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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아흔셋… 사랑이 된다”

“시여 한평생 나를 이기기만 하는 시여’라며 오늘에 이른 나 자신을 되돌아봅니다”등단 나이 ‘고희(古稀)’를 넘긴 한국 시단의 원로 김남조 시인사진이 최근 19번째 시집 ‘사람아, 사람아’(문학수첩)을 펴내며 내놓은 소회다. 올해 93세가 되는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으로 살아온 생애 93년, 저무는 해의 빛이 녹아드는 노을 무렵 아흔셋 일생의 황혼을 노래한다.‘마지막’이란 단어 앞에서는 누구나 매무새를 가다듬고 비장해진다. 지난날을 돌아보고 오늘을 점검하며 남은 날들을 헤아려 보는 시간. “마지막 시집이라고 여겨지는” 이 책, 시인 본인이 “나의 끝시집”이라 일컬은 이 책 ‘사람아, 사람아’를 엮기 위해 김남조 시인은 갈마드는 한평생의 기억을 쓰다듬으며 에는 가슴으로 한 줄 한 줄 시를 써 내려갔다. 이 시집에 담긴 52편 시 속에 그의 어제와 오늘이 그리고 내일이 한데 뒤엉켜 있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그 뒤엉킨 생을 읽는 키워드는 단연 ‘사람’ 그리고 ‘사랑’이다. “열아홉 권의 시집을 내고 다른 것도 썼습니다만 많이 쓴 건 사랑이었”(‘WIN문화포럼’ 김남조 시인 강연록 ‘삶의 축복‘ 중에서)다는 시인의 고백대로 과연 이번 시집에도 ‘사랑’이 있다.시인은 “긴 세월 살고” 나서 이제는 “사랑 된다”고, 그것도 “무한정 된다”고 말한다. 그저 사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고백”까지도 무한정 가능해진 것이다. “많이 사랑하고 자주 고백하는 일”이 “된다 다 된다”고 말하는 그 환희에 찬 탄성에는 ‘사랑’이 ‘되’도록 몸부림쳐 온 지난 세월의 숱한 고행의 흔적이 묻어난다.아흔 평생 1천편 가까이 시를 써 온 그가 가장 많이 쓴 게 ‘사랑’일진대, 단연코 시는 ‘사랑법’을 쉽사리 가르쳐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 된다’를 비롯한 52편의 시들은 간단없는 시적 고행 속에서 묻고 또 되물어 얻어낸 답일 것이다. “철문을 닫고 오랫동안 열어 주지 않”는 시의 맹렬한 질투 속에서도 시를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기를 끝내 포기하지 않은 김남조 시인. 에는 가슴으로 ‘끝까지’ 시의 길을 걸어온 그의 열아홉 번째 시집은 그래서 ‘더없이 가치 있고 귀하다’.‘긴 세월 살고 나서/사랑 된다 사랑의 고백 무한정 된다는/이즈음에 이르렀다/사막의 밤의 행군처럼/길게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그 이슬 같은 희망이/내 가슴 에이는구나’ (김남조 시 ‘사랑, 된다’ 전문)김남조 시인은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나와 시집 ‘목숨’, ‘사랑초서’, ‘귀중한 오늘’ 등과 수필집, 콩트집 등 다수 저작을 펴냈다. 한국시인협회장, 한국가톨릭문인회장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상, 만해대상, 3.1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숙명여대 명예교수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3-05

루쉰의 절망… 그는 왜 절망했을까

중국의 20세기 문학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인 루쉰(魯迅·1881~1936).루쉰은 ‘아큐정전’, ‘광인일기’등 중국 고대사회를 신랄하게 묘사한 소설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게 됐다.‘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옌롄커를 비롯한 현시대 중국 최고 작가들도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꼽는다.‘고독자’(문학동네)는 루쉰의 두 번째 소설집 ‘방황’에서 표제작 ‘고독자’를 비롯한 주요 단편 7편을 엄선해 엮었다.루쉰은 이 작품들을 1924년부터 1926년 사이에 썼다. 원래 수록된 소설집 이름 ‘방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루쉰이 매우 힘들었던 시기에 쓴 작품들이다. 제국주의 침략과 폭압적인 정치권력 등으로 인한 중국의 혼란은 희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중국의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루쉰을 절망시키기에 충분했다.여기에 루쉰 개인사적으로 여러 시련이 닥쳤다. 문학적 동지이자 자신이 부모처럼 돌봤던 동생과 불화가 생겨서 급기야 결별하고 따로 분가해 나오기도 했다. 첫 부인과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언제까지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그런 가운데 싹튼 새로운 사랑으로 인한 갈등 등이 이어지던 시기였다.좌절과 고민이 이어지던 시기를 그대로 투영한 두번째 소설집‘방황’의 키워드는 ‘절망’이다. ‘방황’은 그의 첫번째 소설집 ‘외침’이 나온 지 3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외침’에서 루쉰은 공화제 혁명을 추진하던 1910년 전후 중국의 모습을, 즉, 비극적 현실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간상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담았었다. 그랬던 그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희망에서 절망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어떻게, 왜 바뀌어갔는지 그 면면을 ‘고독자’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3-05

무엇이 영웅을 만드는가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지도자를 만나 관계를 맺는다. 조직의 성패를 좌우하는 이들의 지도력은 사회가 발전하는 속도와 진행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종국에는 역사를 바꾼다.신간‘권력의 자서전’(글항아리)은 역사의 주목을 받았던 열두 명의 인물을 추적해 존경 받는 지도자의 표상과 그 반대의 사례들을 ‘열쇳말’로 집약해 소개한다. 늘 군대의 선봉에 섰던 알렉산더 대왕의 ‘솔선수범’과 도덕국가를 꿈꿨던 공자의 ‘비전’, 출신이 아닌 능력만으로 사람을 평가했던 칭기즈칸의 ‘개방’적 사고, 삶에 어둠이 드리워진 순간에도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마키아벨리, ‘공포’로 조직을 다스렸던 발렌슈타인 그리고 관료제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펠리페 2세의 ‘근면’…. 이들의 사례를 통해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역사적 사건을 복기하고 더 나아가 무엇이 이들을 성공 혹은 파멸로 이끌었는지 성찰한다. 문장의 행간에 담긴 거장 선학들의 통찰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삶의 진리를 안겨준다.저자 김동욱씨는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뒤 2000년부터 한국경제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한경닷컴에서 ‘김동욱 기자의 역사책 읽기blog.hankyung.com/raj99’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역사 지식과 취재 현장의 경험을 접목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마키아벨리의 ‘학습’: 절망을 위대함으로 바꾼 사상가르네상스기를 지나면서 국민국가의 성립기에 이른 이탈리아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때 본래 공화주의자였던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책략과 무력을 함께 사용하도록 권고한다. 이것은 인간해방의 문제가 인간 개인의 도덕적 견지나 이상주의적 인격의 차원에서는 극복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19년간 집필한 ‘군주론’은 각종 교훈을 담고 있으며 많은 ‘지배자의 스승’이 돼 현재에도 널리 읽히고 있다.△그루시의 ‘맹목’: 국가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끌다1815년 워털루에서 프랑스군의 에마뉘엘 드 그루시 원수는 ‘맹목’으로 나폴레옹의 명운이 걸린 전투의 패배를 불러왔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주력이 박빙의 접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전 병력 3분의 1을 거느리던 그루시가 가세했더라면 프랑스군이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그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라”는 나폴레옹의 첫 명령에만 집착해 승리의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다.△스탈린의 ‘변신’: 20세기 괴물의 탄생제정 러시아 헌병대가 ‘가장 잡기 힘든 인물’로 목록에 올렸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잔혹함 이면에 또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저자는 스탈린이 신출귀몰하게 ‘변신’하는 모습에 집중해 키워드를 뽑아냈다. 20세기 괴물로 불렸던 스탈린의 ‘변신’은 러시아 역사에 핏빛으로 고스란히 녹아 있다. 스탈린은 레닌이 경계할 만큼 영리했고 자유롭게 행동했으며 편견 없는 유연한 사고로 러시아 정계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저자는 스탈린의 박약한 윤리 의식과 복잡한 여성 편력, 권력을 향한 공포스러운 집착을 지적하며 그가 러시아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설명한다.△발렌슈타인의 공포 :전쟁과 폐허의 악마근대를 낳은 17세기의 30년 전쟁 때 신성로마제국 지휘관 발렌슈타인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공포’다. “모든 땅이 파괴되고 나서야 평화가 올 것”이라던 공언대로 그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대량 살상과 파괴를 서슴지 않았다. 아침에 너무 일찍 깨웠다는 이유로 하인을 찔러 죽이는 등 아랫사람에게도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2-27

