중물, 시냇물, 물거품, 물넘이, 물갈이, 물갈퀴, 물기슭, 물가늠, 물가난, 물두멍, 물들이, 물막이, 물맞이, 물멀미, 물썰매, 물앙금, 물지게, 물참봉, 물타작, 물팔매, 물함박, 물그림자, 물비린내.물을 성분으로 하는 언어는 이미지로 보나 발음으로 보나 어느 명사와 나란히 서도 자연스럽다. 물의 언어는 물처럼 투명하며 어감도 예쁘다. 물기를 함초롬히 머금은 풀잎에서 물방울 하나가 또르르 굴러떨어질 때 수면에 일어나는 물수제비, 한 줄기 바람이 물 위를 쏴아아 미끄러질 때 수면에 반짝이는 물비늘, 물이 벼랑에서 뛰어내릴 때 쏟아지는 물줄기, 물의 변화는 심상에 차오르는 감성의 수위를 찰랑거리게 만든다.물이 있는 풍경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왕버들이 바지를 동동 걷고 뛰어든 주산지의 봄여름가을겨울이 그렇고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는 백두산 천지가 그렇다. 산 높고 골 깊은 곳마다 소(沼)가 있고 담(潭)이 있어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고 이무기가 승천한다. 물이 있는 자리에는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가 서리서리 서려있다.물의 언어는 표기에 그치지 않는다. 물의 성정(性情)을 느껴보면 말 없는 언어가 흐른다. 스미고 고이고 휘감고 떨어지고, 그 몸짓은 언어라기보다는 실천하며 보여주는 말씀에 가깝다.물은 어디든 가리지 않고 흘러간다. 단단한 바위를 만나도 망설이지 않고 천길 벼랑 아래로 떨어져도 몸을 사리지 않는다. 아무리 비좁은 틈으로도 스며든다. 골짜기든 웅덩이든 함지박이든 자신의 몸을 변형하면서 흐르고 고인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건 아니다. 기름과 만나면 몸을 맞대고 있을지언정, 자신의 성정은 바꾸지 않는다. 자신이 가야할 곳을 알고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경계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며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설파했다.인간에게는 자궁 이전의 물의 기억이 있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끊어진 탯줄을 이으면서 거슬러 올라가면 태고의 바다에 닿는다. 그 바닷가에는 종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있었다. 뭍에 올랐다가 남은 자는 진화를 거듭해 인간이 되었고 바다로 돌아간 자는 고래가 되었다. 한 갈래는 땅에 살면서 찬란한 불의 문명을 이루었고 한 갈래는 바다에 살면서 어둑한 원시의 삶을 이어간다.그렇다면, 인간이 행복할까. 고래가 행복할까. 인간은 문명이 주는 편리한 삶을 영위하고 고래는 물이 주는 원시의 삶을 유영한다. 좋은 집, 좋은 옷, 맛난 음식, 삶을 즐겁게 하는 영상과 음악 그리고 지구의 정복자라는 지위, 뭐로 보나 인간이 행복해 보인다.그런데, 물속에는 중력이 없다. 부력이 중력을 상쇄하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사는 고래에게는 중력이라는, 몸을 무겁게 하는 낱말이 없다. 중력을 벗어나려 꼬리에 불 달고 솟구치다가 추락하는 망신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래의 몸짓을 ‘유영(游泳)’이라고 한다. /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5-19

은자동아 금자동아

