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은 크고 둥글고 푸르다가끔 무덤 안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책장을 넘기는 소리도 들린다그곳이 입구인지 알고길을 제 몸속으로 빨아들이며 날아온 새들이발을 내려놓는다새들에게도 지구는 미끄럽고 둥글다어쩌면 지구는 거대한 무덤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시인은 지구와 무덤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있다. 지구라는 거대한 무덤 속에 살고 있는 존재들의 운명적 존재 양식을 상상력과 참신한 비유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12-16
함께 이루는 생은 얼마나 황홀한가상주시 부원도 석운도예공방토끼랑 닭이랑 네 집 내 집 없이 드나드는 앞마당 한쪽 늙은 호박 한 덩이생을 이어주던 넝쿨넝쿨 다 어디가고무거운 육신 밤새 내린 하얀 눈 속에 묻혀노을빛 속살 덜어내는 중이다검붉은 깃털 윤기 잘잘 흐르는장닭 다가와누비 눈으로 감싸인 어깨부리로 쪼는 순간덩덩, 북소리가 난다해진 앙가슴에 달라붙은 토끼 두 마리고개 갸웃거리며 갉아댈 때샤샤샥 일렁이는 중심의 물결생의 소리가 저 늙은 호박에다 들어앉아 있나감나무 아래 백구도 어느새 담장을 타고허공을 향해 컹, 컹, 후렴을 한다소리가 소리를 키우는 눈부신 고요석운도예공방의 앞마당에 잘 익은 늙은 호박이 있는 풍경을 그려내면서 시인은 호박과 토끼와 장닭, 백구라는 자연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이뤄내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
2019-12-15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습니다나무와 풀잎과 이슬과 바람황무지 흙먼지 별빛의 언어대지와 지평선 새들의 말물결은 뭍으로만 치지 않지만바다에 출렁이는 물결같이기슭에 휩쓸리는 파도같이세계는 그대 앞에 펼쳐졌건만부서진 파도는 되밀려가네허공에 입 맞춘 타는 그 입술메마른 입술이 입 맞춘 허공병사들, 병사들 모든 병사들언제나 무거운 물음같이원방(遠方)의 어두운 그림자처럼언제나 다가서는 질문같이어제도 오늘도 모든 병사들시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연에게 친근한 대화의 창을 열지만 진정한 소통에 이르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있다. 시인이 말하는 병사들이란 누구일까. 그것은 갈등과 분쟁, 전쟁의 희생자들을 일컫는데 시인은 그들을 구원하려는 간절한 염원의 마음을 펴 보이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불화들이 양산해 내는 비극들의 치유와 구원을 염원하는 시인 정신이 선명하게 읽혀지는 작품이다. 시인
2019-12-12
아플수록 몸은 눈이 밝아진다열에 들린 몸이제 속을 날아가는 흰나비를 본다꼼지락거리는 나무의 발가락을 본다넋이야, 넋이야 출렁이는 피(…)어디서 사과 익는 냄새신 살구 냄새물소리물소리달구나 거렁뱅이 바람에도진한 살 냄새아아 뜨거운 몸이한 발만 내디디면그대로 춤이 될 것 같은데허공에 피어갖은 빛낄러흐드러질 것만 같은데그리 길지 않은 생을 노동운동과 노동문학에 바치며 뜨겁게 살다간 시인의 삶을 향한 깊은 통찰의 목소리를 듣는다. 삶과 죽음,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무너질 듯 무너질듯하면서 다시 일어서는 시인 의식을 본다. 그를 사로잡는 고통과 허망함과 절망감을 춤으로 승화시키고, 극복해 나가는 시인의 뜨거운 몸짓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19-12-11
궁벽한 삶의 비탈에추수 끝난 옥수수 대처럼 서서마른 마음 펄럭인다밭뙈기 아래 수척한 그늘이강물에 비쳐 환하다저건 누구의 상처이지?강가에 흩어진 자갈들이 많이 으깨어져 있다큰물 지나간 어수선한 자리푸른 수심(水深)의 생각만으로두리번거리는 사이상처에 붙인 반창고처럼 풀들 우거진아픈 자리마다 핀 가을꽃눈부시게 수면에 얼굴 비춰본다거기, 나를따로 갓 쪽으로만 미는 물모든 걸 비추면서 날 적시는 물물음같이 울음같이 아픈물, 그 오래된 동강이길다랗게 내 몸 감돌아 흐른다.시인이 써온 동강이라는 연작시 중의 한 편이다. 추수 끝난 쓸쓸한 늦가을 동강의 풍경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삶의 상처투성이를 안고 동강 가에 선 시인의 얼굴을 적시며 물음 같이 울음 같이 가슴을 적시며 유유히 흐르는 강가에서 삶의 질곡을 차오르는 서러움을 차가운 강물 속에 던져넣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2-10
