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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울릉도 개척시대 살해 당한 ‘도수 배상삼’ 책으로

울릉도 개척 당시 섬으로 건너가 도벌을 일삼는 일본인들과 그들의 앞잡이 세력을 퇴척하고 개척민들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노력했지만 살해당한‘울릉도수 배상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창작된 책이 발간됐다.포항 출신 김일광 소설가가 쓴 신간‘동남제도 수호검 배상삼 이야기’(우리나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2019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사업 작품으로 선정했다. 김일광 작가가 쓴 책 속의 배상삼은 대구 사람으로, 본명은 배영준이었지만 동학 농민 운동에 연루돼 경상북도 울진에 피신해 있다가 울릉도 개척령이 내리자 전재환 일가를 따라 울릉도에 오게 되면서 배상삼으로 개명했다.김일광 작가울릉도수가 된 그는 도벌을 하러 오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매우 엄했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특히 1894년(고종 31) 가뭄이 극심했을 때 배상삼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내놓게 해 섬사람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했다.이로 인해 일본인들과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부자들의 앙심을 사게 됐다. 결국 그들은 배상삼이 왜인과 내통, 개척민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는 전부 왜인들의 처첩으로 팔려고 한다는 뜬소문을 유포했다.그로 인해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섬사람들까지 그를 원수같이 여기게 만들어 결국에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김 작가는 100년 전으로 돌아가서 동남제도 개척사, 망망한 바다를 건너 울릉도로, 백성을 위한 칼·증거, 울릉도수가 된 상삼과 또 한 번의 배신, 다시 현실로 등으로 꾸며진 소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소설가의 감각으로 흥미진진한 글을 써내려갔다. 울릉/김두한기자

2019-11-21

폭소가 터지는 와중에 심금을 울리는…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 성석제의 산문집 2종이 출간됐다.‘근데 사실 조금은 굉장하고 영원할 이야기’(문학동네)는 그간 작가가 신문과 잡지 등 여러 지면에 발표한 원고를 엄선해 다듬은 신작 산문집이며, ‘말 못하는 사람’(문학동네)은 2004년 출간된 ‘즐겁게 춤을 추다가’를 개정한 것으로 시대를 초월해 독자들에게 울림과 웃음을 줄 수 있는 빛나는 글들을 추려내 개고 작업을 거쳤다.시인이자 소설가인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시대 해학의 아이콘이자 타고난 재담꾼이다. 그런 그의 유머와 입담은 산문에서도 여실히 발휘된다. 이번에 출간된 산문집 2종은 한동안 사진 에세이(‘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 음식 에세이(‘소풍’· ‘칼과 황홀’) 등을 주로 펴낸 그가 오랜만에 선보이는 ‘본격 인생 에세이’로 소설가 성석제로서, 자연인 성석제로서 살아오면서 느낀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와 세상사에 대한 통찰을 특유의 거침없는 화법으로 전개한 글편들이 담겨 있다. 성석제 문학의 기원이 된 순간들, 삶이 내재한 아이러니가 빚어낸 웃지 못할 사건들, 일상에서 만난 빛나고 벅찬 장면들이 기발한 문장들에 담겨 펼쳐진다. 세상만물에 대한 남다른 시선, 통렬한 유머, 불평불만으로 보이지만 깊은 사유가 담긴 성찰까지. 능청스러운 와중에 날카롭고, 폭소가 터지는 와중에 심금을 울리는 그의 산문집은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공감과 위안이, 그의 소설을 좋아해온 독자들에게는 반가운 선물이 돼줄 것이다.신작 산문집 ‘근데 사실 조금은 굉장하고 영원할 이야기’는 모두 4부로 이뤄져 있다. 1부 ‘소설 쓰고 있다’에서는 작가가 어린 시절 처음으로 문학 작품을 접했을 때의 경이로운 순간과 소설가 성석제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작가로 살아오면서 정리한 문학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2부 ‘나라는 인간의 천성’은 자연인 성석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삶에서 만난 소중한 순간들, 기쁨과 슬픔, 애정과 그리움이 담긴 순간들을 통해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되돌아보기도 한다. 3부 ‘실례를 무릅쓰고’에는 사회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 돋보이는 글들이 들어 있다. 파괴돼가는 자연, 훼손돼가는 언어, 관계의 본질을 잊어가는 현시대에 날카롭지만 유머를 잃지 않는 풍자로 응수한다. 4부 ‘여행 뒤에 남은 것들’은 세상을 둘러보며 깨달은 것들과, 일상에서는 만나기 힘든 생경한 풍경에서 느낀 경이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말 못하는 사람’에서는 젊은 날의 성석제를 만나볼 수 있다. 단순히 과거의 글이 아니라 젊은 소설가의 치기 어리지만 반짝이는 사유, 시대를 초월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기발한 질문들이 담겨 있다. 1부 ‘기억’에는 작가의 어린 시절의 추억들과 대학생활이 생생히 그려져 있어 한 소설가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으며, 2부 ‘편력’에는 작가 성석제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들을 한 문학 작품들과 에피소드들이 기록돼 있다. 3부 ‘바라봄’에는 우리나라의 인간군상들이 펼쳐내는 사회상을 남다른 눈으로 포착해 유머러스한 화법으로 풀어낸 글들이, 4부 ‘내가 만난 사람’에는 그가 가까이 알고 지낸 세상을 떠난 문인들, 이문구 소설가, 성원근 시인, 김소진 소설가를 회상하는 글들이 담겨 있다. 떠난 사람을 추억하는 그의 그리움과 애정이 담긴 담백하면서 동시에 애절한 글은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성석제 작가.바깥에는 소란한 90년대가 거센 연기와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고 하늘에는 보이지 않는 별과 별 사이에서 차갑고 더러운 눈, 물이 막 걸음을 떼려는 소년들의 이마에 떨어지곤 했다. 눈앞에서 죽은 소년도 있었고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소년도, 떠나지 못한 소년도 있었다.“모두 어른이 되었으리라.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어른이 된다. 어른들은 탐욕과 폭력과 배신으로 자기들의 나라를 만들려 하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그들은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었다, 서울하고도 신촌에. 언젠가 미국에 그런 일이 있었듯이.” (40쪽)/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1-14

중화요리, 알고 먹으면 더 맛있다

맛은 혀끝에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진정한 진미를 느끼는 데 아는 것은 힘이 된다. 맛있으면 궁금해지고, 알고 먹으면 더 맛있으니까!‘중화미각’(문학동네)은 한국중국소설학회에서 활동하는 인문학자 열아홉 명이 중국 역사와 문학 속 스무 가지 음식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알면 알수록 당장 근처 중화요릿집으로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맛있는 이야기가 가득하다.동파육은 항주의 인기쟁이 소식이 백성들에게 잔뜩 선물 받은 돼지고기를, 다시 백성들과 함께 나눠먹으려고 만든 요리다. 마파두부는 다리 옆 작은 식당 진씨 아주머니가 상인과 노역자들의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 부스러기 고기와 두부에 갖은양념과 기름을 넉넉하게 넣고 맛있게 볶은 요리다. 만두, 포자, 교자, 소매, 혼돈…. 소가 있거나 없거나, 옆이 터졌거나 막혔거나. 이름도 모양도 재료도 다양하고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만두는 사람 머리를 대신해 제갈량이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태생부터 애민정신 가득한 음식인 셈. 친숙한 중국 음식 중에는 얽힌 이야기도 조리 방법도 ‘서민적인’ 것이 많다. 어렵지 않기에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고, 지역별로 입맛별로 응용하기도 쉬웠다.만두라는 명칭이 원래 ‘오랑캐 머리’라는 뜻의 만두(蠻頭), 사람 머리로 속였다는 뜻의 만두(瞞頭)에서 음식을 뜻하는 만두(饅頭)로 변모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만두의 탄생 배경에 인간과 생명을 존중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 남만 현지 사람들은 사람을 죽여 그 머리를 제물로 바쳐 신의 분노를 잠재웠지만 제갈량은 가짜 사람 머리, 즉 만두를 만들어 누구의 생명도 희생시키지 않았다. 제갈량으로 상징되는 중원의 이성적 인문문화가 남만의 야만적 인신제사를 대체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남만인의 생명이나 중원인의 생명을 똑같이 소중하게 여긴 생명존중과 애민정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한국인이 사랑하는 음식 짜장면은 산동 상인들이 한국에 정착하고 나서 새로운 맛을 더해 만들어낸 국수다. 국경을 넘어와 변신한 화교표 짜장면은 사실 태생부터 초경계적이었다. 멀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상지로부터 가깝게는 만주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대륙 서쪽 끝과 동쪽 끝에서 기원한 음식문화가 대륙을 가로지르고 발해를 건너 중국 산동에서 만나 탄생한 음식이기 때문이다.호떡은 오랑캐라고 지칭되던, 중국 서북쪽 유목민으로부터 전래된 음식이었기에 ‘오랑캐 호(胡)’, ‘떡 병(餠)’을 써서 ‘호병(胡餠)’이란 이름으로 표기되었다. 중국 한나라 무렵, ‘병’은 중원으로 들어온다. 당시 황제인 영제가 참깨호떡의 탐식가였다. 이후 호떡은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당나라 문화에 편입되며 동아시아 각지로, 조금씩 다른 형태로 퍼져나갔다.만한전석(滿漢全席)은 만주족과 한족의 진귀한 요리를 모두 모아놓은 최고의 연회로 알려져 있다. 만한전석의 기원은 강희제가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위해 천수연을 연 것에서 비롯됐다.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한 만주족은 폭력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공감을 이끌어내야 했다. 이를 식탁 위에서 실현하려고 연 연회가 바로 만한전석이다.뜻밖에 이 책은 훌륭한 미식 가이드도 된다. 북경오리구이를 굽는 방법으로는 오리에 쇠꼬챙이를 꽂아 숯불 위에서 구워내는 ‘차사오(叉燒)’와 화로 위에 오리를 거꾸로 걸어두고 은은한 불로 굽는 ‘과루(掛爐)’, 그리고 외국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화로 안에서 뜸들이듯 굽는 ‘먼루(燜爐)’가 있다는 사실. 훠궈는 대표적인 요리법만도 여섯 가지다. 입문자에겐 개인 소스를 만드는 일이 심리적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데, 어렵지 않게 시작하려면 마장이나 간장을 기본으로 해 다른 것을 첨가해나가는 게 좋다.한편, 중국에는 손님을 열렬히 환대할 때 꼭 내오는 생선 요리가 있다. 약간은 낯선 이름, ‘쑹수구이위’라는 다람쥐 모양의 생선 칼집 탕수 요리다. 그런데 생선이면 그냥 생선이지 왜 하필 다람쥐 모양일까? 이는 쑹수구이위의 재료 잉어가 원래는 신에게 바치는 제사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맛있는 걸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청나라의 대표 미식가 건륭제가 잉어를 요리로 만들어 바치라 명했고, 요리사는 고심 끝에 잉어의 모습을 쏙 감춘 다람쥐 모양을 한 탕수 요리를 만들어 식탁에 올린다. 그것이 바로 쑹수구이위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1-07