‘조선왕릉 석조문화재’ 총 5권 완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직무대리 김삼기)는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년간 진행한 ‘조선왕릉 석조문화재 보존상태 조사’의 성과를 담은 보고서‘조선왕릉 석조문화재’총 5권을 완간했다.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 있는 조선왕릉의 석조문화재 보존현황을 정밀기록해 체계적인 보존관리와 학술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취지이다.조사대상은 40기의 왕릉(북한 2기(제릉·후릉)제외)에 있는 4천763점에 이르는 방대한 수량의 석조문화재였고, 2015년 첫 보고서를 시작으로 2019년 최종 보고서까지 총 5권에 조사 결과를 담았다.보고서에는 조선 제1대 건원릉(태조)부터 제27대 유릉(순종과 순명황후·순정황후)과 추존 왕릉을 포함했으며, 왕릉별 석조문화재 보수이력, 정밀현황조사, 비파괴 정밀진단을 중심으로 기술했다. 조사연구는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주관하고 궁능유적본부와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이 공동으로 수행했다.5권의 보고서에는 약 500여 년에 이르는 방대한 기간에 조성된 조선왕릉 석조문화재의 손상현황을 과학적인 자료를 근거로 분류해 왕릉별 손상정도를 일목요연하게 비교했으며, 주된 손상원인과 정도를 파악해 해당 왕릉에 적합한 맞춤형 보존관리 방안도 제안했다.보고서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portal.nrich.go.kr)에서 열람 가능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2-24

‘사기’의 통찰력으로 현대를 보다

인간과 권력에 관한 영원한 고전 ‘사기’는 52만 자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구성된 동양 역사서의 근간이요 인간학의 보고다.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이라는 가혹한 삶의 조건 속에서 혼을 담아 써내었기에 깊은 생각의 단초들이 행간에 녹아 있으며 하나같이 명언명구로 장식된 정교한 갑옷과 같은 책이다.‘사기어록’(민음사)은 개인으로서 최초로 ‘사기’를 완역한 동양고전의 대가 김원중 교수가 ‘사기’에서 200여 편의 명구를 뽑아 그 명구가 나온 역사적 배경과 간취할 수 있는 통찰력을 현대적 사유 속에 담아낸, 핵심 어록이다. ‘나’로부터 ‘타인’으로, ‘세상’으로, ‘시대’로 이어지는 맥락을 따라 현시대 당면과제를 놓고, 삶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사기’는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는 치욕을 겪으면서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발분(發憤)의 마음으로 쓴 역사서이다. 진시황이 중국 영토를 통일했다면, 사마천은 관념적 ‘통일 중국’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사마천의 ‘사기’가 가진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지대하다. ‘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 총 130편으로 이뤄져 있는데, 시간적으로는 상고(上古) 시대부터 한나라 무제 때까지 아우르며, 공간적으로는 옛 중원을 중심으로 주변 이민족의 역사까지 다뤘다. 사마천은 인간 중심적 역사관을 기저로 해 탁월한 안목으로 인간과 세계를 탐구했고, 2000년이 넘도록 ‘인간학 교과서’라고 불리며 회자되는 ‘사기’속에 생생한 인간상을 담아냈다. 2011년 9월 김원중 교수는 국내에서 최초로, 개인으로서는 세계에서 최초로‘사기’전편을 완역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중 가장 먼저 출간된 ‘사기 열전’은 교수신문‘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에서 최고 번역서로 선정되기도 했다.그러나 김원중 교수가 완역한‘사기’는 4천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대작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기 열전’만 해도 전체 1천800여 쪽에 달해 독자들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에 김원중 교수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가장 뜻 깊을 명언명구를 가려 뽑아 해설을 달았다.‘인간과 권력의 본질’은 무엇이며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파고든 사마천의 성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장들이다.‘사기어록’은 ‘나’로부터 ‘타인’으로, ‘세상’으로, ‘시대’로 이어지는 맥락을 따라 4부로 구별함으로써 지금 당면한 과제의 기준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와 삶의 지혜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의 풍성한 어록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구축하고 있다. 경구도 있고 격언도 있으며 상소문도 있고 서간문도 있고 속담도 있다. 춘추전국시대와 초한 쟁패 과정을 주축으로 하는 격변의 상황 속에서 탄생된 ‘열전’의 어록들이 가장 많지만, 제후들의 이야기를 담은 ‘세가’와 제왕들의 이야기인‘본기’의 어록들도 수두룩하다.‘사기’의 쉼 없는 생명력의 원천은 바로 인간 개개인의 고뇌와 갈등을 통찰한 데 있다. 천하를 호령한 제왕뿐 아니라 그 아래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소소한 개인들이 자신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모습을 흥미롭게 담아낸다. 이를 통해 사마천은 영원한 성공도, 영원한 실패도 없다는 인간의 흥망성쇠를 밝히고, 역사는 잠재력을 지닌 개개인에 의해 변화한다는 뜻을 새긴다. /윤희정기자

2020-02-20

40년의 세월이 흘러 비로소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게 되고…

공지영 작가가 2년 만에 내놓는 열세번째 장편소설 ‘먼 바다’(해냄 펴냄)는 첫사랑이라는 소재를 통해 삶에 있어 시간과 기억의 의미를 탐구하며 사랑의 힘을 되짚는다.이번 소설은 육체에 각인된 기억을 완전히 잊는데 필요하다는 40년의 세월이 흘러 비로소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고 옛 상처들과 화해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원고지 670매의 경장편 분량인 이 작품은 감각을 깨우는 속도감 있는 문체로 1980년의 서울과 현재의 뉴욕까지 시공간을 교차하며 첫사랑에 빠진 두 남녀의 애절하면서도 풋풋한 마음과 온갖 세상 경험과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장년의 고단함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청춘을 떠올리게 하는 따스한 에메랄드 빛 서해바다와 시간이 박제된 자연사박물관과 9/11 메모리얼 파크 등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을 상징하는 듯한 독특한 배경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체험을 선사한다.가히 ‘사랑의 작가’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많은 작품을 통해 다양한 사랑의 의미와 모습에 천착해 온 공지영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특유의 감성적인 문장과 섬세한 심리묘사로 단순히 첫사랑이란 일상적인 소재에 머물지 않고 살아가는 일, 사랑하는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윤희정기자

2020-02-20

고대 한민족, 그들의 삶과 생각

고분벽화와 암각화 연구의 권위자인 전호태 교수가 우리 고대사상의 탄생을 돌아보는 ‘고대에서 도착한 생각들’(창비)을 펴냈다. 구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수만 년 동안 축적된 고대 한민족의 생각과 신앙을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담아냈다.중요한 유물, 유적, 개념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동서양의 신화, 미술, 종교를 넘나들며 우리 고대의 사상을 입체적으로 설명해낸 이 책은 고대사 공부의 기본서로서는 물론, 가족이 함께하는 역사기행의 길잡이로도 안성맞춤이다.특히 이 책은 아버지와 아들을 비롯해 여러 인물이 등장해 같이 유물을 살펴보고 대화를 나누는 형식을 취해 재미를 더했다. 또한 중간중간 유물과 사상이 생겨날 당시의 상황을 고대인의 시각으로 서술해 생동감 있는 1인칭의 시점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고대의 유물을 지금의 삶과 문화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시대를 관통하는 문화적 통찰을 선사한다.1~4장은 구석기-신석기-청동기-(초기)철기시대로 이어지는 선사시대의 역사를 되짚는다. 문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물과 유적을 보며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 진석은 박물관의 전시실에서 각 시대별 대표적 유물을 차례로 살피며 선사시대의 삶을 만나고 상상한다. 여기서 이 책의 큰 장점이 드러나는데, 역사를 단순히 결과로서, 평면적으로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후기 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후반부(6~14장)에서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종교와 사상이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청동기시대 이후 부족국가의 형성에 따라 현실의 권력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창세신화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영웅신화의 시기가 도래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부여, 가야는 각자의 지배층이 지니는 우월함과 신성성을 부각하기 위해 시조의 영웅신화와 건국신화를 백성들에게 전파했다.6~7장은 삼국시대가 형성되면서 만들어진 각 나라의 건국신화에 얽힌 이야깃거리들을 풀어낸다. 특히 영웅과 하늘이 신성시되는 이유, 동명왕신화와 가야 건국신화가 여러 갈래의 내용으로 전해지는 이유 등 피상적인 지식으로 신화를 접했을 때는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대목들을 짚어내며 신화의 목적과 상징성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8장에서는 샤먼이 가지는 사회적 영향력의 부침을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설명하며 샤머니즘의 원리와 흥망에 대해 말한다. ‘신과 만나는 사람’의 전통이 지금도 남아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떠올리며 읽어내려가다보면, 인간이 가진 근원의 두려움이나 한계가 시대나 문명과 큰 상관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세계의 운행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등장한 음양오행론은 9장에서 설명된다. 특히 음양오행론이 역사시대에 한반도에 자리 잡은 종교와 사상에 흡수돼 각각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는 일부가 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10~14장에서는 한반도에 전파된 불교, 도교, 유교 사상의 주요한 가르침, 삼국에 유입되던 배경과 그에 따른 당시 사회상의 변화 등을 두루 살핀다.암각화와 고분벽화에 대해서 각각 별도의 장을 마련해 더 깊은 이해를 돕는다. 구석기시대 동굴벽화에서 시작된 벽화미술의 흐름은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암각화로 이어진다. 5장에서는 암각화가 남겨진 현장에서 이뤄지는 두 가족의 대화를 통해 암각화의 의미를 탐구한다. /윤희정기자

