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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중심축 세우기

“왜 툭하면 불필요한 자책과 자기비하에 시달릴까? 어떻게 하면 자존심을 지키며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누구에게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이 같은 열망, 인정받고 싶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다루고, 또 만족시킬 수 있을까?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양창순 박사가 ‘참 괜찮은 나’를 만나는 자기 탐구의 길잡이로 나섰다. 40만 부가 판매된 전작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가 인간관계에서의 상처를 줄이는 것을 주제로 했다면, 신간‘오늘 참 괜찮은 나를 만났다’(김영사)에서는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위로와 칭찬, 이해와 수용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것이 우리의 내면에 균형과 조화, 나아가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는 근원적인 힘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게 내면의 중심축을 바로 세울 때 자신을 향해, 그리고 상대방을 향해서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기대다. 근원적이면서도 대단히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름난 경험 많은 상담가답게 인간의 내밀한 욕구와 필요를 하나하나 차분히 응시하면서 자존감과 자기 확신에서 편안한 인간관계와 합리적인 사회생활, 그리고 더 성숙한 삶에 이르는 여정을 안내한다.잠들기 전 오늘 만난 사람들에 대해 필름을 돌려본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했을까?’ 조금이라도 거부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좌절과 우울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예민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도 종종 경험하는 일이다. 적에게조차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기 때문일까. 남들에게 거부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격려받고 싶다. 이 같은 필요를 지닌 이들에게 저자는 스스로에게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 하고 말해주라고 조언한다.이렇게 책은 먼저 인간의 정신적 생존에 꼭 필요한 자존감, 자기 긍정, 자기 확신의 문제를 다룬다(1, 2장).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후회와 자책에 불필요할 정도로 빠져들곤 한다. 말하자면 내면의 중심축이 한쪽으로 쏠려 있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일이다. 자신에게 너그러워져야 하고 때론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야 할 때도 있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그렇게 하여 자신의 내면의 곳간이 넉넉해질 때, 이러한 자기 긍정의 토대 위에서 다른 이들과 좀 더 편안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3장). 특히 직장생활과 조직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다루는 대목(4장)과 대표적인 심리적 문제들을 짚어보는 대목(5장)은 저자의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이 빛을 발한다. 어려운 정신의학 이론을 들먹이지 않고 쉽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강점인데, 상담 중 만난 실감나는 사례와 문학작품 및 영화에서 가져온 이야기는 자연스레 읽는 이에게 흥미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인격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조언, 이를테면 휴식, 취미, 독서,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는 것의 중요성에 관한 글들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6장).삶이 너무 고단하고 인간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더 좋은 삶의 전망을 포기하고 당장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사소한 것들에만 관심을 두기 쉽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현실의 문제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더 나은 삶, 편안한 관계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더없이 귀중한 지혜를 선사할 것이다.“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먼저 나의 내면이라는 곳간이 풍성해야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도 생긴다. 나는 그 곳간을 채우는 양식이 있다면, 바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내면의 중심축이 확고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아니면 외국어를 배우려고 기울이는 노력의 10분의 1만이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려고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최소한 내면의 중심축이 치우치는 일은 없지 않을까?” _10쪽다음은 양창순 박사가 제안하는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5가지 자존감 수칙.1.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떤 일을 잘했으면 그런 자신을 칭찬해준다. 그런 칭찬이 쌓여서 내 마음의 자산이 된다.2. 남의 탓, 환경 탓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분노에 사로잡혀 귀중한 시간을 써버리는 것보다 더 큰 낭비가 있을까.3.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데 천재가 아닌지 돌아본다. 실제 일어난 일에 눈덩이처럼 더해지는 우리의 감정과 생각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4. 인간관계도 날씨와 같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고 생각하자. 상대의 행동을 다 나와 연관해 생각하는 것이 지나치면 관계망상이 된다.5.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지 않으면서 남이 나를 소중하게 여기기를 바랄 수는 없다. (103-107쪽)/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9-08-08

‘日거리의 사상가’그신랄한일본사회비판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우리나라에 수출규제를 단행하면서 한일 갈등이 최악의 국면을 맞고 있다. 일본은 ‘전략물자 밀반출과 대북제재 위반 의혹’을 들먹이며 화이트국가에서 제외하겠다고 위협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비이성적인 행태로 우리나라와 갈등을 일으키고 일부 우익 정치가들이 무례한 망언을 일삼으며 일반 시민들 사이에 ‘혐한’ 분위기를 부추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일찍이 일본의 반지성주의를 경계하고, 평화헌법을 폐기하려는 아베 내각을 향해 ‘독재’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던 일본의 대표적 지성 우치다 타츠루(고베여자대학교 명예교수)는 현재 일본 사회가 강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어떤 이유인지, 어떤 형태인지, 대응 방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의 원인을 자꾸만 외부에서 찾으려는 정치담론이 유행한다는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지난달 중순 한 국내 언론사와 인터뷰하며 일본 엘리트층의 ‘파국 원망’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좀 더 구체화했다. “기존 체제를 개선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하는 아베는 자신의 무능함을 사과하느니 상황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을 선택했다. 파국적 상황이 만들어지면 아무도 실패의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나만 망하는 것은 싫다. 모두가 함께 망하면 내 무능력도 비난받지 않는다는 논리”라는 것이다.‘대세를 따르지 않는 시민들의 생각법’(바다출판사)은 우치다 타츠루가 일본의 진보적 신문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주간지에 6년 동안 연재한 인기 칼럼을 모은 책이다. 연재 기간 동안 일본에서는 두 차례의 정권교체와 오키나와 기지 이전 논란, 올림픽 유치 캠페인, TPP 협정 참가, 독도 및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영토분쟁 등 굵직한 이슈들이 잇따랐고, 무엇보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집단 자위권을 인정하는 안보법 개정 같은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우치다 타츠루는 다양한 시사 쟁점을 다루며 현재 일본이 처한 불안과 위기의 징후들을 읽어낸다. 그가 포착하는 일본 사회의 면면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혼미의 시대에 사회 곳곳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국가 시스템의 낙후성을 만천하에 드러냈으며, 공적 신뢰가 심각하게 무너진 나머지 근본적인 재편은 바랄 수도 없고, 정치가와 관료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들 어떤 변화도 시도하지 않으리라는 절망감이 팽배해 있다. 더 이상 경제성장은 없으며 이대로 가면 불가피하게 활기 없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체념과 아무리 혼자 발버둥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답답하고 무력한 분위기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우치다 타츠루가 “전후 일본의 모든 정부 중 가장 무능한 정부”라고 평가하는 아베 정권은 이제 새 질서를 만들 힘도, 비전도 없기에 상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파국을 향해 폭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치다 타츠루는 몇몇 사회 엘리트들의 여론몰이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적이고 성숙한 시민들, 대세를 따르지 않는 시민들의 참여로 사회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으며 시민들의 각성을 촉구한다.이제까지 100여 권의 책을 발표하며 우치다 타츠루가 일본 사회를 일관되게 비판해온 논지는 ‘어른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가 말하는 어른이란 “적절할 때 적절한 곳에서 적절하게 행동하는 사람” “어떻게 행동해야 좋은지에 대한 적절한 기준이 없을 때에도 적절하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오늘날 일본의 문제는 그러한 어른, 곧 성숙한 시민, 지성인이 점점 사라지고 정치도, 그것을 말하는 언어도 갈수록 단순화·획일화, 유아화·열등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비록 듣기 거북할지라도 ‘아무도 하지 않는 이상한(?) 이야기’를 계속함으로써 위기에 대비할 수 있도록 경종을 울리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으며, 소시민들이 하루하루 열심히 생활해가면서도 동시에 더 넓은 시야에서 세계와 미래를 바라보며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성숙한 시민, ‘위대한 시민’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이 책에서 우치다 타츠루가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인물은 당연하게도 아베 신조 총리다. 그는 ‘아베노믹스’를 ‘아베 거품’ 즉 언젠가 휴지조각이 될 것을 비싼 값에 팔아치우려는 이들이 순박하고 어설픈 먹잇감을 꾀는 노름판이라고 단언한다.우치다 타츠루는 국가안전보장회의 관련법, 특정비밀보호법, 공모죄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서 일본 국민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전후 처음으로 ‘진심으로 전쟁을 개시할 마음이 있는 정부’를 갖게 됐다고 통탄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8-01

쏟아지는 가짜 뉴스와 정보, 진짜 돈과 자산을 지켜라

‘페이크’는 전 세계에서 4천만 부 이상 판매된 재테크 밀리언셀러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시리즈의 최신작(미국 현지 2019년 4월 출간)으로, 현재 시장에 만연한 ‘가짜 돈’, ‘가짜 교사’, ‘가짜 자산’의 실상을 파헤친다. 기존의 부자 아빠 시리즈에서 밝히지 않았던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쉽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지금 이 시대에 맞는 돈과 투자의 비법을 들려준다.이 책은 현재 세계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가짜 돈과 자산들이 무너지면서 사상초유의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저자는 금융 및 경제와 관련된 복잡한 개념을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하며 그 문제점을 짚는다.2008년 700조 달러 규모에 이르는 파생상품 시장이 붕괴해 세계 경제가 무너질 뻔했다. 부채담보부채권(CDO), 주택저당증권(MBS), 신용부도스왑(CDS) 등의 파생상품, 즉 가짜 자산이 그 원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여전히 금융계의 엘리트 계층들이 ‘금융 공학’을 통해 가짜 자산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그 규모는 2008년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난 1천200조 달러(141경 원)에 달한다.저자는 이러한 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가짜 자산과 진짜 자산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가짜 자산은 부자를 더욱 부자로 만들고, 그 실패 비용은 평범한 사람들이 부담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를 구분하는 가장 간단하면서 실용적인 기준은 “자산은 내 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는 것”이고, “부채는 내 주머니에서 돈을 빼 가는 것”이다. 저축 계좌나 주식, 채권, 뮤추얼 펀드, ETF, 연금 계획 등은 가짜 자산이다. 투자자가 투자금과 리스크를 전부 부담하지만 수익은 일부만 얻는, 즉 “내 주머니에서 돈을 빼 가는”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다.더불어 이 책에서는 “내 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는” 무한수익을 창출하는 금과 부동산, 사업체 등 진짜 자산을 구축하는 원리와 방법에 대해서도 설명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8-01

작아서 더 아름다운 미생물의 매력속으로…

위대한 고생물학자이자 진화 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지구는 첫 화석이 만들어진 뒤 내내 ‘세균의 시대’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30억 년 전부터 지구의 암석 속에서, 바다 속에서 번성해 온 세균류는 지구에서 가장 유서 깊고, 지구에서 가장 많은 생물량을 차지하는 지배적인 존재였다. 세균만이 아니라 고세균류나 바이러스류까지 포함한 미생물의 역사는 더 오래되고 깊다. 지구가 소행성과 혜성의 대규목 폭격에서 막 벗어나 식기 시작했을 때인 40억 년 이전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암석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지구 미생물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사실 지구 역사의 4분의 3의 기간 동안 생명의 역사로 치면 6분의 5 기간 동안 지구에는 미생물만 있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류의 역사와 다양성은 미생물의 역사와 다양성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은 보이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무시돼 왔다.지구의 진정한 지배자 미생물의 왕국은 1673년 네덜란드 옷감 상인 안톤 판 레이우엔훅이 현미경을 발견해 이슬 한 방울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다. 그러나 이제 레이우엔훅으로부터 350년 정도 흐른 지금 인류는 미생물 왕국의 힘을 이해하게 됐다. 아니, 현대 인류 문명 자체가 미생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빵, 술, 김치 등을 만드는 식품 산업은 물론이고, 보톡스, 항생제, 백신, 항암제 등을 개발하는 제약 산업, 심지어 바이오 연료를 생산하는 에너지 산업에 이르기까지 현대 문명의 곳곳에서 미생물학이 다양한 모습으로 활약하고 있다. 미생물이 없으면 이제 우리는 식사 한 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질병 치료조차 원활히 받을 수 없다.신간 ‘아름다운 미생물 이야기’(사이언스북스)는 현대 사회의 필수 교양으로 부각되고 있는 미생물학에 대한 종합적인 개괄서다. 김완기 아주대 의과대학 약리학과 교수 겸 대학원 의생명 과학과 교수와 최원자 이화여대 자연과학대학 생명과학과 교수 겸 대학원 에코 과학부 교수가 함께 펴낸 이 책은 40년간 분자 생물학과 미생물학 분야에서 연구와 교육을 해 온 두 저자의 경험과 지혜가 오롯이 녹아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7-25

