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강산은 아름답다. 봄에는 새파란 잎과 들꽃, 여름에는 짙은 녹음과 바다가 펼쳐진다. 가을에는 온 산에 단풍, 겨울이면 하얀 눈이 세상을 덮는다. 사계절이 순환하고 계절마다 자기 풍경을 펼치는 자연이 있어 우리네 삶도 다채롭다.
함박눈 : 함박꽃 송이처럼 굵고 탐스럽게 내리는 눈. 가루눈.
싸라기눈 : 빗방울이 갑자기 찬바람을 만나 얼어서 떨어지는 쌀알 같은 눈.
가랑눈 : 조금씩 잘게 내리는 눈.
눈설레 : 눈과 함께 찬바람이 몰아치는 현상.
도둑눈 : 밤에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살그머니 내린 눈.
떡눈 : 물기를 머금어 떡처럼 척척 달라붙는 눈송이.
살눈 : 얇게 내리는 눈.
설밥 : 설날에 오는 눈.
숫눈 : 눈이 와서 덮인 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눈.
길눈 : 한 길이 되도록 쌓인 눈.
눈석임 : 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 스러짐.
소나기눈 : 폭설.
자국눈 : 발자국이 겨우 날 정도로 적게 온 눈.
잣눈 : 잔 자쯤 온 눈.
풋눈 : 초겨울에 약간 내리는 눈.
우리에게는 눈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첫눈 내리는 날 어디서 만나자. 손톱에 들인 봉숭아 꽃물이 첫눈 오는 날까지 남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꿈은 눈처럼 순수했다. 꿈은 눈 녹듯 눈석임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날까지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더러 사먹기도 하면서/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에 성에가 하얗게 끼어 있었다. 뙤창문을 입김 호호 불어 닦아, 바깥을 내다보면 밤새 도둑눈이 함박 내려 마당이 온통 하얬다. 문을 열면 낯설고 환한 세상이 펼쳐졌다. 바깥으로 나가 신발을 신고 처마를 나설 때, 숫눈 위에 차마 첫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뽀드득 한 발 뽀드득 두 발, 발자국을 찍는 감촉이 참 좋았다. 그렇게 첫 발자국은 길이 되었다. 발자국은 사립문을 지나 고샅으로 나가 이웃과 이웃을 이었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공터에 모였다. 눈을 수박만하게 뭉쳐 굴렸다. 이쪽으로 굴리고 저쪽으로 굴리고, 눈덩이는 점점 커졌다. 힘에 부쳐 더 굴릴 수 없을 때, 다시 눈을 뭉쳐 굴렸다. 굴린 눈덩이가 적당히 커지면 큰 눈덩이 위에 올렸다. 헌 양은 대야를 씌우고 숯덩이로 눈코입을 만들고 솔가지를 꺾어 수염으로 붙였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눈사람이 섰다. 곰방대를 물고 담배 피는 할아버지 눈사람, 큰 냄비를 쓰고 나무 창을 든 병정 눈사람, 이제 걸음마를 뗀 자식 같은 눈사람, 자기 멋대로 생긴 눈사람, 참말이지, 할머니 같고 동생 같고 가족 같았다. 밤새 추위에 떨까 봐 목도리를 둘러주기도 했다.
서너 명씩 패를 짜서 눈싸움을 했다. 눈을 뭉치고 던지고 날아오는 눈뭉치를 피하다가 눈 위에 나동그라졌다. 그렇게 뒤섞여 뛰어놀면 어느새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평소 쌓인 감정을 실어 눈덩이를 던지기도 했다. 눈싸움, 눈사람, 눈썰매, 눈미끄럼틀, 함께 뛰어놀면 묵은 감정은 다 날아가고 개운한 웃음만 남았다.
눈 오는 날에는 아이고 어른이고 다 순수해졌다. 눈밭에서 뒹구느라 옷을 다 버려도 어른들은 나무라지 않았다. 마음껏 뛰어놀아야 크고 또 그렇게 저절로 커야 사람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추위를 이기고 체력을 키우는 데 그만한 놀이가 없었다.
종일 뛰어놀았으니 몸이 나른했다. 아랫목에 누워도 눈밭에서 뛰어놀던 그림이 지워지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면 잠도 꿈도 눈송이처럼 포근했다. /수필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