2020-02-13

통근 버스 탈때 쏟아지는 햇빛만이 유일한 사치인 21살 소희…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 권여선 작가의 여섯번째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이 출간됐다. 2016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안녕 주정뱅이’에 이어 4년 만에 펴내는 단행본이다. 19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모르는 영역’ 등을 포함해 여덟 편의 단편을 담았다.소희는 일하는 매장에서 박스를 들어올리다 박스 아래에 튀어나와 있던 굵은 고정쇠가 손톱을 뚫고 나와 손톱 절반이 뒤로 꺾이고 살이 찢기지만, 대출금과 옥탑방 월세 등을 생각하면 아득해지는 탓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친구도 못 만나고 친구도 못 만들”며, 갚아야 할 빚과 모아야 할 돈을 백원 단위까지 끊임없이 계산하는 스물한 살의 소희. 그런 소희에게 유일한 사치는 아침 통근버스를 탈 때 쏟아져들어오는 햇빛이다. ‘찌르는 듯 따스하고 무심하면서도 공평한’ 햇빛처럼 소희의 하루하루는 거칠 것 없이 무자비하지만 그러나 끝내 온기가 전해져온다. 그건 “대화가 안 된다 매가리가 없다 무난하다 생각이 없다”는 말 대신 손톱이 다친 소희에게 “조심해야지” 하고 말해주는 할머니의 존재 덕분일 것이다. 함부로 희망을 말하거나 섣부르게 위로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조심해야 한다고, 아직 멀었다고 말함으로써 그만큼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때문에 ‘아직 멀었다는 말’은 끝을 단정짓지 않음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2-13

우리 몸은 빅뱅의 순간을 기억하는 우주 그 자체이다

우주는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빅뱅은 왜 일어났는가? 아주 먼 미래의 우주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이 우주 안에서 우리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리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다’(21세기북스)는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윤성철 교수가 서울대 인기 교양과목 ‘인간과 우주’에서 진행한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우주는 138억 년 전 순간적으로 발생한 대폭발로부터 시작됐다. 이것은 우주에 남아 있는 흔적들이 발견되면서 단순한 가설이 아닌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빅뱅우주론은 우주에 관한 여러 굵직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정적인 우주를 표방하는 정상우주론의 자리를 빼앗고 현대 천문학의 중심에 섰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계속 변하는 것처럼 우주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이 같은 현대 과학의 위대한 발견으로, 빅뱅 이후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별의 형성과 진화, 생명의 기원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밝혀낼 수 있었다.이 책에서 저자는 별을 구성하는 물질과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이 같다는 사실을 여러 과학적 근거와 이론들을 통해 자세하게 설명한다.즉 별의 내부에서 합성되는 물질은 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순환 과정을 통해 우주로 퍼져나가 별과 별 사이를 떠도는 생명의 씨앗이 되며, 이는 다시 새로운 별로 탄생되거나 지구에 떨어져서 우리 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된다. 또한 우리 몸을 이루는 원소들 중 하나인 수소는 빅뱅을 통해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 몸은 빅뱅의 순간을 기억하는 우주 그 자체인 동시에 별에서 온 먼지”라는 것이다.책은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인간의 세계관을 뒤바꾼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아인슈타인의 최대 실수, 우주상수’, ‘여성 최초 하버드대 교수가 된 세실리아 페인’ 등 천문학사를 수놓고 있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별의 형성과 진화뿐 아니라 경이로운 생명의 기원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2-06

‘리더를 키우는 리더’ 슈퍼보스의 모든 것

“위대한 리더들은 자석처럼 인재를 끌어당긴다”패션계 대부 랠프 로런, 일류 요리사 앨리스 워터스, 광고계 거물 제이 치아트 등등. 이들은 다른 리더와 달리 ‘특별한 성공’을 거뒀다. 자신만 성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길러내 후배들 또한 성공하게 이끌었다는 점에서 다른 리더들과 차별화된다. 이들은 자신만 빛나는 ‘슈퍼스타’가 아닌, 자신과 더불어 다른 사람까지 빛나게 하는 리더, 바로 ‘슈퍼보스’였다.미국의 세계적 경영학자이자 러디섭 전문가인 저자 시드니 핑켈스타인(다트머스대 터크 경영대학원 교수)은 지난 10년간 인재를 키운 ‘슈퍼보스’에 대해 추적해왔다. 200차례 이상 인터뷰를 실시하고, 수천 개의 기사, 책, 논문, 구술 기록을 샅샅이 살피고, 서른여섯 편의 사례연구를 작성하는 등 광범위하고도 철저하게 연구를 진행해 IT업계, 스포츠계, 광고계, 식료품계, 헤지펀드계, 패션계, 방송계 등 다수의 업계를 아우르는 한 가지 패턴을 발견한다. 각 업계에서 잘나가는 리더 50명 중 15~20명은 한때 한 명 또는 몇몇 ‘인재 육성자들’ 밑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슈퍼보스’를 통해 시드니 핑켈스타인은 10년간 추적한 결과물을 집대성해 ‘리더를 키우는 리더’ 슈퍼보스의 비밀을 낱낱이 파헤친다.‘슈퍼보스’는 총 9장으로 이뤄져 있다. 1장에서는 슈퍼보스를 정의하면서 연구과정에 대해 종합적으로 설명한다. 2장부터 8장까지는 ‘슈퍼보스의 전술’을 하나씩 공개한다. 세계 정상급 리더들은 사용하지만 다른 리더들은 사용하지 않는 그들만의 기술, 사고방식, 철학, 비밀을 낱낱이 소개한다. 9장에서는 관리자들과 리더들이 슈퍼보스식 접근법을 자신의 커리어뿐 아니라 경영방식, 조직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안내한다.그동안 상식, 심리학과 빅데이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인재를 다룬 책은 많았지만, 낯설고 특이해 보이는 방식으로 인적 자원을 누구보다 잘 키워내는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우리에겐 조직을 성공으로 이끄는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절실하다. 시드니 핑켈스타인은 다채로운 슈퍼보스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우리가 어떻게 최고의 인재를 끌어오고 고용할지를, 어떻게 리더로 키워낼 수 있을지를, 즉 인재 관리 및 개발에 대한 종합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한다.슈퍼보스들은 인재를 육성한다는 큰 틀에서 보면 같지만 직원들을 어떻게 동기부여하느냐에 따라 전통 파괴형, 최고 지향형, 그리고 양육형으로 나뉜다.전통 파괴형 슈퍼보스는 자기 비전에만 골몰하기 때문에 직관적이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인재를 키운다.최고 지향형 슈퍼보스는 이기기 위해서는 최고의 인재와 팀을 확보해야 하기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기는 법을 가르치고, 그들을 동기부여해 더 높은 성과를 거두도록 밀어붙인다. 양육형 슈퍼보스는 단순히 멘토처럼 몇 가지 유용한 조언을 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치 장인을 사사하는 것처럼 바로 지척에서 업무에 관해 정확히 피드백을 해주며 적극적으로 지도하고 가르친다.저자는 “사람은 모든 전략의 핵심이며, 어떤 리더라도 생존하고 번영하려면 무엇보다도 인재 풀을 활성화해야 한다. 슈퍼보스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사업상 성공을 거둔다”고 강조한다.이 책은 제이크루의 밀러드 드렉슬러 회장의 추천사처럼 “리더들이 실제로 왕성한 호기심과 재능을 겸비한 사람들을 어떻게 찾아내는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독려하고 성장시키는지 그 놀라운 인재관리법을 보여준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20-02-06

