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가을국화 옆에서 내 몸도 시드나 보다지상에서 사람을 만나몇은 이별을 하고 몇은 남았다쇠 살로 된 수레바퀴 아래서한철에서 다른 한철로이것이 여행이라면 빨리 다른 곳에 닿고 싶다비가 오나 보다젖은 것들이 내 안에서안개가 되어 피어오른다사람 이전깊은 중력의 물기를 머금고 올라오는푸르고 푸른 감각들깊은 상처 위에 혓바닥을 대본다더 따뜻하게 비를 맞고 서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시인의 삶이 얼마나 핍진하고 열악한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수레바퀴처럼 반복적으로 굴러가는 힘든 삶에서 탈출하고 극복해 나가려는 시인의 간절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시인
2019-08-25
만만치가 않은 그녀없으면 허전하고있으면 골치 아프고 때론 짜증난다지구가 네모라고 믿는 그녀아파트, 백화점, 사무실그녀의 공간은 모두 벽과 벽하루 종일 정신없이 돌고 나면 어지럽다각양각색의 사람들오늘도 같은 생각의 무리를 찾고 있다그래서 다들 끼리끼리 모여 산다고 하는 건가세상이 온통 하얀가 싶더니돌아서면 얼룩진 또 다른 골목붉은 벽에 기대고 잠시 쉬고 있을 때나를 보고 꼬마가 중얼거린다알고 보면 무지 쉬운데 라고순리에 맞는 이치가 곧 삶의 공식이겠지나 알고 보면 쉬운 여자야육면체의 네모진 칸칸을 한 면에 같은 색깔로 채우면 완성되는 큐브를 제재로 시인은 현대 문명에 갇혀 사는 우리 시대를 야유하고 있다. 네모의 각진 세상에 경쟁하며 정신없이 사는 것이 오늘의 삶이 아닐까. 이 네모에 갇혀 벽과 벽 사이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체성도, 지향해 가야 할 생의 목표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시인의 시선은 이런 비인간적인 현대 문명의 폐해를 겨냥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08-22
아기를 잠재우는조심스럽게 사쁜거리는당신의 발자국 소리가졸음 오는 잠자리의가장자리를지긋지긋 밟아 주시고잠결에도 듣는당신의 속삭임이꿈으로 살아나는어머니저는 잘 익은 레몬 열매로당신의 꿈속에 열리고 싶은아기를 잠재우는 어머니의 자상한 모습이 숭고하리만큼 감동적이다. 지난 시절 어린 자신을 잠재우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어머니의 꿈속에 잘 익은 레몬 열매로 열리고 싶다는 고백을 하며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기리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8-21
그래 살아봐야지너도 나도 공이 되어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살아봐야지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공처럼, 탄력의 나라의왕자처럼가볍게 떠올라야지곧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꼴둥근 공이 되어옳지 최선의 꼴지금의 네 모습처럼떨어져도 뛰어오르는 꼴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처럼 탄력 있고 회복력이 강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다짐을 본다. 떨어져서 쓰러지고 파괴되어 주저앉아버리는 게 아니라 가볍게 튀어 올라 곧 다른 움직임을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으로 환원되는 공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인
2019-08-20
난로 위에 머리카락 하나가 떨어진다머리카락은 타면서 액체가 된다액체는 거품을 물고 격렬하게 꿈틀거린다그 꿈틀거림 속에서 고약한 냄새가 뿜어져 나온다뿌리를 뻗으며 식물인 양 얌전하게만 자라던 것이불에 닿자마자 슬픈 몸짓 역한 냄새로제 뜨거운 동물성을 있는 대로 드러내니눈 달린 것 이빨 달린 것 숨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독한 냄새를 지우려고 창문을 열자차고 커다란 겨울바람이 들이닥친다머리카락 속에 용쓰던 힘과 냄새는그 바람 속으로 고분고분하게 빨려들어간다하나씩 죽음이 보태질 때마다바람에도 하나씩 힘이 더 붙는다그 바람이 낡은 집을 붙들고 요란하게 흔들어대니문짝들 창문들은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며 밤새 앓는 소리다난로 위에는 이제 더 이상 머리카락이 아닌 것이상처자국처럼 꺼멓게 늘어붙어 있다난로 위에 떨어져 역한 냄새를 풍기며 타들어가는 머리카락은 소멸의 순간을 의미하는데 검고 윤기나던 머리카락이 역한 냄새를 풍기며 소멸되어버리는 상황을 설정한 시인은 삶과 죽음을 떠올리고 있음을 본다. 매우 인상적이고 즉물적인 표현이 이채롭기 그지없다. 시인
