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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올라 신라의 황금빛 ‘금관’ 과 마주하다

등록일 2025-04-02 19:04 게재일 2025-04-0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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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행 에세이 작가 박시윤의 ‘경주는 흐른다’  <3> 신라 금관(상)
대릉원 고분들-무덤들이 웅장하게 솟아 있다. 그곳엔 신라의 왕들이 누워 있고, 신라 왕들이 걸었고, 지금의 경주 사람들이 걷고 있다.

□ 신라의 빛 금관

경주의 대지에는 봄기운과 신라의 향기가 함께 기지개를 켜고 있다. 저 멀리 무덤들이 웅장하게 솟아 있다. 그곳엔 신라의 왕들이 누워 있고, 나는 신라의 왕들이 걸었고, 지금의 경주 사람들이 걷고 있는 길을 따라 우리들의 빛을 만나러 간다.

‘금관’, 떨림이 일었다. 과연, 천 년의 시간을 넘어 그 찬란한 빛은 오늘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황금빛 시간의 조각을 만나기 위해 신라 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일제강점기때 집터 공사중 능묘 발견

모든 절차 무시한 일본인 모로가 등 4명

직접 연장 들고 2~3일 만에 졸속 발굴

처참히 파헤친 곳서 ‘금관총 금관’ 찾아

한번 재미를 본 모로가의 야욕 더 커져

총독 허락 아래 식리총·금령총 파헤쳐

두 번째 금관 ‘금령총금관’ 발굴에 성공

일제 잇단 금관 출현에 보물찾기 혈안

국립경주박물관 어둑한 전시실, 차분한 어둠 한가운데 금관이 빛나고 있다. 유리관 속 금관은 마치 천년의 시간이 그대로 걸어 나온 듯하다. 시간의 틈새에서 흘러나온 신비로운 빛. 신라 왕들은 왜 이토록 화려한 금관을 머리에 썼을까. 권력의 상징이었을까? 아니면 하늘과 신에게 가닿고자 하는 염원의 상징이었을까? 금관의 가지는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뻗었고, 가지 끝에 달린 푸른 곡옥(曲玉)은 신라 사람들이 꿈꾸던 영원의 세계를 담은 듯 푸르다. 죽어서도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었을까. 죽어서도 나라를 다스리며, 하늘과 신에게 기원하고자 했을까.

황금으로 빚은 금관은 태양이 녹아내린 듯 강렬하다. 그러면서도 섬세하다. 빛을 머금은 금판 위에 새겨진 작은 무늬들은 마치 신라의 바람과 빛과 아지랑이와 물결을 담아낸 듯 일렁인다. 신라인들은 금으로 태양을, 옥으로 생명을 표현했다고 한다. 흔들리는 곡옥은 풀처럼 흔들리고, 금관을 둘러싼 장식은 별처럼 반짝인다. 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금관은 단순한 치장의 장신구가 아닌 하늘과 땅, 생명과 죽음, 온 우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성한 상징물이었으리라.

신라 금관은 현재까지 모두 6개가 발굴되었다. 1921년 집터 수리 중 나온 최초의 금관총금관을 시작으로 금방울이 장식된 금령총금관, 그리고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한 서봉총금관, 셋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천마총금관과 황남대총금관은 1970년대 초, 우리 고고학 기술로 세상에 나온 금관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1972년쯤 도굴범들이 교동의 폐고분을 도굴하여 숨기고 있던 것을 되찾은 교동금관이다. 이중 금령총금관과 황남대총금관은 중앙박물관 소장이고 나머지는 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럼, 금관은 어디서 어떻게 발굴되어 현재의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걸까. 천천히 금관이 세상에 나온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고분출토 금제귀고리-비취색 곡옥과 금사슬, 금허리띠, 금귀걸이 등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황금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고분출토 금제귀고리-비취색 곡옥과 금사슬, 금허리띠, 금귀걸이 등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황금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 노서동 집터 공사 중 나온 첫 금관