역사상 최강의 힘을 가진 제국, 미국의 연대기

지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 바로 미국이다. 어떤 나라도, 국제연합도 제재를 가하거나 압력을 넣을 수 없는 나라, 오직 내부의 분열과 경제 하락만이 스스로를 약화시킬 수 있는 초강력 국가가 바로 미국이다. 그러나 미국만큼 평화, 자유, 인권을 강조하는 나라가 없을 만큼 미국은 20세기 내내 그리고 21세기인 지금도 스스로를 공화국이자 세계 평화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자임하고 있다. 어떻게 해 미국은 이렇게 강력해졌을까? 왜 미국은 100년이 넘도록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공고히 유지하며, 앞으로 펼쳐질 우주시대에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일까. 기술과 자본, 자원과 영토, 사회와 제도 등 모든 면에서 남들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앞서간 미국의 성장과정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의 대니얼 임머바르 역사학과 교수는 착안점을 달리해서 이 문제를 생각보자고 말한다. 그는 지난해 출간해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낸 저서 ‘미국, 제국의 연대기: 전쟁, 전략, 은밀한 확장에 대하여’(원제 How to Hide an Empire)에서 ‘영토’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미국은 두 종류의 영토가 있다. 나쁜 짓을 하면 처벌을 받는 영토와 그렇지 않은 영토, 법적 규준을 준수해야 하는 영토와 그렇지 않은 영토로 말이다. 전자는 북아메리카 미국 본토이고, 후자는 전세계에 점조직으로 퍼져 있는 다수의 미국령 섬과 제도, 기지들이다. 점묘주의 제국 미국은 식민지, 미국령 등에서 다양한 자원을 획득해왔고, 그곳의 사람들을 활용해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지로 해 전 세계를 무력으로 제압했다. 그런 영토의 존재가 그간 미국을 얘기할 때는 잊혀졌거나 중요하게 다뤄지지 못했다.오늘날 미국 지도는 50개주로 구성된 익숙한 모습이다. 실제 영토는 이와는 매우 다르다. 우선 알래스카와 하와이, 괌이 빠져 있다. 이게 전부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푸에르토리코, 미국령 사모아·버진아일랜드, 태평양과 카리브해에 퍼져 있는 섬들 등 훨씬 많은 영토와 군사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전 세계에 미군 기지는 800개가 넘는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그 외의 모든 나라가 보유중인 기지를 다 합쳐도 30개에 불과한데 말이다.이 책엔 ‘로고 지도’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미국을 한정시킨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지도다. 그러나 그 다음 페이지에는 1941년 무렵 미국 영토였던 곳까지 포함시킨 확장된 미국 지도가 제시된다. 알래스카, 하와이, 괌, 미국령 사모아, 푸에르토리코,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태평양과 카리브해의 섬들이 모두 포함된 지도다. 둘의 차이는 확연하다.미국이 섬들을 점령한 이유는 대부분 군사적 필요 때문이다. 하지만 로고 지도는 대규모 식민지든 아주 작은 섬이든 할 것 없이 모두 배제한다. 게다가 그런 지도는 진실을 호도한다. 로고 지도만 보면 미국은 정치적으로 균일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각각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자발적으로 편입된 주들로 구성된 연합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사실이었던 적도 없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조약이 비준된 그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주와 영토의 집합으로 이뤄진 국가다. 각각 서로 다른 법이 적용되는 두 영역으로 나뉜 분할 국가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20세기의 중반을 지날 무렵 ‘식민지’들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업그레이드된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이 이로써 시작되기 때문이다.이 책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직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문 초고 사진이 실려 있다. 직접 펜으로 교정을 본 초고에서는 필리핀이 지워져 있고 하와이가 부각되었다. 연설의 내용은 일본의 미국 공격을 규탄하는 것이다. 필리핀을 지워버린 이유는 당시 미국인들은 필리핀을 전혀 자국의 영토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와이는 달랐다. 미국과 가까웠고, 백인의 거주 비율이 높았다. 실제로는 필리핀이 훨씬 거대한 면적과 인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루스벨트는 전쟁에 대한 여론을 고취시키기 위해 필리핀을 없애고 하와이를 부각시켰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2017년 허리케인 마리아가 미국의 해외 영토인 푸에르토리코를 덮쳐 큰 피해를 입힌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푸에르토리코가 미국 땅이라는 걸 아는 미국인은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고, 30세 이하에서는 37퍼센트에 그쳤다. 그러나 실상은 전 세계가 미국의 영토나 기지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이것을 사람들이, 특히 미국인들이 인식하지 못한다는 게 이 책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20-01-16

격동의 20세기, ‘시일야방성대곡’에서 ‘독립선언서’까지

‘한국 산문선: 근대의 피 끓는 명문’(민음사)이 출간됐다. 우리나라의 고전 명문을 총망라해 각종 매체의 주목과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한국 산문선’(전 9권)의 특별편이다. 우리 고전의 부흥을 이끌고 있는 안대회, 이현일, 이종묵, 장유승, 정민, 이홍식 6인의 한문학자가 이번에는 20세기의 명문 39편을 엮고 옮겼다. 외세 침략으로 시작된 격동의 시대, 낡은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바꿔 나간 ‘대한 사람’의 시대정신이 약동하는 뜨거운 문장들을 만난다.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가 일어났다.이로부터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과 동학 농민 운동 등의 큰 사건들이 잇따랐다. 1897년 조선은 대한 제국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결국 을사늑약을 거쳐 국권이 피탈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1부 ‘근대의 격랑’에서는 ‘개화’와 ‘독립’이 키워드인 글들에서 일본은 물론 모든 외세에 예속되지 않으려 한 시대정신을 만날 수 있다. 2부 ‘급변하는 사회’는 학문과 예술, 과학과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각자들이 제시한 구체적인 대처 방안을 실었다. 3부 ‘난세의 인물상’은 책에서 가장 문학적인 부분이니 황현, 김옥균, 이건승, 안중근, 민영환, 신채호 등 불우한 시대의 영웅 또는 개인의 내밀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1-16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다’

‘물질하면 밥은 안 굶는다’고 할 정도로 한때 어촌을 받쳐주는 든든한 직업이었던 해녀. 하지만 고령화와 고된 노동으로 대를 이을 세대가 사라져 당장 몇 해 뒤에 동해안 해녀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육지해녀의 일과 삶의 애환을 진솔하게 조명한 구술생애사가 나와 화제다.경북여성정책개발원(원장 최미화)과 영덕군(군수 이희진)이 펴낸 ‘영덕 해녀 구술생애사 :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해녀 할 거다’에는 바다와 평생을 함께 해 온 65세 이상 고령의 영덕 해녀들이 들려주는 곡진한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대부분 10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해 경력 최고 65년, 최소 40년 이상인 베테랑 해녀들로서, 영덕읍 대부리 최고령 해녀인 전일순(82)을 비롯해 창포리 김경자(79), 경정2리 김복조(79), 석리 김옥란(73), 대진3리 이석란(70), 축산리 김순남(70), 삼사리 김임선(69), 경정1리 최영순(68), 노물리 김숙자(67), 금곡리 권순이(65) 해녀 10명이 그 주인공이다.책에는 오래된 경력만큼이나 분투하며 살아온 해녀들의 이야기가 생생히 담겨 있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3일 만에 물질을 나서야 했던 사연, 어릴 적 앓은 눈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했지만 남편도 모르게 지금껏 물질한 이야기, 가정형편 때문에 포기한 중학교가 미련이 남아 “그때 학교를 댕길라고 울 건데”라며 후회하는 모습, 좋은 시절을 보지 못하고 떠난 어머니에 대한 회한. 옛날에는 ‘금바다’라고 부를 정도로 해산물이 많았으나 바다 환경 변화로 이제는 물질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렵다는 걱정 등 10명의 해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어촌이라는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여성들의 작은 역사가 오롯이 기록돼 있다.책을 통해 개인 생애사와 함께 해녀로서의 일과 생활, 그간의 변화와 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퐁당 자무질(새내기 해녀의 어설픈 물질), 하도불(물질 후 옷을 말리기 위해 지피는 화톳불)과 같은 영덕해녀 특유의 말을 찾아 책읽기의 또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최미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은 “해녀문화가 경북 동해안 관광의 키 포인트가 돼 새로운 관광문화콘텐츠 개발 및 관광산업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1-13

고전읽기는 학습이 아닌 훈련이 필요한 영역

“사실, 독서는 훈련이다”누구나 고전을 읽고 싶어 하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몇 시간이고 TV나 휴대폰, 인터넷과 유튜브를 들여다보긴 쉬워도 30분간 책에 집중하기는 무척 어렵다. 우리를 에워싼 미디어가 문제인 걸까? ‘독서의 즐거움’(민음사)의 저자 미국의 교육자 겸 소설가 수잔 와이즈 바우어는 미디어가 현대인의 독서를 방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별개로 독서가 예전보다 더 어려워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독서는 TV가 등장하기 전부터 집중을 요하는 활동이었고, 고전을 읽는 것이야말로 다른 어떤 학습보다 스스로의 훈련과 숙련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고전을 엄선해 소개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힘으로 꾸준히 고전을 읽어 나갈 방법부터 체계적으로 알려준다.영미권에서 이미 고전 독서의 길잡이로 널리 알려진 이 책을 열기 전에 저자의 이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 베스트셀러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 역사 이야기’시리즈로 알려진 수잔 와이즈 바우어는 해외에서는 고전과 역사를 주제로 자신의 지식을 쉽고 직설적인 문체로 균형감 있게 풀어쓰는 저술가로 정평이 나 있으며 그의 책들은 전 세계 20만 사서와 교육자의 커뮤니티인 ‘스쿨 라이브러리 저널’의 추천을 받고 있다. 초중고 과정을 홈스쿨링으로 이수해 문학과 언어 부문에서 미국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이며 미 대통령을 여럿 배출한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에 대통령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해 모교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한 저자는, 자신의 독학 경험에 더해 네 자녀를 홈스쿨링으로 키운 경험에서 우러나온 확신을 통해 다른 분야와 달리 고전 독서만은 제도권 교육으로 결코 완성할 수 없는, 스스로 훈련해 나가야 하는 영역임을 강조한다.‘독서의 즐거움’의 백미는 소설, 자서전, 역사서, 희곡, 시, 과학이라는 여섯 분야의 장르별 독서법과 함께 우리 시대에 꼭 읽어야 할 고전의 목록이겠지만, 그에 앞서 ‘하루 중 독서에 전념할 30분 마련하기’, ‘저녁보다는 아침 독서’, ‘독서 노트에 발췌하고 요약하기’와 같은 구체적이고 간단한 지침에서 시작해 모든 분야의 책을 ‘이해, 분석, 평가’의 3단계에 걸쳐 세 번 읽기에 이르기까지, 주요 고전 목록에 앞서 스스로의 힘으로 꾸준히 고전을 읽어 나갈 방법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이 책은 십여 년 전 출간된 초판에 21세기의 고전 및 과학서 파트가 추가된 전면 개정판으로 1부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에서는 고전 독서를 위한 준비와 독서 일기 쓰는 법을, 2부 ‘독서의 즐거움’에서는 소설, 자서전, 역사서, 희곡, 시, 과학서 여섯 분야의 장르별 독서법을 알려 주는 한편, 각 장르별 말미에 해당 분야의 고전들을 연대순으로 소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고대의 전통과 현대 작품들 간의 중요한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180여 편의 엄선된 고전 목록이 줄거리와 함께 수록돼 한 분야의 기초가 되는 작품부터 시작해 체계적인 독서를 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20-01-09