낮은 자세로, 공손한 마음으로 사소한 일상을 품어안는 시

세상을 바라보는 온유한 시선과 유쾌한 발상이 돋보이는 순박한 시편들로 개성적인 서정의 세계를 펼쳐온 고영민 시인의 신작 시집 ‘봄의 정치’(창비)가 출간됐다. 2002년 ‘문학사상’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은 그동안 서정시의 다채로운 변주를 보여주며 17년간 꾸준히 시작 활동을 해왔다. 따뜻함과 삶의 비애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그의 시는 다양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데, 특히 일상적인 소재에 곁들인 유머와 해학은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친근한 언어로 정통 서정시 문법에 가장 충실한 시를 쓴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은, 그간 지리산문학상(2012)과 박재삼문학상(2016)을 수상하면서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봄의 정치’는 박재삼문학상 수상작 ‘구구’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 “생의 활력이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오롯한”(안지영, 해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기존의 섬세한 시어와 결 고운 서정성을 간직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과 사물의 존재론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표제작‘봄의 정치’를 비롯해 총 66편의 시를 4부에 나눠 실었다.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한 생명의 새로운 경지를 발견해내는 시인은 “어떤 속삭임도/들을 수 있는 귀”와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눈”(‘내가 어렸을 적에’)으로 사물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간다. 일상의 소재들을 마음껏 부리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의미와 무의미의 내밀한 관계를 안과 밖으로 변주하면서 “안에서/밖을 만드는”(‘밀밭 속의 개’) 시적 사건들을 포착해낸다. 더불어 시인은 “액자를 떼어내고 나서야 액자가 걸렸었다는 것이 더 뚜렷해지는”(‘액자’) 이치를 깨달으며, 부재로 인해 존재가 드러나는 삶의 역설적인 풍경을 깊은 통찰력으로 응시한다.시인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소멸돼가는 존재들에게 온기를 불어넣는다. 마치 “입속에 새끼를 넣어 키우는/물고기”(‘입속의 물고기’)같이. 낮은 자세로 다가가 사물에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끝내 아무것도/움켜쥐지 못한”(‘조약돌’) 존재들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공손한 마음으로 사물의 본성을 일깨우며, 쓸쓸하게 저물어가는 생의 뒷면을 따듯하게 품어안는다.송재학 시인은 “고영민의 시공간에서는 일상과 온기가 서로 살고 있다. 서로의 계절이기도 하다. 현실의 상상력이면서 현실의 반대 혹은 기억들인 온기는 일상을 울울하고 헐렁하게 포옹한다. 울울할 때 시인의 말은 겸손해지고, 헐렁하다면 시인은 말을 줄인다. 고영민의 시가 애틋한 소이연이 저러하다. 오래도록 시인은 날짜들에게 죄다 공손했다. 윤달이 필요할 때마다 고영민의 시집을 뒤적거려야만 했다”고 평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7-25

먹구름 위 뚫고 올라갈 ‘내면의 힘’을 길러라

한국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인 조신영씨는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힐링이 되는 ‘조신영의 새벽편지’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매일 아침 경북매일 지면을 통해 그는 위안과 행복의 메시지를 전해주며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엘리베이션 파워’는 조신영 작가가 2018년 4월부터 11월까지 주말, 공휴일 가리지 않고 200일 동안 매일 한 편씩 써 내려간 칼럼 중에서 50편을 추려, 책의 형태로 엮은 것이다. 저자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2시에 일어나 글을 썼다. 날마다 엘리베이션 파워를 기르기 위한 그만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매일 새벽 6시면 완성한 글을 블로그 (blog.naver.com/dyhope) 이웃들과 경북매일에 연재해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나눴다. 조신영 작가 특유의 따스하고 감동적인 글은 아침 출근길 마음을 새롭게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를 뿌리 삼아 엘리베이션 파워를 기르는 방법을 이해하기 쉽고 감동할만한 이야기로 풀어내 구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자아냈다.6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경청’,‘쿠션’의 저자이기도 한 조 작가는 생각을 생각하는 힘, 즉 엘리베이션 파워(Elevation Power)를 기르는 일이 삶의 자유를 확장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믿는다.그는 “사회적 날씨에 휘둘리지 않는 주도적인 삶의 비결은 먹구름 위로 뚫고 올라갈 수 있는 내면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 내면의 힘을 엘리베이션 파워라고 합니다. Elevation에는 ‘위로 올라가다’라는 뜻 이외에도 ‘고결한’이란 뜻도 있습니다. 부단히 내면의 정원을 가꾸는 정성이 이런 고결한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날씨는 변화무쌍하게 계속될 것입니다. 날씨에 영향을 받는 반사적 삶이 아닌, 내면의 가치에 이끌려 살아가는 주도적 삶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먹구름 위 눈부신 삶은 내 선택으로 결정할 수 있는 목적지입니다”라고 전했다.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과연 잘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불안감에 짓눌리지 않고 마음껏 자유를 추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은 안녕한가? 우리는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저자는 고단한 우리를 먹구름 너머 눈부신 삶으로 안내한다. 먹구름 아래 사회적 날씨에 저항하며 의미를 향한 존재로 거듭나기를 갈망한 이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이 책에 담긴 50편의 이야기는 일상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엘리베이션 파워의 가치를 알려준다.책은 프롤로그, 1부 먹구름 아래, 요란한 삶 2부 먹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힘, 엘리베이션 파워 등 2부 11장으로 구성돼 있다.1963년 서울 출생인 조신영 작가는 엘리베이션 파워를 기르기 위한 목적으로 생각학교ASK를 설립, 운영 중이며 고전적 교육 방법인 트리비움(문법, 논리, 수사)으로 리버럴 아츠 (Liberal arts)를 생각학교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새벽 2시부터 글을 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생각을 생각하는 힘에 관한 책을 지속적으로 쓸 예정이다.“먹구름 아래 우리 삶은 치욕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자존감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순간도 있습니다. 한계가 우리를 낙담케 한다 할지라도 거기에 굴복하면 안됩니다.” ‘엘리베이션 파워’ 33쪽“삶이 변하지 않고 늘 제자리 걸음을 하는 이유는 대오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오각성 없이 먹구름 위 눈부신 삶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엘리베이션 파워’123쪽/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7-25

‘현대 심리학 거장’ 알프레트 아들러의 삶과 이론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알프레트 아들러(1870∼1937). 그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과 함께 ‘현대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는 인간의 열등감을 다룬 대표적인 개인심리학자다. 그는 인간행동을 권력에서의 의지로 설명하며 열등감을 보상하고자 하는 과정을 통해 삶이 지속된다고 했다. 그리고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가 아닌 능동적인 유기체로서의 인간은 주체적으로 설정한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며, 내면의 열등감은 자아실현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설명했다.최근 출간된 ‘아들러 평전’(글항아리)은 알프레트 아들러라는 인물과 그의 개인심리학 이론을 새롭게, 그리고 깊이 있게 다룬 책이다.아들러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전기인 이 책은, 현장 심리학자이자 전기 작가로 미국 예시바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중을 상대로 긍정 심리학에 대한 강연을 펼치고 있는 에드워드 호프먼 교수의 저작이다. 그가 1994년에 쓴 이 책은 아들러의 전생애를 한 권에 담고 있으며,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이론이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첫 등장과 발전까지의 과정을 모두 보여준다.오늘날 현대사회는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인간의 질적 삶을 중요시하기 보다는 물량적 가치와 결과에만 집중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인과 비교하기에 급급해 하며 더 우월한 삶, 인정받는 삶을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한다. 그러나 희망과 삶의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점차 불안이 커지기 시작하고 결국 개인의 성취보다는 과열된 무한 경쟁사회 속에서 스스로 실패했다고 느끼는 열등감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일반적으로 열등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정적인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다. 그러나 알프레트 아들러는 그의 개인심리학에서 인간은 누구나 목표지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열등감을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라고 정의했고, 사람들이 이러한 열등감이라는 감정을 수용할 용기와 사회를 향한 관심을 가질 경우, 인간 내면에 잠재된 창조성을 통해 이를 극복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다고 헀다. 즉, 인간은 열등감을 이겨내고자 하는 본능으로부터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설명하며 인류의 발전 또한 열등감의 산물이라고 언급했다.일반적으로 열등감은 자신감 상실이나 현실 회피 등을 유발하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분류되지만, 아들러는 만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분류했다. 열등감은 인간이 목표를 가지고 좀 더 잘 살아가려고 할 때 수반되는 것으로, 열등감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어떻게 사용하고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한 자기결정성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그는 개인 내면에 자리한 열등감을 마주하고 극복방안을 찾는 순간이 한층 더 우월한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성장의 발로이기 때문에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안은 무한한 창조능력인 자유의지임을 강조했다.특히, 그는 사회적인 소속감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을 중시하며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아성장에 이르기 위해서는 개인중심적인 시야에서 벗어나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그는 인간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자유와 책임을 지는 주체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바라봤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공동체 의식을 겸비하고 있다면 건강한 정신 상태를 지니게 됨으로써 심적 해방감을 얻게 돼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바라봤다. 이처럼 아들러는 인간에게 잠재돼 있는 사회성을 고양시켜 능동적으로 삶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창조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이 책의 서문은 알프레트의 아들 정신의학자 쿠르트 아들러가 직접 썼다. 아들러와 관련된 저작은 많이 나와 있지만, 대부분 아들러와 프로이트의 초기 관계와 뒤이은 결별 등 이런저런 이야기에만 집중돼 있거나 아동, 성인, 가족과 관련된 이론과 치료 기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쿠르트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아들러)와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를 생생하게 그려낸 최초의 본격적인 전기”다. 이 책은 아들러의 인생사뿐 아니라 그가 직접 만났던 수천 명의 사람과 현대 심리학 전체에 영향을 미친 위대한 심리학자로서 성장한 이야기들을 모두 담았다. 프로이트와의 관계 등 지엽적인 내용에만 매진한 다른 책들과 차별적으로, 호프먼 교수는 특히 미국에서의 아들러의 경력까지 자세하게 서술했다. 평생을 ‘프로이트의 추종자’로 불리며 쌓였던 아들러에 대한 오해가 이 책을 통해 풀린다. 또한 처음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무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아들러의 미국에서의 생활을 상세하게 알렸다. 아들러의 개념들을 알기 쉽게 소개하는 것 외에도 아들러의 생애를 의미 있는 역사적 맥락에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역시 특별하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아들러와 그의 삶, 격동의 역사를 모두 만나보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7-18

‘20세기 포스터 모더니즘 선각’ 보르헤스와 마주하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현대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20세기 중반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각자로 평가받는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서사 형식으로 문학과 철학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남겼다. 보르헤스는 ‘픽션들’, ‘알레프’ 등의 단편소설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소설가였고, 생전 주제와 형식을 가리지 않고 수천 쪽에 달하는 에세이를 남긴 산문 작가이자 평론가였으나, 무엇보다 시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를 첫 책으로 내며 문학 여정을 시작한 시인이기도 했다.최근 민음사에서 출간한 그의 시선집 ‘창조자’는 라틴아메리카 문학 연구 및 번역에 앞장서 온 우석균 서울대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교수의 번역으로 이뤄졌다.‘창조자’는 보르헤스 만년기의 대표 작품집 ‘창조자(El Hacedor)’(1960)의 주요 수록 시와 보르헤스 시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별도의 여섯 편을 함께 엮었다.“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신은 빛을 여읜 눈을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눈에 선사하네.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원고들 같이까다로운 책들을.”―‘축복의 시’에서보르헤스의 시 세계는 그의 나이 30세였던 1929년과 50대 중반이었던 1955년 이후, 즉 청년기와 만년기로 나뉜다. 이를 가르는 중요한 사건은 시력 상실이다. 특히 ‘창조자’는 보르헤스가 눈먼 후 공동 저작 외에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으로, 갑자기 암흑세계에 빠진 심경을 최초로 드러낸 것이었다.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이러한 ‘눈먼 도서관의 주인’ 보르헤스를 오마주하기도 했다.보르헤스 역시 자신의 내면 세계가 가장 진하게 녹아 있는 작품으로 주저 없이 ‘창조자’를 꼽았다. 단편소설의 플롯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작가의 자기 고백적 목소리는 보르헤스 문학의 미로를 푸는 열쇠가 바로 시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들은어느덧 내 영혼의 고갱이라네.분주함과 황망함에 넌덜머리 나는격정의 거리들이 아니라나무와 석양으로 온화해진아라발의 감미로운 거리,불후의 광대무변에 질려대평원그리고 참으로 광활한 하늘이 자아내는가없는 경관으로 감히 치닫지 못하는소박한 집들이 있는,자애로운 나무들마저무심한 한층 외곽의 거리들.이런 모든 거리들은 영혼을 탐하는 이들에겐행복의 약속이라네”─ ‘거리’에서청년기의 보르헤스는 ‘울트라이스모’(일종의 전위주의 운동)를 제창해 모더니즘 일변도였던 아르헨티나 문단 쇄신에 앞장섰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공간,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지방색이 강한 자유시를 많이 남겼다. 그러나 눈먼 후 만년의 그는 정형시에 주력했다. 운율과 리듬을 맞추는 것이 기억과 구술에 의존해야만 했던 창작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텍스트에 대한 집요한 검열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혹자는 그가 일생 동안 청년기 시에 수차례 개작을 거쳐 ‘울트라이스모’와 지방색을 없앤, 아예 새로 쓴 다른 시가 되었다고 평하기도 한다.이번‘창조자’에 수록된 청년기 대표시는 개작 전 초판본을 번역했다. 보르헤스 애독자라면 누구나 찾아보고 싶었던 초기 보르헤스 시의 전위적인 작품부터 가장 잘 알려진 보르헤스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후기 시의 원숙함까지 한 권에 담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7-11