절절함과 따뜻함… ‘인간’ 정약용을 만나다

조선 실학을 대표하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전통한국의 수많은 사상가들 가운데서도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평가된다. 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정약용을 떠올리면 오랜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유배생활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한 18년이란 유배생활은 그에게 깊은 좌절도 안겨줬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등 모두 542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초판이 나온 1979년 이래 다산 정약용을 만나는 가장 친절한 통로 역할을 해온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창비)가 초판 발간 40주년을 기념해 새롭게 정비된 모습으로 출간됐다.정약용이 유배 시기 절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들을 엮은 이 책은 대학자 이전의 인간적인 다산의 면모를 만날 수 있어 오늘날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이번 개정판에서는 지방관 이종영에게 주는 글을 새롭게 추가했고, 시대 변화에 맞춰 번역과 체제, 장정을 정비했다. 이제 막 고전을 접하기 시작하는 청소년과 정약용을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 더욱더 오래 사랑받는 입문서로 남기 위한 새 단장이다.이 책의 편역자이자 대표적 다산학 연구자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다섯 번째 개정판을 출간하면서 “세상에 공개하려고 저술한 책에서는 인간 다산의 속마음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지만 아들·형님·제자들에게 보낸 그의 사신(私信)에는 깊은 속마음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는 말을 남겼다. 불운한 환경 속에서도 생활인이자 소통하는 지식인으로서 아름다운 말들을 남겼던 다산의 자취를 이 책 전체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이 책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둘째형님께 보낸 편지,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 등 총 4부로 구성돼 있다.각 부에는 아들들이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기를 입에 닳도록 이야기하는 모습(1~2부), 다산과 마찬가지로 귀양살이를 했던 둘째 형님 정약전을 안부를 물으며 깊고 넓게 학문을 토론하는 모습(3부), 제자들의 장래를 걱정해 온갖 지혜를 전수하려는 모습(4부)이 각각 담겨 있다.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단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들들에게 주는 편지글이다. 다산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 학연(學淵)과 학유(學游)가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늘 엄격하게 격려했다. 이 편지들에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슨 공부를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빛나는 명언들과 함께, 불의와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다산의 매서운 선비정신이 담겨 있다. 편지를 읽다보면 참다운 길을 가도록 준엄하게 꾸짖는 다산의 음성이 귓전에 들리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애끊는 부정(父情)이 넘친다.제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에는 생계를 꾸리는 방법, 친구를 사귈 때 가려야 할 일, 친척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 등 다산의 생활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다산 자신의 저서를 후세에 전해달라는 전언과 함께 저술의 과정과 원칙을 정제해 제시하고 있어, 다산 사상의 큰 줄기를 압축해놓은 글로 읽기에 유익하다.다산 정약용 표준 영정제3부에는 정약용의 강진 유배와 비슷한 시기에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둘째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들을 실었다. 이들 형제는 유배 중에서도 서간을 주고받으며 변함없는 우애를 나눴다. 정약용은 자신보다 더 외로운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형의 건강을 염려하고 지극한 마음을 전한다. 특히 두 형제는 심도있는 학문 주제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유배지에서도 학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실함을 바탕으로 ‘목민심서’등 정약용의 빛나는 저작들이 탄생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제4부는 정약용이 제자와 지인에게 써 보낸 글을 선별한 것으로, 자상한 스승의 마음씨와 더불어 다산의 넓고 깊은 학문세계가 드러난다. 학승 초의선사를 제자로 삼고 시와 선에 대한 깊은 담론을 펼친 것은 너무도 훌륭한 문학론이며, 19세의 어린 소년으로 해배 후 찾아온 이인영에게 해준 이야기는 뛰어난 문장론이다. 지방관 이종영에게 남긴 두 편의 글은 목민관의 자세를 다룬 내용을 담아 ‘목민심서’의 축약처럼 읽힌다. 특히 이 편지들은 다산이 실학자로서 얼마나 튼튼한 현실주의적 사고와 실학사상을 지녔는지 보여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0-31

‘올재클래식스’ 32번째, 관자·순자·주역 발간

(사)올재(이사장 홍정욱)는 권당 2천900원에 판매하는 ‘올재 클래식스’ 32번째 시리즈로 중국 고전 ‘관자’, ‘순자’, ‘주역’을 출간했다.‘관자’는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을 지낸 관중(管仲, ?∼기원전 645) 사상을 정리한 고전이다.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 주인공인 관중은 중국 최초 정치경제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예의와 염치를 아는 구성원을 기르고, 부국강병을 이룰 다양한 방법을 소개했다.‘순자’는 합리적 실천 유학을 추구한 순자 사상을 집대성했다. 예치주의를 주창한 그의 저서는 법가를 비롯한 제자백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졌다.천지만물의 도덕과 인간이 본받아야 할 도덕이 내재돼 있어 동양철학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주역’은 미래를 예측해, 좋은 일을 추구하고 흉한 일은 피하고자 하는 인류의 노력이 수천년 집약된 철학서다. 64괘에 담긴 자연에 대한 통찰과 인간사의 보편적 지혜를 탐구할 수 있는 주역에 대해 공자는 “만년에 ‘역’(易)을 좋아해, 이 책을 읽다가 가죽끈이 3번 끊어졌다”고 말할 정도로 주역 공부에 매진했다.‘관자’는 두 권으로 구성됐으며, 두 종 모두 고 신동준 21세기정경연구소장이 번역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0-24

경계와 단절을 넘어타자를 향한 공감

올가 토카르추크. /연합뉴스2018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57)의 대표작 ‘방랑자들’(민음사)이 출간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자로 토카르추크를 선정하면서 “삶의 한 형태로서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해박한 열정으로 그려낸 서사적 상상력”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일찍이 폴란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토로한 바 있는 토카르추크의 작품 세계는 본질적으로 경계와 단절을 허무는 글쓰기를 통한 타자를 향한 공감과 연민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대표작이 바로 ‘방랑자들’이다. 작가는 소설을 가리켜 “국경과 언어,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심오한 소통과 공감의 수단”이라고 말했는데, 작자가 지향하는 이러한 가치가 무엇보다 생생하게 빛나는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2008년 폴란드 최고의 문학상인 니케 문학상을, 2018년도에는 맨부커 상 인터내셔널 부분을 수상한‘방랑자들’은 단선적 혹은 연대기적인 흐름을 따르지 않고, 단문이나 짤막한 에피소드를 촘촘히 엮어서 중심 서사를 완성하는 패치워크와도 같은 이야기 방식이 가장 절묘하고 효과적으로 활용된 사례로 평가받는다. “물리적인 이주(移住)와 문화의 이행에 초점을 맞춘, 위트와 기지로 가득한 작품”이라는 한림원의 평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작품이다.휴가를 떠났다가 느닷없이 부인과 아이를 잃어버린 남자, 죽어 가는 첫사랑으로부터 은밀한 부탁을 받고 수십 년 만에 모국을 방문하는 연구원, 장애인 아들을 보살피며 고단한 삶을 살다가 일상에서 탈출해 지하철역 노숙자로 살아가는 여인, 프랑스에서 사망한 쇼팽의 심장을 몰래 숨긴 채 모국인 폴란드로 돌아온 쇼팽의 누이, 다리를 절단한 뒤 섬망증(8B6B妄症)에 시달리는 해부학자, 지중해 유람선으로 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그리스 문명의 권위자….‘방랑자들’은 여행, 그리고 떠남과 관련된 100여 편이 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기록한 짧은 글들의 모음집이다. 어딘가로부터, 무엇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들, 아니면 어딘가를, 무엇을,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해 다다르려 애쓰는 사람들, 이렇듯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진다.소설의 제목은 고대 러시아 정교의 한 교파인 ‘달리는 신도들’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들은 온갖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정체되거나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하고 장소를 바꾸는 것만이 악을 쫓아낼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소설의 첫머리에서 토카르추크는 다음과 같은 모토를 선언한다.“내 모든 에너지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버스의 진동, 자동차의 엔진 소리, 기차와 유람선의 흔들림.”(본문 19쪽)모스크바의 지하철역 주변에서 노숙하는 정체 모를 노파의 에피소드를 통해 토카르추크는 인간이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어떤 장소나 사물에 얽매이게 되면, 근본적으로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관습과 타성에 젖어 익숙한 것만을 찾는 인간은 현재에 안주하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기계적으로 순응하게 되고, 더 이상 모험이나 행복을 갈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될 거야, 심장은 나무 바늘에 찔리고, 손과 발은 핀으로 뚫려서 문지방과 천장에 고정될 거야. (….)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본문 391~392쪽)올가 토카르추크. /연합뉴스토카르추크는 우리를 쉼 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여행이야말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우리가 머무는 공간,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소유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삶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님을 일깨운다.‘방랑자들’은 여러 이야기를 직조한 다성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불과 10여 개의 문장으로 이뤄진 짧은 텍스트도 있고, 중편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긴 분량의 이야기도 있다. 여행기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실은 독자로 하여금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듯이 읽으며 사색을 하도록 유도하는 철학적인 이야기들이다. 또한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른 느낌과 해석이 가능한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텍스트이기도 하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0-24

