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산소와 수소의 결합이다. 산소는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 반응으로 만들어진다. 수소는 빅뱅 때 만들어졌다. 별이 폭발하면서 흩어진 산소가 우주를 떠도는 수소와 만나 물이 된다. 물은 대우주의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가 만들어낸 물질이다.
물은 곧 생명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 물이 있다. 인간도 어미의 뱃속에서 물의 막(羊水)에 싸여 신체를 갖춘다. 세상에 태어나서도 물을 떠날 수 없다. 멱감고 물장구치고 고기 잡고 빨래하고, 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다.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하고 그러다가 지치면 냉수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가뭄이 들면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 간절히 물을 원하고, 물과 함께 누려온 삶의 정서는 많은 언어를 낳았다.
윤슬 -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물너울 - 넓은 물에서 크게 움직이는 물결.
물마루 - 바닷물의 마루터기, 곧 멀리 보이는 수평선의 두두룩한 부분.
물무늬 - 물결처럼 어른어른하는 무늬.
물이랑 - 물이 넘실거려서 물의 표면이 밭이랑처럼 된 것.
물비늘 - 햇빛을 받아 수면이 반짝이며 잔잔하게 이는 물결.
물여울 - 강이나 바다에서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
물장구 - 헤엄칠 때 발등으로 물 위를 잇따라 치는 일.
물거울 - 거울 삼아 모양을 비추어 보는 물.
물보라 - 물결이 바위 따위에 세게 부딪치거나 솟구칠 때, 사방으로 흩어지는 잔 물방울.
물방귀 - 물밑에 있던 공기가 물 위로 떠오르면서 꾸르륵 꾸르륵하며 내는 소리.
나비물 - 세숫대야에 담겨 가로로 퍼지게 끼얹는 물.
추깃물 - 송장이 썩어서 흐르는 물.
물수제비 - 둥글고 얇은 돌을 물 위로 스치듯이 튀기어 가게 던졌을 때, 생기는 물결 모양.
고지랑물 - 썩어서 된 더러운 물.
쇠지랑물 - 비 온 뒤 썩은 초가지붕에서 떨어지는 쇠지랑 빛깔의 낙숫물.
햇물, 헛물, 샘물, 맹물, 물결, 물꽃, 밀물, 썰물, 물꼬, 구정물, 도랑물, 마중물, 시냇물, 물거품, 물넘이, 물갈이, 물갈퀴, 물기슭, 물가늠, 물가난, 물두멍, 물들이, 물막이, 물맞이, 물멀미, 물썰매, 물앙금, 물지게, 물참봉, 물타작, 물팔매, 물함박, 물그림자, 물비린내.
물을 성분으로 하는 언어는 이미지로 보나 발음으로 보나 어느 명사와 나란히 서도 자연스럽다. 물의 언어는 물처럼 투명하며 어감도 예쁘다. 물기를 함초롬히 머금은 풀잎에서 물방울 하나가 또르르 굴러떨어질 때 수면에 일어나는 물수제비, 한 줄기 바람이 물 위를 쏴아아 미끄러질 때 수면에 반짝이는 물비늘, 물이 벼랑에서 뛰어내릴 때 쏟아지는 물줄기, 물의 변화는 심상에 차오르는 감성의 수위를 찰랑거리게 만든다.
물이 있는 풍경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왕버들이 바지를 동동 걷고 뛰어든 주산지의 봄여름가을겨울이 그렇고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는 백두산 천지가 그렇다. 산 높고 골 깊은 곳마다 소(沼)가 있고 담(潭)이 있어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고 이무기가 승천한다. 물이 있는 자리에는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가 서리서리 서려있다.
물의 언어는 표기에 그치지 않는다. 물의 성정(性情)을 느껴보면 말 없는 언어가 흐른다. 스미고 고이고 휘감고 떨어지고, 그 몸짓은 언어라기보다는 실천하며 보여주는 말씀에 가깝다.
물은 어디든 가리지 않고 흘러간다. 단단한 바위를 만나도 망설이지 않고 천길 벼랑 아래로 떨어져도 몸을 사리지 않는다. 아무리 비좁은 틈으로도 스며든다. 골짜기든 웅덩이든 함지박이든 자신의 몸을 변형하면서 흐르고 고인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건 아니다. 기름과 만나면 몸을 맞대고 있을지언정, 자신의 성정은 바꾸지 않는다. 자신이 가야할 곳을 알고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경계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며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설파했다.
인간에게는 자궁 이전의 물의 기억이 있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끊어진 탯줄을 이으면서 거슬러 올라가면 태고의 바다에 닿는다. 그 바닷가에는 종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있었다. 뭍에 올랐다가 남은 자는 진화를 거듭해 인간이 되었고 바다로 돌아간 자는 고래가 되었다. 한 갈래는 땅에 살면서 찬란한 불의 문명을 이루었고 한 갈래는 바다에 살면서 어둑한 원시의 삶을 이어간다.
그렇다면, 인간이 행복할까. 고래가 행복할까. 인간은 문명이 주는 편리한 삶을 영위하고 고래는 물이 주는 원시의 삶을 유영한다. 좋은 집, 좋은 옷, 맛난 음식, 삶을 즐겁게 하는 영상과 음악 그리고 지구의 정복자라는 지위, 뭐로 보나 인간이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물속에는 중력이 없다. 부력이 중력을 상쇄하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사는 고래에게는 중력이라는, 몸을 무겁게 하는 낱말이 없다. 중력을 벗어나려 꼬리에 불 달고 솟구치다가 추락하는 망신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래의 몸짓을 ‘유영(游泳)’이라고 한다. /수필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