2019-08-19
수평선이 축 늘어지게 몰려 앉은 바닷새가 떼를 풀어 흐린 하늘로 날아오른다. 발 헛디딘 새는 발을 잃고, 다시 허공에 떠도는 바닷새, 영원히 앉을 자리를 만들어 허공에 수평선을 이루는 바닷새.인간을 만나고 온 바다,물거품 버릴 데를 찾아 무인도 가고 있다허공에 수평선을 이루며 영원히 앉을 자리를 만든다는 표현에서 인간과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자연의 원형을 지키려는 시인정신을 읽는다. 인간과 문명의 흔적인 물거품을 피해 깨끗한 무인도로 찾아가는 도저한 바다를 시인은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9-08-18
바알간 초록시금치 밑둥아침 산책 나온바알간 오리발 맨발채마밭을 지나바알간 볼의 소년이새 운동화를 신고읍내학교로 간다도시락이 따뜻하다아직은미워할 수 없는 게더 많다아직은바알간 속살로기다리고 있는 게 더 많다시인이 고향에 가서 받은 느낌을 그려내고 있다. 바알간 초록 시금치와 오리들의 맨발, 바알간 볼의 소년이 새 운동화를 신고 읍내 학교로 가는 풍경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어쩌면 그 소년이 그 옛날 자신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소년에게서 희망의 빛살을 보는 백발의 시인은 자기 자신이 새 운동화를 신고 학교로 가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만히 웃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
2019-08-15
거, 앉아보소.늙은 여자가 강물 물 가까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쉰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망가진 채 엉거주춤 돌아온 사내더러 한 번 말했다. 꺼질 듯 낮게 말했다. 키가 껑충한 그래서 그런 건지 낯짝 안 보이는, 아직도 허공에 매달려 떠돌고 있는 건지 낯짝 없는, 낯짝 없는 사내더러 여자가 말했다.여자는 오랜 세월, 장터거리에서 혼자 국밥집을 해왔다. 저녁노을 그 아래 시뻘겋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러나 쿨럭쿨럭 뒤엉키는 물, 지금은 다만 긴 강.이 시를 읽고 나면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는, 어떤 서러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됨은 무슨 까닭일까. 시인이 펼쳐내는 참 기막힌 한 장면을 본다. 다 망가진 채 쿨룩거리며 돌아온 사내와 시장에서 국밥장사로 한 생을 보내는 여인네가 강가에서 해후하는 장면이다. 첫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음을 본다. 그녀의 기다림은 이 잠깐의 만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긴 강처럼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계속될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는 가슴 아픈 해후의 한 장면을 시인은 그려내고 있다. 시인
2019-08-13
귀똘이들이별의 운행을 맡아가지고는수고로운 저녁입니다가끔 단추처럼 핑글떨어지는 별도있습니다가을 해질녘 창가에 붙어 우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삼라만상 중의 미물인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밤하늘 별의 운행에 관여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귀뚜라미 울음이 낭자하게 퍼지는 뜰에 내리는 별 싸라기들은 서로 아름다운 소리와 빛으로 화답하며 어우러져 그윽한 수묵화 한 장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시인
2019-08-12
회전문 속에서 가방을 놓치고회전문 밖으로 밀려나와 가방을 본다이것은 죽음의 한 경험인가회전문 밖으로 밀려나온 여기가 후생(後生)이라면가방 든 시절이 전생의 이승이었단 말인가회전문 밖에서 떨어진 가방을 들여다본다내용물은 별것도 아니지만나 없으면 육신의 껍질이나 쓰레기에 불과하지만그것을 지금 잃는다면 아쉬움도 꽤 따를 것이다장례식에는산 자들이 억누르는 슬픔의 총체보다 더 큰죽은 자의 고요한 슬픔이 뒤따른다회전문 속에 가방을 떨어뜨리고 나와 밖에서 그 가방을 바라보며 시인은 인생을, 인생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가방은 우리가 평생 살아오면서 쌓아온 재산과 명예와 지위 같은 소유를 의미하는데 회전문 속의 가방처럼 나를 떠난 그것은 크게 가치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장례식에서의 이런 느낌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것을 표현하면서 부질없는 소유에 대해 경계하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시인