만성염증 방치하면 동맥경화·당뇨·암·치매로 발전

건강 검진을 받아도 이상은 없는데 알 수 없는 통증으로 자꾸만 아프다면? 만성염증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만성염증은 동맥경화, 고혈압, 당뇨, 비만, 아토피, 류머티즘, 암, 치매, 우울증 등 현대인의 만성 질환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 몸이 스스로 회복하는 정상적인 면역 과정이 ‘급성염증(Acute inflammation)’이라면, 이 과정에 문제가 생겨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지연되는 상태가 ‘만성염증(Chronic inflammation)’이다. 감염 부위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급성염증과 달리, 만성염증은 전신에 걸쳐서 오랜 기간 뚜렷하지 않은 반응으로 나타난다. 알 수 없는 통증, 지속적인 피로와 불면증, 우울, 불안과 같은 기분 변화, 변비, 설사, 속 쓰림과 같은 위장관 증상, 체중 증가, 회복이 잘 안 되고 자주 반복되는 감기 등 모호한 증상으로 나타나 ‘소리 없는 살인자’라고도 불린다.만성염증의 원인으로는 세균과 바이러스, 미세먼지, 중금속, 환경호르몬과 같은 환경오염 물질, 진통제, 소염제, 항생제의 무분별한 남용, 지나친 운동과 스트레스 등이 꼽힌다. 무엇보다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이다. 트랜스지방, 첨가물, 정제곡물, 설탕, 잔류 농약 등 먹거리에 포함된 강력한 ‘생체 이물’, 즉 내 몸에 원래 있지 않았던 것들이 지속적으로 몸속으로 들어오면 면역 반응이 일어나 활성산소가 발생하고, 정상 세포까지 상처를 입는 만성염증으로 고착화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먹거리를 고를 때 만성염증을 일으키는 식품과 줄이는 식품을 똑똑히 구분해야만 하는 이유다.만성염증은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 염증을 늦출 수는 있지만, 그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없고, 더 큰 부작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을 바꾸는 것이 답이다. ‘만성염증을 치유하는 한 접시 건강법’(판미동)은 염증을 줄이는 식품으로 어떻게 한 끼 식사를 구성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0-17

‘날개’ 이어쓰기 이상을 다시 주목하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이상 ‘날개’중내년은 천재 작가 이상(1910∼1937)이 태어난 지 110년째 되는 해다. ‘천재’와 ‘광인’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로 한국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 이상은 근대 문인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문학적 자장이 넓고 크다. 그는 시, 소설을 비롯해 수필에서도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으며, 그의 문학은 당대뿐만 아니라 10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중에서도‘날개’는 명실공히 그의 대표작으로 이상 문학에 대한 관심을 널리 확장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냈다.식민지 지식인의 불우한 자의식을 그린 소설로, 흥미로운 경구의 삽입을 통해 모더니즘을 실험한 소설로, 자본주의 화폐경제를 재현한 소설로도‘날개’는 그간 다양하게 읽혀왔다.‘정오의 사이렌이 울릴 때’(문학과지성사)는 이상의 대표작 ‘날개’를 여섯 명의 소설가(이승우, 강영숙, 김태용, 최제훈, 박솔뫼, 임현)가 새롭게 이어쓰기를 시도한 작품이다.이승우의 ‘사이렌이 울릴 때’, 김태용의 ‘우리들은 마음대로’, 임현의 ‘진술에 따르면’은‘날개’와 동일한 시공간 및 인물을 공유하면서 비교적 적극적인 방식의 이어쓰기를 시도한다.이승우의 ‘사이렌이 울릴 때’는 ‘날개’의 마지막 장면에 주목한다.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정오의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를 외치는 ‘날개’속 ‘나’를 대면하는 또 다른 ‘나’를 등장시키는 이 작품에서는, 정오의 사이렌 소리만 맹렬할 뿐 그 무엇도 분명한 것이 없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라는 사실만이 확실할 뿐이다.김태용의 ‘우리들은 마음대로’와 임현의 ‘진술에 따르면’은 공통적으로 ‘날개’ 속 ‘아내’를 초점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겹쳐지는 작품들이다. ‘날개’에서와 달리 김태용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얻게 된 그녀(‘나’)는 매우 솔직한 여성으로 등장하며,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등장하던 영화는 이제 끝났고 새로운 영화가 시작된 것이다”라고, 결국 자의식 과잉의 무능한 남편을 버리고 “나는, 우리들은 이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고 선언하는 소설로 읽힌다.임현의 ‘진술에 따르면’은 백화점 옥상에서 투신한 사내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투신 장면을 봤다는 목격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아내는 “아무래도 내가…. 그 사람을 죽인 것 같다”라고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 임현의 작품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교환과 관련해 ‘날개’의 화폐경제가 의미하는 바를 날카롭게 분석해보는 소설로서 흥미로우며, 현재적 관점에서 더 많은 논의를 가능케 한다.앞의 세 편의 소설이 ‘날개’의 한 장면 혹은 다른 등장인물들을 극대화함으로써 정전 자체에 대한 적극적인 ‘다시 읽기’를 부추기고 있다면, 강영숙의 ‘마지막 페이지’, 최제훈의 ‘1교시 국어 영역’. 박솔뫼의 ‘대합실에서’는 이상의 ‘날개’를 후경으로 설정하면서 ‘다시 쓰기’의 행위에 더 몰두한다.강영숙의 ‘마지막 페이지’는 어떤 불행한 사건을 공유하고 있는 두 친구의 관계가 그려진다. 하나의 방을 비밀처럼 공유하고 있는 ‘나’와 ‘아내’ 사이의 감정 교환과 서로 간의 오해를 그리고 있는 ‘날개’의 구조는 강영숙의 작품 속에서도 어느 정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최제훈의 ‘1교시 국어 영역’은 대입 시험을 치르고 있는 재수생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하고 있는데, 그 의도가 비교적 분명한 풍자소설에 가깝다. 우리가 배운 ‘날개’에 대한 설명들, 즉 ‘현대 문명과의 불화’나 ‘지식인의 내면세계’ 혹은 ‘무력한 지식인의 분열상’이 얼마나 공허한 이야기일 수 있는지를 유머러스하게 확인한다.박솔뫼의 ‘대합실에서’는 이상의 행로를 따라 서울 시내의 거리를, 그리고 동경의 거리를 하릴없이 걷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계속 실패하는 숫자 세기를 반복하면서, 서로 돈을 주고받는 무용한 행위를 반복하면서, 걷다가 멈추고 커피를 마시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또 걷는다. 박솔뫼의 작품은 ‘무용한 시간’을 재현하는 소설처럼 읽힌다. 그리고 그 무용한 시간들은 이야기를 읽고 쓰는 시간들을 자연스럽게 환기한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9-10-17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 그리고 그들의 사랑