삶과 삶이 교차하는 그 우연하고도 필연적인 순간

‘무엇이든 가능하다’(문학동네)는 2009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세계적 거장 미국 여류 소설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63)의 신작 소설집이다. 삶의 깊고 어두운 우물에서 아름답고 정결한 문장으로 희망을 길어내는 스트라우트의 여섯번째 소설이다. 미국 일리노이주에 위치한 가상의 작은 마을 앰개시를 주요 무대로 해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인물들의 삶을 아홉 편의 단편에 담아 엮었다.작가는 제각기 자기 몫의 비밀과 고통과 수치심을 품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욕망과 양심의 충돌, 타자를 향해 느끼는 우월감과 연민, 늘 타인에 의해 상처를 입으면서도 타인의 관심을 끝없이 갈구하는 인간의 비극적인 아이러니를 예리하게 포착해낸다.스트라우트는 언제나 우리 삶의 근원에 자리한 외로움과 인간의 존재 조건이 지닌 한계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이 책에서 작가는 한층 더 예리하고 냉철한 시선으로 인간의 어두운 욕망과 내적인 갈등을 조명한다. 삶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순간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온 남자는 인생의 말년에 어쩌면 진실은 지금껏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앞에 무너지고(‘계시’), 부유하고 풍족한 삶의 이면에 존재하는 배우자의 추악한 비밀은 끝없는 번민과 고통을 낳으며(‘금 간’), 또다른 이는 전쟁에서 자신이 목격하고 저지른 끔찍한 일들로 인해 순수에 대한 혐오와 동경을 모두 지닌 채 방황한다(‘엄지 치기 이론’). 소설 속에서 삶은 상실의 연속이자 상실 이전의 삶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는 과정이다.스트라우트에게 인간의 삶은 그 모든 결함과 맹점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냉소의 대상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의 대상이다. 삶에 내재한 근본적인 한계는 그 한계가 극복되는 순간을 더 빛나게 만드는 어둠이다. 작가는 우리가 매일 서로에게 무지와 오해를, 크고 작은 폭력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서로에 대한 이해가 열리는 찰나의 순간, 그런 선의로 충만한 순간들 역시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7-11

‘역사저널 그날’ 고려편, 드디어 책으로 만난다

민음사에서 펴낸 ‘역사저널 그날’ 시리즈는 KBS의 교양 역사 토크쇼 ‘역사저널 그날’의 재미와 깊이를 온전히 책으로 담아내 호평을 받았다. 역사(History)가 지닌 이야기(Story)로서의 재미를 극대화한 이 시리즈는 출간과 동시에 역사 분야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7년 ‘조선’ 편이 완간된 후에는 고려 편의 출간 시기를 묻는 독자들의 문의가 잇따를 정도였다.‘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은 방송의 생동감 넘치는 대화를 고스란히 지면으로 옮겼다. 동시에 방송에서는 시간 관계상 빠르게 언급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던 부분을 쉽게 풀어 설명해 천천히 되새길 수 있게 했다. 요소마다 첨부된 풍부한 도판과 상세한 사료는 고른 호흡으로 독서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방송과는 다른 형태로 몰입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은 1 왕건에서 서희까지 2 강감찬에서 최충헌까지 3 만적에서 배중손까지 4 충렬왕에서 최영까지 등 총 네 권으로 구성된다.2013년 가을에 첫 방송을 시작한 KBS ‘역사저널 그날’은 역사의 대중화라는 흐름을 가장 먼저 이끈 TV 프로그램으로 평가받는다. 역사를 지루하고 딱딱하며 일방적인 지식이 아니라 쉴 새 없이 주고받는 수다로 풀어내면서도 가볍지 않은 울림을 전해 줌으로써 재미와 깊이를 모두 잡았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 결과 주말 저녁의 치열한 시청률 경쟁 속에서도 돋보이는 성과를 냄으로써 2019년 현재 세 번째 시즌을 통해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다. 지난 2016년,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건국에서 멸망까지 장장 8개월여에 걸쳐 고려사 전체를 다룬 것이다. 방송 사상 유례가 없는 프로젝트였다. 고려 편 방송은 여러 시청자의 호평을 받으며 많은 화제를 낳았다.10세기 초, 한반도에 다시 한번 분열의 시대가 도래했다. 힘을 잃은 신라 왕실을 대신해 혼란을 수습할 자는 누구인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왕건에서 서희까지’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해 후삼국을 통일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분열은 극복됐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부작용은 만만치 않았다.거듭된 혼인은 후계 다툼을 낳았고, 약해진 왕권을 일으켜 세우려는 광종의 노력은 또 다른 후유증을 남겼다. 외침도 있었다. 거란의 첫 번째 침공은 서희의 활약으로 막아 냈지만 내부의 대립과 갈등은 거란의 재침을 불러왔다. 고려는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자주와 종속, 저항과 순응의 갈림길에서 문명 대 야만, 농경 대 유목이라는 구도는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그러나 북방 민족이 언제나 한반도를 위협하는 요소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강감찬에서 최충헌까지’는 외부의 적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을 물리침으로써 고려에 100년의 평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흥망성쇠의 이치는 변화를 불러온다. 북쪽에서 거란을 대신해 여진이 새롭게 대두했다. 기존의 질서가 흔들리면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다시 전쟁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등장한 서경 천도론자들은 실패하지만, 세력을 키운 무신들은 마침내 고려사의 주인공이 된다. 13세기 초, 몽골고원에서는 난립하던 부족들이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여들었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강타할 폭풍의 전조였다.‘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3: 만적에서 배중손까지’는 무신 정권 치하에서 몽골의 침입으로 존망의 갈림길에 선 고려를 살펴본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반란과 하극상의 시대는 최충헌의 집권으로 진정됐다. 그러나 곧 몽골이 맹렬한 기세로 고려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28년간 몽골에 맞서 싸우며 저항하지만 한계에 달하고, 마침내 결단의 순간이 다가온다. 고려 태자가 몽골의 대칸을 직접 만나고자 길을 나선 것이다. 고려의 명운을 건 협상은 성공할 수 있을까? 고려는 몽골의 질서 아래에 편입되는 길을 택함으로써 다른 국가들과는 다르게 멸망을 피했다. 그러나 마냥 다행스럽기만 한 일이었을까?‘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4: 충렬왕에서 최영까지’는 원 간섭기에서 시작해 위화도 회군까지 다룬다. 쿠빌라이 칸의 딸과 혼인한 충렬왕, 쿠빌라이 칸의 손자 충선왕은 고려를 존속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고려의 독립은 끊임없이 위협당했다. 개혁 군주 공민왕은 원의 기황후에게 맞서고 신돈을 등용하기도 하며 마지막 혼을 불태우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이성계가 최영을 처형하면서 드디어 고려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이 급전직하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7-04

일상을 겪어내며 한번은 마주했을 어떤 무례함과 부당함

작가 임솔아의 첫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문학동네)이 출간됐다.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첫 장편소설 ‘최선의 삶’으로 2015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증명하고, 첫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로 2017년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며 시와 소설 모두에서 눈에 띄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젊은 작가다. 시적인 문장 안에 진중한 사유를 함축해 한국문학의 깊이를 더하는 임솔아의 작품세계를 단편집으로는 처음 음미해볼 수 있는 기회다. 임솔아가 고르고 골라 배치해둔 단어들은 시어와 같은 무게를 지니고 문장과 문장 사이를 말해지지 않은 의미로 고요히 채워가며 자신만의 독특한 울림을 발산한다. 소설집에 수록된 여덟 편의 작품은 인물의 나이순으로 배치돼 있다. 다음 작품으로 이행할수록 나이를 먹어가는 임솔아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변화는 인상 깊다.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여기게 만드는 세상에 반발하며 서걱거리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존재들이 소설집의 끝에서는 물기를 품은 눈송이로 변해 서로 뭉친다. 임솔아가 ‘작가의 말’에서 “이 인물들은 여태 내가 겪어온 것들을 함께 겪은 동지들”이라고 밝힌바, 소설 속의 인물들이 삶을 지속하며 이뤄내는 변화는 작가 임솔아가 겪은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임설아는 작가 스스로 경험하지 않고서는 써낼 수 없는 약자와 소수자로서의 삶의 세부를 소설 속에 배치해놓는다. 이렇게 쓰였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일상에서 한 번씩은 마주했을 어떤 무례함과 부당함을 생생히 기억해내게 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7-04

김병래 산문집 ‘오이 둘 풋고추 다섯’ 출간

시인이자 수필가인 김병래사진 작가가 농촌(포항 흥해)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성찰한 사색 등 94편을 수록한 산문집‘오이 둘 풋고추 다섯’(북랜드)를 출간했다.양돈과 축산 등 농사일을 하면서 지역문단의 동인회 활동을 통해서 시와 수필을 써온 저자는 주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글의 소재로 삼고 있다.이 산문집에 실린 글들도 대부분 자연에서 발견한 생명의 메시지다. 무릇 모든 생명에는 빈부귀천이 없으며 그 자체로 목적이고 완성이라는 것. 그래서 비록 못나고 가진 것 없는 사람도 좌절하거나 기죽지 않고 살아갈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다는 것. 누구든 눈과 마음을 연다면 자연에서 얼마든지 생명의 의미와 보람과 행복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고 권유다.저자는 자연을 보며 인간을 생각하고 있다. 오늘날 이 땅 위에서의 바람직한 인간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사유한 저자의 결론, 결국 해답은 자연이라는 것을 통찰했다. 저자가 몸소 실천한 자연 속에서의 삶과 자연을 통해 얻은 기쁨과 소중한 깨달음을, 짧은 단상과 에세이, 산문 등 다양한 장르의 형식으로 알차게 엮었다.산문시처럼 간결하게, 때로는 적당한 길이의 수필로, 시의 한 구절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구사하며 쓰인 편 편의 글 모두에는 잘 쓴 글을 읽는 재미와 더불어 세상 어떤 경전보다 더 귀한 자연이 주는 생생한 생명의 메시지가 풋풋하고 아름답게 때로는 묵직하게 담겨 있다.아울러 오늘날의 생태계 파괴 우리 사회의 물신화 현대문명의 기계화 인류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사회참여적인 주제를 자연과 견줘 다룸으로써 문학의 깊이와 함께 물질주의 문명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바르게 나아갈 수 있는 지표가 되는 철학적 교훈도 이야기하고 있다. 1부 ‘초곡 엽서’는 산자락의 작은 목장에서 목부 일을 하던 시절의 단상들이며 2부 ‘보라고 봄이구나’는 모 일간지에 게재된 에세이들을 모았고 3부 ‘보리밭이 있는 풍경’과 4부 ‘오솔길 따라’는 수필동인지 등에 실었던 글들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7-01