2019-08-11
기쁨과 슬픔은 붙었다 녹슨 쇠붙이의 몸에는녹슬지 않은 하얀 얼룩 같은 것이 떨어질 듯, 붙었다대문을 삐끔 열고 나온 늙은이가 하아얀 치아의웃음을 문간 위에 걸어놓고 돌아간다 그 집에는 곧느닷없는 기쁨의 손님들이 들어찬다 굽은 삭정이,그 집의 감나무 가지 위에도 오늘은 하얀 웃음 달이 걸렸다삭정이 감나무는 여름에 불 같은 푸른 잎을 달았다몇 해 전 칠순을 넘겨 공중목욕탕에 들어간 그 노인은까닭 없이 미끄러져 머리통의 피를 타일 바닥에다 쏟았다지구는 돈다! 다 아는 진리가 그에게는 믿기지 않았으나빙빙 도는 둥근 지구를 따라 회전 춤을 추기가 쉽지 않았을 때그는 벌렁 타일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웬일로 노인을 걱정하던노인의 할멈이 되레 그 가을, 간암으로 횡사했다 ‘할망구무덤에 잔디가 곱게 자라서…’ 노인이 씁쓸한 얼굴로말을 얼버무릴 때 그의 입속에서 이승과 저승은 아귀처럼 붙어 있었다기쁨인 이승의 혀끝에 슬픔인 저승의 몸통이 따라붙었다내 눈알과 시신경과 힘줄이 붙어서 수술한 자리 시신경이 땡기니,온몸에 퍼진 피붙이 크고 작은 그의 이웃들이 따라 아프다노인의 집을 버리고 어수룩한 샛골목을 더듬는데,무심코 발길에 채인 빈 양은냄비 하나가그동안 모았던 소리를 다 풀어놓고, 또 왕- 운다울지 마라! 네 울음의 빈 껍질에도 언젠가그것만큼의 족한 기쁨의 물이 넘쳤었다시인은 동네 노인의 집을 방문해서 마주친 어느 노인을 그리고 있다. ‘녹슨 쇠붙이’로 표현된 노인에게서 ‘녹슬지 않은 하얀 얼룩’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노인의 하얀 치아를 일컫고 있다. 시인은 생을 마감해 가는, 소멸되어 가는 존재에게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의 절실한 모습이 감각적으로 표현된 잔잔한 감동을 거느린 작품이다. 시인
2019-08-08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살랑거리며 말라가는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즈려 밟고 차며 걷는다만약 숲 속이라면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나는 자명함을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내 발바닥 아래누군가가 발바닥을맞대고 걷는 듯하다시인은 단조롭고 권태로운 생활의 굴레를 ‘자명함’이라 지칭하며 거기서 벗어나려 하고 있음을 본다. 매일 아침 산책하며 마주치는 것들은 모두 자명한 것들뿐이다. 그렇다고 독충이나 웅덩이가 있는 위험한 산책길을 원하지는 않지만 아무런 자극도 변화도 없는 삶의 굴레를 권태로워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08-07
내가 아직입에 담지 못한한마디 말지하의 검은 꿈속에서피와 살의 강림을 기다리며있는 한 덩이백치(白痴)한밤중문득 눈 떠차고 검은 어둠에 엎디어인공호흡을해본다사랑이라는 제목의 시(詩)지만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은 않음을 느낀다. 자신의 시 쓰기 작업에 닿아 있다. 시를 창작하는 데서 오는 절망감, 최후통첩 같은 열망이나 침묵과 절정 같은 내면의 고통스러움을 고백하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8-06
그대, 알알이 고운 시 이삭 물고 와잠결에 떨구고 가는 새벽푸드덕새 소리에 놀란 나뭇잎이슬을 털고빛무리에 싸여 눈뜬내 이마 서늘하다평생 궁구하며 시를 써온 시인은 이렇듯 어느 순간 새소리에 놀란 나뭇잎처럼, 이슬처럼 시가 찾아온다고 고백하고 있다. 기나긴 어둠의 끝을 밀며 열리는 새벽, 빛 무리에 싸여 시가 찾아온 것처럼 우리네 인생에서도 간절히 열망하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바램의 끝을 물고 아름다운 성취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이 시에 얹어놓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08-05