시인 백석(1912~1996), 그의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시절을 촘촘하게 복원해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백석의 연인 김자야(金子夜·1916∼1999)의 산문 ‘내 사랑 백석’이 2019년 김자야 여사의 20주기를 앞두고 새로운 장정으로 출간됐다.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은 20대 청년 백석의 꾸밈없는 모습과 섬세한 마음, 문우들과의 교우관계, 그리고 그의 시가 발산하는 애틋한 정조의 이면 등을 그를 깊이 연모한 여성 김자야의 필치로 전하며,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온 산문이다.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1부 운명에서는 백석을 만나기 직전 김영한 여사의 성장기와 기생 김진향으로서의 삶이 펼쳐진다. 어린 시절 불우했던 집안 사정, 기생으로의 입문, 일본 유학과 귀국, 백석과의 운명적인 만남까지가 영화처럼 펼쳐진다.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 김영한은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집안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됐다. 그녀는 무너진 집안을 일으켜보고자 열여섯의 나이로 조선권번에 들어가 기생으로 입문해 조선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 문하에서 여창가곡, 궁중무 등을 배우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는‘삼천리’지에 수필을 발표해‘문학 기생’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다가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길을 떠난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으로 학업을 이어가던 중, 해관 선생이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하지만 면회가 안 된다는 말을 듣고 함흥 땅에 주저앉는다. 1936년 가을, 그는 궁리 끝에 자신이 그렇게도 싫어했던 기생 복색을 입고 함흥권번으로 들어간다. 오로지 은인이던 해관 선생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기생이 되면 큰 연회 같은 곳에 나갈 수 있고, 그러면 함흥 법조계의 유력한 인사들을 만나서 해관 선생님의 특별면회를 신청할 수 있으리라는 절박한 믿음으로 다시 들어선 길이었다. 결국 해관 선생은 만나지 못했지만, 바로 그곳에서, 1936년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47쪽, ‘마누라! 마누라!’)2부 당신의 ‘자야’는 백석과의 사랑 그리고 이별의 기록이다. 백석이 지어준 ‘자야’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 청진동 시절 자야를 두고 ‘세 번’이나 새로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냉엄한 신분제 시대의 사랑, 거리에서 지인이나 자야의 손님과 마주칠 때마다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이 시인과 기생 커플의 고뇌와 갈등, 백석 집안의 극렬한 반대와 자야의 방황, 자야에게 만주 신경으로 도망가자고 제안하는 백석의 사랑이 영화처럼 펼쳐진다.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들의 연애사를 뛰어넘는다. 자야가 복원한 그들의 사랑과 고뇌, 갈등을 통해 백석과 백석 시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백석의 시 ‘바다’‘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이렇게 외면하고’‘내가 생각하는 것은’‘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에 흐르는 애틋한 정조의 실체는 그들의 애정전선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했다.3부 흐르는 세월 너머에는 백석의 시를 어루만지며 그들의 젊은 시절과 생사조차 알길 없는 백석을 그리워하는 자야의 애틋한 정이 고여 있다. 여든 살의 청년 백석을 꿈에서 만났는데, 백석이 자꾸만 허기가 지다고 호소하고 돈을 몇천 원만 꾸어오라고 재촉하더라는 대목은 애절하기 그지없다. 더불어 백석 시를 통해 백석을 그려보는 살뜰한 마음, 백석은 ‘월북 시인’이 아니라 ‘재북 시인’으로 보아야 마땅하다는 것, 제 손으로 백석의 시선집을 펴내겠다는 신념으로 동분서주하다가 뜻밖에도 한 후배 시인에 의해 발간된 ‘백석시전집’을 가슴에 안고 느꼈던 감격, 그리고 백석의 고희를 맞아 쓴 편지 등은 긴 세월이 흘러도 변색되기는커녕 더욱 짙고 단단해지는 자야의 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책 말미에는 김자야 여사의 집필과 출간을 뒷바라지해 끝내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세상에 알린 시인 이동순의 발문과 백석 연보를 덧붙였다. 멋쟁이였던 모던보이가 어떻게 토속적인 시를 쓸 수 있었는지, 그의 시에 나오는 ‘나타샤’ ‘고흔 당신’ ‘허준’ 같은 시어에 얽힌 실제 인물들은 누구인지, 그의 성격은 어떠했는지, 교사와 기자로 일하다가 다시 만주로 떠나고 만 이유는 무엇인지 등 젊은 날의 백석의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은 백석 연구의 서브텍스트로서도 그 의의가 각별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0-10

‘보리타작소리’ 등 포항 흥해지역 구전 민요 자료집 출간

1960년대까지 동해안 최대의 곡창지대인 흥해 들판에서 불렸던 민요를 채록해 한 권의 책으로 엮은 민요자료집이 출간됐다.포항시 흥해읍 지역의 농요를 보존·전승하기 위해 지난해 설립된 포항흥해농요보존회(회장 박현미)는 최근 흥해지역 구전민요을 채록해 정리한 ‘어절씨구 흥해야! 흥해의 민요’(박창원·박현미 편저)를 출간해 출판기념회를 갖는다.Ⅰ, Ⅱ부로 구성된 이 민요자료집의 Ⅰ부는 지역의 민속학자인 박창원씨(현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가 흥해읍 지역에서 채록한 ‘모찌는소리’, ‘모심는소리’, ‘논매는소리’, ‘보리타작소리’, ‘지게목발소리’, ‘어사용’, ‘그물당기는소리’, ‘베짜는소리’, ‘나물캐는소리’, ‘상여소리’, ‘월월이청청’등과 국악인 박현미씨(현 흥해농요보존회장)가 최근 흥해 출신 김선이 기능보유자로부터 채록한 ‘치이야칭칭나네’ 등 총 80여 편의 민요를 악보, 녹음CD와 함께 실었다. Ⅱ부는 박창원씨의 논문 ‘흥해지역 민요의 전승양상’이 실려 있다. 240×190cm, 243쪽. 경북도의 향토농업문화계승보전지원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민요자료집 출간에 대해 박현미 포항흥해농요보존회장은 “이 책을 통해 흥해농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한편 앞으로 흥해농요의 보존·전승을 위한 교재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990년대 흥해에서도 민요가 잘 보존된 북송리, 죽천리 등에서 카세트 녹음기로 민요를 채록했던 박창원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은 “흥해는 논농사가 발달한 지역이라 어느 지역보다 ‘모심는소리’가 잘 보존돼 왔다”고 말하고, 보존·전승을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포항흥해농요보존회는 13일 오전 9시30분 흥해종합복지센터에서 이 책의 출판기념회를 열고, 오후에는 흥해농요경창대회를 개최한다. /윤희정기자

2019-10-10

나쁜 습관을 사용하는 5가지 방법

‘일찍 일어나겠다고 다짐하지만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고 싶어 하지만 제때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좋다는 걸 알지만 운동도 음식도 조절하지 못하고 자꾸 실패를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나쁜 습관은 없다’(판미동)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나쁜 습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열어 주고, 습관을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알려 주는 책이다. 조직 습관 개선 컨설턴트인 저자 정재홍씨는 나쁜 습관을 개선하려면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그 출발점인 생각과 감정 등 내면의 습관부터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습관이라는 지름길을 이용하는 뇌의 특성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미 굳어진 나쁜 습관이 있어도 이를 의식적으로 사용해 다른 지름길을 내면 좋은 습관이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심리학과 뇌과학, 습관에 관한 다양한 연구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 감정, 신체반응을 다루는 5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나도 모르게 되돌아가는 나쁜 습관을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한다면, 자신의 한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나쁜 습관을 넘어서 원하던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저자는 습관을 뛰어넘기 위해 그 바탕에 있는 자신의 내면대화(생각, 감정, 느낌 등)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에니어그램의 머리형(생각), 가슴형(감정), 장형(행동)의 유형 구분법을 적용해 주로 활용하는 내면대화에 따라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자신의 유형에 맞게 습관을 다루면 매우 효과적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느 순간 다시 원래의 습관대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 책에 담긴 ‘생각에 거리감 두기’ ‘감정 저장고 비우기’ ‘불편을 이용하기’ 등의 다양한 기법들은 자신에게 맞게 나쁜 습관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잡이가 돼 줄 것이다. /윤희정기자

2019-10-03

타인, ‘지옥’인가 ‘놀이공원’인가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심층 인터뷰를 가장 많이 한 인터뷰어를 꼽는다면 단연 지승호 작가를 떠올릴 것이다. 2002년 이후 지금까지 50여 종의 단행본 인터뷰집을 낸 지 작가는 국내 최고의 인터뷰어라 할 만하다. 그의 인터뷰어가 돼본 사람이면 한결같이 그의 철저한 사전 준비와 열정과 노력에 탄복한다. 이번 그의 인터뷰집 ‘타인은 놀이공원이다-두근두근, 다시 인터뷰를 위하여’(싱긋) 서문에는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각각의 ‘신’을 한자로 풀이하며 그의 인터뷰어 영업비밀을 살짝 드러낸다.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눈치가 있어야 하고, 신하가 돼야 하고, 신뢰가 있어야 하고, 운때가 맞아야 하고, 건강해야 하며, 실패를 맛보고도 거듭 도전해야 한다고. 그와 함께 작업을 해본 편집자들은 또 그가 ‘섭외의 신’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는 인터뷰 상대를 대부분 자신이 직접 섭외한다. 이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승섭 교수, 김규리 배우, 강원국 작가, 목수정 작가, 강용주 의사, 이은의 변호사, 주성하 기자, 서지현 검사 등 화제의 인물들이다. 이 책은 이들을 만나 묻고 들으면서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민감하고 절실한 문제를 에두르지 않고 솔직하게 짚어본 산물이다. 여덟 인터뷰어들 역시 진보와 보수를 떠나 하나같이 사회적 약자와 그들의 고통을 주시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이번 인터뷰집은 2018년 2월부터 2019년 4월까지 월간‘인물과 사상’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골라 묶은 것이다. 다만 지면상의 한계 탓에 대체로 인터뷰어들의 핵심적 주장을 저마다의 어투를 살려 담았다. 이 책에서는 인터뷰어 모두가 자신의 연구와 경험을 바탕으로 발언하고 있지만, 현재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야만적인지 지적하면서 앞으로 어떤 사회로 바꿔나가야 할 것인지를 묻는다.그런 점에서 우선 사회역학 분야를 연구중인 김승섭 교수의 지적이 인상적이다. 좌파건 우파건 사람이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건강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는 전제하에 사회 자원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간다는 것.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고 나서도 다시 병을 유발하는 환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에 대해, 그리고 ‘병원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고 그는 말한다. 의사 강용주와 목수정 작가, 서지현 검사 등은 폭력적 사회에서 정치성을 떠나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 책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위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다.이번 인터뷰집은 저자가 스스로를 응원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 서문에서는 20년 넘게 인터뷰를 진행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들으면서 외롭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저자의 근황이 엿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인터뷰를 준비하고 진행하며 녹취를 푸는 과정은 언제나 신나고 좋았다며 인터뷰를 놀이공원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두근거리는 인터뷰어가 되자고 다짐하면서 이번 인터뷰집이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기대하기도 한다. 사르트르가 했던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을 변주한 ‘타인은 놀이공원이다’라는 제목에서도 ‘이제부터라도 힘 닿는 한 즐거운 놀이공원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저자의 각오가 묻어난다.“지승호: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타인은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들이 모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점점 더 지옥으로 이끄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에게는 내가 바로 타인일 테니까요. 저 역시 제가 힘든 것만 생각하면서 타인을 지옥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타인에게는 지옥이었겠지요.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 타인을 다시 놀이동산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그리고 힘이 닿는 한, 저 역시 타인에게 놀이공원 같은 사람이 되려 합니다. 저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그러면 일도 다시 즐거워지겠지요. 일상의 고통을 좀더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겠지요. 이 책 역시 여러분의 놀이공원이자 대화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앞으로도 ‘설렁설렁’ 인터뷰를 해나가겠습니다. ‘설렁설렁’이라는 말은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거나 움직이는 모양’이라는 뜻입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0-03