한국현대사 70년, 자주·개방·실용 키워드로 재구성

‘다시 쓰는 韓國현대사 70년’(아이컴)은 ‘역사의병’을 자처하는 언론인 박진용(67)이 ‘자주’, ‘개방’, ‘실용’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 본 한국 현대사 70년의 기록이다.저자는 한국현대사 70년을 현실주의 역사관으로 재구성했다. 좌경사관의 이념적 종속성, 공간적 자폐성을 이념적 자주성과 공간적 개방성으로 전환시켜 한국현대사를 바라봤다.또한 종속자폐에서 비롯된 공론들을 배격하고 국제현실, 국가현실에 충실한 실용의 눈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했다.전작 ‘역사의병, 한국사를 말한다’, ‘나라가 크면 역사도 커져야’ 등을 통해 대중역사서를 집필한 경험과 언론인의 경험을 살려 우리 현대사를 저자 특유의 속도감 넘치는 필력으로 풀어 생생하게 들려준다. 더불어 지금의 좌경 역사서들보다는 역사인식의 진실성에서 유를 달리한다고 이야기하며 우리 초중고대 역사교육이 환골탈태 수준으로 재편돼야 한다는 믿음을 공유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이 책은 서장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공유해야 할 역사인식을 짚어보고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이룬 현대사 70년을 5개의 장으로 나눠 서술했다. 1장은 1940년대까지, 2장은 1950년대(이승만), 3장은 1960, 1970년대(박정희), 4장은 1980, 1990년대(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5장은 2000, 2010년대(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를 다뤘다. 전 6개장에는 역사 사실과 역사 평론(역사 돋보기 외)이 혼재돼 있다. 1~5장의 각 장에서는 한국사에 영향을 미친 그 시대의 국제 흐름을 짚어보고 한국사를 정치· 외교· 안보, 경제, 사회, 북한 순으로 정리해 국제사회와 연결 짓고자 했다. 한국의 외환위기, 북한 핵 문제 등은 당대 세계사 흐름에 포함시켰다.박진용씨이 책은 512쪽 분량으로 두께가 있는 편이다.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수준이나 한국현대사를 세계사와 묶어 서술해 분량이 늘어났다.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이 배우거나 기억하는 현대사(교과서)의 목차와 이 책의 목차 체제를 꼼꼼히 비교(66쪽 참조)해 읽기를 바란다. 저자는 “그를 통해 우리의 역사교육이 청맹과니 수준이었음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은 서장 한국사 서술의 지향(94쪽)까지만 읽기를 권한다. 그 정도면 저자가 하려는 이야기 즉 자주개방실용의 역사인식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하버드대 역사학박사)는 ‘추천의글‘을 통해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일제시대의 자주적 민족주의와 사회개혁 정신을 민주국가 건설과 수호발전을 위한 정신무장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정통 민족주의 이념의 맥이 끊기면서 북한의 사이비 마르크스주의나 관제 민족주의, 남한의 현실 타협적 기능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들 사관에 빠져들거나 안주하면서 대한민국 역사교육은 현실의식을 상실해 반(反) 대한민국 세력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갈파한 60대의 우직한 언론인인 저자가 문제의 핵심인 현대사를 직접 써 보인 것이 이 책이다”고 말했다.저자 박진용은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4·19 의거나 6·10 항쟁 같은 반독재 투쟁의 결과물인 것처럼 설명하는 수박 겉핥기식의 역사해석은 지양돼야 한다는 점이다”며 “혹 문재인 정권 출현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은 5장까지 읽으면 그 해답을 자연스레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6-27

일상에서 마주하는 삶의 모순 날카롭고 재기발랄하게 포착

2002년‘문학과 의식’에 시가, 2013년 ‘작가세계’에 평론이 당선되며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해 온 권성훈 시인이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실천문학사)를 출간했다.‘배꼽’을 비롯한 59편의 시가 수록돼 있는 이번 시집에서는 “사물을 읽는 몸”의 언어들이 재기발랄하면서도 날카롭고 촘촘하게 펼쳐진다. 시인은 자신의 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물상)들로부터 삶의 단서들을 예리한 감각으로 포착해 독자들 앞에 제시한다. 권성훈은 사물 겉으로 보이는 상식의 외간을 벗기고 적나라한 삶의 ‘비밀’과 ‘실상’을 우리 앞에 드러내 보여 줌으로써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권성훈의 시편들은 파란만장한 생의 굴곡이 육체에 고스란히 부기(附記)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즐겨 등장하는 장기, 살가죽, 명치, 뼈, 심장, 폐부, 꼬리, 힘줄, 아가리, 혀, 고막, 오장육부, 내장 등은 우리가 세상을 건너갈 때 세계의 측량할 수 없는 힘이 가한 충격을 흡수하는 장소다.권성훈 시인권성훈의 시에는 자본주의 시대에 넘쳐나는 물성(物性)과 피 내음이 짙게 배어나는데, 특히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장면들에 주목함으로써 삶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그만의 방식으로 그려낸다.“살아서 입지 못하는 황홀한 옷 한 벌/저승 가는 길을 꼼꼼히 재단해/이제야 나를 위해 떳떳하게 나를 입어 보는 것/스스로 입지 못하는 생애의 끝 한 벌 입는 거야/매일같이 시작되는 하루를 내 손으로 갈아입지만/벗었던 세월만큼 주름진 길/그 길을 세상 밖에서 지우는 화려한 복화술/거울의 눈치를 살폈던 관절 마디를 섞어서/내가 안 보일 때까지 나를 반죽해 줘/손댈 수 없을 때까지 후끈 달구어지면/내 몸도 이렇게 눈부신 뜨거움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 ‘유쾌한 치킨’부분‘유쾌한 치킨’은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의 하나인 ‘치킨’으로써 인간 삶의 야만성을 찔러 댄다. 이 시의 화자는 알몸으로 튀겨져 인간들의 식탁 위에 올려질 치킨인데, 인간들의 무지막지한 탐식욕의 희생양이 되어 지상에서의 짧은 삶을 마감하게 된 치킨의 마지막 반어적 야유, “내 몸도 이렇게 눈부신 뜨거움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라는 말은 자본주의 시대 속 인간의 단말마처럼 여겨져서 섬뜩함을 안겨 준다.‘밤은 밤을 열면서’는 이처럼 지금 세계가 병들어 있음을 뼈아프게 느끼며 자신의 삶을 질료 삼아 몸으로 겪어 나가는 한 시인의 정신적 풍경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삶 주변에 널린 사물들, 물상들 속에서 그것들의 외관, 그것들이 피워 내는 냄새, 그것들의 황폐한 존재 방식으로부터 자신이 살아가며 견뎌 내는 세계를 처절하게 인식하며, 맞부딪혀 나아간다. 그 처절한 인식과 항거의 몸짓이 바로 이 시집의 제목 ‘밤은 밤을 열면서’와 일맥상통하며 닿아 있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9-06-27

대부호가 알려주는 돈 모으는 진짜 원리

“사람의 생각에는 에너지가 있다. 생각은 상황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니 기왕 생각한다면 불안해지는 일보다는 오늘이, 그리고 내일이 즐거워질 수 있는 일을 하자”(‘돈의 진리’중)일본에서 개인 납세액 1위인 대부호 사이토 히토리는 화장품 회사 긴자마루칸의 회장이자 유명 저자다.화장품과 건강식품을 판매하는 회사 긴자마루칸 창업자인 저자는 일본에서 1993년부터 12년 연속 개인 소득 납세액 최고 10위 안에 드는 기록을 세운 자산가다.토지 매각과 주식 공개 등으로 거액의 세금을 내는 고액 납세자들과 달리 그는 사업소득만으로 가장 많은 세금을 낸 부자다.베일에 싸인 삶을 산 그는 중학교 졸업 후 트럭운전사, 페인트공 등을 거쳐 24세 때인 1972년 긴자마루칸 전신인 긴자니혼간포(日本漢方)연구소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다.그의 부자가 되는 비결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 ‘부자의 관점’(2017), ‘부자의 행동습관’(2016), ‘부자의 인간관계’(2015) ‘1% 부자의 법칙’(2004) 저서들은 일본에서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인생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 전역에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가져오는 부와 운의 원리를 전해 화제가 됐다.그는 책을 통해 “웃음 속에 성공이 있다”면서 웃음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어떤 일이든 즐겁게 하며, 소리 내어 행복을 불러들이라고 조언했다. “나는 행복해”“나는 운이 좋다”“정말 고마운 세상이야” 등을 천 번 이상 말하면 파동이 생겨서 생각과 행동이 바뀌고, 부와 성공이 저절로 따라온다고 강조했다.최근 국내 번역 출간된 사이토 히토리의 신간 ‘돈의 진리’(RHK) 역시 그 연장 선상에서 행복한 부자가 되는 길을 제시한다.책은 제1장 부자처럼 돈을 대하는 방법, 제2장 돈이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 제3장 눈앞에 닥친 문제가 주는 좋은 신호들, 제4장 성공에 대한 믿음, 제5장 운이 좋다고 믿으면 더 좋아지는 운으로 구성됐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6-20

오늘 당신에게 대한민국이란 무엇입니까?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가 있은 이후 수천 년에 걸쳐서 되풀이되어 온 질문. 그 탐험의 길을 나서야 하는 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작가의 말’ 전문‘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선 굵은 대하소설로 현대사의 아픔을 짚어 온 소설가 조정래(76) 작가가 신작 장편소설 ‘천년의 질문’(전3권)을 펴냈다.장편소설 ‘정글만리’(전3권)와 ‘풀꽃도 꽃이다’(전2권)를 3년 간격으로 발표한 작가가 어김없이 3년 만에 발표하는 이 작품은 지독한 영극화 현실 속에 국가의 역할을 묻는다.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수천 년에 거쳐 하나의 거대한 집단, 즉 국가에 소속돼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되물었을 법한 질문인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기본적이고도 치열한 질문에 대한 뜨거운 응답을 던진다. 국가의 정체를 밝히고자 한 동서양의 연구서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관점에서 국가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직접 만나 심층적으로 취재함으로써 21세기 국가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다각도로 조명하고자 했다.소설은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 자본과 권력에 휘말려 욕망을 키워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월급 통장에 매달 ‘0원’을 찍으며 사건 취재에 고군분투하는 기자의 노력,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동료들이 낙엽 떨어지듯 일자리를 잃자 자신이 낳은 두 아이의 눈빛까지 무서워졌다는 만년 시간강사의 고뇌가 술회되는 동시에, 비자금 장부의 행방을 추적하는 재벌 그룹 구성원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그려진다.‘개천에서 승천한 용’인 서울대 출신 수재는 재벌가 사위로 발탁된 후 온몸을 다 바쳐 신분 상승을 꿈꾸지만, 결국 죽어도 진골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비자금 장부를 훔쳐 잠적하고, 재벌의 유화정책으로 굳게 입 닫은 언론에 좌절한 기자와 그를 회유하기 위한 재벌 정보원의 전방위적 시도가 긴박하게 연출된다. 눈앞의 이익을 챙기기에 혈안인 국회의원과 사업가, 변호사 등의 아귀다툼은 치열하기만 하다.작가는 수십 명에 달하는 등장인물들에게 생생한 캐릭터를 부여해 정경유착의 실태와 비정규직 문제, 급격한 사회 양극화에 시달리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드러낸다. “입법·사법·행정이라는 국가권력에 재벌·언론이라는 사회 권력이 야합해 온갖 비리를 조장하고 있”는 현실에서 작가는 불법 비자금, 전관예우 문제 등 관행처럼 벌어지고 있는 권력 범죄의 실태를 소설로 형상화함으로써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국민 소득의 절반을 독식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유지되는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한다.국권상실, 동족상잔, 군부독재의 뼈아픈 역사를 건너온 국민의 애환을 소설에 담아내며 그동안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반드시 피어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조정래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도 한 걸음 내디딜 변화의 길을 그려냈다.나와 내 이웃을 위한 작은 실천만이 거대 권력의 독재를 막을 수 있으며, 우리 모두 함께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머지않은 때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믿음은 작가가 오늘도 원고지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게 해주는 밑거름이다. 자본과 권력에 빼앗긴 국민으로서의 권한을 찾는 일이 의외로 간단하고 쉬운 일임을 일깨워주는‘천년의 질문’은, 무거운 현실에서도 국민 스스로 깨어나야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는 국민 깨우기의 자명종이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6-13