길을 가던 아이가 허리를 굽혀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돌이 사라진 자리는 젖고돌 없이 어두워졌다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반복했다 그때마다 날개를몸 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허공은 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스스로 지웠다아이의 손에 멈춘 돌은잠시 혼자 빛났다아이가 몇 걸음 가다돌을 길가에 버렸다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발을 몸 속에 넣고멈추어 섰다길 가다 돌 하나를 집어들고 놀다가 길가에 버린 아이와 돌과 허공, 망초가 있는 그림 하나를 보여주며 시인은 그 하나하나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본다. 비록 무정물(無情物)일지라도 나름대로 존재 태를 가지고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삼라만상에 어느 것 하나 무의미하게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가만히 들려주는 것이다. 시인
2019-08-04
한 할머니가 시골길을 가고 있네맞은편에서 여학생 한 명이 등장하네둘은 뭔가 생각난 듯 훔쳐보며 갈라지고 있네서로의 뒤를 자꾸만 자꾸만….순간! 들녘 한가운데 놓이는저 아름다운 헌 길과 새길한 할머니와 여학생 하나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서 가는 무심하고 고요한 풍경 하나를 펼쳐보이며 시인은 인생길을 떠올리고 있다. 왜 그들은 서로 훔쳐보며 갈라서서 가는 것일까. 그들은 그들에게 남아 있는 생의 시간을 줄이면서 서로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게 인생이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무의미한 것이라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8-01
단 한 사람의 가슴도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내 마음의 군불이여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시인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시 쓰는 자세,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지고 다짐해보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자신이 쓴 시가 단 한 사람의 가슴이라도 따스하게 데워주고 감동에 이르게 하고 싶은 시인의 겸허하고 결의에 찬 시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시인
2019-07-31
우리 식구들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서럽다어머니를 보면, 형을 보면밍키를 보면서럽다밖에서 보면버스 간에서, 버스 정류장에서병원에서, 경찰서에서….연기 피어오르는동네 쓰레기통 옆에서‘가족’이라는 말보다 ‘식구’라는 말이 훨씬 절실한 혈육 애를 느끼게 해준다. 한솥밥을 같이 먹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밖’이라는 시어에는 식구들이 먹고살기 위한 벌이가 이뤄지는 곳이란 뜻을 품고 있다. 밖에서 우연히 만나는 식구들에게서 살가운 정을 느낌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어떤 서러움이 차오른다는 시인의 말에 깊이 공감이 가는 아침이다. 시인
2019-07-30
꽃뱀 한 마리가우리들의 시간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바람이 보라색과 흰색의 도라지 꽃망울을 차례로 흔드는 동안꼭 그만큼의 설레임으로 당신의 머리칼에 입맞춤했습니다그 순간, 내 가슴 안에 얼마나 넓은 평원이 펼쳐지는지얼마나 아름다운 색색의 꽃들이 피어나는지….사랑하는 이여, 나 가만히 노 저어그대에게 가는 시간의 강물 위에 내 마음 띄웁니다바로 곁에 앉아 있지만너무나 멀어서 먹먹한 그리움 같은언제나 함께 있지만 언제나 함께 없는사랑하는 이여,꽃뱀 한 마리 우리들의 시간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습니다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곁에 있어도 그립고 함께 있어도 사랑의 갈증에 목말라하는 것이리라. 시인은 그런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을 열망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7-29