‘인생이라는 강’에 ‘용서라는 징검다리’를 놓는다

“새벽별 중에서 가장 맑고 밝은 별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새벽별 중에서 가장 어둡고 슬픈 별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시 ‘새벽별’ 전문)사랑과 고통을 노래하며 삶을 위로하고 인생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는 따뜻한 시편들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정호승의 신작 시집‘당신을 찾아서’(창비)가 출간됐다. 열세번째 시집인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눈물의 고해성사를 통해 인간이라는 불씨, 인간이라는 새싹을 살려내”(문태준, 추천사)는 뭉클한 감동이 서린 순정한 서정 세계를 선보인다.진솔하고 투명한 언어에 깃든 “불교적 직관과 기독교적 묵상과 도교적 달관”(이숭원, 해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정결한 시편들이 가슴을 촉촉이 적시며 잔잔하게 울린다. 모두 125편의 시를 각부에 25편씩 5부로 나눠 실었으며, 이 중 100여 편이 미발표 신작시다.정호승의 시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생에 대한 경외심이 우러난다. 그의 시를 읽으면 지나온 삶을 겸허한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된다. 시인은 “내 시의 화두는 고통”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살아갈수록 상처는 별빛처럼 빛나는 것”(‘부석사 가는 길’)이고, 그 상처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은 시가 삶을 성찰하는 거름이 된다고 말한다. 시인은 “눈물마저 말라”버린 “목마른 인생”(‘새들이 마시는 물을 마신다’)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고통을 통해 얻어진다고 믿는다. 고통은 또한 용서를 통해 치유되는 것이기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에 진심을 바쳐온 시인은 간절한 손길로 “인생이라는 강”에 “용서라는 징검다리”(‘유다를 만난 저녁’)를 놓는다.인생의 의미와 가치, 사랑과 고통의 본질을 탐구해온 시인은 삶의 고통과 슬픔을 사랑과 용서와 화해로 승화시킨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갈망해온 그의 시선은 늘 “인생을 잃고 쓰러진”(‘겨울 연밭’) 연약한 존재들에게 머물며 삶의 그늘진 구석을 응시한다. 시인은 이제 비루한 삶의 낮은 곳에서도 “먼지가 밥이 되는 세상”(‘먼지의 꿈’)을 꿈꾸며 “푸른 겨울 하늘을 날아/붓다를 찾아가는/작은 새”(‘낙인(烙印)’)가 돼 절대적 진리와의 만남을 갈망한다. “만나고 싶었으나 평생 만날 수 없었던”(‘당신을 찾아서’) 절대적 진리의 상징인 ‘당신’을 찾아서 “평생의 눈물이 얼어붙은/저 겨울 강”(‘겨울 강에게’)을 건너는 시인의 열망은 뜨겁다 못해 눈물겹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1-09

왜 인구가 줄어들면 위험하다고만 하는 걸까

‘저출산’, ‘고령화’, ‘지방 소멸’, ‘인구 절벽’ 등 줄어드는 인구에 따른 사회 변화는 피할 수 없는 범지구적 문제다. 인구가 줄어들면 고용 시장이 감소되고, 이에 따라 과거의 인구수에 맞춘 국가 정책이나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제반도 변할 것이다. 이런 변화들은 과연 위기나 재앙을 불러일으키기만 할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대책을 지금 준비하고 대처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일본의 지성’이라 불리는 우치다 다쓰루(70)가 편저로 참여한‘인구 감소 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위즈덤하우스)은 인류학·사회학·지역학·정치학 등 각 분야별 10인의 전문가들이 일본의 인구 감소 문제를 주제로 쓴 논의들을 엮었다.우치다 다쓰루는 인구 감소는 중요한 문제지만, 일본 사회에는 아직 위기의식이 부족하며, 위험한 상황이 예측되는데도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회피하는 현실을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극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를 진단하고, 냉철하고 계량적인 지성을 모아 미래를 대비할 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이 책은 인구 감소 사회에 당면한 지금,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논의들을 제공한다.2019년 9월 통계청이 발표한 ‘세계와 한국의 인구현황 및 전망’에 따르면 2019년 인구의 14.9퍼센트를 차지하는 고령인구(65세 이상) 비중은 48년 뒤인 2067년 46.5퍼센트로 증가하고, 인구의 72.7퍼센트인 생산연령인구(15∼64세)는 2067년 45.4퍼센트로 낮아진다고 한다. 이처럼 최근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 문제는 한국의 미래가 달린 주요 논안 중 하나다. 하지만 인구가 사라지는 사회에 대한 불안한 예측만 무성할 뿐, 정작 출산을 적극 장려하려는 지원 정책 수준은 미비하다. 그렇다고 출산율만 높인다고 해서 이런 현상이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인구 감소 문제를 접근해야 하는 것일까?일본의 인구 감소 문제에 대한 논의들을 담은 이 책은 한국의 상황을 진단하고 대안을 고민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호모사피엔스의 역사로 살펴보는 인구동태와 종의 생존 전략, 인공지능시대의 고용과 경제의 변화, 도시와 지방의 인구 격차와 해결 방안, 만혼화·비혼화의 윤리적 원인, 재정을 축소하는 유럽의 사례와 인구 문제, 도시와 지방을 살려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건축, 지방 주민을 늘리는 문화적 사회포섭, 도시와 지방을 연결하는 공동체 운동, 여성에게 출산의 책임을 강요하는 사회 비판, 일본의 ‘사양’과 인구 변화에 대한 정치적 문제 등 다양한 시각으로 인구 감소 문제를 접근하도록 유도한다.인구 감소의 현실을 즉각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는 도시와 지방의 인구 격차다. 인구가 몰려들어 포화 상태인 도시에 비해, 지방은 점점 주민이 줄어들면서 소멸되고 있다. 도시에서도 노인 인구는 해마다 증가하므로, 지방을 활용한 인구 분산 정책이 시급하다.이 책의 7장에 실린 일본의 오카야마현 나기초 마을은 도시와 지방의 격차를 줄일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주목할 만한 사례다. 인구 6천 명 정도의 나기초 마을은 2014년 기준 일본에서 가장 높은 출생률을 기록하며 유명해졌다. ‘나기 차일드 홈’이라는 육아 지원 시설을 중심으로 마을 전체가 육아를 응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으며,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가 편리하게 살 수 있는 공영 주택을 제공한다. 또한 도시처럼 문화적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도시와 지방의 격차는 줄이고 출산율을 높여 인구 감소 사회의 문제를 헤쳐 나갈 방안은 결국 ‘사람’에게 있다.한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위기 상황 이전에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적인 문제에 더 집중하고, 미래 세대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찾아낸다면 인구 감소 사회의 미래는 긍정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는 지금, 축소되고 감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성장만 고집하는 모든 체제에서 한발 물러나 사람이 생기를 갖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위기가 와도 무너지지 않는 사회를 마련한다면 미래 세대는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1-02

항일 여성 작가 백신애 중단편선집 출간

일제시대 여성작가이자 항일운동가, 계몽운동가로 활동한 소설가 백신애(1908~1939)의 중단편선집 ‘혼명에서’(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만주와 시베리아를 방황하는 실향민을 그린 ‘꺼래이’, 현모양처 삶을 살았으나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여인을 그린 ‘광인수기’ 등 그의 문학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주요 작품 16편이 망라돼 있다.소설가 백신애1929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백신애는 영천 출신으로 1939년 불과 3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소설 20여 편, 수필 등 30여 편을 남겼다. 생전에 작품집이 출판되지 않은데다 작품이 다소 거칠고 과격하다는 평으로 인해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한국 여성 작가들을 살피는 연구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백신애 문학의 다양한 가치가 재평가됐고, 이후 백신애는 강경애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한국문학계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백신애의 문학 세계는 극심한 가난과 봉건적 인습의 굴레에 갇힌 여성들의 비극, 또는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살아낸 짧지만 강렬했던 삶과 지녔던 치열한 문제의식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1-02