울진 응봉산에서 제주 한라산까지… 백대 명산 묵언 수행기

‘백폭 진경 산수화속 주인공되다(상·하·정음서원)’는 저자 장종표(패션캠프 대표이사)씨가 산림청 선정 백대명산을 묵언수행하면서 느낀 소회와 감동을 엮은 여행에세이다.장씨는 2016년 9월 20일부터 2018년 12월 1일까지 2년 2개월 간 주로 혼자 묵언수행하며 울진·삼척의 응봉산에서 제주도의 한라산까지 산림청 선정 백대명산을 모두 둘러 보고 그 발걸음 하나하나에 아로새긴 감동과 느낌을 기록하고 책으로 엮었다.저자는 체력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체력을 보통 평균보다 한참 모자라게 평가한다. 체력의 약점뿐만 아니라 저자는 또한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업의 부진과 좌절, 가까운 친지의 죽음과 슬픔, 권력과 사회의 거대한 힘 앞에서 느끼는 분노와 소외감 등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한 인생살이의 애환을 저자는 산과 더불어 묵언수행하며 고독이 주는 성찰과 사유를 통해 자연적 사회적으로 지구와 사회에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개인의 운명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유와 삶의 의욕을 발견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감상과 아울러 산에 대한 거리와 소요시간 등 다양한 산행정보와 산의 특성, 산의 매력, 관련된 이야기와 시문학, 꽃과 나무의 이름 등도 꾸밈없는 필체로 보여주고 있어 인간미가 물씬 담겨 다가온다.책은 저자가 백대명산을 묵언수행한 날짜를 기준으로 춘하추동 4계로 나누고 이를 다시 초춘, 만춘, 초하, 만하, 초추, 만추, 초동, 만동, 8계절로 세분해 아름답고 신비스런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를 연상할 수 있도록 편집했다.책에서는 저자가 산행에서 만나는 작은 경험, 사소한 사건 등을 담백하게 자신의 경험처럼 만날 수 있으며, 저자의 여유로운 태도와 함께 공감하게 된다.가령 소요산 산행 이야기에서는 저자가 안내판에서 인용한 김시습과 보우선사, 이성계의 시를 읽으면서 잠시 고된 산행을 멈추고 쉬게 된다. 천마산에서는 고려 말 이성계가 “매우 높아 푸른 하늘에 홀笏이 꽂힌 것 같아, 손이 석 자만 더 길었으면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고 했다는 인용을 보면서 독자들은 저절로 하늘에 손을 뻗게 된다.산행 중간 중간마다 마치 고속도로의 휴게소를 운영하듯이 수많은 시문을 소개한다. 운악산에서는 정상석 뒷면에 새겨진 이항복의‘현등사’를 소개하고, 축령산 남이바위에서는 남이장군의 호기 넘치는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태평하게 못 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겠는가.”를, 장성의 백암산에서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김인후의 시를 소개한다. 강천산 옥호봉에서는 소나무의 샛노란 송홧가루와 박목월의 ‘윤사월’을 연결해줘 색다른 감흥을 전해준다.칠갑산에서 “콩밭 매는 아낙네”를, 덕숭산(수덕산)에서‘수덕사의 여승’이라는 유행가를 언급하는 글에서는 저자의 소박함과 진실됨 앞에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이밖에도 꽃이 핀 적상산의 나무, 응봉산에서 역ㄱ자로 자라는 기이한 소나무, 도락산의 기이한 소나무가 담백하게 찍혀있고, 미세먼지가 끼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 풍경, 정상석 가까이에 바글거리는 인간군상의 풍경, 이런 사진을 찍은 필자의 ‘투박한 모습’도 걸러지지 않고 솔직하게 담겨있어 시선을 사로잡는다.홍성광 문학박사는 “이 책에는 좋은 경치가 함께 수록돼 있어 직접 산을 오르지 않고도 눈요기로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소위 와유(臥遊)라고 하던가. 집에서 자리에 누워 TV로 명승지를 구경하듯이 백대명산을 눈으로 감상하며 즐길 수 있는 책”이라고 평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6-13

왕벚나무에서 생명의 숲을 찾다

‘에밀 타케의 선물’(도서출판 다빈치)은 환경운동가이자 생태교육가인 정홍규 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가 120여 년 전 이 땅에 왔던 프랑스인 선교사 에밀 타케 신부의 자취를 탐사하며 자연과 창조, 생태와 영성, 환경과 인간에 대해 고민한 기록이다.에밀 타케 신부는 24세 때인 1898년 조선에 와서 55년간 선교활동을 한 후 1952년, 79세의 나이로 대구에서 선종했다. 그는 부산본당(현 범일성당), 진주본당, 마산본당(현 완월동성당), 제주의 하논성당과 홍로성당(현 서귀포성당), 목포 산정동성당 등의 주임신부를 거치며 선교활동을 했다. 그중 제주에 머물렀던 13년의 기간 동안 1만점 이상의 식물 표본을 채집해 유럽과 미국, 일본의 식물학자에게 보냈다. 그 가운데에는 한라산에서 자생하는 왕벚나무의 표본도 있고 구상나무 표본도 있다. 식물학에 대한 타케 신부의 공적을 기려 학명에 타케티(taquetii)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갯취, 한라부추, 겨이삭여뀌, 섬잔대 등 125종이나 된다.타케 신부는 같은 임무를 띠고 일본에 파견된 선교사 포리 신부에게 제주 왕벚나무를 보냈고 그 답례로 온주 밀감 14그루를 받았다. 이 온주 밀감 14그루는 지금의 서귀포 감귤산업이 자리 잡는 밑바탕이 됐다.저자 정홍규 신부는 타케 신부의 자취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발견을 했다. 타케 신부의 자취마다 굵디굵은 왕벚나무들이 아름드리 자라고 있는 것이었다. 제주도의 왕벚나무 자생지야 타케 신부가 처음 발견해 세계 식물학계에 그 존재를 알린 곳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타케 신부의 사목지였던 마산 완월동의 성요셉성당 앞, 나주의 노안성당과 나주성당, 생의 후반을 보냈던 대구의 남산교구청 안에도 해마다 4월이면 아름다운 왕벚꽃을 활짝 피우는 오래된 왕벚나무들이 있었다. 이것은 필시 타케 신부가 심은 나무가 틀림없으리라. 타케 신부는 제주의 자생 왕벚나무를 세계 식물학계에 최초로 보고했던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아름답게 피는 벚꽃 아래 더 이상은 ‘일본의 그늘’을 만들지 말라고 위로할 뿐만 아니라 다녀갔던 자리마다 남긴 왕벚나무를 통해 자신의 손길을 아직까지 느끼게 한다.정홍규 신부는 에밀 타케 신부의 삶에서 생태와 영성, 식물과 신학의 만남을 보았다. 비슷한 말처럼 쓰이는 환경과 생태를 필자는 이렇게 구분한다. “환경이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라면 생태는 안으로 움직인다. 환경은 지식과 정보, 데이터 중심으로 접근하지만, 상호 연결성, 관계성, 그리고 더 큰 진화의 맥락으로 이해하도록 배우는 것은 생태 리터러시다. 한라산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을 환경이라고 한다면 한라산에서 행성 지구와 인간이 상호 관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생태 리터러시다.” 리터러시란 문맹 상태를 벗어나는 것, 인지하고 이해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통합적 과정을 말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생태 리터러시는 곧 생태에 대한 문맹을 퇴치하자는 제언이다.생태학의 기본 법칙은 ‘모든 것은 모든 것과의 관계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창조물을 통해 신성을 감지한다. 신은 저곳에 있지 않다. ‘신은 만물 속에, 만물은 신 안에’ 있다. 그러므로 ‘생태영성’은 내적으로는 나 자신과 관계의 차원에서는 우리의 이웃들과, 생태의 차원에서는 인간과 비인간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영성적으로는 이 모든 차원들과 평온한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온전한 조화는 우리를 탐욕이나 소비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좀 더 단순한 녹색 삶’을 지향하는 선을 세상에 퍼뜨리게 한다.이 책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요소는 한국 초기 천주교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다. 흔히 이재수의 난, 혹은 제주민란이라고도 부르는 1901년(신축년)의 민중 봉기를 필자는 종교 문제로 인한 사건이라는 뜻에서 ‘신축교안’이라고 부르고, 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여러모로 고찰한다. ‘오로지 초월만을 추구했던 파리외방전교회’에 대한 비판과,‘향촌민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호교적 선교’이자 ‘지역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선교가 아니라 급속한 교세 확장에만 힘쓴 탓’에 지역민들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자기 반성적 사고를, 다른 이도 아닌 신부의 입장에서 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모든 근대 학문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싹을 틔울 수밖에 없던 한국의 식물학과 그 주도자들의 친일 실상 발견에 대한 고백도 뼈아프다.이런 성찰들은 다시 ‘가톨릭은 호교적인 선교를 넘어 자연의 영성으로, 식물학계는 지속 가능한 미래 세대를 위한 생태 교육과 체험으로’ 나아가서, 우리의 삶에 생태영성과 문화를 육화시켜 통합생태론을 구축하자는 제안으로 이어진다. 백여 년 전 타케 신부가 남긴 선물을 건네받아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 찬란한 벚꽃을 기꺼이 누리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창조의 책’ 지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6-06

자서전 쓰고 싶은가요?

베트남전쟁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아낸 장편소설 ‘하얀전쟁’으로 유명한 안정효(80)는 ‘탁월한 소설가’·‘번역의 대가’·‘불세출의 이야기꾼’으로 불린다. 신간 ‘안정효의 자서전을 씁시다’(민음사)는 안정효의 ‘자서전 쓰기’ 방법론과 철학을 한데 담은 책이다.청년 시절부터 여든에 이르는 오늘날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글을 써 온 저자 안정효는 그야말로 ‘글쓰기광(狂)’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글을 쓰거나 작품을 구상하고,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과 영화, 음악을 즐기며 여전히 왕성하게 세상만사를 탐구하는 저자의 일상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변함이 없다. 이제껏 펴낸 소설과 수필만 따져도 벌써 십여 권이고, 번역한 작품까지 헤아리자면 120여 권을 훌쩍 뛰어넘는다. 1천쪽에 육박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장편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을 놀랍도록 짧은 기간에, 무려 완전한 우리말로 번역해 낸 ‘사건’은 여전히 전설로 회자되고 있으며, “글쓰기에 집중하느라 하도 외출을 안 해서 가지고 있던 신발을 다 버렸다.”라는 우스갯소리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처럼 문학과 글쓰기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는 저자의 집요한 태도는, 타고난 언어 감각과 어우러져 난생처음 글쓰기에 도전하는 이들뿐 아니라 글을 쓰다가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까지 여러 가르침을 전한다.‘안정효의 자서전을 씁시다’는 지난 수십 년간 자기가 직접 익히고 갈고닦은 글쓰기 이론과 노하우를, 수백 편에 이르는 소설과 영화 등 다양한 예시를 바탕으로 정리한 일종의 ‘글쓰기 길라잡이’다. 하지만 ‘글쓰기 일반’이 아닌 ‘자서전 쓰기’에 집중한 까닭은, 가령 ‘소설가’나 ‘시인’은 아무나 될 수 없을지언정 ‘자서전 작가’는 누구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사 시대 원시인들조차 스러져 가는 자신의 존재를 기록하고자 손등 위에 진흙을 불어 흔적을 남겼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자기 인생을 세상에 남기고자 하는 근원적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SNS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더더욱 강화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가 스스로의 인생을 글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마음가짐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기술들을 조목조목 알려 주며, 구상부터 착수, 마무리와 실패 때의 대처 방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규모의 지식과 조언을 들려준다.저자는 먼저 ‘자서전 쓰기’의 당위성을 각성시키고, 곧이어 글쓰기를 일종의 특권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통념을 타파하면서 글자를 무기로 백지와 맞서 싸우는 행위가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님을 거듭 강조한다. 가령 ‘자서전’은 유명인이나 정치인, 성공한 기업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화술만 잘 갖춘다면 당신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재산이 많든 적든, 놀라운 무용담이나 기상천외한 경험이 있든 없든 출중한 자서전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6-06