-금관총 금관(金冠塚 金冠, 국보 제87호)

일제강점기인 1921년 9월, 경주 노서동 중심가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구슬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파란빛을 띠는 게 아주 고급스러웠다. 지나던 일본 순사 미야케 요산(三宅與三·삼택여삼)이 눈여겨보고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봉황대 아래 언덕을 가리켰다. 미야케는 다급히 그곳으로 갔다. 인근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朴文煥)이 주막 뒤뜰을 넓히고 돋우느라 언덕의 흙을 파다 쓰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심상치 않은 파편들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미야케는 박문환에게 더는 흙을 파지 못하게 하고 곧바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경주경찰서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경찰서장 이와미 히사미쓰(岩見久光·암견구광)는 바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촉탁 직원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제록앙웅)에게 연락했다. 둘은 곧바로 현장을 둘러보았다. 둘은 지독한 유물 수집가로 현장에서 심상치 않은 촉을 느꼈다.

규정상 현장을 보존하고 총독부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와미와 모로가는 모든 절차를 무시했다. 그리고 경주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경주고적보존회 촉탁 와타리 후미야(渡理文哉·도리문재)와 경주보통학교장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대판금태랑)를 불렀다. 그리고 넷이 직접 연장을 들고 현장으로 갔다. 그리고 발굴에 들어갔다. 모로가와 와타리가 직접 채굴하고 경찰서장 이와미와 경주보통학교장 오사카가 채굴 상황을 기록하고 발굴된 것의 분류와 정리를 맡았다.

매장 주체부가 드러났다. 모로가의 눈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금관이었다. 가슴이 벅찼다. 막 드러난 신라능묘의 황금관을 눈앞에 두고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꿈같았다. 뒤이어 비취색 곡옥과 금사슬, 금허리띠, 금귀걸이 등 다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황금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유리그릇 편과 구슬목걸이 등 매우 귀중한 유물도 뒤를 이었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경주보통학교교장 오사카 긴타로(왼쪽), 경주고적보존회 모로가 히데오
경주보통학교교장 오사카 긴타로(왼쪽), 경주고적보존회 모로가 히데오

뒤늦게 보고를 받은 경주 군수 박광렬(朴光烈)이 다급히 현장을 찾았다. 파헤쳐진 능묘는 처참했다. 피장자가 묻힌 곳까지 마구 연장질을 해댄 현장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다. 조상숭배를 금과 옥조로 여기며 살아왔거늘 조선의 정신을 뿌리째 흔드는 야만적인 행태에 치가 떨렸다.

군수는 상부에 보고하여 지시와 절차에 따라 진행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조선인인 경주 군수의 말은 무의미했다. 그들은 보고 선상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군수를 철저히 따돌렸다. 군수는 이를 두고 볼 수만 없어 경상북도지사에게 긴급 보고했다. 도지사는 도청 직원을 급히 파견하는 동시에 조선총독부에도 긴급 전문을 보냈다. 하지만 이와미와 모로가의 막무가내 행실보다 모두 한발 늦었다. 발굴은 2~3일 만에 비전문가들에 의해 졸속으로 끝이 났다.

경주경찰서장이 법령에 따라 경무총장을 거쳐 조선총독에게 즉시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모두 무시하고 연장부터 들이대 무단 채굴한 후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현장 보존은 더더욱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때 모로가는 마치 모든 권한을 쥔 것처럼 주도했다.

