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이 지나도 겨울은 포근하기만 하다. 겨울은 추워야 제맛일 텐데 낙목한천(落木寒天)은 고사하고 아직 단풍조차 제대로 덜든 잎새들의 항거(?) 탓일까? 황록으로 변조되는 잎새들이 어서 단풍 들고 낙엽 져 나목(裸木)이 될 때까지 계절의 수레바퀴는 겨울을 손사래 치며 잠시 주춤하는 듯하다. 자연의 미묘하고 미세한 변화와 정교한 반응은 간혹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얼핏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층계가 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푸른 잎사귀가 단풍 들기 전이거나 열매가 채 익기 전에 떨어져 버린다면 나무들은 얼마나 아쉽고 마음 조여 할까? 충분한 연습과 적응, 내성(耐性)이 갖춰지지 않은 채 부모 곁을 떠나게 되는 자식과 비슷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때가 되면 떠나고 흩어졌다 모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이, 시간이 경과되면서 순서에 따르거나 또는 역행(逆行)으로 나타나는 자연현상과 사회양상들은 실로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만큼 자연은 천변만화하고 세상은 복잡다단하기 때문이다.
‘조락(凋落)이 스미고/스산함이 감돌수록//비우고 떨구고 삭히고 재우면서//나무는/야윈 가지로 허허롭게 몸짓한다//두텁게 몇 겹 옷으로//추위를 밀어내고/움츠림을 가리는/부류들은 알지 못한다//나무가/왜 옷을 벗으며/절대고독에 맞서는가를//뼈저리는 혹한에/신음조차 삼키며//속으로 보듬고 의연히 참아가며//또 한 겹/숙성의 테두리/옹골차게 새긴다’ -拙시조 ‘겨울나무’ 전문
나무의 나이테는 그냥 당연히 생긴다거나 결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온갖 비바람이나 가뭄, 풍상을 견디고 추위를 이겨내야만 인고의 증표 같은 나이테가 오롯하게 새겨지는 것이다. 열대지방의 나무나 콩나물 시루 같은 호조건(好條件) 속에서 생기게 되는 밋밋한 성장테와는 차원이 다른 촘촘하고 또렷한 나이테가 겹겹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나무의 성장과 시련의 과정이 응축되고 기록되는 나이테가 있기에 나무들은, 더욱 꿋꿋하고 강인하게 혹독한 추위에 맨몸으로 맞서며 ‘절대생존’을 지켜가는 것이다.
나이테를 감아가며 겨울을 나는 나무처럼 사람들은 한 해를 보내면서 연륜을 더해간다. 한 해가 마무리되는 12월은 지난 1년 동안의 자취를 반추하며 결실과 공적을 정리하고, 새로운 해의 계획과 목표를 가늠하여 보다 나은 새날을 기약하기도 한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크고 작은 일들과 희비의 사연이 점철된 아스라한 날들은 자신의 흔적이고 역사이며 삶을 지탱하는 자양분이기에 소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미리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정리하고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면 삶의 내면이 새롭고 알찬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나 비록 올해 이룬 것이 그다지 없고 내세울 것조차 없다손 치더라도 너무 허탈해하거나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싶다. 하루하루 무위(無爲)로 보낸 것 같은 날들도 먼 훗날 되돌아보면 하나의 궤적이고 삶의 편린이기에 모든 날이 살갑고 다행스러운 안도의 나날이 될 것이다. 온갖 잎새 다 내려놓고 칩거에 드는 겨울나무처럼 홀가분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더 고요하고 깊어지며 생각에 잠겨 드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세월은 무심치 않아 연륜을 쌓고 인생은 무상치 않아 슬기를 낳는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