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 품은 가을빛 덕수궁 돌담길 단풍 즐기는 관광객 북적
덕수궁 돌담길에도 가을이 깊었다. 돌담을 따라 흩날리는 처연하도록 고운 단풍에서도 고궁의 품격이 묻어난다. 가을을 즐기려는 북적이는 사람들. 그러나 아픈 역사를 품은 고궁의 가을빛은 고요하고 숙연하다. 돌담길의 정취에는 풍경만이 아니라 격동의 시대를 품은 역사의 숨결이 머문다.
열강들이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격변의 시절,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다. 아관파천 1년 뒤 1897년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해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황궁은 1904년 원인 모를 대화재로 주요 전각들이 소실되었고, 복원공사가 이루어졌으나 1907년 일본의 압박으로 고종황제는 폐위된다.
덕수궁은 애초 궁궐로 지어진 곳이 아니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로 그의 후손들이 거주하던 저택을,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불타자 선조가 귀환 후 임시 거처로 삼으니 이곳을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이후 재건한 창덕궁으로 광해군이 옮겨가면서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남긴다. 그 후 270여 년간을 방치되어오다 고종에 의해 황궁으로 다시 사용된다.
그러나 1905년 중명전(重明殿)에서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1910년 한일병탄으로 우리나라는 주권을 잃는다. 일본은 한양의 모든 궁궐을 공원화 하였고 덕수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3분의 1로 축소된다.
덕수궁에서 가장 역사 깊은 전각은 석어당(昔御堂)과 즉조당(卽祚堂)이다. 이 두 건물이 애초 월산대군 후손이 거주하던 저택으로 선조가 임시 궁으로 사용하면서 덕수궁의 뿌리가 된다. 선조가 석어당에서 승하했고 선조를 이은 광해군과 인조의 즉위식이 즉조당에서 열린다. 인조가 경운궁 건물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이 두 건물은 임진왜란의 아픔과 역사를 그대로 보존하고자 남겨둔다. 석어당은 유일한 중층 목조 전각으로 단청이 없다. 선조를 애도하고 임진왜란의 고난을 잊지 않기 위해 소박한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자 함이다. 즉조당은 훗날 고종이 임시 정전(正殿)으로 삼는다. 주요전각들이 타버렸을 때도 최우선으로 복원해 고종이 직접 쓴 친필의 ‘卽阼堂’ 현판을 걸었다.
반면 돌로 지어진 서양식 궁궐 석조전(石造殿)은 부강한 나라를 꿈꾸었던 고종의 근대 의지가 담긴 건축물로 근대화의 상징이 된다. 그러나 완공과 동시에 국권을 상실한다. 실록에 따르면, 즉위한 순종이 일본에 의해 창덕궁으로 옮겨 가면서 경운궁에 남은 아버지 고종의 덕(德)과 장수(壽)를 기리며 ‘덕수궁’이라 이름을 바친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야참으로 올린 식혜 한잔에 이씨 조선 500년 역사는 무너지고 있었다. 윤치호의 영문일기에 따르면 식혜를 바쳤던 궁녀 2명도 의문사 당한다. 고종의 죽음은 전국적인 항일정신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곧 상해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고운 단풍 흩날리는 고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결이 서린 곳 이자 오늘의 대한민국이 태동한 역사의 무대이다.
나라의 운명을 함께 한 고종황제의 비극을 덕수궁이 품는다. 고종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던 함녕전의 처마 끝에 처연한 가을빛이 머물고 아름다운 돌담길 너머 쌓여가는 낙엽 위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결이 머문다. 사람들은 가을빛 담은 고궁에서 깊어가는 가을을 자유롭게 즐긴다. 이 자유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귀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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