교토의 사계절·꽃·산책로 그리고 발길을 끄는 가게들

특유의 정제된 언어로 책에 관해,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작가 이다혜의 신간 ‘교토의 밤 산책자’(한겨레출판)는 “한국에 살아? 일본에 살아?”라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숱하게 교토를 방문해온 이다혜 작가의 첫 번째 교토 여행에세이다. 가산탕진을 부추긴 도시 1호는 서울, 2호는 교토라고 말할 정도로 작가에게 교토는 여러 이유에서 사랑하는 도시다. 처음에는 걷기 위해, 그다음에는 쇼핑을 하러, 또 그다음에는 계절을 즐기기 위해 찾은, 작가만의 애정하는 공간들을 네 가지 테마로 엮었다.1부 ‘봄밤에는 잠들 수 없다’는 교토의 꽃, 계절을 주요 테마로 했다. 겨울 끝의 매화부터 봄밤의 벚꽃, 장마철의 수국과 가을 단풍숲까지, 때에 따라 색을 갈아입는 교토의 자연을 보며 시간의 미감을 느끼게 된다.2부 ‘달밤에 단추를 줍는 기분’은 교토의 정원과 산책로를 주요 테마로 한다. 촬영이 금지된 낙원, 교토의 비밀 정원부터 산골마을 오하라의 세 갈래 산책길까지, 혼자여도 섞여도 좋은 교토의 산책 명소를 공개한다. 더불어 붐비지 않는 인파 속에서 여유롭게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작가만의 팁도 공개한다.3부 ‘작은 자유는 여기 있다’의 주요 테마는 취향별 볼거리와 가게이다. 맥주, 위스키 애호가들을 위한 견학부터 부엌에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줄 그릇 쇼핑까지, 작가의 취향이 듬뿍 담긴 가게와 그에 얽힌 이야기로 가득하다. 맥주와 책, 식물을 좋아하고 소소한 문구용품과 소품 사기를 즐기는 사람들에겐 최고의 파트다.4부 ‘온몸이 녹신녹신해지는 맛’은 이다혜 작가의 추억과 편애하는 이유가 듬뿍 담긴 카페 및 음식점을 소개한다. 교토풍 샌드위치부터 여름 별미 물양갱, 쌀쌀한 날 응급 식량 면 요리까지, 작가의 글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이는 듯하다.이다혜 작가의 추천은 단순히 소재 중심이 아니다. 작가의 경험과 고충에서 비롯한 감상과 실용성이 모두 담겨 있다. 인파에 치이지 않고 절경을 보고픈 사람에게 추천하는 시간과 장소, 체력이 약한 사람들을 위한 성수기 여행 팁과 벚꽃철을 놓쳤을 때 유용한 관상 팁, 장마철에 여행을 떠난 이들에게 제격인 명소 추천까지 척척 이어진다. 볼거리뿐 아니라 쌀쌀한 날 한기가 잔뜩 들었을 때 찰떡궁합인 음식 등 사계절을 여러 번 경험한 작가의 디테일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다. 게다가 각각 소재에 얽힌 추억과 작가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일화는 당장 교토에 가지 않을 사람들에게도 교토의 감성과 분위기를 선사한다.이다혜 작가의 여행법이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여행자의 게으름을 아낌없이 용인한 친절한 구성과 내용에 있다. 심심한 상태를 좋아하고, 여행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심심하려고’일 정도라는 작가의 말에서 여행의 이유를 다시 되새긴다. 시간을 아낌없이 흘려보내고 싶어서 떠나는 여행, 모든 장소에 가보지 않아도 어떠한 긴장감도 부담도 느껴지지 않는 여행. 그런 여행이 이 책에선 가능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5-30

일상생활 속의 소소한 기쁨, 하루키식 소확행

소박한 문체와 정감 가는 일러스트로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의 에세이 시리즈가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국내 독자들을 찾았다. 문학동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으로 출간한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을 잇는 시리즈로, 1995년에서 1996년까지 ‘주간 아사히’에 연재된 에세이 60여 편을 모았다.일상생활 속의 소소한 발견과 빛나는 위트는 물론, ‘노르웨이의 숲’성공 이후 본격적으로 인기 작가 대열에 들어선 시기의 소회, 외국생활의 에피소드,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출판업계의 현실에 대한 단상 등을 엿볼 수 있다.북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안자이 미즈마루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연은 그가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 고쿠분지에서 재즈 카페를 운영하던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2014년 고인이 됐을 때는 매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친구가 떠났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다. 두 사람은 1983년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를 출간하며 본격적으로 공동 작업을 시작했고, 80년대 중후반에 걸쳐 ‘무라카미 아사히도’라는 에세이 시리즈를 여러 잡지에 연재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일자 눈썹에 시무룩한 표정이 포인트인 일러스트는 방송 매체에 잘 등장하지 않는 하루키의 실제 얼굴보다 더 유명해졌고, 에세이에 즐겨 쓰인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표현은 물질적 여유보다 평범한 일상 속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공감을 사며 지금까지 두루 인용되고 있다. 그후 장편소설 작업 등을 위해 연재를 일단락하고 십여 년이 지난 뒤‘주간 아사히’로 돌아와 새로이 일 년가량 연재한 에세이를 모은 책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다.1995년에서 1996년은 무라카미 하루키가‘노르웨이의 숲’과 ‘태엽 감는 새’로 대중적인 성공과 문학적 성취를 함께 거두고, 옴진리교 지하철 테러사건 피해자를 취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한창 작업중이던, 소설가로서 터닝 포인트에 속하는 시기다. 몇 년간 일본을 벗어나 유럽과 미국에서 생활하는 등 사생활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지만 특유의 관조적인 화법과 위트 섞인 시선은 여전하다. 밀리언셀러를 내는 인기 작가이면서 문단의 주류에서는 벗어나 있는 자신의 고충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백화점이나 레스토랑 등에서 현대 자본주의에 잠식된 사회의 모순을 집어내고, 동료들과 함께 아마추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며 달리기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을 보여준다.제목의 ‘장수 고양이’이자 하루키가 소설가를 꿈꾸던 시절부터 길러온 샴고양이 ‘뮤즈’의 이야기는 총 세 번에 걸쳐 등장하는데, 영특하고 미스터리한 반려묘의 나날을 관찰하는 감탄과 애정이 듬뿍 어린 시선에서 자타공인 애묘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직업만큼이나 취미생활에서 얻는 성취감을 소중히 여기고, 주위 사물 하나하나를 자신의 기준으로 바라보며, 바뀌는 세상사에 때로는 감동하고 때로는 투덜거리는 생활인 하루키의 에세이는 소설과는 또다른 매력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바깥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되 휘둘리지 않으려는 소탈한 개인주의는 모바일 메신저와 SNS를 통해 손쉽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할 수 있게 된 지금 세대에도 색다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몇십 년이 지나도 유효한 하루키식 인생관에 다시 한번 매료될 시간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5-30

촘스키 “오늘날 미국은 공포마케팅 시대”

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현인으로 인정받는 노암 촘스키는 쉼 없이 체제와 구조의 혁명적 변화를 구상하며, 연대와 조직화 만이 희망이라고 역설하는 세계적인 지성이다. 신간 ‘세계는 들끓는다’(창비)는 올해 91세인 그를 30여 년 간 인터뷰해 온 독립언론인 데이비드 바사미언(74)과 2013년 6월부터 2017년 6월까지 4년 동안 진행한 12번의 인터뷰를 엮은 대담집이다.12번의 인터뷰는 세계 도처의 현안들을 전방위적으로 진단한다. 점증하는 환경위기와 핵전쟁의 위협, 중동 지역을 넘어 아프리카·동남아까지 달구고 있는 이슬람 무장세력을 다룬다. 또한 시민적 자유를 위협하는 국가의 감시와 통제, 민주주의의 후퇴와 복지국가 해체, 인공지능 군비경쟁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적인 이슈들을 망라한다.이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분석하는 촘스키의 언어는 쉽고 정확하며, 시야는 크고 넓다. 일관된 세계관을 통한 그의 통찰은 명쾌하며, 모든 사안에 한결같이 비타협적으로 접근하는 자세는 글의 설득력을 높인다.촘스키는 오늘날을 미국의 우익세력이 정치적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자국민을 위협하는 ‘공포마케팅’의 시대라고 진단한다. 공포마케팅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테러에 대한 공포는 직접적으로 중동의 이슬람세력과 연결된다. 촘스키는 ISIS를 낳은 것은 미국이며, 지하드의 테러를 아프가니스탄의 좁은 부족 범위에서 서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전세계로 확산시킨 것은 미국의 폭력적인 대외정책이라고 말한다.촘스키는 가장 직접적이고 첨예한 분쟁의 현장인 팔레스타인2013이스라엘부터 시리아 지역의 참화, 최근 터키 에르도안 정권의 대대적인 쿠르드족 탄압 등에 이르기까지 중동지역 분쟁의 어제와 오늘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이 분쟁의 역사는 곧 미국 개입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것은 부시나 오바마, 트럼프 어느 한 정부나 정당의 입장이 아니다. 테러라는 가면 뒤에 숨어 미국을 움직인 것은 오로지 ‘석유’, 그 이권이었음을 촘스키는 분명히 지적한다.그럼에도 촘스키는 폭력의 악순환을 멈추고 미국의 대외정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전망한다. 테러로부터의 방어를 목 놓아 외치는 그 정부야말로 테러의 위협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보국가에 반대하는 여론을 형성한다면, 미국의 파행적인 대외정책을 멈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진정한 위기는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위기다. 촘스키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대로, 해수면 상승과 국토 침수에 따라 발생할 수천만의 방글라데시 기후난민, 공동 상수원인 히말라야 빙산 붕괴로 발발할 인도2013파키스탄 분쟁, 그로 인한 핵전쟁과 전세계적 기아의 가능성은 기후변화가 한 나라나 어느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인류 전체의 생존이 걸린 문제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에 가장 큰 책임을 진 나라 중 하나인 미국의 행태는 어떤가? 에너지회사와 다국적기업은 온갖 대중매체를 동원해 ‘기후변화란 없다, 있다 해도 사람 탓이 아니라 태양의 흑점 등등 때문이다’라는 궤변으로 사람들을 “완전한 비이성과 자기파괴로” 몰아가고 있다.(61~62면) 미국은 이들 기업의 이익을 앞세우기에 급급하다. 트럼프 정부는 더 많은 화석연료, 더 많은 석탄발전소를 요구하며, 환경 규제를 철폐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려 한다. 그야말로 다함께 “벼랑으로 질주하자”(221면)라고 말하는 중이다.이에 맞서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은 직접적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토착집단들이다. 촘스키는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약탈적 자본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자본주의2013제국주의에 의해 무자비하게 수탈당한 현장의 참상과 함께 브라질과 베네수엘라의 야노아뫼족, 캐나다의 퍼스트 네이션즈, 콜롬비아의 깜뻬시노, 호주와 인도의 부족공동체 등이 약탈에 맞서 기울이는 노력 등을 소개한다.세계를 해석하는 촘스키의 일관성과 통찰력은 평생 굽힘 없이 고수해온 진보적 세계관에서 비롯한다. 그 세계관을 통해 그는 세계 곳곳에서 지금 벌어지는 문제를 보다 큰 시야에서 꿰뚫어 조망한다. 그에게 진짜 변화는 그것을 만들려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연대와 상호지원으로부터 시작된다. 책의 곳곳에서 그는 진짜로 변화를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의 집단적 참여, 연대와 공동체, 조직화의 중요성을 거듭 말한다. 이는 그에게만 진리가 아니며 과거에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앞으로 일굴 진짜 변화는 그것을 만들려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 간의 연대로부터 시작될 것이다./윤희정기자

2019-05-23

사랑한다는 것, 마음의 상처를 받을 때까지 줄곧 그래야 한다

대만의 사유하는 공학자, 리자퉁 교수의 ‘외롭고 쓸쓸한 사람 가운데‘(문학동네)는 그가 대만의 일간지 연합보(聯合報) 문예칼럼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은 책으로 1995년 출간 후 30만 부가 팔린 스테디셀러다. 리자퉁은 대만의 칭화대학교, 징이대학교, 지난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교육자다. 오랜 기간 그 자리에서 고민하고 사유했던 생각들을 칼럼에 담았다.리자퉁의 글은 관념적이지 않다. 그는 친구들과의 대화, 신문기사, 영화, 그림 한 편 등을 접하고서 영감을 얻는다. 즉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글감이 된다. 나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글은 어떤 주의나 사조류의 분석이 될 수 없다. 때문에 편안하고 익숙한 그의 글에는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이 담겨 있어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자아낸다.소탈하고 담담한 문체는 그의 ‘배경과 이력’을 떠올리면 다소 의외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대만의 명문가 태생이다. 그의 증조부는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중국 근대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이홍장(1823~1901)의 친형 이한장(1821~1899)이다. ‘이한장’ 역시 청나라의 대신으로, 양광총독까지 지낸 세력가였다. 리자퉁은 대만의 명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은 후 다시 대만으로 돌아와 대학교수에 이어 총장직을 연임했다.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았으나 젠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를 “멍청한 늙은이”라 칭하며 제자들의 배려나 관심을 과분해하고, 자신은 좌우명을 갖기에도 모자란 사람이라고 시종 겸허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런 삶의 태도가 그의 글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리자퉁 자신이 직접 겪은 바를 이야기하는 글 중 백미는 테레사 수녀를 만나고, ‘임종자의 집’에서 봉사를 하며 얻은 깨달음이 담긴‘높은 담을 헐어버리자’를 꼽을 수 있다. ‘높은 담을 헐어버리자’는 이 책의 대만판 원제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인 리자퉁은 본인의 신앙과 신념을 따라 줄곧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인도 콜카타로 건너가 테레사 수녀를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리자퉁은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호스피스 병동인 ‘임종자의 집’에서 머물며 사흘 간 봉사를 하다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한다. 줄곧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자부했던 자신이 정작 진정한 빈곤과 불행은 회피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오십육 년 이래 편안했던 날들이 갑자기 자리를 내주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간 무슨 의미인지 와닿지 않았던 “한 조각의 순결한 마음이어야, 자유롭게 베풀 수 있고,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마음의 상처를 받을 때까지 줄곧 그래야 한다”는 테레사 수녀의 말을 섬광처럼 이해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쉰을 훌쩍 넘은 나이, 리자퉁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완전히 변하는 경험을 한 후 한참을 눈물을 흘린다. 그러고는 우리의 마음에 있는 ‘높은 담’을 헐어버리자고 힘주어 말한다. /윤희정기자