자정 근처 생각은맑은 기름 같다불면의 접시 위를조금씩 채워 가서꺼질 듯피어나는 빛 속사리(舍利) 하나앉힌다자정 무렵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시인은 맑은 기름 같이 떠오르는 생각에 더욱 선명해지는 의식을 가다듬고 있음을 본다. 불면의 접시 위에 조금씩 채워나가 그 위에 이뤄지는 사리(舍利)라고 지칭하며 구원의 빛을 앉히는 한 밤의 정결한 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12-09
치자향 흐드러진 계단 아래 반달이랑 앉아하염없이 마을만 내려다본다몇 달 후면 철거될 십여 호 외정 마을오늘은 홀로 사는 누구의 칠순잔친가이장 집 스피커로 들려오는홍탁에 술 넘어가는 소리소리는 계곡을 따라 산으로 오르지만보지 않아도 보이고듣지 않아도 들리는그리운 것들은 다 산 아래 있어서마음은 아래로만 흐른다도대체 누구 가슴에 스며들려고저 바람은 속절없이 산을 타고 오르느냐마을 개 짖는 소리에반달이는 몸을 꼬며 안달을 하는데나는 어느 착한 사람을 떠나흐르고 흐르다가제비집 같은 산 중턱에 홀로 맺혀 있는가곡진한 유행가 가락에 귀 쫑긋 세운 채반달이 보다 내가 더 길게 목을 뽑아 늘인다박규리 시인이 미소사라는 절집에서 공양주 보살로 있을 때 쓴 작품이다. 세속적 욕망을 털어내지 못한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 보이는 이 시는 사찰이라는 계율과 법문의 엄격한 굴레들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여전히 벗겨 내지 못한 세속의 무늬들이 스며 듦을 인식하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깨달음의 수행을 다짐하는 시인을 본다. 시인
2019-12-08
집을 등에 이고 사는 것들은모두 달로 가야 한다나뭇잎 위에 앉아 있는 달팽이를 본 적이 있는가배경으로 언제나 달이 뜬다집이 아니야 짐이야그 짐 속에는 아버지가 주무시고어머니가 손톱을 깎으신다동생은 수학 문제를 풀고아버지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어머니 외출하셨으면 좋겠어요꿈속에서 나는 자주 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였다제발 나타나지 마세요 아버지 자꾸 죽어요내 집이 피로 붉어요애야 노을이 져야 달로 간다나는 너에게 가르쳐주고 싶다달이 창백한 건 일찍 나왔기 때문이 아니야달은 출혈의 산물이야내가 얼마나 피 흘리고서야 잔잔히 떠오르겠습니까나뭇잎 위에 앉은 달팽이를 바라보며 시인은 삶의 등짐을 가득 지고 가는 가족들을 떠올리고 있다. 각자의 집을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제 길을 가는 가족 구성원들이 삶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굴곡진 생의 길을 달팽이처럼 짐을 지고 가는 가족들에게 격려와 함께 초월을 염원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는다. 시인
2019-12-05
새의 나라에 왔다새소리가 들리는 곳은 새의 나라다새는 사랑하겠다고 운다지그래서 울음이 노래가 된다지새의 나라에 와서 노래를 배운다울어 노래가 되는 울음을 배운다서울을 내가 울어 노래가 된다면그곳은 나의 영토카불을 내가 울어 노래가 된다면그곳은 나의 나라새의 나라에서는 대통령도 뽑지 않는다사랑을 누가 대신 울어줄 것인가사랑하겠다고 우는 노래를 향해누가 명령할 것인가사랑하겠다고 우는 노래가 왕이다나의 나라에서는 노래가 통치한다새가 날아가며 운다나 또한 달리며 운다내 노래가 들리면 그곳은나의 나라인 줄 알아라.시인이 말하는 새의 나라는 시인이 꿈꾸는 비상(飛上)과 꿈의 실현이 있는 나라다. 새의 나라는 영역의 단절이나 불통이 없다. 무한히 열려 있어 꿈이 있고 자유와 소통이 존재하는 나라다. 언제든지 날아오르고 떠날 수 있는 새는 부질없는 소유로 육신을 무겁게 하지 않는다. 그런 새의 나라 같은 초월을 꿈꾸는 시인 정신을 본다. 시인
2019-12-04
