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백색의 위로, 4.6km 숲길 끝에서 만난 영양 자작나무 숲

등록일 2025-11-20 16:30 게재일 2025-11-21 12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영양 자작나무숲. 

11월 9일, 남편과 경북 영양군 수비면 죽파리의 영양 자작나무숲에 다녀왔다. 아침상을 물린 후 영양 자작나무숲으로 가자는 그의 말에 꽁꽁 닫혀 있던 가슴이 번쩍 열렸다. 며칠간 집안일로 짓눌렸던 답답한 마음을 씻어낼 기회였다.

청송에서 영양 수비면 죽파리까지 60km, 한 시간이 넘는 거리다. 농사일도 모두 마친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길을 나섰다. 수비면으로 들어서는 초입부터 붉고 노란 단풍이 강렬하게 유혹했다. 눈부신 붉은 잎이 흔들리는 모습은 심장을 녹아내리게 할 만큼 아름다웠지만, 곧 만날 백색의 장관을 기대하며 아쉬운 감탄만 속으로 삼켰다. 굽이굽이 골짜기를 도는 길마다 형형색색 자태를 뽐내는 가로수들이 가을의 절정을 노래했다.

자작나무 숲 안내센터에 도착하니 주차장은 대형버스와 승용차로 만원이었다. 조금 걷다 보니 전기차 매표소가 나왔다. 차를 운행한다는 것은 숲까지의 거리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30분을 기다려야 탈 수 있는 차대신 걷기로 했다.

길은 넓고, 사람들의 발길로 잘 다져져 걷기 편안했다. 우람하게 죽죽 뻗은 소나무와 맑은 계곡물 소리, 바람에 스치는 잎새 소리에 취해 걸었다. 남편이 주변 소나무 군락 속에서 간간이 보이는 ‘진짜’ 자작나무를 알려주며 걷는 재미를 더했다. 시원하게 길만 낸 채, 어떤 인공적인 손길 없이 자연 그대로 보존된 숲의 풍모가 경이로웠다. 거대한 소나무와 자연스럽게 조화된 나무들의 모습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숲은 좀처럼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더니 마침내 눈앞에 펼쳐 진 자작나무 세상,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수만 그루의 자작나무가 온 산을 뒤덮고 있는 모습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신선같이 흰 도포를 입고 머리는 노랗게 물들인 듯, 곧고 시원하게 뻗은 순백의 자작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4km가 넘는 거리를 힘겹게 걸어온 모든 노력이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길고 긴 고행 끝에 마주한 황홀함 그 자체였다.

이 숲이 자연이 아닌, 인간의 장기 비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라웠다. 영양 자작나무숲은 산림청에서 1993년부터 30.6ha 규모로 30cm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30년 전, 미래를 내다본 산림청 담당자의 혜안이 오늘날 영양군을 대표하는 명품 관광자원을 탄생시킨 것이다. 단기 성과 위주의 축제나 임시방편적인 홍보에 경쟁적으로 매달리는 최근 지자체의 경향 속에서, 영양 자작나무 숲의 사례는 ‘계획적 규모의 자치 경제’와 길고 깊은 호흡으로 추진된 산림 정책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내려오는 발걸음은 거짓말처럼 가벼웠다. 순백의 자작나무 숲에서 좋은 기운을 받은 것일까. 온몸의 나쁜 기운이 말끔히 씻겨 나가고, 며칠간 우울했던 마음조차 홀가분해졌다. 숲의 매력에 흠뻑 빠져 계절마다 변모하는 풍경을 꼭 다시 보고 싶었다. 지금의 화려한 단풍도 좋지만, 연두의 봄, 청록의 여름, 그리고 눈 덮인 겨울 숲의 모습을 기대하며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문득 우리 마을 청송군 파천면 중평마을을 생각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을 가로수로 소나무나 백일홍, 벚나무 중에서 선택하여 바꿔 심으면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우리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지금의 볼품없는 가로수를 정비하여, 장차 10년 후 아름답게 변모할 마을을 꿈꿔본다. 영양 자작나무 숲은 내게 치유를 선물했을 뿐 아니라, 미래를 향한 소박하지만 분명한 꿈까지 심어준 소중한 여정이었다.

/손정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사회 기사리스트

더보기 이미지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