2019-05-23

군사 전략가이자 행정관료, 왕양명의 삶·사상

양명학은 중국의 주류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의 대안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수신(修身)과 신민(新民)을 강조했던 주자(朱子)와 달리 안신(安身)과 친민(親民)을 중히 여겼다. ‘칼과 책’(글항아리)은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의 삶과 사상을 한 편의 소설처럼 쉽게 풀어냈다. 그간의 양명학 관련서 가운데 왕양명의 생애에 관해 가장 일상적이고 인간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흔히 학자들이 사상가로 알고 있는 왕양명은 사실 많은 전쟁터를 누빈 군사 전략가이자 백성의 삶을 돌보는 행정가이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 왕양명이 몸을 닦기보다는 몸을 보호해야 한다(안신)고 했으며, 백성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했는지(친민) 미뤄 짐작할 수 있다.왕양명은 절강성 여요에서 왕화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이’하고 ‘특출’났으며 열두 살에 이미 자신이 성인(聖人)이 되고자 공부한다고 밝히곤 했다. 열다섯의 나이에 군사 정세를 살피러 혼자 변방으로 나가 기마와 궁술을 익혔고, 당시 사상계의 주류 학문인 주자학에 몰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타고난 재능을 시기하는 이가 많았던 탓인지, 당시 관료의 자리가 꽉 차 있던 탓인지 왕양명이 과거에 급제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여느 위인전에 나오는 장원 급제 이야기와 달리 왕양명은 과거 시험에 두 차례 이상 낙방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는 것이었으므로 실패에 개의치 않고 실천적 자세로 학문을 탐구하는 데 열중한다.이후 유학을 성학(聖學)으로 삼고 이에 집중하긴 했지만, 왕양명은 학문을 수양하는 데 도교의 양생술, 불교의 선종 사상을 포괄하기도 하는 등 그 경계가 없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한 후 백성을 돌보는 관료로, 전장을 지휘하는 장수로 바쁘게 지내는 동안에도 학문 연구와 강학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서른네 살부터 제자를 받아들여 숨을 거둘 때까지 성인의 도를 가르쳤다. 유배지인 용장에서 왕양명은 주자가 이야기한 격물치지설 즉, 사물을 관찰한 후 지식을 얻은 후에야 천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관점이 세상의 이치와 맞지 않음을 깨닫는다. ‘용장에서 도를 깨쳤다’고 하여 이를 ‘용장오도(龍場悟道)’라 한다.용장오도 이후 왕양명은 자신의 사상 체계를 공고하게 다져갔다. 그는 앎과 행동이 분리돼 있지 않으며 인간 본연의 마음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를 정리해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자신만의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골방 철학자가 아닌 현실에 두 발을 디딘 채 정치와 전장을 누빈 그의 경험이 녹아 있다. 그의 사상 체계를 간단히 말하면 ‘양지(良知)’라고 할 수 있는데, 왕양명은 ‘양지에 이른다’ 혹은 ‘양지를 다한다’라는 뜻의 치양지를 통해 ‘지’와 ‘행’의 합일을 이뤄야 한다고 했다.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고 할 때는 먼저 그의 심지를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지치게 하고,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어지럽힌다. 이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인내심을 키움으로써 지금껏 할 수 없었던 사명을 감당케 하려 함이다.” 이 말은 왕양명의 일생에 그대로 투영된다. 일찍이 성인이 되고자 마음먹고, 공명정대한 태도로 관료직을 수행한 그에게 암울한 현실 정치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파란만장하고 고달픈 인생 역정은 그 길을 의연하게 걸어간 그에게 사상과 철학의 정신적 동력이 됐다. 왕양명이 고결한 인품으로 불세출의 위업을 달성하고, ‘기이하고 특출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입덕(立德)’ ‘입업(立業)’ ‘입언(立言)’ 이 세 측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뤄 후대에 ‘삼불후(三不朽)’라 평가받았다.이른바 이치만을 따지는 이학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마음에 주목하는 왕양명의 심학(心學)은 많은 지식인에게 논쟁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세간으로부터 주목받았다. 그의 학문과 사상 체계는 하나의 학문이 돼 한 시대를 풍미했고, 명 중엽 이후로 ‘양명학’으로 불리게 된다. 양명학은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마음을 어떻게 수양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 철학이다. 그의 철학은 종교의 장벽을 넘나들며 유(儒), 불(佛), 도(道) 3교의 일치론을 낳았다. 또한 양명학은 주자학 일색이던 동아시아 사상 체계의 흐름을 바꾸고, 근현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5-16

평생 사랑과 헌신으로 살았던 어머니를 향한 절절한 고백

“어머니, 어머니의 딸이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너무너무 감사합니다”포항 흥해중학교 교사(사회과) 정은정(51)씨가 에세이 ‘어머니의 딸이어서 행복했습니다(생각나눔)’를 발간했다.20여 년간 중등교사로 재직한 정씨의 첫번째 저서다.모두 95개의 에세이에서 정씨는 기독교 가정인 아버지 정상구 집사와 어머니 김선화 권사의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아버지의 몫까지 더한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었다”며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어머니를 향한 진심 어린 고백을 이 책에 절절히 녹여내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어머니는 누구보다 위대하고 고귀한 삶을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섬김과 헌신으로 인생을 채워나간다. 저자는 그런 어머니를 책을 통해 어머니를 향한 진실한 고백을 전하고 있다.“어머니가 생전에 보여주셨던 희생과 사랑, 섬김과 신앙에 대한 내용”이 이 책에 안에 가득 스며들어 있다. 특히 자녀를 향한 남다른 교육열과 헌신이 중점적으로 그려져 있다.정씨는 어머니의 일대기를 구구절절하게 나열한 자서전이 아니라 어머니의 인생을 고백조로 써내려갔다.정씨의 마음에는 어머니께 전수받은 신앙의 유산과 인생의 바른 가치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 영향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정씨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흘러가고 있다.그런 마음이 책 속에서도 포근하게 담겨 있다.각 에세이에 다양한 삽화와 사진이 그 역할을 한다. 글에 나온 사연을 소개하는 사진과 삽화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따스함, 그리고 감동을 전하기에 충분하다.저자는 이 책을 쓰며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속 그림들을 떠올렸다. 우리 기억 속에 남겨진 교과서 삽화가 그렇듯, 이 책의 사진들은 각기 다른 형태와 용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따뜻하고 사람 냄새가 난다.정은정씨는 평생 자녀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대학원에서 수학하며 배움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저자 정은정씨는 “이 책을 어머니의 사랑받는 자녀로 살아가는 모든 분에게 추천하고 싶다”며 “여러분들도 한 어머니의 소중한 자녀인 만큼,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며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9-05-16

도연 스님의 글과 목소리로 함께하는 진정한 ‘쉼’ 연습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고 있나요?” 잠 잘 시간을 줄여서 자기계발을 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스마트 폰을 보고, 쉴 때도 잠깐만 쉰다. 멍하게 있는 시간은 낭비다. 이것이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는 ‘휴식’에 대한 편견이 낳은 강박이다.‘잠시 멈추고 나를 챙겨 주세요’(담앤북스)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낭비하면 쉽게 자책하고 불안해하는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여유와 자기 사랑의 방법을 알려주는 명상 에세이다. 활발한 SNS 활동 및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에세이로 인기가 높은 도연 스님은 카이스트 재학 시절까지 치열하게 공부하며 높은 스트레스를 견디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그래서 학생과 직장인을 비롯한 현대인의 마음을 이해하며 명상을 해온 경험을 통해 번뇌와 잡념, 스트레스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내려놓을 수 있는지를 공유한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쉴 때조차 불안해지는 사람들을 향해 제대로 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또한 자신의 에너지 수준을 높이고 아우라가 한층 빛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방법도 안내한다.단순히 긴장을 풀라는 메시지만 전달하는 것이 아닌, 이완하고 긴장을 푸는 과정과 연습까지 섬세하게 안내한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머리를 식히는 방법,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법, 산만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다. 챕터별, 문단별로 안내돼 있어 내용을 이해하기 쉽다. 각 챕터 마지막 코너에서는 스마트 폰을 통해 스님의 육성을 들으며 언제 어디서나 명상을 연습할 수 있다.도연 스님은 사람들과 마찰, 불협화음은 자신의 부족함을 점검하고 자신이 지닌 사랑의 크기를 점검할 좋은 기회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자비심을 키우는 명상으로 나를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소개한다. 저자 도연 스님은 카이스트(KAIST)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며 물리학자를 꿈꿨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뒤 출가했다. 2012년부터 정부 기관 등지에서 명상과 마음챙김,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5-09

돈황과 하서주랑,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누적 판매부수 400만부를 넘긴 유홍준 교수의 베스트셀러 시리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비) 중국편이 출간됐다. 일본에 이은 두번째 해외 답사기로 넓은 땅과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빚어낸 중국의 방대한 문화유산을 찾아 경쾌한 답삿길에 나섰다.첫발을 뗀 곳은 유홍준 교수가 오랫동안 답사의 로망으로 간직한 돈황과 하서주랑으로, 이번에 출간된 1·2권에서 만날 수 있다. 국내편의 ‘해남·강진’이나 일본편의 ‘규슈’가 의외의 답사처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저자는 예상 밖의 선택으로 독자의 흥미를 끈다. 사막과 오아시스, 그 속에 숨겨진 보물 같은 불교 유적과 역사의 현장을 만나는 돈황·실크로드 여정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그 옛날 중국문명이 태동한 곳일 뿐 아니라 여러 민족들이 서로 투쟁하면서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해온 실크로드의 역사가 ‘답사기’ 중국편에서 생생하게 재현된다.1권 ‘돈황과 하서주랑 :명사산 명불허전(鳴不虛傳)’은 중국 고대국가들의 본거지이자 ‘사기’와 ‘삼국지’의 무대인 관중평원에서 시작해 하서주랑을 따라가며 돈황 명사산에 이르는 2천 킬로미터의 여정을 담았다. 실크로드 전체를 6천 킬로미터 정도로 추정할 때 그 동쪽 3분의 1에 달하는 대장정이다. 대륙의 스케일을 느낄 수 있는 답삿길이다. 불교가 이 길을 통해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왔고, 한족과 유목민족들의 투쟁이 이 길을 중심으로 벌어졌다.관중평원(關中平原)은 섬서성 서안(西安)을 중심으로 사방이 험준한 산맥과 네 개의 관문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넓이도 넓고 토양이 비옥할 뿐 아니라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주나라·진나라·한나라 등 중국을 통일한 나라들을 포함해 여러 나라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등 오랫동안 중국 역사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문화유산도 풍부해서 진시황과 한무제, 이릉과 사마천, 이백과 두보가 남긴 유적과 무덤, 문학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중국 4대 석굴사원으로 꼽히는 천수 인근의 맥적산석굴은 그 정교한 모습을 보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대륙을 연결하는 회랑처럼 길게 뻗어 있는 협곡이 마치 ‘달리는 회랑’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하서주랑(河西走廊)은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蘭州)에서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을 거쳐 돈황에 이르기까지 장장 900킬로미터에 달한다. 이곳은 한나라 무제가 흉노를 몰아내고 하서사군을 설치한 곳으로, 같은 시기 한사군이 설치된 우리 역사를 떠올리게도 하는 곳이다. 기이한 황하석림 속에 화려한 불상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난주의 병령사석굴을 만나고, 유장하게 흐르는 황하의 모습을 그 어디에서보다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을 지나면 돈황에 도착한다. 많은 사람들이 ‘답사의 로망’으로 꼽는 오아시스 도시 돈황은 석굴사원들과 그림 같은 사막 풍광을 보러 오는 답사객들로 붐비는 관광도시가 됐다. 특히 중국 최고의 석굴사원 중 하나인 막고굴은 예부터 돈황이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뿐 아니라, 만리장성 등과 함께 중국에서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저명한 불교 유적지다. 수준 높은 불상과 불화가 남아 있고 이 지역의 역사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그림들도 볼 수 있어 귀중한 연구자료가 된다.2권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오아시스 도시의 숙명’은 불교미술의 보고(寶庫) 막고굴 곳곳을 살피며 그곳에서 발견된 돈황문서의 다난했던 역사를 담았다. 옥문관과 양관 등 실크로드의 관문들을 탐사한다.돈황 명사산 자락에 자리잡은 막고굴에는 4세기 이래로 수백년 동안 석굴이 열려 지금까지 492개 굴이 확인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값하는 세련된 관리 시스템을 통과해 입구에 다다르면 1.6킬로미터에 달하는 절벽에 굴착된 수백개의 석굴이 장관을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국미술사와 불교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각종 불상·조각상들과 여러 가지 도상을 구현한 벽화들이 바로 이 석굴 속에 들어 있다. 남북조시대 불상의 맑고 앳된 인상(수골청상)과 당나라 불상의 세련되고 사실적인 모습, 부처님의 전생을 포함한 심오하고도 흥미로운 불교 도상들을 재현해놓은 벽화들이 관람객을 사로잡는다. 돈황문서가 발견된 제17굴 장경동과 천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제45굴의 보살상은 막고굴 답사의 백미다.돈황 인근에는 막고굴 외에도 가볼 만한 답사처가 많다. 과주(안서)에 있는 유림굴은 여타 석굴들 못지않은 수준을 보이면서도 탕구트계의 나라 서하가 남긴 불교예술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돈황 시내에서 각각 서남쪽, 서북쪽에 위치한 양관과 옥문관은 예부터 서역으로 열린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서유기’의 주인공들이 불경을 찾기 위해 떠났다는 서역이 바로 이 너머다.유홍준 교수는 “중국은 우리와 함께 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해나가는 동반자일 뿐 아니라 여전히 우리 민족의 운명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막강한 이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우리는 중국을 더욱 깊이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중국은 언제나 즐거운 여행의 놀이터이자 역사와 문화의 학습장이면서 나아가서 오늘날 국제사회 속에서 우리의 좌표를 생각게 하는 세계사의 무대였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9-05-09

