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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호 승

등록일 2019-10-22 19:29 게재일 2019-10-2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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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아내가 끓여준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다가

내가 먹던 밥을 개에게 주고

개가 먹던 밥을 내가 핥아 먹는다

식구들의 박수를 받으며 촛불을 끄고 축하 케이크를 먹다가

내가 먹던 케이크를 고양이에게 주고

고양이가 먹던 생선대가리를 내가 뜯어 먹는다

오늘은 내 생일이므로

짐승의 마음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날이므로

개밥그릇을 물고 거리로 나가 유기견들에게 내 심장을 떼어주고

길고양이들에게 내 콩팥을 떼어주고

물끄러미 소나기 쏟아지는 거리를 바라본다

벌써 며칠째 인터넷 접속이 되지 않는다고

답답해 미치겠다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한여름에 겨울 점퍼를 입은 노숙자 한 사람이 빗속에 쓰러진다

나는 젖은 돌멩이로 떡을 만들어 그에게 주고

흙으로 막걸리를 빚어 나눠 마시고

신나게 꼬리를 흔들다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에게 말한다

부디 다시는 태어나지 말라고

태어나지 않은 날이야말로 내 생일이라고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시인의 통렬한 자기반성, 속죄의 목소리를 듣는다. 치욕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존재에 대한 거부와 절멸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절대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이면서 순결하고 진실한 삶에 대한 열망과 지향의 신앙고백, 결의로 여겨진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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