토요일 저녁이면 그는 홀로 쌀을 씻고 나는 홀로 차를 마신다 어김이 없다 그는 저쪽에서 나는 이쪽에서, 그는 쌀을 씻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고 있으며 나는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소리를 내고 있음을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그 까닭을 여기 밝혀 적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을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쌀 씻는 소리가 차 마시는 소리가 우리들의 암호라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암호는 암호가 된다 하지만 그와 나의 암호의 한 모서리가 조금씩 조금씩 닳아져 가고 있음을 오늘 보았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미구에 모든 것이 탄로되리라)시인이 차 마시는 소리, 쌀 씻는 소리를 암호라고 말하는 것은 은밀한 소통의 방식을 말하는데 그 속엔 비밀스러움이 숨어 있다. 그런데 시의 뒷부분에서 그 암호의 모서리가 조금씩 닳아져 가고 있다고 고백하는 시인은 그 은밀한 소통의 꿈이 닳고 노출되어가는 것이라 여기며 그것을 염려하며 닥쳐올 건조하고 우울한 시간들을 예감하며 경계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2-03
갓 지어낼 적엔서로가 서로에게끈적이던 사랑이더니평등이더니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제 몸만 불리는구나갓 지어낸 밥은 차져서 밥알들이 서로 끈끈히 붙어 있지만 찬밥이 되었을 땐 밥알 알갱이들은 끈기를 잃어버리고 서로 흩어져 나뒹군다고 말하는 시인은 사랑이랄까 혁명이랄까 세상사의 속성을 떠올리고 있음을 본다. 사랑도 혁명도 우리네 인생살이도 시작될 때는 말랑말랑하고 연대와 결속도 끈끈하고 의욕적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속력은 떨어지고 열정도 식어 흩어지고 만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사랑, 혁명, 세상사를 경계하는 시인의 마음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시인
2019-12-02
백양나무 가지에 바람도 까치도 오지 않고이웃 절집 부연 끝 풍경도 울지 않는 겨울 오후경지정리가 잘된 수백 만평 평야를흰 눈이 표백하여 한 장 원고지를 만들었다저렇게 크고 깨끗한 원고지를 창 밖에 두고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운 문장을 생각했다강가에 나가 갈대 수천 그루를 깎아 펜을 만들어까만 밤을 강물에 가두어 먹물로 쓰려 했으나너라는 크고 아름다운 문장을 읽을 만한 사람이나 말고는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아서저 벌판의 깨끗한 눈도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서그만두기로 결심하였다발목 푹푹 빠지던 백양리에서 강촌 가던 저녁 눈길에백양나무 가지를 꺾어 쓰고 싶은 너라는 문장을시인은 눈 내린 들판이라는 원고지에 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려다 단념하고 만다. 무슨 까닭일까. 그 고요하고 완벽한 평화경을 어떤 표현으로도 쓸 수 없다는 외경감 같은 것을 느꼈으리라. 시인
2019-12-01
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읍디다미당 서정주의 고향은 선운사가 있는 전북 고창이다. 시인은 선운사로 동백꽃을 보러 갔다가 개화시기를 잘못 알았는지 핏빛으로 타오르는 동백꽃을 못 보고 선운사 동구의 주막집에서 주모의 육자배기만 듣고 왔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 서러운 가락 속에서 무정하고 허망한 세월을 느끼고 막걸리 몇 사발을 마시고 돌아온 시인의 허허로운 마음 자락을 읽는다. 시인
2019-11-28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부서져 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아주 부드럽고 미세한 시멘트 가루는 물과 만나서 엄청나게 강한 물질로 변하게 된다는 사실을 들어 삶의 원리 하나를 역설하고 있음을 본다.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가장 강해지는 것과 가루처럼 철저하게 부서지고 실패를 거듭했을 때 비로소 단단해지고 우뚝 일어설 수 있다는 시인정신을 읽는다. 시인