남녀가 짝을 지으면 하늘에 기원한다, 하늘의 자식 잘 키울테니 참한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삼신할매는 이 간절한 약속을 믿고 아이를 점지해준다. 어미는 뱃속 아이를 위해 온갖 지성을 들였다. 음식을 가려 먹었으며 부정한 것은 피했다. 언행도 함부로 하지 않았고 나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새 생명을 맞기 위해 어미의 마음가짐이었다.아이가 태어나면 하나 같이 ‘응애’라고 울음을 터트린다. 이 울음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첫 언어이다. 이 함성을 고고성(呱呱聲)이라고 한다. 가위로 탯줄을 끊어내는 순간부터 아이는 모태에서 독립해 하나의 개체가 된다. 이 독립기념일을 우리는 ‘귀빠진 날’이라고도 한다. 태아의 귀가 산도를 빠져나오면 다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갓난쟁이의 몸짓은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이다. 이를 ‘배냇짓’이라고 한다. ‘배내’는 배 안이며 ‘배냇짓’은 배 안에서부터 한 몸짓이다. 갓난아이는 잠을 자면서 방실거리며 웃거나 눈코입을 찡긋거리는데, 이렇게 귀여운 몸짓이 바로 배냇짓이다. 배냇짓을 학자들은 마주보는 이의 공격성을 누그러트리게 하는 유화적 몸짓이라고 해석한다.배내옷- 갓난아이에게 입히는, 깃을 달지 않은 저고리.배냇니- 젖먹이 때 나서 아직 갈지 않은 이, 젖니.배내똥- 갓난아기가 먹은 것 없이 처음 싸는 똥.배냇머리- 태어난 뒤 한 번도 깎지 않은 갓난아이의 머리털.갓난아기가 풀무처럼 입으로 바람을 불어 대면 ‘풀무질’이다. 입술을 투르르 털며 내는 소리는 ‘투레질’이다.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 ‘죄암’ 또는 ‘쥐엄질’이다. 잠들기 전이나 깬 후에 부리는 투정은 ‘잠투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을 싸대는 행위는 ‘쉬야질’이다.어린아이를 부모는 여러 가지 몸짓으로 얼러 댄다. 어린아이의 겨드랑이를 치켜들고 올렸다 내렸다 할 때, 아이가 다리를 오그렸다 폈다 하는 짓은 ‘가동질’이다. 어린아이를 세워 두 손을 잡고 앞뒤로 밀었다 당겼다 하는 짓은 ‘시장질’ 이다. 어린아이를 곧추세워 좌우로 흔들며 두 다리를 번갈아 오르내리게 하는 짓은 ‘부라질’이다.밉둥이- 미운 짓을 하는 어린아이.옹알이- 생후 백일쯤 되는 아기가 옹알대는 짓.나비잠- 만세라도 부르듯 두 팔을 벌리고 새근새근 자는 모습.배밀이- 배를 바닥에 문지르면서 기어가는 모습.얼뚱아기- 둥둥 얼러 주고 싶은 재롱스러운 아기.이쁘둥이- 이쁜 어린아이.당싯거리다- 어린아이가 누워서 춤을 추듯 팔다리를 춤을 잇따라 귀엽게 움직이다.아망거리다- 어린아이가 괜스레 트집을 잡아 오기를 부리다.조작거리다-걸음발 타는 어린아이가 제 마음대로 귀엽게 자꾸 걷다.자칫거리다- 걸음발 타는 어린아이가 서툰 걸음으로 몇 걸음씩 걷다.아칫거리다- 어린아이가 이리저리 위태위태하게 걸음을 떼어놓다.어린아이가 도담도담 자라 살이 포동포동해지면 ‘옴포동이’라고 하는데, 이맘때면 아이의 몸짓이 다채로워진다. 짝짝쿵 손뼉을 치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도리질’한다. 왼손 손바닥에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댔다 떼며 ‘곤지곤지’하고, 두 손을 쥐었다 펴며 ‘죔죔’한다. 그러면 엄마는 어린아이를 따로 세우면서 ‘섬마섬마’ 또는 ‘따로따로따따로’라고 추임새를 넣는다.똥싸개라도 부모에게는 은자동아 금자동아이다. 귀여운 나머지 너무 오냐오냐 키우면 아이는 ‘응석받이’가 된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의 행위에 적절한 경고를 울리는데, 만져서는 곤란하거나 더러운 것을 만지려 하면 ‘지지’라 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에비’라며 말린다.칭얼거리며 엄마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아이를 ‘쫄래동이’라고 한다. 이럴 때 엄마는 아이에게 겁을 주며 달래는데, 이 말을 ‘곽쥐’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한 대 쥐어 박는 일은 ‘먼지떨음’인데, 그저 엄포나 놓을 양으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듯 살살 때린다는 뜻이다. 아우가 생긴 아이가 샘내느라 밥을 많이 먹으면 이를 ‘밥빼기’라고 한다.