‘Memento Mori’당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과연 당신이 연장하고자 하는 것은 삶인가 죽음인가?, Memento Mori, 당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사람이 늙어간다는 건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누구나 결국엔 닿는 삶임에도 젊었을 때는 무관심하고 나이가 들면 두려워한다.영국 케임브리지대학과 뉴캐슬대학의 교수를 지낸 피터 존스 박사는 저서 ‘메멘토 모리’(교유서가)에 고대의 나이 듦과 죽음에 관한 사료를 풍부하게 담았다.특히 로마제국의 대표적 지성인이자 네로 황제의 조언자였던 세네카는 노년과 죽음을 주제로 많은 저작을 남겼다. 이와 함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키케로, 역사가였던 플루타르코스, 로마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 호메로스, 플라톤,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그리스인들의 생각도 이번 책에서 들어볼 수 있다. 이들의 삶과 철학을 통해 노년과 죽음에 대한 고뇌는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로마인은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로마인들의 삶은 짧고 고단했다. 신생아의 3분의 1이 출생 한 달 이내에, 절반은 5세 전에 질병, 영양 결핍, 열악한 위생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전체 인구의 50퍼센트가 20세 전에, 거의 80퍼센트가 50세 전에 사망했다. 죽음을 언제 어디서나 일상적으로 접했던 로마 시대 사람들은 죽음과 질병, 그리고 이를 이겨내야 도달할 수 있는 노년에 관해 부단히 사색할 수밖에 없었다.로마인들은 수명이 짧았기에 노년은 종종 신들이 주는 귀중한 선물로 여겨졌다.호메로스와 키케로를 비롯한 여러 문인과 철학자에게 노인들은 풍부한 경험과 지혜의 원천이었다. 키케로의 대화록 ‘노년에 관하여’에서 대 카토는 ‘활동적인 일을 할 수 없고, 신체가 쇠약해지며, 거의 모든 쾌락을 박탈당하고, 죽음이 멀지 않다’는 노년에 대한 네 가지 비판을 차례로 반박한다. 활동적인 일에는 젊음과 체력이 필요하지만 이를 수행하려면 노인의 판단력과 경험과 권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년에 중요한 것은 체력보다도 정신력이며, 사람은 지식을 쌓고 배움을 지속하는 한 나이듦을 의식하지 않는다. 노년에는 예전만큼 쾌락이 중요하지 않으며 성욕, 야망, 연회나 음주에 대한 욕구가 줄어드는 만큼 만취와 불면의 밤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 사후세계에 관해서는 가능성이 두 가지뿐인데, 하나는 죽음으로 영혼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이고 하나는 죽음이 영혼을 영생의 장소로 인도하여 행복하게 지내게 하리라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두려워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반면 언제나 중도가 최선이라고 믿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두 극단인 청년기와 노년기 모두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청년은 경험이 모자라서 미숙하며, 그렇다고 노인이 되고 경험을 쌓아도 저절로 지혜가 생기진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학은 인생의 전성기에 있는 남자의 가치를 쓸모없는 늙은이와 끊임없이 대조해 보여주곤 했다. 오늘날 대중매체가 알려주는 노년의 대처법은 로마 철학자들이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식단을 조절하라, 사람들과 어울려라, 몸과 마음이 깨어 있도록 활발히 움직여라. 그에 더해 산아 제한과 위생 및 생활수준 향상으로 나이듦의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엔 죽음을 마주하게 되며, 뭐든 뜻대로 될 것 같은 이 세상에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한다.바로 이것이 현대인과 로마인의 가장 중요한 차이다. 로마인들은 결코 죽음과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대인들에게 삶은 짧고 고단했으며 육신은 젊든 늙든 온갖 질병에 노출돼 있었다. 인간은 자연 혹은 ‘운명’이 던져주는 것을 최대한 기품 있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키케로는 노년의 죽음을 오랜 여행을 마치고 뭍으로 다가가는 여행자에 비유했으며, 스토아주의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렇게 썼다.“삶이란 얼마나 하찮은가. 어제는 한 방울의 정액이었고 오늘은 시신 아니면 재다. 그러니 너는 이 덧없는 순간들을 자연이 너에게 의도한 대로 쓴 다음 흔쾌히 쉬러 가라. 때가 된 올리브 열매는 자신을 잉태한 대지를 축복하고 자신에게 생명을 준 나무에 감사하며 땅으로 떨어진다.” _254∼255쪽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9-26

동아시아 상상력과 환상의 보고 ‘산해경’에 나타난 한국문화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신화집인 ‘산해경’은 동아시아 상상력의 원천이라 할 고전으로 역대에 걸쳐 비상한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러나 정작 ‘산해경’과 주변 문화의 상관성에 관한 탐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국내 최초로‘산해경’역주본을 발표해 한국 지식 사회에 ‘동아시아 상상력’이라는 화두를 던져 신선한 충격을 줬고 이후 30년간 ‘산해경’연구에 매진해 온 신화학자인 정재서 교수(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산해경’과 한국 문화의 상관성을 집중적으로 고찰한 ‘산해경과 한국 문화’(민음사)를 출간했다.‘동이계(東夷系) 고서(古書)’로 통칭되는 ‘산해경’에는 고대 한국 관련 내용이 풍부히 담겨 있어 한국 문화와의 친연성은 근원적이다. 아울러 장구한 역사 동안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교섭을 고려하면 한국 문화에 수용된 ‘산해경’의 양상과 의미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벗어난다. 그럼에도 ‘산해경’과 한국 문화의 상관성을 고찰한 책이 전무한 것은 우리 학계 일각에 존재했던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속지주의(屬地主義)적 인식, 신화·상상력 분야에 대한 인식이 취약했던 학풍 등과 관련이 있다. 이 책에서는 ‘산해경’의 적용 범주를 중국 대륙 밖으로 확장해 ‘산해경’이 지닌 동아시아 상상력의 공유 자산적 의미를 실감함은 물론, 한국 문화의 해석 근거를 기존의 국학 범주에서 벗어나 ‘기서(奇書)’에까지 확대해 한국 문화의 근원에 대한 다양한 인식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9-19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 구상 시인 시‘오늘’ 중에서고(故) 구상 시인(1919~2004)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첫 평전이 나왔다.이숭원 서울여대 명예교수가 구 시인의 85년 삶을 담은 ‘구도 시인 구상 평전’(분도출판사)을 출간했다.사제의 길을 걸어보려다 기자와 종군 작가로 일하고 휴머니즘에 천착한 시를 쓴 작가의 정신을 돌아본다.가장 문학적인 것은 화려한 수사가 아닌 소박한 진실이라는 본질을 추구한 구상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조명했다.구상 시인은 한국 문학계에서 전인적 인격과 지성을 지닌 한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힌다. 그는 항상 ‘시의 언어 뒤에는 그 말의 내용과 일치하는 등가량(等價量)의 체험과 진실성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명확한 시관(詩觀)의 실천을 강조해왔다. 기교의 경지를 넘어서는 적확 간명한 수사로써 의미의 정곡을 조준하는 데에도 시인이 단연 으뜸이었다.이러한 작품세계는 ‘영성과 윤리도덕’의 구현이라는 입장에서 뛰어난 문학적 순기능을 펼쳐왔으며, 대사회적 문제들을 소재로 삼은 시작들은 시대의 참된 예언자적 메시지로 남아왔다.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인으로서의 투철한 책임감은 해방작품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6·25 전선에서는 민족통일을 향한 비원을 담았으며 1공화국 정권 하에서는 저항적 사회시평집을 내고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터도 찾아 전쟁의 도덕적인 잘못을 꼬집기도 했다.시인은 한국에서 연작시를 처음으로 쓰고 또 가장 많이 쓴 작가다. 그의 연작시집에서는 치열한 존재론적 인식과 강렬한 역사의식, 그 체험의 부피에서 오는 메시지가 뿜어져나온다.대표작의 하나인 ‘초토(焦土)의 시’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전쟁의 고통을 초월해 구원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연작시다. 대표적인 신앙시작으로 꼽히는 ‘그리스도폴의 강’은 2년간 시문학지에 연재된 연작시. 50편으로 이어지는 시들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신앙적 직관으로 조명함으로써 읽는 이들을 깊은 침잠과 관조의 신앙적 세계로 이끌었다.‘밭일기’, ‘까마귀’(1981),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유치찬란’(1989) 등의 연작시에서는 파란에 찬 역사와 병고로 수없이 죽음을 체험한 시인의 자전적 고백을 담았다. 또 자기수행의 표상과 물질주의, 현실의 부조리 등에 대한 경고도 깊이 드러낸다.이 외에도 시인은 다수의 시집과 수상집, 사회평론집, 희곡 시나리오집 등을 남겼다.시인은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시인에 포함됐으며 그의 작품은 일찍부터 영어와 프랑스어, 독어, 스웨덴어, 일어 등으로 번역돼 세계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문학을 사랑하는 각국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으로 남아있다.서울여대 명예교수인 저자는 서울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문학 비평에 진력해왔다. 특히 시문학 연구를 통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9-19