2019-11-27
사랑도 만질 수 있어야 사랑이다아지랑이아지랑이길게 손을 내밀어햇빛 속 가장 깊은 속살을만지니그 물컹거림으로나는 할 말을 다 했어라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 7번 국도변의 등명이라는 곳을 지나며 시인은 등불을 비추어 밝힌다는 등명(燈明)이라는 지명에 주목하면서 사랑의 원리 하나를 깨닫는다. 사랑은 밝히고 만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시인이 7번 국도변 등명이라는 곳에서 만져본 아지랑이 속살이 바로 사랑의 속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인
2019-11-26
은행나무 밑에 서 있으면은행나무가 되고 싶고소나무와 함께 서 있으면소나무가 되고 싶고감나무에 기대어 서 있으면감나무가 되고 싶고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시인은 은행나무, 소나무, 감나무 아래 서서 그 나무가 되고 싶다는, 그 나무들처럼 푸르고 아름답고 소담스런 열매를 맺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대책 없이 욕심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성찰하고 있음을 본다. 어쩌면 나무들처럼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살겠다는 무욕의 시인정신을 내비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1-25
비 오시는 소리 들린다꿈이 마르는 나이라서 잠귀도 엷어진다아, 푸욱 잠들고 싶다한 사나흘 푸욱 젖어 살고 싶다빗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번잡스러운 삶의 시간을 벗고 한가롭고 평안이 흐르는 자기 내면의 시간에 빠져들고 싶은 마음을 내보이고 있다. 마음의 고향으로 찾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꿈이 마르는 나이가 되면서 그런 마음은 더욱 절실해져서 촉촉이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 사나흘 고요히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리라. 시인
2019-11-24
그대, 알알이 고운 시 이삭 물고 와잠결에 떨구고 가는 새벽푸드덕새 소리에 놀란 나뭇잎이슬을 털고빛 무리에 싸여 눈뜬내 이마 서늘하다산사(山寺)에서나 깨달음직한 순간의 깨끗한 세계, 깨달음의 세계가 그대로 시가 되어 시인에게 다가오는 새벽을 시인은 가슴 벅차게 맞고 있음을 본다. 대체로 밤에 찾아오는 무상감(無常感)이랄까 욕망의 순간들이 깨끗하게 정화되어 시는 새벽의 이슬방울처럼 투명하고 정결하게 시인의 가슴 속으로 굴러드는 것이다. 시인
2019-11-21
왜 벌레들의 몸은 딱정벌레의 몸은 뼈가 밖에 있고각질(角質)이고 살이 속에 들어 있고 감춘 살이고사람들의 몸은, 날쌔게 들판을 달리는한 마리 아프리카 표범은힘센 것들의 몸은 털과 살 속에 뼈를 감추고 있을까연질(軟質)일까 들킨 살일까사랑아 나도 그렇게 되어 있다 힘세지고 있다힘이 약한 벌레는 뼈가 밖에 있고 살이 속에 있으며, 사람을 비롯한 힘이 센 동물들은 뼈가 속에 있고 살과 털이 밖에 있다는 시인의 언급이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사랑아 나도 그렇게 되어 있다 힘 세지고 있다’는 마지막 시구에서 시인은 사랑의 힘을 한 궤에 엮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1-20
복숭아나무 똑바로 서 있는 거 못 봤다꼭 비스듬히 서 있다길가에서 길 안쪽으로 쓰러지는 척구릉 아래쪽으로 기울어몸 가누지 못하는 척허공에 진분홍 풀어지나가는 사람 걸어 넘어뜨리려고안 속는다, 안 속아몸은 이쪽에 머리는 저쪽에 풀어두고왜 서 있나비틀비틀 무슨 생각하며 걸어왔나도화길 밖으로 꽃잎 다 흘리고안 속는다, 안 속아길가에서 길 안쪽으로 쓰러질 듯이 비스듬히 서 있는 복숭아나무를 바라보며 시인은 안 속는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되뇌이고 있다. 그것은 역설(逆說)이다. 경계에 몸을 비스듬히 걸치고 있는 복숭아나무의 특이한 생존에 매력을 깊이 느끼고 있는 시안을 본다. 시인