서원(書院)의 자미목(紫薇木)은 그믐처럼 붉었다햇살이 하얗게하얗게 달구고 있는그믐의 한낮자미목 붉은 꽃들 위로상현에서 하현까지의 달이까맣게 떠올랐다혓바닥으로이지러지고 차오르는 여러 개의 달을핥아대는자미목의 뜨거운 꽃들붉은 꽃들의 자궁에서 피어나달은세상을 온통 뜨겁게 물들이고 있었다‘서원의 자미목’과‘그믐의 한낮’이라는 표현에서 정적 속의 화려한 꽃 색깔이며 역동적인 삶 속에 잠재된 죽음의 그림자를 표현하고 있음을 본다. 삶 속에 있는 죽음 혹은 죽음 속에 깃든 삶이라는 모순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붉은색과 흰색, 검은색을 대비하면서 생멸(生滅)의 긴장감을 환기시키는 시인 의식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19-07-28
아무도 모르게 풀잎을 매듭으로 엮어 두었다누군가 그것에 발이 걸리어 신나게 넘어질 일을 꿈꾸며우리는 웃었다 가끔 우리가 그 매듭에 쓰러지면서자기가 엮은 줄에 자기가 묶인다는 뜻으로 쓰이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는 작품이다. 제 마음씨나 언행으로 인해 제가 꼼짝없이 얽혀 듦을 의미하는데 스스로 어려움에 들지 않으려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마음으로 맺은 사람이 풀어줘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7-25
내 마음은 우연한 나의 자연내 말은 우연한 나의 자연고속도로 위에 새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그 새의 살을 들고 가서 누구도 삶지 않았다우연히 죽은 새는 아무도 먹지 않네살해당한 새만 먹을 수 있네시인은 자신의 마을과 말이 우연한 자연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속도로 위에 죽은 새는 우연한 자연의 한 현상으로 우연히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인식에는 우연에 대한 공포감이 스려있다. 우연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깊이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19-07-24
왕들은 문에 손을 대지 않는다그들은 저 낯익은 거대한 판때기를 부드럽게 혹은 거칠게 앞으로 미는, 뒤로 돌아서 그 판때기를 제자리에 놓는 - 문을 두 팔로 여닫는 행복을 모른다… 방의 가장 만만찮은 장애물의 배때기를 도자기 고리로 검어 쥐는 행복을, 빠른 몸싸움을 위하여 한순간 걸음 멈추니 눈이 뜨이고 전신이 새로운 실내에 적응한다정다운 한 손으로 아직은 문을 잡고 있지만 이내 아주 밀어 속에 갇힌다 2013 억세지만 유쾌하게 기름 친 용수철이 찰칵 작동하여 그걸 보증한다시인의 말처럼 옛날의 왕(王)들은 시종(侍從)들이 열어주는 문을 드나들지 직접 문에 손을 대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도 관직이 높거나 부자들은 비서나 운전기사들이 있어서 자동차의 문이나 각종 출입의 문을 직접 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시인은 직접 문을 열고 닫는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름 친 용수철이 찰칵 작동하는 문에 대한 희열을 표현하며 문 여닫는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기쁨과 행복을 표현하고 있다. 시인
2019-07-23
배를 민다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배를 밀어넣고는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허공으로부터 거둔다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잠시 머물다 가라앉고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배를 바다로 밀어 넣으면서 배와 분리되며 육지에 남겨지는 자신을 발견한 시인은 자신의 손이 환해지며 온 몸으로 차오르는 전율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시인의 그윽한 사랑 노래를 듣는다. 배 떠나 자신의 안으로 소리없이 밀려드는 배는 사랑이기 때문이다.시인
2019-07-22
크낙하게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굶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슬픔일랑 잠시 밀쳐두고 밥을 삼켜야 하는 일이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밥을 씹어야 하는저 생의 본능이상주에게도, 중환자에게도, 또는 그 가족에게도밥덩이보다 더 큰 슬픔이 우리에게 어디 있느냐고시인이 말하는 ‘생의 본능’일까. 시인은 상주들, 중환자들, 또 그 가족들도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하는 밥덩이 속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가슴 속에 슬픔이 가득할 때도 비어있는 위장은 왜 염치도 없이 밥을 달라하는 것일까. 피할 수 없는, 서글픈 생의 본능이다.시인
