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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서울, 조계사와 회화나무의 아름다운 이야기

장은재작가
등록일 2025-04-23 19:03 게재일 2025-04-24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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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서울 조계사 회화나무와 백송 노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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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가 붉은 연등으로 휘황찬란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서울 봄날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붐비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고향의 절친한 친구와 함께 덕수궁 정문 옆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정담을 나누었다. 오늘따라 커피 향이 더욱 짙게 고향의 향수를 자극했다. 우리는 정년퇴직 후 제주도에 사는 고향 친구와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는 동창과 전화로 황혼의 삶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울을 찾은 나를 위해 친구는 오늘 하루를 함께 서울의 고궁 등 시내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했다. 먼저 오전에는 덕수궁 돌담길과 고종황제 길을 걷고 점심 식사 후 오후에는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열리는 국제펜클럽 총회와 이사장단 이취임식장까지 안내해 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도중에 갑자기 수백 년 묵은 조계사 회화나무와 백송 생각에 일정을 수정하여 조계사로 향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조계사

대웅전 앞뜰 붉은연등 등 휘황찬란

부처님 오신날 맞아 인산인해 이뤄

500년 세월 품은 천연기념물 ‘백송’

키 13.6m·둘레 2m·독특한 하얀껍질

수백년 껴안은 채 변함없이 우뚝 선

회화나무에 소원 비는 사람들 발길

명상과 기도, 쉼터·소통의 공간으로

 

대부분 사찰은 산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나에게 서울의 도심에 그것도 가장 번화한 중심가에 조계종의 본산 조계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관심을 끌었다. 산중 사찰은 자연 속에 자리하여 고요한 수행과 깊은 명상에 적합한 공간이다. 조용한 환경에서 내면의 집중과 깨달음을 추구하기에 더없이 좋다. 또한 그러한 것이 전통적인 불교의 사찰이기도 하다. 반면에 서울 조계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방문할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 현대인들에게 종교활동과 정신적 휴식을 제공하는 데에는 산중 사찰보다 더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중 사찰이 심오한 수행의 공간이라면, 조계사는 대중과 소통하며 도시 속 신앙과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는 실천적 종교 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늘 언론을 통해서만 보고 들은 현장을 직접 방문한다는 사실에 적이 긴장되기도 했다. 조계사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신도들뿐만 아니라 내외국인을 비롯한 나무를 보러 오거나 관광으로 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마 다가오는 5월 5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영향도 크지 않았나 싶다. 

 

조계사는 붉은 연등으로 휘황찬란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조계사 대웅전 앞뜰에 연등을 달고 살아가는 회화나무가 먼저 눈에 띄었다. 나무에 소원을 비는 한 시민을 보았다. 회화나무 노거수는 수백 년 시간을 껴안은 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살아갈 것이다. 한 시민이 그 거대한 몸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는 순간, 나무는 단순한 생명이 아닌 전능하신 부처님과 인간의 경계를 잇는 존재로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시민은 그 앞에서 말없이 삶의 무게를 내려놓은 채 나무의 숨결에 귀 기울이며 소망과 고요함 사이의 빛나는 틈에서 가장 순수한 기도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 기도하는 자체가 바로 부처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룩해 보였다. 나무 주변의 벤치에 앉아 있는 시민은 나무와 물리적으로 가깝게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과 평화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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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백송.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번지 조계사 대웅전 앞뜰에는 500살 되어 보이는 회화나무 노거수 외에도 같은 나이의 천연기념물 백송 노거수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천연기념물 백송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들여온 희귀한 소나무로, 희고 거친 껍질이 세월의 흔적처럼 드러난 채 대웅전을 향해 굽이진 가지를 뻗고 있었다. 한때 일곱 갈래로 웅장했던 가지는 이제 세 개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백송의 나이가 500살, 키 13.6m, 몸 둘레는 2m이다. 형형색색의 연등 사이로 솟은 그 자태는 여전히 신비롭고 경건했다. 해맑은 미소의 어린 부처상과 함께 살아가는 아픈 상처를 안은 백송은 부처님과 일상생활, 그리고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조계사 마당에서 인간과 자연의 깊은 교감을 상징하듯이 했다. 스님과 신도들의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수백 년 동안 조용히 지켜보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계사 경내의 부처님과 회화나무, 백송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조계사를 찾는 세속인들의 지치고 상처 난 심신을 보듬고 꿰매 주어 안정과 평화를 찾게 해 주는 숭배의 대상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불교에서 나무는 단순한 식물을 넘어 생명, 성장, 깨달음, 무상의 교훈을 담은 상징적 존재로 여겨 왔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나무는 수행의 공간이자 인간 내면의 성장과 자연과의 조화를 일깨우는 매개체로 작용해 왔다. 불교 예술과 사찰의 구조 속에서도 깊은 상징성을 지닌 중요한 요소이다. 조계사 경내의 회화나무와 백송은 이러한 불교적 상징을 실감케 하는 대표적인 존재로 생각되었다. 회화나무는 오랜 시간 신도들의 기도를 받아온 역사와 인내의 증인으로서 생명력과 영적 성장을 상징하고 백송은 희고 곧은 기상으로 청정한 마음과 불굴의 정신을 상기시킨다. 이 두 나무는 각각 역사성과 정신성(精神性)을 품은 상보적 상징으로, 찾는 시민에게 심오한 영적 공간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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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회화나무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

회화나무와 백송이 있는 이 자리는 본래 왕자들의 별궁이었고, 이후 한 양반가의 저택으로 그러다가 보성학교에서 지금의 조계사가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 숱한 수난의 역사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나무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나무도 품격이라는 신분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집 마당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큰 학자가 나온다고 해서 학자수(學者樹)로도 불리는 이 나무는 궁궐이나 서원 혹은 그야말로 지체 높은 양반들만 식재하고 볼 수 있었다. 그 옛날에는 서민들이 함부로 심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오늘날 오래된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서열 높은 분들의 거주지였거나 양반가, 선비가 살았다고 보면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지금이야 그런 상징성과 의미보다는 수형과 꽃의 아름다움에 더 무게를 두고 정원이나 집 마당에 심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백송은 어릴 때는 녹색인데 어른이 되면서 나무껍질이 하얀 레이스처럼 조각조각 갈라져 백송(白松)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줄기는 흰빛이지만, 하늘을 이고 있는 바늘잎은 늘 푸르다. 조선시대에 중국에서 도입된 것으로 회화나무처럼 양반집에만 심을 수 있는 품격 있는 나무라고 한다. 백송은 나이만큼이나 몸도 성치 않았다.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무상한 것은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정만은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다시 세속으로 환속했다.

 

조계사(曹溪寺)는…

조계사는 한국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으로, 대승 보살 정신을 바탕으로 대중과 함께하는 삶을 지향하는 중심 사찰이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불교의 자주화와 민족자존 회복을 염원하는 스님들에 의해 각황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며, 근대 한국불교 최초의 포교당이자 4 대문 안에 세워진 첫 사찰이다. 1937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삼각산 태고사를 형식상 옮기는 방식으로 절 이름을 태고사로 바꾸고, 보천교의 십일전 건물을 대웅전으로 개축하여 1938년 봉불식을 열었다. 이후 1954년 불교정화운동을 계기로 조계사로 개명되어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의 중심 사찰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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