그때 그 여자들, 사적이며 공적인 ‘나’의 이야기

현재 한국문단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소설가 은희경(60)은 풍부한 상상력과 능숙한 구성력, 감각적 문체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중견 작가다. 은희경은 동시대 여성들 마음을 잘 그린 덕분에 성공적인 작가가 됐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이중주’로 당선된 이후 ‘새의 선물’,‘타인에게 말걸기’, ‘아내의 상자’등의 작품으로 문학동네 소설상, 제10회 동서문학상, 제22회 이상문학상, 제38회 동인문학상, 제14회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실상부의 작가로 자리매김했다.은희경 소설의 특징은 여성을 중심으로 그들이 겪는 일상의 고민과 문제를 심도깊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지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이들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던 ‘여성성’을 지우고, 일탈을 시도한다.최근 그는 장편소설‘빛의 과거’(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태연한 인생’(2012년) 이후 7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로 깊이 숙고해 오랫동안 쓰고 고쳤다.특유의 분위기는 신작에서도 여전하다. 전작들이 그랬듯 여성들의 관계 속에서 사회성 짙은 메시지가 진하게 묻어난다.2017년의 ‘나’는, 작가인 오랜 친구의 소설을 읽으면서 1977년 여자대학 기숙사에서의 한때를 떠올린다. 같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서로가 기억하는 ‘그때’는 너무나 다르다.은희경은 갓 성년이 된 여성들이 기숙사라는 낯선 공간에서 마주친 첫 ‘다름’과 ‘섞임’의 세계를 그려낸다. 기숙사 룸메이트들을 통해 다양하며 입체적인 여성 인물들을 제시하고 1970년대의 문화와 시대상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무엇보다 회피를 무기 삼아 살아온 한 개인이 어제의 기억과 오늘을 넘나들면서 자신의 민낯을 직시해 담담하게 토로하는 내밀한 문장들은, 삶에 놓인 인간으로서 품는 보편적인 고민을 드러내며 독자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는 ‘은희경’이라는 필터를 거쳐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이야기는 중년 여성 김유경이 오랜 친구 김희진의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읽게 되며 시작된다. 대학 동창인 그들은 “절친하다거나 좋아하는 친구라고는 말할 수 없”고 “끊어진 건 아니지만 밀착될 일도 없”는, 어쩌다 보니 가장 오랜 친구가 된 묘한 관계다.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으나 전혀 다르게 묘사된 김희진의 소설 속 기숙사 생활을 읽으며, 김유경은 자신의 기억을 되짚는다.소설가 은희경. /문학과지성사 제공기숙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룸메이트다. 타의에 의해 임의로 배정된 네 명이 한 방을 쓰는데 ‘임의’의 가벼움에 비해 서로 주고받는 영향은 터무니없이 크다. 국문과 1학년 김유경의 322호 룸메이트는 화학과 3학년 최성옥, 교육학과 2학년 양애란, 의류학과 1학년 오현수다. 최성옥과 절친한 송선미의 방인 417호 사람들(곽주아, 김희진, 이재숙)과도 종종 모이곤 한다.1977년의 이야기는 3월 신입생 환영회, 봄의 첫 미팅과 축제, 가을의 오픈하우스 행사 등 주요한 사건 위주로 진행된다. 김유경의 서사가 굵직하게 이어지는 사이사이, 322호와 417호의 룸메이트인 일곱 여성들의 에피소드도 다채롭게 전개된다. 그들은 각자 “성년이 되어가는 문으로 들어가” “낯선 세계에 대한 긴장과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자기 인생을 만들어”간다(2016년 작가 인터뷰). 김유경은 말더듬증이라는 약점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내리누르며, 말과 행동이 필요한 순간 입을 다문다. 회피를 방어의 수단으로 내세우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세상의 어중간한 어디쯤에 위치시키려 한다. 한편 누군가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무리에 휩쓸리지 않고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취향을 조용히 발전시키는 오현수, 남을 끌어내려 항상 주인공이 되길 바라는 김희진, 그와 비슷하지만 남의 눈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욕구 충족이 중요한 양애란이 그렇다. 지향점과 실제의 삶에 괴리가 심한 사람도 있다. 최성옥처럼 자신이 선택한 남성에 의해 그 괴리가 발생하기도 하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입맛에 맞춰 교정하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매사 주요하게 지적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발을 헛디뎌버리는 곽주아 같은 경우도 있다. 그들은 “치졸하고 나이브”(‘작가의 말’)하며, 소탈하기도 섬세하기도 하다. 선량하고도 얄미우며 까칠하면서도 유약하다. /윤희정기자

2019-09-05

인간의 삶과 자아는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

종교사회학의 세계적 권위자 스티브 브루스의 ‘사회학’(교유서가)은 사회계급, 범죄와 일탈행위, 교육, 노동, 종교, 나아가 정치적 분파에 관한 연구들을 거론하며 자아가 사회에 의해 형성되고 거꾸로 사회가 자아에 의해 형성되는 방식을 탐색함으로써 사회학의 기본 원리를 설명한다. 이번 전면개정판에서 저자는 사회학의 본질을 규명한다. 아울러 사회과학에서의 ‘과학’을 강조하며 새로운 의제나 발상이 사회학을 형성하긴 하지만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사회분석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또 사회학이 사회과학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할 때는 사회학 특유의 연구대상에서 유래하는 고유한 이점과 난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연과학과 인간과학의 연구대상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사회적 행위의 규칙적 패턴을 찾아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회학적 설명에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전제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은 여러 면에서 특별한데, 우선 공평무사를 목표로 삼는다. 일반인은 보통 자신이 지닌 문제는 사회 탓으로, 자신이 거둔 성공은 자기 공로로 돌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회학자들은 질병, 가난, 실패, 불행의 사회적 원인은 물론이고 건강, 부, 성공, 행복의 사회적 원인에도 관심을 가진다. 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은 또 증거에 입각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뿐 아니라, 개인보다는 일반적인 것이나 전형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이른바 인간 행동의 일반적 원칙을 끌어다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지만, 학자들은 일반적 원칙을 만들기 위해 개인의 인생을 연구한다고 저자는 상기시킨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8-29

상위 20%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

신간‘20 VS 80의 사회’(민음사)는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책이다. 저자 리처드 리브스(50)는 미국 진보 성향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상가이자 경제학자다. 이 책은 불평등에 실제 책임이 있는 상위 20퍼센트가 어떻게 사회를 망치고 있는지 조목조목 비판한다. 리처드 리브스는 최상위 1퍼센트와 나머지 99퍼센트의 대결 구도를 고수하는 기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상위 20퍼센트, 즉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불평등 구조를 분석한다. 중상류층의 위선적인 태도와 불공정한 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불평등 논의의 큰 흐름을 바꾼 화제의 책이다.“상위 20퍼센트인 중상류층의 규모와 그들이 집합적으로 가진 권력은 도시의 형태를 바꾸고 교육 제도를 장악하고 노동 시장을 변형시킬 수 있다. 또 중상류층은 공공 담론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기자, 싱크 탱크 연구자, TV 프로듀서, 교수, 논객이 대부분 중상류층이기 때문이다.”저자는 중산층이라는 개념이 ‘편리한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현재의 불평등 구조를 유의미하게 분석하려면 ‘중상류층’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표들은 상위 20퍼센트와 나머지 80퍼센트 사이의 큰 격차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러한 상위 20퍼센트와 나머지 사이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지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평등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20 VS 80’이라는 불평등의 구조를 인지하고, 논의의 초점을 상위 20퍼센트인 중상류층에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다.이 책에서 주로 설명하는 미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비춰 봐도 결코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중산층이 세계적 경제 침체 속에서 점차 해체되고 있다면, 이 책에서 포착하는 중상류층의 행태는 현재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체감하는 현실과 유사하다. 자녀의 양육과 교육을 통해 인적 자본을 키우고, 이를 통해 고소득 전문직 일자리를 물려주려는 중상류층의 모습은 매우 익숙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격차는 확대되고 사회적 지위는 대물림된다. 이른바 수저론 등으로 표현되는 한국 사회의 현상은 이와 같은 맥락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장과 같이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도 상위 20퍼센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분명한 수치와 논거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 또한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20 VS 80의 사회’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기회 사재기(opportunity hoarding)’다. 능력과 실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달리 성공의 기회는 평등하기는커녕 상위 20퍼센트가 사재기하고 있는 것이다. 중상류층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교육, 대입, 인턴과 고소득 일자리 등 성공의 기회를 독차지하며 자신의 자녀에게 사회적 지위를 물려주려 한다. 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 법과 제도에 의해 현실이 된다. 이렇듯 불공정하게 대물림된 소득과 부, 사회적 지위는 점차 불평등의 격차를 확대한다.중상류층은 기회를 사재기하며 ‘유리 바닥’을 만든다. 유리 바닥은 자녀 세대가 하위 계층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 보호 수단을 일컫고자 저자가 제시한 용어로, 저자는 경직된 하향 이동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녀를 위해 유리 바닥을 깔아 주는 중상류층 부모들의 불공정한 행위가 불평등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원인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기회 사재기와 이러한 사재기로 인해 만들어진 유리 바닥은 세대를 거쳐 계급 간의 분리를 영속시키고 불평등 문제를 악화시킨다.고학력을 갖추고, 고소득 전문직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상류층은 표면적으로는 불평등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1퍼센트와 99퍼센트의 대결 구도를 만들고 최상위층인 슈퍼 리치에 대한 비판을 이끌었던 것 역시 중상류층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언행일치’의 차원에서 보면 이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며 위선적이기까지 하다. 자신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 배타적인 부동산 정책을 지지하며 자녀들에게 좋은 학벌과 고소득 일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 인맥과 연줄을 통해 자녀에게 인턴 기회를 마련해 주고, 학비를 지원할 여력이 있으면서 장학금 혜택까지 차지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8-29