세계 최고 부자의 아내에서 세계 최대 자선단체 경영자로

멜린다 게이츠(55)는 세계 최고 부자이자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64)의 아내다. 그녀는 세계 최대의 자선재단 빌 앤 멜린다 자선재단 경영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신간 ‘누구도 멈출 수 없다’(부키)는 멜린다 게이츠가 자신의 인생과 더 나은 세상,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길에 관해 이야기한다.1993년 빌 게이츠와 약혼 여행으로 떠난 아프리카에서 멜린다 게이츠는 비통한 빈곤의 현장을 마주 한다. 그 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퇴사한 후 가정주부로 살고 있던 1997년, 뉴욕타임스에서 아프리카의 빈곤과 질병 문제를 다룬 기사를 읽은 그녀는 ‘어째서 세계의 빈곤은 사라지지 않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전 세계의 과학자들과 행동가들을 모으기 시작한다.2000년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설립한 멜린다의 행보는 명예를 위해 재단을 세우고 책상 앞에서 자선을 실천했던 기존 부자들과 완전히 다르다. 그녀는 남편 빌 게이츠와 함께 350억 달러(41조7천억 원)를 기부하고 ‘진짜’ 빈곤과 질병 원인을 찾아 전 세계의 ‘현장’을 누빈다. 해당국이 제공하는 통계 숫자는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재단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즉각적이고 확실한 해결책을 찾아낸다. 이 책은 그렇게 찾아낸 세계 빈곤 퇴치의 핵심인 가족계획, 무급노동, 조혼, 여자아이 교육, 직장 내 성 평등 문제 등 9가지 문제에 대해 그녀가 20년간 들인 노력이 들어 있다. 선의와 희망으로 세상을 돕는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경험으로, 지금까지 계산되지 않았던 수치와 데이터로 실제로 세계를 바꾸는 담대한 여정이 펼쳐진다.‘여성의 권한이 강화되면 인류는 번영한다.’ 멜린다는 이것이 과거 20년 동안 자선 사업을 하면서 자신이 얻은 통찰인 동시에 그동안 사람들이 놓치고 있었던 중대한 아이디어였다고 밝힌다. /윤희정기자

2019-12-26

논어 속 의도된 침묵마저 읽어낼 수 있는가

“위트를 타고 삶의 미시와 거시 사이를 활강하는 글쓰기”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생각거리를 차원 높은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요즘 가장 핫한 지식인, 서울대 김영민 교수(정치외교학과)의 새 책이 나왔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논어 에세이’(사회평론)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동양고전 ‘논어(論語)’에 대한 에세이다. 저자는 ‘불후의 고전’을 ‘살아 있는 지혜’로 포장해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하는 세태를 경계한다. 그의 희망은 소박하다. 고전을 매개로 해 텍스트를 공들여 읽는 사람이 돼보자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몸담은 삶과 세계라는 텍스트일 터, 2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살아남은 ‘논어’에 수많은 이들이 주석을 달고 지금까지도 해설을 덧붙이는 이유이자 김영민만의 시선이 주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저자는 동아시아 정치사상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로서, 고전 ‘논어’라는 헌 부대에 지금 ‘세상’이라는 새 술을 붓고, 자신만의 주특기인 본질적인 질문 던지기와 자유롭고 독창적인 글쓰기를 버무려 전혀 새로운 장르를 발효해냈다.공자는 “나는 말하지 않고자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영민은 ‘논어’ 텍스트 전체가 “발화한 것, 침묵한 것, 침묵하겠다고 발화한 것”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본다. 침묵을 매질로 삼은 메시지는 그에 걸맞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독해자를 요구한다. 따라서 이러한 분류를 염두에 두고 의도된 침묵마저 읽어낼 자세로 ‘논어’를 탐사해 나가자고 제안한다.불필요한 과장(overstatement)을 비판하고, 침묵 및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를 옹호한 공자를 통해 단순한 침묵이나 생략으로 보이는 것들이 갖는 전복적인 성격을 간파하기. 이렇듯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는 위트와 아이러니로 직조한 글쓰기로 해당 텍스트를 넘어 보다 넓은 콘텍스트의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김영민은 공자의 제자들이나 ‘논어’의 편집자가 유려한 예식의 집전자로서의 공자만큼이나 현실에서 실패한 선생의 모습을 사랑한 데 주목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허나 결함이 있더라도 자신의 결함을 인지할 수 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윤희정기자

2019-12-26

이해할 수 없는 우연으로 마주치며 서로를 이해하고…

강희영의 장편소설 ‘최단경로’(문학동네)는 한국문학에 또렷한 이정표를 새긴 걸출한 작품들을 산출해낸 문학동네소설상의 제25회 수상작이다. “어디를 봐도 흠잡을 구석이 없는 뛰어난 작품”(소설가 박민정), “에너지와 기운이 강력한 소설”(소설가 정용준)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수상의 영예를 거머쥔 작품이다.전임자의 방송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발견한 라디오 피디 ‘혜서’와 교통사고로 아이와 엄마를 잃은 ‘애영’이 각각 소리의 정체와 사고의 근원을 추적하는 여정에서 불가해한 우연으로 마주치며 서로를 이해해나가는 이야기다. 각자 다른 시선과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하나의 서사로 정교하게 수렴되는 탁월한 구성력과 완결성, 읽는 이의 마음에 곧바로 가닿는 간결하고 인상적인 문장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라디오 피디인 혜서는 전임자인 ‘진혁’으로부터 인수인계 자료가 담긴 업무용 노트북을 건네받는다. 그런데 우연히 열어본 노트북 맵의 계정은 여전히 로그인 상태이고, 맵에는 진혁이 떠난다던 시드니가 아닌 암스테르담의 지명들을 검색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진혁의 방송에서 알 수 없는 희미한 소리까지 발견한 혜서는 늘 의뭉스러웠던 진혁의 태도에 의문이 더해져 맵의 검색 기록을 단서로 그의 뒤를 좇아 암스테르담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몇 차례의 엇갈림 끝에 애영과 마주친 혜서는, 고등학생 때 진혁과 연인관계였던 애영이 임신 사실을 외면하는 그를 뒤로한 채 암스테르담에서 미술가로서 새 삶을 시작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2-19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까?

심리학은 인문학일까, 과학일까, 아니면 그 둘이 융합된 것일까? 우리는 생물학, 철학, 사회학, 의학, 인류학, 인공 지능 등 수많은 학문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심리학에 매료된다. 심리학의 본질은 마음의 작용에 근거해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감정들은 우리가 자신을 어떤 유형의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는가를 결정한다. 하지만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은 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생물학적 과정들이기도 하다.직관적 인포그래픽과 핵심 설명으로 이름난 ‘세상의 원리 시리즈’ 의 다섯번째이자 최신판 ‘심리 원리: 인포그래픽 심리학 팩트 가이드(How Psychology Works: Applied Psychology Visually Explained)’(사이언스북스)가 출간됐다.이 책은 영국 백과사전 출판 명가 돌링 킨더슬리가 기획한 전문 필진의 원고에 더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최신 주석이 포함됨으로써 더욱 이해하기 쉬운 심리 가이드북이다.‘심리학 개론’, ‘심리 장애’, ‘심리 치료법’, ‘실생활 속 심리학’등 4부로 구성돼 이론에서 치료, 개인적 문제에서 실제적 적용에 이르는 심리학의 모든 측면을 다뤘다.1부 ‘심리학 개론’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인 심리학을 소개하고 심리학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장이다. 심리학의 다양한 접근법들은 사람의 생각과 기억, 감정의 원리를 푸는 열쇠를 찾아내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심리학의 발전은 대부분 최근 약 150년 사이에 이뤄졌지만 심리학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철학자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을 분석하고 해석함으로써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알아내려고 해 왔다.마음속의 무의식적 갈등이 성격 발달을 결정하고 행동을 좌우한다고 설명하거나(정신 분석학), 사람들의 행동이 세상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학습되는 것으로 잠재의식의 영향과는 관계가 없다는 전제를 기초로 사람들을 이해하고 분석(행동주의)한다.2부 ‘심리 장애’에서 다루는 심리 장애 증상들은 대개 순환적인 사고, 감정, 행동과 관련돼 있다. 4명 중 1명이 일생 중 한 번 이상 정신 장애나 신경학적 장애를 겪는다. 심리 장애를 의학적으로 진단한다는 것은 한 개인이 보이는 신체적, 심리적 증상의 패턴을 특정한 심리 장애의 증상에 해당하는 행동에 매칭시키는 복잡한 과정이다. 학습 장애나 신경 심리학적 문제는 쉽게 알아볼 수 있지만 성격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기능 장애들은 수많은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요인이 관여하기 때문에 진단하기가 더 어렵다.3부 ‘심리 치료법’을 통해 심리학 접근 이론만큼 다양한 유형의 심리 치료법을 살펴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접근법들마다 다양한 치료 방향을 제시한다. 보건 영역에서 심리학은 구성원들의 정신 건강과 그와 연관된 신체 건강을 향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심리 치료들은 다양한 전략을 사용해 사람들이 신체적 또는 정신적 건강에 해로운 사고, 행동, 정서를 수정하고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것을 일깨워 줘 자기 인식을 증진하도록 돕는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각각의 장애에 적합한 치료법을 찾아 적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4부 ‘실생활 속 심리학’에서는 응용 심리학의 각 분야를 다룬다. 효과적으로 학습하려면 뇌 회로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 협상할 때 긴장을 줄여 주는 기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광고주들은 물건을 사도록 설득하기 위해 어떤 심리학 기법을 사용할까? 심리학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 끊임없이 변하는 학문을 구성하는 모든 다양한 이론과 장애, 치료법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교육, 직장이나 스포츠 혹은 개인적 인간 관계나 애정 관계, 심지어는 돈을 쓰는 방식이나 투표 행위조차도 각각 해당하는 심리학 분야가 있으며 누구나 지속적으로 심리학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정치와 사회, 광고와 스포츠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방면에 대해 심리학적 연구가 이뤄진다. 사람들이 일할 때나 놀 때나 어떤 식으로 세상과 상호 작용하는지를 이해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경험을 향상시키는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2-19