생의 원점에 이리도 아름답고 행복한 날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의 순간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무 행복한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면 이 험한 세상을 살 수 없을까 싶어서 신은 요람기의 기억은 지워지도록 두뇌를 설계했는지도 모른다.아이는 배밀이에서 걸음마를 거쳐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 요람기에서 멀어질수록 험한 세상을 맞닥트리고 그 시련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간다. 늙어갈수록 점점 어린아이가 되다가 마침내 삶을 마감한다. 죽기 직전에 누는 똥도 배내똥이라고 하는데, 그 성분이 배내똥과 같다고 한다. 삶과 죽음, 극과 극은 맞닿은 모양이다./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5-05

이팝나무에 쌀밥 열리면

봄이 무르익는가 싶더니 어느새 이팝나무가 꽃눈을 터트린다. 이팝나무 가지마다 하얀 꽃이 만발하면 흰쌀밥으로 온통 나무를 뒤덮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팝나무(이밥나무)라고 불렀는데, 옛날에는 이팝나무 꽃이 풍성하게 피어나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여겼다.인간은 먹이를 찾아 오래도록 떠돌았다. 야생에서 사냥과 채집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먹이가 되는 작물을 경작하면서 한곳에 정착했는데, 인간에게 농경은 삶의 방식에 혁명과 같았다. 양지바른 터에 움막을 짓고 물이 있는 강가에 밭을 개간했다. 그에 맞춰 살림살이를 빚고 농기구를 만들었다. 행동도 논밭을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사계절 일상도 농작물의 생육에 맞추었다.쇠스랑, 가래, 써레, 따비, 괭이, 호미, 절구, 맷돌, 도리깨, 망태기, 도롱이, 부지깽이,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 품앗이, 깟짓동, 김칫동, 노적가리, 동동초가, 사립문, 영마루, 이엉, 짚신.단군 때, 고시(高矢)라는 신장(神將)이 있었다. 농사와 가축을 관장하던 고시는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과 불을 얻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한 점 떼어 던지며 ‘고시네’하고 외쳤다. 고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고수레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는 은혜로운 음식을 짐승도 함께 먹자는 베풂이기도 했다.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다, 님도 보고 뽕도 딴다,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않고 외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않는다, 남이 장에 가니 거름 지고 장에 간다, 오뉴월 하루 놀면 동지섣달 열흘 굶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한 어깨에 두 지게 질까, 낫 놓고 기역자 모른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늙은 소도 콩깍지 실으러 갈 때는 잰다, 삼사월은 굼벵이도 석 자씩 뛴다, 농번기에는 부지깽이도 쉴 틈이 없다, 메밀꽃 필 때는 동서집에도 가지 마라, 오뉴월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농경문화는 이처럼 많은 속담을 낳았다. 숨은 뜻을 곱씹어보면 생활에 빗댄 해학과 풍자가 은근하고 삶에서 건진 지혜가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농경에서 따온 동사도 많은데, 그 내용을 보면 참 재미가 있다.