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들리지 않는 말이다.
‘침묵은 금’이라는 그럴싸한 경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은 언제나 의심받아 왔다. 대화 중 침묵은 단순한 소리 없음이 아니다. 침묵이 ‘말하지 않음’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 이해되는 순간, 침묵 속에는 질적으로 다른 두가 지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독백적 침묵’과 ‘대화적 침묵’이 그것이다. 독백적 침묵은 상대의 말에 대한 회피, 무관심, 무책임의 태도이고, 대화적 침묵은 상대의 말에 대한 경청, 숙고, 책임의 태도이다.
독백적 침묵은 대화를 단절하는 침묵이다. 이 침묵은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다. 이미 결론을 내린 주체가 더 이상 응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 때 나타난다. 겉으로 보면 말이 없지만, 실제로는 내면에서 독백이 멈추지 않는다. 상대의 말은 이미 무효화 되었고, 응답은 예정에 없다. 이 침묵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말 없는 선언이다. 더 들을 것도, 더 바뀔 것도 없다는 확신 위에서 유지되는 무거운 고요함이다. 이러한 침묵은 숙고의 시간이 아니라, 배제의 기술이다. 질문 앞에서 답을 말하지 않으며, 호소 앞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방패로만 사용한다, 단순히 말하지 않음이 아니라, 응답 가능성 자체를 제거하는 행위이다. 독백적 침묵은 대화의 거부이며, 언어의 윤리를 포기한 상태이다.
대화적 침묵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이 침묵은 말의 실패가 아니라, 말의 책임을 자각한 결과이다. 아직 충분히 듣지 않았음을, 아직 응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나의 말이 상대방에 의하여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는 선언이다. 대화적 침묵은 열려 있는 상태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더 듣기 위해, 더 숙고하기 위해, 그리고 내 말이 불러올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 위한 선택된 침묵이다.
소위 ‘대화주의’의 창시자 바흐친(Mikhail Bakthin·러시아 철학자·1895-1975)은 “하나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종결시키지 않으며,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말은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인식 속에서 생겨난 절제의 기술임을 통찰한 것이다. 거울 없이는 그 잘난 콧잔등 하나 몰 수 없는 게 인간이다. 말은 언제나 타자의 응답을 전제로 할 때 의미를 갖게 된다. 타자의 응답을 전제하지 않은 말이 의미를 잃듯 침묵이란 말 또한 마찬가지다. 대화란 어떤 주제에 대한 결론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이다. 나의 침묵이 상대의 응답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는가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응답을 상상하지 않는 침묵은 대화를 파괴한다. 사적 대화 중에서, 공적 담론의 장에서 끝까지 침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왜 말하지 않을까.
금과 돌이 쉽게 구분되듯 침묵의 정체 또한 쉽사리 들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침묵을 금으로 만들지 돌로 만들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공봉학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