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한글날을 앞두고 이런저런 행사가 열린다. 한류가 세계의 문화를 주도하는 시대에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행사는 바람직하다. 언론도 우리말의 우수성을 알리는 기사를 싣는다. 그러고는 우리말을 사랑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튿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외래어가 넘치는 기사를 남발한다.
“리어에는 센티멘탈하고 절제된 바디 위에 스포티한 느낌을 살린 투 라인 테일램프를 적용하였으며, 리어 펜더의 숄더 볼륨에 포인트를 준 낮고 와이드한 프로파일과 쿠페형 루프 끝단에 위치한 고정형 리어 윙 스포일러로 하이 퀄리티한 EV 이미지를 강조했다.”
국산 승용차를 소개하는 기사인데, 번역체를 구사하고 영어를 많이 쓴 이유를 물어보니 고급스러움과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란다. 반대로 보면 한국어로 쓰면 저급스럽고 신뢰감이 떨어진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의식은 거리의 간판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말의 우수성을 모르는 사람은 영어는 고급스럽고 세련되었다는 편견에 빠져있다.
우리말은 동사를 중심으로 하는 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동사가 발달했고 그에 따라 형용사도 발달했다. 예를 들어보자.
- 달리다, 내닫다, 치닫다, 내달리다, 치달리다, 내리달리다
- 돌다, 휘돌다, 맴돌다, 에돌다, 겉돌다, 공돌다, 나돌다, 감돌다, 떠돌다, 베돌다, 싸고돌다, 장돌다, 통돌다, 헛돌다, 계면돌다
- 서다, 추서다, 벋서다, 못서다, 엇서다, 뒤서다, 갈서다, 나서다, 대서다, 다가서다, 돌아서다, 들어서다, 갈라서다, 가로서다, 곤두서다, 곧추서다, 내려서다, 넘어서다, 따로서다, 올라서다, 일어서다, 빕더서다, 비켜서다, 물러서다, 앞장서다, 물구나무서다
달리다, 돌다, 서다, 하나에 그치지 않고 움직임의 상태에 따라 세분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증명으로, 우리말은 표현하지 못할 움직임이 없을 정도다.
“우리말은 표음문자다. 대상의 움직임이나 상태 그리고 성질 등을 음성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도록 발달했다. 특히 형용사와 부사에서 도드라지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풍부한 감성과 관련이 있다. 한국어에서 형용사는 고유어 비중이 높다. 표현 또한 다양하여 우리말의 특성을 잘 반영한다. 이러한 점에서 형용사는 ‘한국어다운’ 어휘로 꼽힌다. 풍부한 표현력, 아름다운 어휘, 묘사와 상징이 풍부한 ‘소릿말’이 적재적소에 활용되기 때문이다.”(김이랑 ‘문장의 문학적 메커니즘’부분 발췌)
미쁘다, 예쁘다, 참하다, 어여쁘다. 탐스럽다, 살갑다, 밉살맞다, 푸르데데하다, 푸르뎅뎅하다, 푸르죽죽하다, 푸르스름하다, 누르스름하다, 가무스름하다, 불그스레하다, 동그스름하다, 가느스름하다, 야트막하다, 나지막하다, 자그마하다, 나직하다, 달콤하다, 달짝지근하다, 우락부락하다, 얼룩덜룩하다, 울긋불긋하다, 알쏭달쏭하다, 시시껄렁하다, 시금털털하다,
동사가 풍성하면 이를 수식하는 형용사도 이처럼 발달한다. 상태를 나타내는 우리말은 풍성하다. 어감으로 실제를 연상할 수 있다. 감각적이면서 감성적인 표현은 형용사에도 넘치는데 특히 흉내말에서 도드라진다. 우리말은 흉내말을 무한대로 만들어낸다.
찰랑찰랑, 자박자박, 넌출넌출, 알록달록, 어슬렁어슬렁, 어우렁더우렁, 붉으락푸르락, 퐁당퐁당, 방긋방긋, 두리번두리번, 바람만바람만, 왁자지껄, 헐레벌떡, 그냥저냥, 개발괴발, 곤드레만드레, 미주알고주알, 아옹다옹, 알콩달콩, 얼렁뚱땅, 오순도순, 허겁지겁, 흐슬부슬, 흐지부지, 흥청망청, 얼씨구절씨구….
우리말 동사는 움직임이 살아있다. 형용사는 모양을 그대로 어감으로 살린다. 그래서 생동감이 넘치고 상태도 실감이 난다. 이는 표음문자의 특성이지만, 그 특성을 잘 살려 표현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언어 사용자인 우리이다. 이처럼 풍성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만들고도 외국어를 고급스럽다고 여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김수영(金洙暎·1921~1968) 시인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수필에서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낱말로 꼽았다. 시인이 살던 시대의 언어라서 지금 우리에게 약간 덜 친근하지만, 외래어 홍수에 휩쓸리는 오늘의 언어를 돌아보라는 성찰을 준다.
한글날, 일 년에 한 번쯤이라도 주변을 돌아보며 우리말을 찾아보시라. 그러고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10개를 꼽아 보시라.
/수필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