2019-07-21
바람도 한바탕 씽씽 불어라세차도록 칼칼히 시원스레 불어우리들 뛰놀았던 대숲 언저리죽순 같은 희망으로 뾰족한 그리움으로흔들어 들깨울 것들 죄다 깨워라할머니의 텃밭 가득 토란은 살쪄 알이 굵고마늘은 여물고 상추꽃은 쇠어서허옇게 허옇게 머리 풀고 날려라굴뚝엔 연기 오르고 사랑엔 등불 밝혀서그날 밤 뒤란 가득 탐스런 감꽃들도 수북이 쌓이거든쓰러진 토담벽 울타리를 넘어수심 서린 잔별들도 총총히 밝고주름 많은 빨래를 펴던 어머니의 방망이질 소리(중략)어수선한 대청마루 신발 흐트러진 토방 끝까지성가신 애기들의 울음 소리가사립짝 울바자 위에 소란스레 울리고옛집의 너른 마당귀 해마다 화들짝 피던허연 살구꽃 그늘, 그 아래 여린 풀잎 한 잎도다시금 남김없이 푸르름 들어라점점 피폐해져가는 농촌 사회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빛을 본다. 시 전편에서 우리 농촌이 다시 활발히 일어서야한다는 당위성과 함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농촌을 살리고 고향 정신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할 것인가를 우직한 목소리로 역설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07-18
보라 저 눈 트는 꽃잎보라 저 걷고 있는 나무어느 길손에게잃어버린 노래를 물으랴나 평생 헛된 꿈만 꾸고 살아왔구나종 울고 해 기울어서 일어나길 떠날 채비 이제서야 하느니가자 저 바람 속으로가자 물보라 지는바다의 저 어질머리저 바람 속으로 걸어나가 님의 가슴 속으로 가자고 토로하는 시인의 가슴 뛰는 연가(戀歌)를 듣는다. 그런데 제목인 별사(別辭)는 이별의 노래를 의미하는데 어찌된 일일까. 꽃이 눈 트고 나무도 걷는데 벌써 종 치고 해가 기운다는 데서도 느껴지는 불균형을 느낄 수 있다. 시 전체에 흐르는 이러한 불균형과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19-07-17
그 날 칠포 바닷가 모래밭에 수천 수만의 가시내들이 깔깔거리며 모래 틈새로 스며들더니 넋 나간 멀커니처럼 냉수대가 밀려온 오늘 아침 불현듯 진저리 치며 뛰쳐나와 손나발을 불어대는 연분홍칠포 바닷가에 피어난 갯메꽃을 보고 나팔을 부는 연분홍 난쟁이들이라 표현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발랄하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깔깔대던 수천 수만의 가시네들의 사랑이 스며들어 피어오른 난쟁이꽃이라는 데서 미소를 머금게 되는, 시인의 특이한 상상력이 압축되어 표현된 재미난 시다. 시인
2019-07-16
한 그루 키 큰 나무로 서고 싶어요 나는그대의 집 높디높은 담장보다매일 한 뼘씩 더 올라 가지를 뻗고 싶어요그대, 눈부시게 화장을 하는 푸른 방의손거울을 반쯤이나 들여다볼 수 있는창문 밖에서, 잎 넓은 나무로 서서 가려주고 싶어요내 큰 손으로 가장 밝은 햇살만 따 담아 말렸다가비가 오는 날은 잘게잘게 갈아서그대의 이마 위에 뿌려드리고 싶어요목이 타는 한여름 가뭄이 들 때내 가슴 그늘로 자리 펴고 바람으로 짠 홑이불 덮어그대 고운 잠 자장가 불러 재우고 싶어요절절한 사랑의 노래를 듣는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섬세하고 부드러운, 따스하고 살가운 사랑을 보내고 싶은데 임은 먼 곳에 있어 늘 그리움에 젖어 애틋한 마음만 바람 속에 얹어 보내는 시인의 마음을 읽는다. 시인
2019-07-15
허공의 경계선을 지나운석처럼 버찌들이 떨어진다저들이 태어나 한 생애를 견디고끝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한 점 핏방울로 맺히는망명점, 북반구의 유월기억나지 않는 생애저 너머로지가 그 무슨열혈남이라도 되는 양핏빛으로버찌가 떨어진다이해받지 못한울음 덩어리의 생하얗게 세상을 밝히며 피었던 벚꽃 진 자리에 맺힌 짙붉은 버찌를 바라보며 시인은 화려했던 청춘의 시간이 휘발되어 지나가고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인생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열혈남아처럼 핏빛으로 떨어지는 버찌를 울음 덩어리로 표현하며 붉은 절망을 느끼는 시인을 본다. 시인
2019-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