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정의할 때 가장 자주 거론되는 가치 중 하나는 ‘독창성’이다. 어떤 작곡가가 표절 없이 작곡하였더라도, 같은 멜로디가 수백 년 전에 이미 존재 하였던 것이라면 이 음악의 예술적 가치는 부정된다. 위대한 예술가를 말할 때, 우리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형식과 감각을 창조한 사람들을 떠 올린다. 베토벤이 교향곡의 문법을 바꾸었고, 피카소가 회화의 시선을 해체한 것처럼, 예술은 낯익은 질서를 흔들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힘에서 그 가치를 얻는다. 이것이 예술의 독창성이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트롯트는 다소 난처한 위치에 놓인다. 일정한 2박자 리듬, 단순한 코드 진행, 반복되는 멜로디와 주제로 일관한다. 형식적 실험이나 조성의 파괴 대신 익숙함 속에서 감정을 끌어낸다. 그래서 흔히 ‘음악성은 부족하다’거나 ‘저급한 대중 오락‘이라는 달갑지 않은 평가가 따른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을 오직 형식적 독창성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 독창성을 떠난 예술은, 고통을 미화하는 ’위대한 거짓말‘이자, 인간의 삶을 다시 ’예‘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신비한 마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트롯트는 단순한 구조 속에서도 애절한 정서와 사랑을 노래하며, 삶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제공한다. 반복의 진부함보다는 집단적 카타르시스가 우위를 점하는 곳이 뽕짝의 필드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을 ’인간이 세계와 화해하고, 삶을 긍정하기 위한 근원적 장치‘로 보았다. 니체에게 예술이란, 진리에 대한 인식 행위보다 더 깊은 차원의 힘이며,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묘약이다. 진리가 삶의 무의미와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예술은 고통을 형상화하고 미화한다. 우리의 삶에게, ’그래 좋아‘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다.
트롯트는 묻는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가 어디냐?‘ 라고. 이 질문을 던진 트롯트가 현대 미학을 인도의 향불(정의송 노래)처럼 흔들리게 만든다. 미셀 옹프레는 ’예술의 이유‘에서 ’고상한 미적 영역이라는 관념의 신전‘에서 예술을 끌어내려, 예술이 초월적 그 무엇이 아닌, 감각적 그 무엇임을 선언한다. 예술을 민중적, 감각적, 쾌락적 힘에서 찾고, 고통을 노래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면 그것이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맛난 음식을 한입 머금고 ’오! 예술이다!‘라고 감탄할 때, 예술은 그저 맛난 것일 뿐이다.
예술의 독창성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술이 삶에 봉사하는 그 무엇으로 볼 때, 우리는 예술의 대중성을 또 다른 가치 창조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이 음양으로 짜여있듯, 예술도 순수와 대중이 함께 한다. 거실에서는 조용히 클래식을, 차 안에서는 뽕짝을 감상하자. 이왕이면 한 곡 뽑아도 좋고. 이 맛에 사는 것이 아닐까. 예술의 진정한 이유가 삶을 긍정하고 인간의 감각을 해방하는데 있다면, 트롯트는 그 자체로서 충분히 예술이리라. 오늘 퇴근길 차 안에서는 뽕짝 한 곡을. 쿵짝 쿵짝~~
/공봉학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