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재촉하는 비가 전국적으로 내리는가 싶더니, 강원·충청지방에서는 밤사이에 눈으로 둔갑해 소복이 쌓였다. 3월에 내리는 눈은 대부분 무거운 습설이라 농가 비닐하우스 등 시설물 피해나 설해목을 초래해 걱정이 앞선다. 한 달 전 입춘 무렵의 한파와 영하권의 날씨가 경칩까지 이어져 꽃과 나무들의 개화시기가 늦춰지는 바람에 지자체별로 고심하고 있다고들 한다.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매화축제가 매화는 없고 축제만 있는 상황이 벌어지다 보니 ‘대충 난감’이 따로 없을 정도다. 그만큼 기후변화는 이상기온과 예측불허로 다가오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더디 오는 봄을 마중이라도 하듯 남도로 향했다. 섬처럼 군데군데 야트막한 등성이가 솟아 있고 바닷물이 빠졌다가 다시 채워지는 갯벌에서 묻어나는 비릿함이 인상적인 ‘녹차수도 보성’의 득량만이다. 전남 벌교읍과 장흥군 사이의 연안에 서당항, 군농항, 율포항 등의 고만고만한 항ㆍ포구들이 이어져 있고, 멀리 고흥군과 보성군 사이의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득량도를 품은 곳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5년 후인 정유재란 때,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 받고 배설이 감춰둔 12척의 배가 있는 장흥 회진포로 가던 중 군량미를 얻었다 해서 붙여진 득량(得糧)이기도 하다.
보물(寶)같은 고장(城)답게 전남에서 평균고도가 가장 높은 보성군은 바다와 산, 섬이 어우러져 발길 닿는 곳마다 테마와 먹거리, 스토리가 많은 곳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천혜의 산자락 일대에는 차밭이 많아 전국 녹차 생산의 4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산 아래 도강과 영천마을에는 서편제 판소리 명창이 많이 배출되었는가 하면, 동쪽 벌교의 꼬막과 서쪽 회천의 낙지 등의 먹거리가 풍부해 사시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남도의 연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그곳 보성에서 ‘어디에도 없는 득량만’의 오묘함에 매료되어 시절인연처럼 일림산 기슭 삼의당에 5년째 칩거하며 글을 쓰고 살아가는 한 소설가가 있다. 세상의 풍찬노숙을 달관한 듯 해맑은 웃음이 여유롭고 ‘측간수인(厠間囚人)’을 자처하며 호탕하고 분방하게 글을 쓰고 시를 읊으며 지역의 문화적인 소통과 교류에도 한몫하고 있다. 밤낮없이 집필하고 고뇌하며 유유자적 행운유수로 수행하듯이 살아가며 때때로 세상을 향한 일갈도 서슴지 않는 그는, 어쩌면 요즘 보기 드문 기인(?) 같고 달인같은 모습이랄까?
“커피 앞에서/바다를 마신다/고깃배 선창에 떠맡기고/집으로 돌아간 사람들/꼬막 낙지 주꾸미 갯 것 건진다고/칼바람 맞서며 짠물 삼켰다/사나운 시간이 잠들면/검은 머리 갈매기 날개를 접고/먹이를 찾느라 뻘짓 바쁘다//바다 앞에서/커피를 마신다/철게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숨어버리는/생을 찾는다” - 양승언‘커피 바다’전문
썰물과 밀물이 드나드는 율포항 언저리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커피 바다’ 시를 감상하는 기분은 어떨까? 그리움처럼 멀어져가는 썰물에 내 마음 뻘처럼 고스란히 드러나 속내를 보이지만, 두고두고 사무치는 마음 나지막이 밀물처럼 살며시 다가오면, 한결 넉넉하고 푸근하게 삶을 다독이며 세상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남도의 봄은 그렇게 잠방잠방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