뒤늦게 총독부에서 정식 파견된 일본인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매원말치)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소천현부)는 절차와 방법을 무시한 난폭한 수습에 적잖은 불쾌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신라 금관 최초 발굴’이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전대미문의 특종감을 찾았으니, 일제의 입장에선 대만족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환호했다. 온 나라가 들썩였다. 세계 유일한 낯선 형태의 금관을 두고 일제는 자신들의 세기적 최고의 고고학 성과물로 자랑했다. 세계의 이목이 일본이 식민 지배하고 있는 조선, 조선의 경주라는 도시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에 쏠렸다. 금관의 출현은 식민 지배를 받던 조선인들에게도 뜨거운 관심사였다. 모로가는 흡족했다. 금관은 자신의 촉이 이루어낸 최고의 성과물이었으니까.

일제의 야욕은 경주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고분들을 향했다. 그들의 목적은 학술적 조사와 가치에 중심을 둔 게 아닌, 오로지 묻혀 있을 부장품에만 쏠려 있었다. 많은 전리품과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한 보물찾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금관총내부-금관총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 첫 금관과 유물 발굴되었다. 그 후 94년 만인 2015년 재발굴됐다. 2023년 6월 30일, 금관총 고분정보센터로 문을 열었다.
금관총내부-금관총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 첫 금관과 유물 발굴되었다. 그 후 94년 만인 2015년 재발굴됐다. 2023년 6월 30일, 금관총 고분정보센터로 문을 열었다.

□ 식리총과 금령총을 열어라

-금령총금관(金鈴塚金冠, 보물 제338호)

한번 재미를 본 모로가의 고분에 대한 야욕은 더 커졌다. 1924년 4월, 사이토 마코토 총독(齋藤實·재등실, 제3·5대 조선총독)이 조선 남부 시찰차 경주로 왔다. 모로가는 사이토 총독과 봉황대에 올랐다. 그리고 남쪽을 바라보며 섰다. 봉토가 많이 손상된 고분 2기가 보였다. 옹기종기 들어찬 민가 사이의 고분은 미관에도 좋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을 못 이기고 이미 많이 파괴된 고분을 두고 모로가는 넌지시 발굴의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나 1923년 9월, 일본 본토 관동대지진으로 자금 사정이 좋지 않던 조선총독부는 소극적이었다. 모로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모로가의 집요한 계책에 총독이 그리하라 일렀다. 이는 총독이 사적 자금을 내어 허락한 것이었다.

또 다시 고분들은 마구 파헤쳐졌다. 총독이 허락한 발굴이라는 명분 아래 모로가는 기세등등했다. 1924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 위원이자 현장 책임자인 우메하라 스에지와 고이즈미 등이 인부들을 대동해 노동동의 고분(식리총(飾履塚), 금령총(金鈴塚)) 2기를 파기 시작했다. 원형이 크게 손상된 고분이었지만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두 번째 금관이 나온 것이다. 금관엔 금방울(金鈴·금령)이 달려 있었다. 금령총금관(金鈴塚金冠, 보물 제338호)으로 이름 붙였다. 다른 한 곳에서는 장례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신발인 금동식리(金銅飾履)가 나왔다. 어디 이뿐인가. 금제관드리개·가는고리금귀걸이·유리구슬목걸이·은제허리띠와 띠드리개·은팔찌·철제고리자루큰칼 등도 함께 쏟아졌다. 금관이 작은 걸로 봐서 어린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곳에서 이처럼 많은 황금이 쏟아진 것이다.

자신의 예측이 적중하자 모로가는 환호를 질렀다. 짜릿했다. 황금 유물에 심취한 모로가는 점점 경주에서 절대적인 문화 권력자가 되고 있었다. 한편 경주에는 일본인들이 들끓었다. 모로가 외에도 관학자를 비롯하여 황금이 쏟아진다는 소문을 듣고 자칭 고고학자라며 떠들고 다니는 아마추어 유물 수집꾼들이 득실댔다. 금관의 출현으로 경주는 유명세를 탔지만, 반면 도굴범들이 들끓는 도시가 된 것도 사실이다.

*스웨덴 황태자가 참여한 ‘서봉총’ 이야기와 ‘신라금관 모독’ 등의 이야기는 ‘신라금관’ (하)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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