미술 감상?난,한 곳만 판다

“미술은 어렵다?!” 이 어렵다는 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그림감상은 어떨까?‘원 포인트 그림감상’(아트북스)은 미술책 애독자이자 미술 애호가로서 그간 ‘미술과 동행하는 삶’을 추구해 온 정민영씨가 그림 앞에서 난감해하는 관람자를 위해 색다른 그림 감상법, 즉 ‘원 포인트 그림감상’을 소개한다.저자의 전략은 이렇다.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그중 소재면 소재, 물성이면 물성, 인물이면 인물, 사물이면 사물, 어느 하나의 요소에 집중해 공략하는 그림감상법이다. 마치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배우 유오성(무대포 역)이 “난 한 놈만 팬다”라고 외치며 한 목표물(?)에만 돌진했듯이, ‘그림의 한 요소 패기’ 전략이다. 그렇게 하면 작품 전체 혹은 작가의 의도를 꿸 수 있다는 이야기다.‘원 포인트 그림감상’은 빨리 보고 많이 보는 수박 겉핥기 식의 ‘패스트 감상’이 아니라 천천히 보고 찬찬히 살펴보는 ‘슬로 감상’이라 할 수 있다. 대상을 좀 더 오래 관찰하고 작품을 곱씹어 보면 스스로 마음으로 감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러면 작품에 보다 밀착하는 ‘깊은 감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림을 감상하고 사유하는 시간을 위해 감상자와 그림 사이에 여백을 두자는 말이다. 그림은 화가의 마음이자 화가가 포착한 세상의 마음이기에, 화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저자가 제안하는 그림감상은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조형요소를 제치고 한두 가지 요소에 집중하기 전략이다. 다시 말해 작품 속에 내재돼 있는 조형요소 중 한두 요소를 파고드는 감상법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을 잃어버려선 안 된다. 작품은 관람자의 눈을 통해 감상당함으로써 비로소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감상하는 행위를 배제하면 작품은 생명을 잃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다. 감상은 작품에 관람자의 마음을 주고 전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감상 포인트는 직접적·간접적 요소로 나눠 찾을 수 있겠다. 직접적인 요소로는 소재·구성·색상 등이 있고, 간접적인 요소로는 서명·낙관·작품명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초보자가 할 수 있는 최적의 감상 포인트는 ‘원 포인트 소재’에서 찾는 것이다. 감상 포인트를 소재에서 찾아 나름의 요령이 생기면 그때는 자기 방식으로 감상하면 된다. 물론 감상에 정답이란 없다.그림감상에서 중요한 것은 관람자 저마다의 감상이다. 작품에 대한 선지식이나 선입견 없이 오로지 관람자의 눈이나 마음으로 바라볼 때, 또는 관람자의 마음속에서 영적인 힘이 발휘할 때 작품은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다시 말해 예술작품의 가치는 관람자의 시선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이에 더해 지은이는 구글링을 적극 활용해 관련 정보를 감상의 재료로 활용하라고 제안한다. 여기에서 감상은 ‘검색하기’가 아니라 ‘사색하기’가 되겠다.저자는 구체적으로 60개 작품을 선정해 어떤 포인트에 집중해 감상할 것인지를 안내한다. 예를 들어 빈센트 반 고흐의 ‘슬픔’을 보면서 그림에 나타난 나부의 새끼발가락에 주목하라는 식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고흐의 마지막 여인이었던 ‘거리의 여자’ 시엔이다. 고개 숙여 우는 듯한 자세 못지않게 생기다 만 것 같은 새끼발가락 또한 슬픔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준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저자는 또한 원 포인트 그림감상에서 그치지 말고, 원 포인트 글쓰기로 나아가길 제안한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포인트를 중심으로 메모를 한 후 거기에 자신만의 경험과 지식이 보태지고 더해져 그것이 글로, 책으로 이어지길 바란다는 이야기다. 세상에 없는, 있지만 크게 주목하지 않은 부분에 관심을 갖고, 작품과 자신의 생을 깊고 넓게 해주는 일, 그것이 ‘원 포인트 그림감상’이자 ‘원 포인트 글쓰기’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2-12

“영영 이 시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면…”

‘젊은 시인’ 황인찬(31) 시인의 세번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창비)가 출간됐다. 2010년 22살에 등단한 그는 기존의 시적 전통을 일거에 허무는 개성적인 발성으로 평단은 물론이고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등단 2년 만에 펴낸 첫 시집‘구관조 씻기기’로 최연소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 이어 두번째 시집‘희지의 세계’에서 ‘한국문학사와의 대결’이라는 패기를 보여주면서 동시대 시인 중 단연 돋보이는 주목을 받았다.4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한결 투명해진 서정의 진수를 마음껏 펼쳐 보인다. 일상을 세심하게 응시하며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환기하는 “차가운 정념으로 비워낸 시”(김현, 추천사)들이 깊은 울림을 남긴다.일상의 사건들을 소재로 하면서 평범한 일상어를 날것 그대로 시어로 삼는 황인찬의 시는 늘 새롭고 희귀한 시적 경험을 선사한다. 감각의 폭과 사유의 깊이가 더욱 도드라진 이번 시집은 더욱 그러하다. 특히 김동명(‘내 마음’), 김소월(‘산유화’), 윤동주(‘쉽게 씌어진 시’), 황지우(‘새들도 세상을 떠나는구나’)의 시와 대중가요, 동요 등을 끌어들여 패러디한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시 속에 숨어 있는 시구나 노랫말을 찾아 읽는 재미가 색다르다. 치밀하게 짜인 단어와 구의 반복적 표현, 대화체의 적절한 구사도 눈여겨볼 만하다.시인은 고백하듯이 시를 쓴다. 세상을 앞에 두고 늘 “어떻게 말을 꺼내”고 “어떻게 말해야”(‘불가능한 경이’) 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시인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이 이 시에 담겨 영영 이 시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것을 미래라고 부를 수 있다면”(‘그것은 가벼운 절망이다 지루함의 하느님이다’) 영영 탈출하지 못할 그 오래된 미래 속에서, 그리고 “이제 영원히 조용하고 텅 빈” 세상 속에서 “고독을 견뎌”(‘부곡’)내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랑을 되풀이하려는 것 같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2-12

다시 나타난 ‘불령선인(不逞鮮人: 불량한 조선사람)’ … 잔혹한 간토의 기억

2019년은 일본으로부터 혐한(嫌韓)이 폭풍처럼 불어닥친 한 해였다. 지소미아 조건부 동결과 정상회담 가능성으로 인해 협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곤 하나, 깊어진 골은 쉽게 회복될 것 같지 않다. 이런 와중에 일본의 미디어와 대중사회는 대혐한 시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일부 넷우익을 중심으로 한 혐한 현상은 이제 주류 미디어의 주류가 됨과 동시에 정부 주도의 혐한 성격도 띠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국내 최초로 일본의 ‘혐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노윤선의 ‘혐한의 계보’(글항아리)가 출간됐다. 이 책은 혐한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해 혐한 담론의 출현과 정치화되고 있는 혐한까지 그 계보를 그리고 있다.혐한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한국에서 알려진 바와 달리) 1992년 3월 4일자의‘마이니치신문’의 기사였으며, 당시에는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원망에 관한 일본인의 인식 부족을 지적하며 일본인의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이 그 중심에 놓여 있다. 그러다가 이것이 점점 한국인에 대한 혐오감, 멸시감, 체념, 우월감, 공포감, 위화감의 현상을 짚는 용어로 사용됐다.1923년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들을 가리켜 불렀던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용어가 현대에도 재등장했으며, ‘웃길 정도로 질 나쁜 한국’과 같은 말들이 나돈다. 심지어 “악(惡)이라기보다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 가까운” 게 한국인의 본모습이라고 말한다.현재 일본은 국내 혹은 국제정치에서의 도구로 혐한을 활용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눈앞의 현실을 살피는 가운데 그 기저에 있는 뿌리 깊은 내용까지 캐내려 한다. 혐한의 사고방식은 무엇이고, 어디서 왔는지, 더욱이 일본 내 문화와 결합되면서 어떻게 거부감 없이 국민에게 주입돼 왔는지를 규명한다.그를 위해 1990년 초반의 혐한 태동기부터 2002년 월드컵 이후 본격화된 시기, 그것의 미디어적 전개, 넷우익과 거리 시위로의 확산, 매 시기 혐한의 변곡점이 무엇이고 이것을 주도한 인물과 책은 무엇인지 등 혐한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정리해낸다. 일본에서 이는 최근의 혐한 움직임과 관련해 전체적인 지형도를 그린 1부와 박사 학위 논문 ‘일본 현대문화 속의 혐한 연구’를 근간으로 재정리한 2부로 구성됐다.책은 야마노 샤린의 ‘만화 혐한류’를 비롯해 소설 ‘반딧불이의 무덤’‘요코 이야기’ ‘해적이라 불린 사나이’‘영원한 제로’등 혐한 관련 베스트셀러들을 정밀하게 분석했다. 저자는 이들 작품이 널리 읽히는 현상 자체가 가족애와 결합된 애국정신의 전형적인 퍼포먼스이며, 혐한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강화돼 가는 모습이라고 평가한다.또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에서 하나의 ‘사회적 구호’로 나타난 혐한 현상을 간토대지진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대비시켜서 바라보고 왜 증오의 피라미드가 다시 쌓아지기 시작하는지를 살펴봤다.2009년에 30건에 불과하던 혐한 시위는 2011년에는 82건으로 늘어나더니 2012년에는 301건을 기록했다. 3년 사이에 10배 급증한 것이다. 재일코리안은 일주일에 다섯 번 이상 혐한에 노출된 셈이다. 혐오 발언은 “조센진(朝鮮人)을 죽이자, 학살하자”라는 폭력적인 구호로까지 나타났다. 이는 간토대지진을 떠올리게 한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2-05