2019-11-19
우리나라의 기운이서해로부터 시작하여대관령에서 불끈 솟았다가동해로 내리닫는 곳봄은 아련함이 아니다노곤함도 아니다바람이다청록색 바다이빨 드러낸 파도다힘과 힘의 부딪힘이다대관령과 동해가 온 몸으로 부딪혀미친 듯이솟구치는 것이다겨울의 거센 모습과 바다의 힘찬 포효를 들어 물밀듯이 번져오는 봄의 도래를 예찬하고 있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에 새 생명들이 희망차게 차오르고 회생되는 것을 시인 특유의 강렬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11-18
새는 그 내부가투명한 빛으로 가득 차 있다마치 물거품처럼, 부서짐으로써 스스로의나타남을 증거하는새는한없이 깊고고요한,지저귐이 샘솟는 연못과 같다새의 비상은 무게를 털어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끝없이 자신을 비우고 덜어내어 가볍게 해서 날아오르는 것이다. 물거품처럼 부서짐으로써 한없이 깊고 고요한 창공에 들 수 있다고 말하는 시인은 새의 이러한 지고지순한 애씀을 흠모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땅 위에 묶인 우리 모든 인간들의 꿈과 바람이 아닐까. 시인
2019-11-17
무금선원에 앉아내가 나를 바라보니기는 벌레 한 마리가몸을 폈다 오그렸다가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배설하고알을 슬기도 한다시인은 설악산 백담사 큰스님이며 시인이다. 평생을 청정한 무욕의 삶을 살아온 시인이 자신의 한 생이 벌레처럼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를 반복하며 살았다고 고백한 목소리를 듣는다. 깊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인의 말이 서늘한 슬픔으로 스며듦을 느낀다. 소유와 욕심·욕망의 아집에 사로잡혀 하찮고 부질없는 것에 목숨 걸고 끝없이 반복하며 살다 죽는 것이 우리네 한 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시인
2019-11-14
달밤이면 야수로 변하는 사내가 있었지 빈 들판 서늘한 나뭇가지 끝둥글고 빛나는 보름달 차오르면 깊고 어두운 늪 갇혀 있던 그의 살갗엔 하나 둘 길고 뾰족한 가시 돋아났지벌거벗은 흰 달빛 아래 꿈속처럼 아득한 전설가시를 꽃처럼 품어줄 처녀의 자궁 바라의 씨 뿌리는 거야야성의 내력 감추고 끝끝내 살아남아 달의 아이 잉태하는 거야 선명한 아침 햇살 떠오르면 붉디붉은 목숨 거듭나기 위해시인은 벌거벗은 흰 달빛 아래 꿈속처럼 아득한 전설 하나를 들려주고 있다. 철갑을 두른 듯 거친 대궁에서 고운 보라색 꽃을 피워 올리는 가시연은 끝끝내 살아남아 달의 아이를 잉태하기 위해 붉디붉은 목숨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강한 의지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변절과 변덕이 다반사인 경박한 사랑이 만연한 이 세상 속으로 진정한 사랑의 서사를 건네는 시인을 본다. 시인
2019-11-13
오래된 서랍속황금빛 마흔 여덟 개들창이 있었네화들짝 불을 당기는 감청(紺靑)의 그리움아 그 애 청수는내가 잊고 있었던 세월동안신기루처럼 내 아이 서랍 속에 와 있었네연두 순 틔우고낙엽지고참 오랜 세월을행성처럼 나를 돌던 그 소리오늘도 아이의 방문 앞에 서면녹슨 손잡이까지 와 묻은아릿한 기억서랍 속 그 비밀스런 창들이 모두 열려주술을 왼다시인의 오래된 서랍 속에는 바람 칸이 마흔 여덟 개인 낡은 하모니카가 있다. 그 마흔 여덟 개의 창에는 먼저 보내버린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 골싹하게 담겨져 있다. 어찌 잊혀지겠는가.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오늘 같이 서랍 속 하모니카의 바람 칸 속에는 너무도 그리운 아이의 모습이, 아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머물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의 가슴 뜨거운 호명 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11-12