고려인 강제 이주사 다룬 가장 생생하고 뜨거운 노래

시는 물론 분야를 넘나드는 다양한 창작·연구 작업을 통해 문학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겨왔으며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인 이동순(70) 시인의 신작 시집 ‘강제이주열차’(창비)가 출간됐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돼 등단한 이래 시인은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입지를 굳혀온 한편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전집’을 발간한 것을 비롯해 분단으로 매몰된 많은 시인을 발굴해 문학사에 복원하는 등 연구자로서도 뚜렷한 성과를 남겼다. 이번 시집 ‘강제이주열차’는 시인의 열여덟번째 시집으로 구소련 시절 스탈린 정권이 자행한 고려인 강제이주사를 다룬 연작 성격의 작품집이다. 제1부 ‘강제이주열차’에서는 부제 그대로 강제이주사를 집중적으로 천착했다. 이 시집에서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목이다. 시인은 80여 년의 세월 동안 소외와 무관심 속에 방치돼왔던 강제이주 문제를 자기 문학의 화두로 삼고서 그 시절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었”(‘우리는 무엇인가’)던 고려인들의 처절한 수난의 역사를 세세하고 실감나게 복원해낸다.제2부 ‘슬픈 틈새’에서는 사할린 한인들을 주로 다뤘다. 역사학자 반병률 교수의 해설에 언급된 바와 같이 사할린은 오랫동안 러시아와 일본 간 분쟁의 장이었던 곳으로서 무수한 일제 강제징용자들의 아픔이 서려 있다. 시인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만리타향에 뼈를 묻은”(‘강제징용자’) 사할린 한인들의 기구한 세월을 그려냈다.제3부 ‘두개의 별’에는 2018년 카자흐스탄을 방문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담겨 있다. 시인은 고려인 묘지에 나란히 묻힌 두 혁명가 홍범도와 계봉우를 기리기도 한다. 특히 시인은 전10권에 이르는 서사시 ‘홍범도’(국학자료원 2003)를 집필하기도 했던바, 홍범도 장군이 대한독립군을 창건하면서 공포했던 ‘유고문’의 형식을 빌린 ‘신 유고문(新諭告文)’은 오늘날 한반도 상황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8-29

위기는 자본주의의 정상적 메커니즘의 일부다

자본주의란 무엇일까? 자본주의는 어디서나 똑같을까? 자본주의에 미래가 있을까?영국의 사회학자인 저자 제임스 풀처는 ‘자본주의’(교유서가)에서 자본주의의 기원부터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단계까지 자본주의의 역사와 발전에 대해 논한다. 자본주의의 여러 형태들을 살펴보고 오늘날 자본주의가 과연 지구화됐는지 탐구한다.또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광기에서 최근의 경제위기에 이르는 자본주의의 위기 경향을 검토하고 자본주의의 미래는 어떨지, 현실적 대안이 있을지 논한다.이번 전면개정판에서 저자는 특히 자본주의에 대한 그릇된 통념과 오해를 바로잡는다. 투기를 비생산적인 활동으로 치부하기 쉽지만 저자는 투기가 가격 변동에 따른 불확실성에 대비해 보험을 드는 방법이기도 하며, 단순한 부작용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서 자라나는 불가피한 파생물이라고 말한다.“위기는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특징 중 하나다. 내부에서 작동하는 역동적이고 누적적인 메커니즘이 너무 많은 탓에 자본주의는 장기간의 안정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산과 소비의 분리, 생산자들 간 경쟁, 자본과 노동의 갈등, 투기 버블을 부풀리다가 터뜨리는 금융 메커니즘, 자산 갈아타기 등은 모두 애초부터 자본주의의 특징이었던 불안정성의 원천이며 앞으로도 의심할 바 없이 그러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8-22

‘어떻게 하면…’ 100세 철학자의 행복한 인생

“아름다움의 의미와 영원에 대해 깨어 있는 청춘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한국 1세대 철학자이자 명수필가인 김형석(100) 연세대 명예교수가 최근 에세이집 두 권을 잇따라 펴냈다.올해로 100년째 삶을 이어가고 있는 김 교수는 전국에서 강연회를 올해에만 150여 회 소화한데 이어 수십년간 써온 글 중에 현재에도 유효한 내용들을 선별해 책 두 권으로 엮은 것이다.열림원에서 펴낸 ‘100세 철학자의 철학, 사랑이야기’와‘100세 철학자의 인생, 희망이야기’는 “어떻게 하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조용히 이끌어 준다.이번 책에서 김 교수는 책 앞에 ‘젊은 세대와 나누고 싶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놓았듯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그가 들려주는 인생 경험과 철학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불행해지고 무의미한 일에 땀 흘리는 사람은 행복해질까!’“무엇이 행복일까요? 그리고 사람은 언제쯤 철이 드나요? 김형석 교수에게 사람들은 늘 질문하곤 한다. “이 나이가 되어 보니, 많이 일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도 이제서야 철이 드는 것 같습니다. 오래전 내 친구들이 ‘김 교수가 가장 철이 없으니 제일 오래 살 거야’라는 농담을 자주 했는데, 어쩌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아요.”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는 김형석 교수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김형석 교수는 데카르트의 말을 빌려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체험하지 않으면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경험한 사실이 없다면 짐작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폭넓은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풍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알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을 체험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인간적 삶이 무엇인지조차 희미한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각자 혼자만의 섬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형석 교수는 사랑은 주면서 받도록 돼 있는 것이며, 완전히 고립된 삶이 있다면 사랑은 머물 곳이 좁아지고, 결국 고독은 사랑이 없는 병이라는 점을 강조한다.‘100세 철학자의 철학, 사랑 이야기’는 김형석 교수가 고독을 느끼는 젊은 세대에게 바치는 사랑과 영원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지난날 철학자로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며 던져온 대화들을 담고 있다. 영원한 것을 찾고 그것을 사랑하는 일이 삶의 과제이자 철학적 문제였던 젊은 날의 고독한 대화들이 바로 그것이다. 내 곁에 아무도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야 한다. 그것이 무(無)에서부터 온 인간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인간은 정신적 존재라는 점이 새삼 깊은 위안을 준다.우리가 존경하는 수많은 사상가들 특히, 풍부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들은 과연 군중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까? 김형석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깊은 사상은 정신적 대화에서만 이뤄지며, 그 대화는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100세 철학자의 인생, 희망 이야기’는 김형석 교수가 교육자로서 살아오며 느낀 감정과 사유의 기록을 담고 있다. 그는 인생이 본질적으로 모순이라는 사실을 철학자로서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그 모순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끊임없이 질문한다. ‘인간의 조건’ ‘만나고 사랑하는 것’ ‘우리가 가야 할 그곳’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등 4가지 테마로 구성된 이 책은 정체성 상실의 시대에 소중한 자아를 발견하고 실패와 상실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번뇌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삶의 원칙을 깨닫게 한다.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던 철학자 소크라테스, 헤겔, 공자, 예수의 이야기도 100세 철학자의 입담 속에서는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다.“때가 오면 누구나 야간열차에서 내려야 한다. 열차는 그대로 달리기 때문에 내린 사람의 운명은 누구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이 인생의 야간열차에서는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내리고 싶어도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같은 순간에 죽음을 택했다고 해도 열차에서 내리면 모두 자기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공존(共存)이란 삶이 허락된, 열차 안에서만의 일이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인생의 야간열차를 탄 채 달리고 있다. 백 년쯤 지나면 열차 안 사람은 모두 바뀐다. 50년만 지나도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반이나 사라져 간다. 그동안 어두운 열차 밖으로 이미 내렸기 때문이다.”-‘100세 철학자의 철학, 사랑 이야기’55p. ‘야간열차 이야기’ 중에서/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9-08-22