‘도시수행자’의 실시간 스트레스 대응 전략

‘참선’1·2(나무의마음)는 1987년에 암울한 세상과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홀로 한국에 왔던 스물두 살의 교포청년 테오도르 준 박이 30년 가까이 전통 선방에서 참선 수행을 하고, 이제는 ‘21세기 도시 수행자’가 돼 쓴 에세이다. 미국에서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젊은이가 언어도 문화도 다른 한국의 절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시행착오를 거듭한 세월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자 21세기 현대인들의 일상에 꼭 필요한 참선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안내서다. 저자는 스스로의 경험과 국내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참선이 흐리고 왜곡된 마음 상태를 맑고 깨끗한 상태로 만들어준다는 것, 그러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판단력이 좋아지며 학업이나 업무의 성과도 높아진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얼룩 없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보니 쓸데없는 생각, 불필요한 감정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 없이 원하는 것에 집중하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것이다.저자는 참선을 ‘행복으로 가는 새로운 공식’이라 표현하며, 정신적으로 많은 자극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참선과 같이 누구나 쉽게 배우고 활용할 수 있는 자기 제어 기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참선은 온갖 정보와 자극에 쏠린 우리의 의식을 내면으로 돌려 마음의 힘을 기르는 방법이다. 저자가 알려주는 참선은 어렵지 않다. 올바른 자세와 복식호흡, ‘이뭣고?’ 화두, 이 세 가지만 알면 된다. 가부좌로 앉아, 복식호흡을 하면서, “이뭣고?”(‘이것은 무엇인가?’를 세 음절로 줄인 표현)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멈췄다가 다시 내쉬면서 “이뭣고?” 하면 된다.저자는 21세기 도시 수행자답게 가부좌로 앉아서 하는 참선뿐 아니라 의자에 앉아서, 서서, 심지어 누워서 할 수 있는 참선도 알려준다. 참선이 배우기 쉽고 그 효과가 놀랍다는 것을 굳게 믿지만, 꾸준히 오래 지속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기에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 참선하는 것을 자꾸 잊어버릴 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때, 참선의 효과에 의구심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큼 오래 걸리지 않고, 쉽게 참선을 배워 참선의 혜택을 누리면 좋겠다는 게 저자의 가장 큰 바람이다. 따라서 종교적 당위성에 기대 참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자신이 오랜 세월에 걸쳐 경험하고 납득한 것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현대 심리학과 요가, 프라나야마 호흡법 등 참선의 효과를 이해하고 참선을 꾸준히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다양하게 시도해보고 그 결과도 공유한다.저자는 이미 깨달음을 얻고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누구나 참선을 하면 불안과 분노, 우울, 자괴감 같은 내적 고통에서 벗어나 일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데도 그 방법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곳을 찾기가 어려우니 자신이 배운 것을 나누고자 나선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편견과 환상만 있을 뿐 제대로 소개된 적 없는 한국의 전통 참선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한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선사로 꼽히는 송담 스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종교적 관습과는 거리를 두고 지극히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참선의 가치와 활용법을 이야기한다. 참선의 효과를 맹신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몸으로 확인하고자 한 저자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참선’은 2권으로 이뤄졌다. 1권 ‘참선 : 마음이 속상할 때는 몸으로 가라’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저자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인천 용화사를 찾아 송담 스님의 제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출가 수행자로서의 고뇌와 갈등, 어렵게 배운 참선의 원리와 방법, 참선을 일상화하기 위한 전략을 소개한다. 또한 불안과 화, 외로움, 우울, 패배감 같은 현대인을 괴롭히는 정신적 고통을 참선으로 해소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2권 ‘참선 : 다시 나에게 돌아가는 길’은 20년 넘게 대중의 관심을 피해온 저자가 송담 스님의 조언에 따라 TV에 출연해 참선을 가르치기 시작한 후 그전까지 상상도 못했던 출구전략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이 담겨 있다.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고 ‘현실 수행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설렘과 두려움도 털어놓는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참선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방식으로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참선과 리더십, 참선과 과학기술, 참선과 사랑의 관계를 저자만의 시각으로 진지하면서도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1-28

‘모든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살지 않는다’

노벨문학상·맨부커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프랑스 공쿠르상 올해 수상작가에 장 폴 뒤부아(70)가 선정됐다.선정 작은 뒤부아의 최신작 ‘모든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살지 않는다’(Tous les hommes n‘habitent pas le monde de la meme facon·롤리비에 출판사).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감옥에 갇힌 덴마크-프랑스계 남자 주인공 폴 한센이 폭력배 출신의 수감자와 감방을 함께 쓰면서 자신의 지나간 인생을 회고하는 내용이다.감옥 생활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죽은 자들과 상상의 대화를 하며 지낸다. 상실과 회한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은 뒤부아가 그동안 써낸 소설 가운데 최고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간 르 몽드는 지난 4일(현지시간) 공쿠르상이 발표된 뒤 수상작에 대해 “화자의 고통스러운 이야기 속에서 뒤부아는 몽환, 샤머니즘, 해학의 순간들을 빛나게 포착했다”면서 “이 작품에는 시종일관 가벼운 웃음을 잃지 않게 하는 우아함이 있다”고 호평했다.현대 프랑스 소설에 하나의 브랜드를 제시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장 폴 뒤부아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랑스적인 삶’‘타네 씨, 농담하지 마세요’‘케네디와 나’‘이 책이 너와 나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등 네 권의 소설이 2006년 국내에 소개됐고 출간을 즈음해 내한해 서울에서 강연회와 독자 사인회를 갖기도 했다.국내 번역 출간된 그의 소설 4권을 소개한다.△‘프랑스적인 삶’1958년부터 출범한 제5공화국을 배경으로 프랑스 현대사의 환멸과 갈등을 저자의 개인적 좌절과 고난, 가족적 파탄 등 삶 전체와 절묘하게 조화시킨 자전적 소설이다. 삶의 길을 찾는 무정부주의자, 사주의 딸과 결혼하는 스포츠 지 기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무 사진을 찍어서 유명한 사진가가 되지만 무력한 남편, 게으른 연인, 있으나마나 한 아버지, 피곤에 지친 봉급 생활자로서의 삶이 주인공 폴 블릭의 생애를 가로지른다.△‘타네 씨, 농담하지 마세요’삼촌에게서 대저택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주인공이 집수리를 하면서 경험하는 ‘노가다’ 세상의 이모저모를 그린 작품으로 전작 ‘프랑스적인 삶’에서처럼 작가 특유의 익살과 유머가 돋보인다.△‘이 책이 너와 나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지독한 절망감에서 ‘살아돌아온’ 한 남자가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의 작품이다. 아내와 이혼하고 외톨이가 된 중년의 남성 폴 페레뮐터. 일년 전 그는 죽고 싶을 만큼 큰 절망감에 빠져있었다. 우연히 들른 비뇨기과에서는 생식능력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고 그 뒤 아내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삶에 대한 열정을 잃고 한없이 무기력감에 빠져있던 남자. 그는 갑자기 자신이 그동안 “살아왔다기보다는 부자연스럽게 생을 포장해왔다”고 느낀다. 그는 삶을 완전히 바꿔보기로 결심한다.△‘남자 대 남자’왜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할까. 이 책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게 마련인 의문들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결국 모든 면에서 상반되는 두 남자의 맞대결로 끝을 맺는다. 일상적이고 흔한 풍경속에는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비극적인 색조, 이를테면 권태, 삶의 위기, 무력감, 욕망의 좌절 등이 담겼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