키가 크려는지아내는 자꾸만 악몽을 꾼다꿈을 대신 꾸어줄 수는 없는 일하지만 아내는 내가 곁에 없어 그런다고팔을 당긴다그러면철없는 기러기처럼행장만 꾸리는 남편도 머쓱해져다시 짐을 풀기도 하는 것인데선잠 든 아내의 숨결이 고를 때까지내 숨결도 고르다 보면이 세상꿈까지 동행할 수 있는 길이란참으로 드문 길이라아내의 고른 숨결 속으로내 고단한 숨결도가만가만 보태어보는 것이다오랜 세월 절집에서 은거하던 시인이 집으로 돌아와 오래 비워둔 방에 내린 어둠을 걷어내고 아내와 자신의 숨결로 채우려 하고 있다. 가만히 아내의 꿈결에 들어 아내의 숨결과 함께 가고자 하는 시인의 따스한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시인
2019-11-11
한 장씩 더듬으며 너를 떠올리는 것은내가 이 풍경을 대충 읽어버린 까닭이다.어두워지더라도 저녁 가까이창문을 달아두면검은 새들이 날아와 시커멓게강심(江心)을 끌고 간다.마음의 오랜 퇴적으로 이제 나는이 지층이 그다지 초라하지 않다.그 창 가까이 서 있노라면오늘은 더 빨리 시간의 전초(前硝)가무너지는지,골짜기를 타고어느새 핏빛 파발이 번져 오른다.곧 어둠의 주인이 찾아들겠지만내가 왜 옹색하게 여기몇 가을째 세들어 사는지헤아리지 않아서 이미 잊어버렸다어떤 저녁에는 병색 완연한 새 한 마리가내 사는 일 기웃거리다 돌아가면나도 아주 하릴없어져 어스름 속에쭈그리고 앉아 불붙는 아궁일물끄러미 들여다보거나 정 심심해지면땅거미 가로질러하구 저쪽 갯벌 끝 끝까지 걸어가곤 한다.거기에는 소금을 모두 비운 한 채소금 막이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남아 있다.시간의 무딘 칼날에 베여도 이제 더는아프지 않도록이 밤의 책들 다 사르리라, 나는불꽃을 훨씬 뛰어넘는 새벽의 사람이 되어서평온한 저물녘의 풍경을 나열하며 노을 따라 스미는 내면의 평화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을 힘들게 하던 시련과 고통, 상처의 시간을 극복하고 희망차고 안정된 새로운 시간을 마련해가겠다는 의욕에 찬 시인의 마음 자락을 읽는다. 시인
2019-11-10
언제부턴가오른손 검지에티눈이라는 놈이칩거하기 시작했네틴은액을 바르고 덧발라놈들을 박멸시키려 해도새순처럼 번져갔네그들이 호시탐탐 반란을 일으킬 때면마취주사 맞는 것처럼손끝에서 늑골까지 쩌릿하네살다 보면작은 상처 하나가온몸을 아리게 하는 날이 있다네그런 날이 있다네손에 난 작은 티눈이 온통 온몸을 뒤흔들어놓기도 한다고 말하는 시인은 사소한 일에서 받은 작은 상처가 얼마나 생의 균형을 흔들어 놓고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고 삶을 힘들게 하는지를 토로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1-07
늦가을 바람녘비 맞은 감이 지네남정들 썩은 삭신을 덮고허옇게 허옇게 지리산 청마루도 흐려지는데지리산 감나무 맨 윗가지무신 날이 저리 붉은가얼어붙은 하늘에 꽉 백혀 진저리치고 있는가된똥 누다 누다눈꼬리에 마른 눈물 달은 자식들처럼감씨 퉤퉤 뱉다 기러기떼선연한 노을 끝으로 숨어버린 남정들처럼잘못도 용서도 구할 수 없는한반도 근대사 속을사람 지나간 자취마다 하얗게 쏟아지는감꽃 폭풍지리산 늦가을 땡감 나무 맨 윗가지에 매달린 감을 보며 시인은 이 땅 근대사의 아픔을 떠올리고 있다. 해방공간의 지리산은 이념으로 뜨거운 남정네들이 산으로 숨어들었다 이름 없이 숨져간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시인은 붉은 감을 보며 선연한 노을 끝으로 숨어버린 파르티잔들을 떠올리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11-06
산 허벅지가 안개에 가려 있었습니다밑동이 튼튼한 나무들도 예사로웠습니다따라 오르는 길은 여전하였으나마루턱 아래 바로 거기샛길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담홍색 수줍은 길바람이 스치자11월 마른 덤불이 발갛게 달아오른 두둑에 서서나는 얼마나 숨을 헐떡거렸던지산길 오르다 만난 산마루턱 바로 아래에 난 작은 샛길 하나를 발견한 시인은 숨가쁜 희열을 느끼고 있다. 산길 오르다 보면 샛길을 만나는 것은 예사스러운 일이지만 힘겨운 산행에서 문득 만나는 샛길은 뜻밖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 느끼는 감정을 잔잔한 어조로 풀어내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