“詩는 빵이다” 순수와 참여를 넘나드는…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칠레의 국민 시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파블로 네루다의 대표 시집 ‘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 기본적인 송가’(Odas Elementales·민음사)가 국내 최초 완역돼 출간됐다. 네루다는 굴곡진 라틴아메리카와 칠레 현대사의 주역 중 하나로서 ‘문학 투사’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문학비평가 헤럴드 블룸으로부터 모든 시대를 통틀어 서구의 가장 고전적인 시인이라는 평가도 받은 ‘서정과 순수’의 시인이기도 했다. 평생 2천500여 편이 넘는 시를 남긴 네루다는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주체와 객체, 역사와 신화, 부드러움과 단호함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유연함으로 자신의 시에 대한 손쉬운 일반화를 거부하였다.이 시집은 분명하게 민중의 삶을 향하면서도 ‘단순한 언어의 미학’으로 높은 예술성을 달성한 네루다 후기 시 미학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대표작이다.네루다는 지역 일간지에 일주일에 한 번씩 시를 연재하기로 하면서 특이한 조건을 하나 걸었다. 바로 문예면이 아니라 뉴스면에 시를 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의 시는 독자들의 삶과 호흡하며, 몇 년간 인기리에 연재됐다. 네루다는 시는 모름지기 모두가 함께 나누는 빵 같은 것이 돼야 하며 최고의 시인은 우리에게 일용할 빵을 건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이런 그의 오랜 시적 신념이 마침내 가장 적절한 시의 형태로 구현된 것이 바로 이 송가 시리즈다. 민중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그가 평생에 걸쳐 옹호해 온 가난한 민중에 의해 폭넓게 읽혔고,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달성했다는 점에서 거장의 가장 야심찬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이 책의 시는 알파벳 순서대로 정렬돼 있다. 공기(Aire)에서 시작하여 포도주(Vino)까지, 네루다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시로 썼다. 이 순서에는 어떤 위계도 차별도 없다. 시인의 투명한 눈을 통해 옷과 토마토, 양파 등의 소박한 일상 사물에서부터 기쁨과 슬픔, 질투와 평온 등의 감정, 아메리카라는 땅과 세사르 바예호 같은 자신이 사랑했던 동료 시인, 여름과 비, 숫자, 게으름 등,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이 시가 된다.“비가 돌아왔다.하늘에서 돌아온 것도서쪽에서 돌아온 것도 아니다.나의 유년기에서 돌아왔다.밤이 열리자, 천둥이밤을 뒤흔들고, 소리가고독을 쓸어갔다,그리고 그때비가 도착했다,나의 유년기의비가 돌아왔다,처음엔성난돌풍 속에서,나중에는어느 행성의젖은꼬리처럼,비는타닥타닥 끝없이 타닥타닥끝없이”―‘비를 기리는 노래’에서짤막한 시행은 신문 지면에 싣기 위해 판형에 맞춘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위한 네루다의 의도적 선택이었다. ‘언어의 미다스 왕‘이라 불렸던 네루다의 유려한 솜씨로 수수한 진정성과 강렬한 서정, 서사시적 우아함이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네루다는 서시(序詩) ‘보이지 않는 사람’에서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새로운 시적 자아를 밝힌다. 남과 다르다는 우월의식과 교조주의, 그리고 내면으로 침잠하는 ‘내 형제 옛 시인’에 대한 결별의 선언은 과거 자신의 시를 포함한 기존의 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이제 ‘보이지 않는 사람’인 ‘나’는 피 흘리며 아파하고 땀 흘려 노동하는 모든 이들인 ‘우리’다. ‘나’는 핍박받는 민중의 영웅적 대변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의 ‘기본적인 것’, 친숙하고 소박한 사물들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들을 그대로 전달하는 투명한 존재다.이 시집은 이데올로기적 논란을 비껴가며 좌우를 가리지 않고 대중 독자의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냈으나 공공의 책무를 지닌 노동자로서의 시인이라는 정체성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버린 것은 아니다. 미국의 군사적 개입과 경제적 수탈을 비판하고, 여러 정치적 폭력에 항거하는, 색채가 분명한 시를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네루다는 이러한 시들 역시 정치적 구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민중을 향해 흘러들 수 있도록 근원적 휴머니즘의 시세계를 구축해 냈다.송가(Ode, Oda)는 고대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에 의해 그 원형이 확립된 서정시의 형식이다. 핀다로스는 당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성대했던 네 개의 스포츠 제전(올륌피아, 네메아, 퓌티아, 이스트미아)의 승리자들을 영웅으로 격상시켜 엄숙한 주제와 품위 있는 문체, 웅장한 합창시의 형식으로 칭송했다. 고대 그리스 이후로도 송가라는 형식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시대, 권력자 혹은 영웅의 고귀함을 찬미하는 웅장한 장시의 전통을 이어왔다. 그러나 네루다는 지금껏 송가의 대상이 된 적 없는, 혹은 진지한 ‘시’의 주제도 된 적 없던 아주 소박한 보통의 것들을 주제로 선정하고 이를 송가라 불렀다. 이로써 시의 엄숙함과 권위를 탈피하는 한편 일상은 숭고의 차원으로 격상되는 사건이 일어난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9-08-15

‘어떻게든 되겠지’가 가장 위험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존 기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가장 위험하다”잘 살아남는 이들은 어떤 유형의 인간일까.확신을 갖기보다 중립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미래를 더 정확히 예측한다. 이들은 성실성, 신중함, 성찰적인 태도를 보이며, 이질적인 시각들을 아우르는 통합성, 상세한 정보에 근거한 판단, 지속적 정보 갱신의 특성을 나타냈다. 이들 부류는 어느 예측 정보도 한 번에 신뢰하지 않고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으며,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질문을 내놓거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나갔다.예측의 정확도가 높은 개인이나 미래지향적 기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학습한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학습이 아니다. 모르게 하는 것을 밝혀내는 학습이다. 이들은 관심이 없어서, 논리적으로 해명되지 않아서, 경험하지 않아서, 기존 관념을 벗어나서, 알고 싶지 않아서, 내 생각과 달라서, 너무 엉뚱해서 간과되는 정보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자신의 눈을 가린 인식의 장벽을 하나씩 허물어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도록 함으로써 스스로 생각하고 예측했다.또 한 가지, 자아효능감이 높은 개인은 그렇지 못한 개인보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자기회복력이 높다. 미래 자아효능감을 가지려면 미래 예측이라는 일종의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신간 ‘미래 공부’(글항아리)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변화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관계와 네트워크를 만들고, 새로운 관계와 네트워크를 통해 생존력을 높이고 성장하는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8-15

인간 존재의 반복되는 서사, 생의 시작과 끝 담담히 담아내

‘아침 그리고 저녁’(문학동네)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60)가 2000년 발표한 장편소설이다.인간 존재의 반복되는 서사, 생의 시작과 끝을 독특한 문체에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아름답지만 황량하고, 때론 고독한 피오르를 배경으로 요한네스라는 이름의 평범한 어부가 태어나고 또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꾸밈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이 짧은 소설은 작가 특유의 리듬과 침묵의 글쓰기를 통해 한 편의 아름다운 음악적 산문으로 읽힌다.포세는 극작가이자 소설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내놨다. 그의 역량은 장르를 불문하고 뻗어나가 희곡과 소설뿐만 아니라 시와 에세이, 어린이책까지 전 세계 40개 이상 언어로 번역됐다. 노르웨이 최고의 문학상인 브라게 명예상, 스웨덴 한림원 북유럽 문학상, 국제 입센상을 비롯 유수의 문학상으로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고, 프랑스 공로 훈장에 이어 세인트 올라브 노르웨이 훈장을 수훈했다.바지런한 산파의 움직임, 산모의 고통 어린 숨, 이제 곧 아버지가 되려는 남자의 기대와 걱정. 소설은 노르웨이 해안마을 어딘가, 한 살림집에서의 출산 장면으로 시작된다. 일이 잘못돼 아내나 아이나 아내와 아이 모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찬 남자의 내적 독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상념은 분명 그들을 도와 온갖 나쁜 일로부터 구원해줄 신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는 믿지 않는 남자에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미처 단어가 되지 못한 외마디 모음과 뒤섞인 아내의 비명이 길게 이어진 후 마침내 아이가 태어나면서 초조한 시간은 끝난다. 그렇게 요한네스라는 이름의 아이가 태어났다. 장이 바뀌고 그사이 긴 시간이 흘러 요한네스는 노인이 됐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가족을 이루고 너무 외진 곳이었던 고향을 떠나 새로운 이곳에 터전을 잡았고 고깃배를 타고 나가 생계를 꾸렸다. 아내도 친구도 곁을 떠난 지금, 적막하고 고독하기만 한 요한네스의 삶에서 근처에 사는 막내딸만이 의지처가 돼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의 하루가 막 시작된 참이다. 썰렁한 집안에서 혼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빵을 먹는다. 별다른 기대가 없는 일상,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고 원래 그대로인데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듯하다. 늙은 몸도 무게가 거의 없는 듯이 가뿐하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 풍경이 어쩐지 너무 달라 보인다. 요한네스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바라본다. 그리고 ….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