‘2017 맨부커상’ 최종 후보영국 여성 작가 앨리 스미스 ‘사계절 4부작’ 중 첫 장편

2017년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앨리 스미스의 사계절 4부작 중 첫 번째 장편소설 ‘가을’(민음사)이 번역 출간됐다.앨리 스미스는 독특한 방식의 글쓰기와 신화와 회화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지적인 주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의식 등으로 영국에서 독보적인 여성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영국 작가다.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스코틀랜드가 언젠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다면 그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평가를 받는다.‘가을’은 2017년 최신작이자 ‘사계절 4부작’으로 기획한 연작 중 첫 번째로 출간된 소설이다.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 도서 시장에서 화제가 됐으며,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뉴욕 타임스에서 ‘올해의 책’에 선정되는 등 언론과 문단, 독자들의 큰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스미스는 현재까지 ‘가을’과 ‘겨울’을 발표했고, ‘봄’이 출간을 앞두고 있으며, 민음사는 스미스의 4부작 작품을 모두 계약해 차례대로 국내에 소개할 예정이다.이번 소설은 80세가 넘은 이웃 노인 대니얼과 특별한 우정을 나눈 십 대 소녀 엘리자베스 이야기와 시간을 건너뛰어 서른 두살 미술사 강사가 된 엘리자베스의 일상을 교차하며 진행된다. 실제로 여러 사회 정치적 이슈로 혼란스러운 영국 사회 면면을 현재 진행형으로 묘사한 통찰력 있는 작품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 한국 사회에 적용돼도 무리가 없을 만큼 동시대성을 지닌 소설이다.백한 살이 넘어 요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는 대니얼과 사회인이 된 엘리자베스의 차가운 일상은 ‘독거노인’과 ‘비혼여성’을 넘어 ‘관료주의’와 ‘난민’으로까지 생각의 영역을 넓힌다. 이웃과의 교감이 개인들 각각의 삶에 얼마나 강한 불빛으로 사회를 건강하게 밝힐 수 있는지, 앨리 스미스는 사회의 한복판 속에서 소설가가 가진 날카로운 직감력으로 사회를 크로키한다. 재기 발랄하고 영리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녀만의 언어유희를 발견하는 것 역시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빼놓을 수 없는 독서 체크 사항이다.세상이 지금과 달리 흥미진진하던 시절, 당대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던 지식인이자 작곡가였던 대니얼은 이제 동네에서 늙은 동성애자라는 소문에 휩싸여 산다. 어린 엘리자베스는 우연히 학교 숙제로 이웃 사람 인터뷰를 하러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이십 년 후, 엘리자베스는 대니얼의 영향으로 미술사를 전공한 대학 강사가 되고, 백한 살이 넘은 대니얼은 요양원에서 주로 잠들어 꿈을 꾸며 지낸다. 그 ‘투표’ 이후 엘리자베스가 겪는 매몰찬 도시의 분위기와 차가운 사람들, 대니얼의 꿈속에 복기되는 옛 시절에 대한 추억들, 그리고 그와 쌓은 우정의 근원과 영향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추억들을 오가며 순환을 이루던 이야기는 점차 늦가을을 향해 나아간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9-05-09

유전기술·에너지·인공지능·교육 4대 핵심 분야로 보는 한국의 미래

‘공존과 지속: 기술과 함께하는 인간의 미래’(민음사)는 권혁주, 김기현, 장대익 교수를 비롯해 서울대 이공대·인문사회대 23인의 석학이 합작한 ‘한국의 미래’ 프로젝트가 만 4년 만에 일궈 낸 집합 지성의 결실이다. 유전기술·에너지·인공지능·교육의 4대 핵심 분야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종합 리포트하며 신기술이 우리 사회에 연착륙하기 위한 ‘공존과 지속’이라는 방향을 제시한다.이전의 기술 혁신 관련 논의들이 이공계 위주로 펼쳐졌다면 2015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기술혁신과 우리 사회의 접점을 논하며 이공계는 물론 인문사회계의 분야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토론의 장이 마련된 데 의의가 크다. 에너지시스템 분야를 맡은 이정동 교수를 비롯해 권혁주(행정대학원)·김기현(철학과)·장대익(자유전공학부) 교수 등이 교육미디어, 유전공학, 인공지능 분야의 좌장을 맡았다. 중국에서 얼마 전‘유전자가위’ 기술로 HIV(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에 내성이 있는 아기를 탄생시켰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있었다. 인간의 삶을 향상하는 진보인가, 아니면 생명의 영역에 인간이 개입하는 위험한 시도인가? 이와 같은 문제를 둘러싼 과학적·철학적 쟁점이 책의 1부 ‘유전자 편집의 시대’에서 깊이 있게 다뤄진다.융합의 전문가로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 온 장대익 교수가 대담을 이끄는 가운데, 유전자가위를 개발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클래리베이트(Clarivate))이자 “동아시아 10인의 스타 과학자”(‘네이처’)로 선정된 김진수 교수가 유전자교정 기술을 직접 설명한다. 이어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을 연구하는 이두갑 교수가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고, 인공지능과 빅 데이터 기술을 기반으로 기초생물학을 연구하는 김홍기 교수가 유전자 편집의 사회적 효과로 논의를 확장하며, 판사직을 역임한 뒤 철학과로 옮겨 온 김현섭 교수가 생명공학의 법적·윤리적 함의를 짚는다. 유전자편집이 건드리는 사회 영역들을 망라해 가히 ‘어벤저스’를 떠올리는 구성이다.AI 전문가가 철학과 교수들과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눈 인공지능 파트에서는 인간이 만든 로봇이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해소된다. 컴퓨터공학부의 문병로 교수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큰 차이점 중 하나인 ‘기호의 접지(symbol grounding)’를 들어, 기호와 의미를 연결하는 능력이 사람에게는 있지만 컴퓨터에게는 없다는 점에서 컴퓨터가 사람의 존재 가치 자체를 훼손하는 일은 아주 먼 미래라고 말한다. 이어 철학과 김기현 교수가 로봇의 인간화보다 오히려‘인간의 로봇화’가 더 큰 위험이라고 지적해, 공감을 축소해 가는 인공지능 시대에 공동체 정신의 유지로 우리 삶의 질을 생각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윤희정기자

2019-05-02

시신으로 발견된 여고생, 남은 이들의 삶의 의미

2016년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로 제47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동시대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 된 권여선(54) 작가가 3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레몬’(창비)을 출간했다.삶의 불가해함을 서늘한 문장으로 날카롭게 그려내며 특유의 비극적 기품을 보여줬던 권여선이 이번에는 작품세계의 또다른 확장으로 장르적인 솜씨까지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국문학의 특출한 성취로 굳건히 자리매김하며 동료 작가들에게도 찬사를 받아온 권여선의 이번 변신은 독자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권여선의 소설을 읽는 재미를 줄 것이 분명하다.2002년 한일월드컵으로 떠들썩했던 여름,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이라 불렸던 비극이 벌어지고, 이 사건을 둘러싼 모든 인물의 삶이 방향을 잃고 흔들린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세 여성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이 작품은 애도되지 못한 죽음이 어떤 파장을 남기는지 집요하게 파고들어가며 삶의 의미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출간 전 실시한 사전서평단 이벤트에서도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번 작품은 권여선 소설의 새 지평을 증명할 것이다.2002년 여름, 열아홉살이던 해언이 공원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고, 범인이 잡히지 않은 채 17년의 세월이 흐른다. 당시 사건의 용의자였던 한만우를 형사가 취조하는 모습을 다언이 상상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용의자는 한명 더 있었다. 해언이 마지막으로 목격됐을 당시 타고 있던 자동차의 운전자 신정준. 하지만 신정준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그렇게 사건은 미제로 남지만 그 비극에 얽힌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진다. 살인사건으로 시작되는 권여선의 네번째 장편소설 ‘레몬’은 지금까지 권여선이 보여줬던 소설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 매력적인 미스터리 서사는 읽는 이를 이야기 한가운데로 순식간에 끌어당기는 놀라운 흡인력을 보여주며 장르적 쾌감마저 안겨준다.이 작품의 중심화자인 해언의 동생 다언은 “언덕길을 굴러 내려가는 자전거의 종처럼 당당당당 웃던 아이”였지만 사건 이후 “이상한 이미지들이 마구잡이로 혼합되어 있는” 무표정한 얼굴로 변모한다. 그리고 8년이 지난 뒤에야 사건의 주요 용의자였던 한만우를 찾아가겠다는 결심이 선다. 이 작품이 발표된 2016년 문학평론가 정홍수가 “김다언이 한만우 집에 들어서는 장면과 같은 깊이를, 다른 소설에서 느낀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뛰어났다”라고 평한 바 있을 정도로 한만우의 집에서 벌어지는 모든 장면은 이 소설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애잔하고도 묵직하게 보여준다. 여고생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종내에 신의 존재, 그리고 죽음과 삶의 의미를 묻는 대목으로까지 이어지는데 이 흐름은 권여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소설적 깊이를 증명해낸다.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레몬’으로 대표되는 “노란빛”이 있다. 레몬은 화자 다언이 친언니보다 따랐던 선배 상희가 썼던 시에 등장하는 단어이면서, 다언이 한만우 집에서 함께 먹었던 따뜻한 계란프라이의 애틋한 노란빛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다. 동시에 그 노란빛은 언니 해언이 죽기 직전 입고 있었던 원피스의 색깔이기도 하다. 다시 오지 않을 좋았던 시절을 상징하는 레몬의 노란빛은 다언으로 하여금 비틀린 자력 구제로서의 복수를 결심하게 만드는데 여기에 이 소설의 반전이 숨어 있다.권여선 작가. /창비 제공권여선 작가는 “사람이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을 수 없다는 걸, 그게 당연하다는 걸 아는데, 저는 그게 가장 두렵고 두렵지만, 두려워도 삶의 실상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삶의 반대는 평(平)인 것인가, 그래서 나는 평하지 못한 삶의 두려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생각한다”고 작가의 말에 적었다.권여선 작가는 1996년 제2회 상상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해 이전까지 ‘안녕 주정뱅이’를 비롯한 5권 소설집과 2편 장편소설을 펴냈다. 이상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동리문학상,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한편, 2016년 문예지 계간 ‘창작과비평’에 발표한 소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를 수정·보완해 새롭게 선보이는 이 소설은 2017년 원제와 동명의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