사람을 가르쳐 일깨우고 힘과 용기를 준다는 뜻으로 ‘북돋우다’를 쓴다. ‘북’은 초목의 뿌리를 덮고 있는 흙을 말한다. 농작물 밑동의 흙을 긁어 주면 영양분이 잘 스며들고 바람에 잘 쓰러지지 않는다. 이를 비유하여 ‘용기를 북돋우다’, ‘사기를 북돋우다’로 쓴다.사람의 행위가 가볍고 방정맞게 보이면 ‘까분다’라고 한다. ‘까불다’는 ‘까부르다’를 줄인 말이다. 키로 곡식 알갱이를 고르는 행위를 키질이라고 하는데, 키를 아래위로 흔들면 티나 검불이 사방으로 나비처럼 날아간다. 이는 곡식을 까부르는 행위로 그 모양을 빗대어 나비질이라고도 한다.상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물건을 뜻하는 말로 ‘어처구니 없다’가 있다. 어처구니는 궁궐 지붕의 추녀마루 끝자락에 있는 여러 가지 짐승 조각이나 맷돌의 손잡이라고 한다. 궁궐 지붕에 어처구니를 설치하지 않았거나 맷돌에 손잡이가 없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리하여 일이 뜻밖이거나 기가 막히게 한심한 상황에서 쓴다. ‘어이없다’도 같은 말이다.하던 일을 중도에서 포기한다는 뜻을 가진 ‘팽개치다’는 ‘팡개’에서 나온 말이다. 팡개는 곡식이 여물 무렵 새를 쫓는 데 쓰는 대나무 토막이다. 토막의 한끝을 네 갈래로 쪼개어 가운데 나무를 끼우고 이것을 흙에 꽂으면 틈새로 돌멩이나 흙덩이가 낀다. 새를 향해 팡개를 휘두르면 흙과 돌멩이가 날아갔다. 이러한 행위를 ‘팽개질’이라고 했다.모든 일을 평등하게 한다는 뜻으로 ‘평미레 치다’가 있다. 옛날 싸전에 가면 됫박이나 말에 곡식을 담고 작은 방망이로 그 위를 밀었다. 이 방망이가 바로 평미레이다. 평미레로 밀면 됫박에는 딱 한 되 분량만 남았다. 어떠한 일을 공평하게 하자고 할 때 평미레 치자라고 말한다.운동경기에서 볼 수 있는 행위로 ‘헹가래 치다’가 있다. 농사에서 가래로 흙을 파기 전에 빈 가래로 손을 맞춰 보았다. 일종의 예행연습인데 이 행위를 헹가래질이라고 했다. 사람을 들어 올릴 때 호흡이 중요하다. ‘헹가레’는 여럿이 한 호흡을 맞추어 이겼을 때 이를 서로 치하하는 상징적 행위이다.얼마 전까지 ‘서리’라는 풍습이 있었다. 남의 집 과일, 곡식,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인데, 농촌에서 자란 사람이면 이러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서리를 맞아도 주인은 내 자식이 먹었으려니 생각하고 벌을 내리지 않았다. 마을 사람은 모두 하나이며 남의 자식도 내 자식과 같다는 인식에서 나온 넉넉한 마음이었다./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4-21

삶은 동사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쉼 없이 움직인다. 일어나고 일하고 배우고 만나고 말하고 마시고 노래한다. 잠을 자는 시간에도 숨을 쉬고 몸을 뒤척인다. 움직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삶이라는 명사를 파생한 동사는 ‘살다’이다. ‘살다’의 어감을 느껴보면 흥미롭다. 숨을 쉬는 소리 ‘ㅅ’에 양성모음 ‘ㅏ’를 붙이고 흐르는 어감을 가진 ‘ㄹ’로 받쳐놓았다. 졸졸, 솔솔, 돌돌, 같은 흉내말을 보면 ‘ㄹ’을 알 수 있다.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돌이 구르는 소리이다. 끊어지지 않는 움직임이 그대로 느껴지는 생생한 언어이다. ‘살림살이’를 보라. 구르는 소리가 셋이다. 이렇듯 ‘살다’는 생명의 언어며 ‘삶’은 생명의 일생이다.가다, 오다, 뛰다, 막다, 살다, 눕다, 자다, 깨다, 졸다, 싸다, 먹다, 놀다, 씹다, 감다, 놓다, 끄다, 따다, 푸다, 붓다, 널다, 펴다, 재다, 괴다, 긁다, 씻다, 썰다, 켜다, 끄다, 베다, 휘다, 굽다, 쐬다, 읽다, 찌다, 지다, 말다, 쥐다, 펴다, 듣다, 차다, 빗다, 쌓다, 파다, 쓰다, 입다, 때다, 앉다, 얹다, 주다, 갈다, 찧다, 찍다, 꺾다, 깎다, 묶다, 막다, 채다, 호다, 접다, 짚다, 지다, 뜨다, 닫다, 열다, 밀다, 풀다, 돌다, 짜다, 불다, 빼다, 낚다, 닦다, 파다, 캐다, 울다, 웃다, 매다, 메다, 푸다, 넘다, 기다, 박다, 빨다, 널다, 패다, 쪼다, 젓다, 뜨다,우리말에는 두 음절 동사가 많다. 