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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그 그리움의 정경들

등록일 2021-08-11 19:52 게재일 2021-08-1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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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한 색시 얻어 새끼 낳고 알콩달콩 살 거라고 초가삼간 오막살이를 마련했다. 처음 가진 내 땅이라 마음이 뿌듯해 여기까지 내 영역이라고 줄을 긋기는 좀 그랬다. 지게를 지고 들로 나가 돌을 져 날랐다. 하나 둘 쌓아 나지막이 두르다 보니 돌담이 되었다.

입구를 비우니 뭔가 허전했다. 지게를 지고 낫을 들고 뒷산으로 갔다. 싸리나무를 추려 한 짐 지고 와 얼기설기 엮었다. 입구에 말뚝 하나 박고 거기에 엮은 것을 붙이니 싸리문이 되었다. 내 집에 잡귀가 들지 말라고 뾰족한 가시가 많은 엄나무도 얹었다. 늘 비스듬히 서 있다고 해서 사립문(斜立門)이라고 불렀는데, 말이 문이지, 사립문은 손님을 막아서지 않았다. 바깥에서 슬쩍 밀면 제가 먼저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집만 있다고 살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양식을 얻으려면 비탈을 개간해 밭을 만들고 봄이면 논밭을 갈아야 했다. 장날 장터에 나가 대장간에 들러 농기구를 샀다. 생활에 필요한 도구는 나무나 풀 등을 잘라 손으로 만들었다. 솜씨야 있을까만 손으로 만들면 얼기설기한 대로 살림이 되고 투박한 대로 도구가 되었다.

 

따비 - 쟁기보다 작고 보습이 좁게 생겨, 풀뿌리를 뽑거나 밭갈이를 하는 데 쓰는 농기구.

보습 - 쟁기나 극젱이의 술바닥에 맞추는 삽 모양의 쇳조각.

극젱이 - 쟁기와 비슷하나 보습 끝이 무디고 술이 곧게 내려감(굽정이).

써레 - 갈아 놓은 논의 바닥을 고르거나 흙덩이를 잘게 부수는 데 쓰는 농기구.

써레뭉둥이 - 써레의 몸이 되는 나무.

고무래 - 곡식을 그러모으거나 펴거나, 밭의 흙을 고르는 데나, 아궁이의 재를 긁어내는 데 쓰는 ‘丁’자 모양의 기구.

쇠스랑 - 땅을 파헤쳐 고르거나 두엄, 풀 무덤 따위를 쳐내는 데 쓰는 갈퀴 모양의 농기구.

미 - 김을 매거나 감자나 고구마 따위를 캘 때 쓰는 쇠로 만든 농기구.

슴베 - 칼·호미·괭이 따위의 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부분.

괭이 - 땅을 파거나 흙을 고르는 데 쓰는 농기구(날의 모양에 따라 가짓잎괭이, 삽괭이, 수숫잎괭이, 토란잎괭이).

여우호미 - 삼각괭이.

도롱이 - 짚이나 띠 따위로 촘촘히 엮어 비 오는 날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

망태기 - 가는 새끼나 노 따위로 엮어 만든 그릇.

 

낫, 삽, 갈고리, 조리, 멍석, 삿갓, 쑤세, 깔판, 부지깽이, 똬리, 물동이, 뒤주, 주걱, 화로, 곰방대, 굴대, 채, 됫박, 나막신, 짚신, 목침, 풍로, 남포, 등잔, 돗자리, 요강, 물레, 함지박, 광주리, 코뚜레.

“새끼 짊어지고 고개를 넘어 닿은 두메, 햇살 맑은 언덕에 터를 다진다. 나무를 잘라 뼈대를 세우고 흙을 이겨 벽을 쌓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돌을 모아 나지막한 담을 두른다. 가지 닮은 나무 둘 맞대 지게를 만들고 기다란 나무를 낫으로 툭툭 잘라 바지랑대를 세운다. 싸리나무 한 줌 묶어 어지럽게 흩날리는 생각을 쓸어내고, 수수대궁 두엇 꺾어 내면에서 재채기를 일으키는 먼지를 털어낸다. 댕댕이덩굴로 멍석을 짠 다음 그 위에 앉아 말린 옥수수자루로 삶의 뒷면에서 자분거리는 가려움을 긁어도 본다”(‘너와집’/ 김이랑 수필에서 발췌)

가을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깨나 콩을 널었다. 뙤약볕에 깨와 콩이 잘 마르면 도리깨를 휘둘러 내려쳤다. 타닥타닥 알곡은 깍지 밖으로 튀어나와 멍석 위에 떨어졌다. 알곡이 다 떨어지면 빗자루로 쓸어 키 위에 담았다. 키를 들고 까불면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곡은 키 위에 떨어졌다. 곡식에 섞인 검부러기가 나비처럼 날아간다고 하여 이를 나비질이라고 했다.

이른 새벽부터 가을마당에 탈곡기가 돌아갔다. 와랑와랑 자욱한 먼지를 피우며 나락을 털어내면 고사리손도 한몫 거들었다. 나락은 가마니에 담겨 곳간에 차곡차곡 쌓였다. 아버지가 쌀 한 가마니 지고 장에 간 날, 아이들은 종일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날 저녁 밥상에는 드물게 소고기국이 올랐고 달각딸각 수저 부딪는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초가집 용마루를 하얀 달빛이 쓰다듬을 때, 고봉밥을 다 비운 아이들이 투정을 부리다가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이들 불룩한 배를 한 번씩 쓰다듬고는 툇마루로 나갔다. 자식을 배불리 먹였다는 포만감에 아버지는 막걸리 한 잔 들이켜며 고단한 하루를 위무했다.

사립문은 단지 드나드는 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좋은 기운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며 이른 아침 사립문을 열었다. 행여 자식이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풍년초 한 대 태우며 사립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아버지는 밤마실 나간 식솔이 다 들어오고 나서야 사립문을 닫았다.

지금은 사람도 풍경도 과거로 떠나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그 기억의 조각들은 머릿속에 남아 있다.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면 사립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환영처럼 어른거린다. /수필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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