모두 삶의 기본이 되는 행위라는 특징이 있다. 삶이 단순하던 시절에 만든 가장 단순한 언어이다. 삶이 복잡해지면서 두 동사가 결합했다. 살아가다, 쥐어짜다, 동여매다, 낚아채다 등이다. 살아있는 세포처럼 동사도 단음절에서 다음절로 진화한 것이다.식물의 동사는 몇 개 없다. 뿌리를 뻗다, 물을 빨다, 가지를 벌리다, 꽃이 피다, 지다, 열다 등이다. 무생물은 움직일 수 없으므로 동사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말은 ‘돌이 구르다’라고 표현한다. 가만히 따져보면 서술어 ‘구르다’는 자동사(自動詞)이나 알고 보면 ‘무엇이 돌을 굴리다’로 타동사(他動詞)이다. 움직이고 구르는 힘은 스스로가 아닌 타력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생물에 붙이는 동사는 몇 개 없다. 이렇게 동사를 비교해 보니 인간이 얼마나 왕성하게 활동하는지 실감이 난다.동사 ‘살다’는 우리말 곳곳에 있다. 나이를 말할 때 ‘살’을 쓴다. 다섯 살, 서른 살, 일흔 살이라고 한다. 살아가는 일에도 ‘살이’를 붙인다. 살림살이, 옥살이, 귀양살이, 더부살이, 타향살이, 처가살이, 겨우살이, 이렇게 보니 사람에게 ‘살다’는 없어서는 안 될 동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먹여 살리다’라고 말하겠는가.삶의 마지막 동사는 ‘죽다’이다. 죽음에 이르면 하나씩 멈추고, 마지막 움직임이 멈추면 삶을 마감한다. ‘죽다’는 어두운 음성모음에다 닫히고 막히는 소리 ‘ㄱ’이 받침이다. ‘주욱’을 보자. ‘주우우’ 이어지다가 ‘ㄱ’에서 숨이 끊어지고 문이 닫힌다. 어감으로 보는 죽음은 끝이며 단절이다.돌아가시다. 사망하다, 별세하다, 운명하다, 타계하다, 작고하다, 기세하다, 땅에 묻히다, 밥숟가락 놓다, 숨이 끊어지다, 영원히 잠들다, 다음 세상으로 떠나다, 유명을 달리하다, 요단강 건너다, 저승사자를 따라가다, 숨이 멎다, 심장이 멈추다, 영면에 들다, 열반에 들다, 입적하다, 선종하다, 서거하다, 심장박동 그래프가 수평을 그리다, 황천길로 가다, 골로 가다, 북망산 가다, 칠성판(七星板)을 지다, 올림대를 놓다(속된말), 사자밥을 떠놓다(속된말)응용하거나 파생하거나, 우리말은 하나의 뿌리를 가진 동사를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이러한 표현 뒤에는 상황, 장소, 세계관 같은 것들이 숨어있다. ‘돌아가시다’는 영혼의 고향이 있다는 세계관이고 ‘저승사자를 따라가다’는 내세관이다. 죽음은 끝이나 소멸이 아니라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인식이다. 이승을 버리거나 다음 세상으로 가는 일이라는 것이 우리네 정서이다. 인간의 죽음에도 은유와 철학이 숨어있는 게 우리말의 특징이다.우리말에서 ‘죽다’는 생물에만 쓰지 않는다. 시계가 죽었다, 팽이가 죽었다, 불이 죽었다, 처럼 무생물에도 쓴다. 또한 풀이 죽었다, 사기가 죽었다, 끗발이 죽었다, 처럼 감정에도 쓴다. ‘캬! 죽인다’ 또는 ‘죽여 준다’처럼 감탄에도 쓴다. ‘좋아 죽겠어’ 또는 시어(詩語)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처럼 역설에도 쓴다.우리 사는 세상에 모든 것이 정지한다고 가정해보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구에 동사 ‘불다’가 없고 ‘흐르다’가 없고 ‘치다’가 없으면 바람도 멈추고 물도 멈추고 파도도 출렁이지 않는다. 움직임이 없으면 죽음의 세계이다. 동사가 없으므로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 달처럼,삶은 동사다. 쉼 없이 움직이다보면 부딪치고 엎어지고 깨지기도 한다. 아파서 울고 서러워서 가슴을 치기도 한다. ‘엎어지다’가 있으면 ‘일어나다’도 있다. ‘울다’가 있으면 ‘웃다’도 있다. 그러니 기왕 한 세상을 사는 거, 활기차게 살아볼 일이다./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