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탄내가 난다. 누가 뭘 태우고 있나보다. 베란다 창을 타고 넘어오나 보다 생각한 나는 보고 있던 TV에 눈을 고정시켰다. 냄새가 점점 더 심해졌다. 퍼뜩 머릿속에 경보기가 울렸다. 벌떡 일어나 싱크대로 뛰어가서 가스렌지를 껐다.
“어휴, 또 태웠다.”
빨래 삶는 솥에 행주를 넣고 삶고 있었다. 5~6개의 하얀 행주는 절반이 바닥에 심하게 눌어붙어서 도저히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폭폭 삶아서 햇볕 아래 말리면 느껴지던 그 뽀송뽀송함이 너무 좋은데. 베란다와 부엌의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래도 매캐한 냄새는 빠지지 않은 채 마음 깊이 가라앉는다. 몇 달 사이 벌써 여러 번 행주를 태워버렸다. 사용해서 닳은 행주보다 태워버린 행주의 수가 훨씬 많다.
오후에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갔다. 오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입들이 분주하다. 경험담이 쏟아져 나온다. 한 친구가 웃으며 말한다. 어느 날 아이들에게 폰 봤냐고 물었단다. 아이들이 쓰러질 듯이 웃으면서 엄마가 지금 폰들고 전화하고 있잖아 하더란다.
그런 것도 문제지만 가스불은 큰일이 생길 수 있다며 입을 모았다. 가스 밸브에 타이머를 부착하라고 한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쓰니까 세상 걱정없다고 하면서. 다른 친구는 천행주를 쓰지 말란다. 어느 회사 제품이 좋다며 일회용 행주 쓸 것을 권한다.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천행주 대신 일회용 행주를 쓰면 편하긴 하겠지만 환경오염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 날 모임 화제는 치매, 경도인지 장애, 건망증 등에서 떠돌았다. 검사를 받아 봐야 한다든가, 아직 치매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자위 섞인 목소리. 서로 아마 건망증일 거야로 결론짓고 돌아서는 뒷모습들이 코끝을 찡하게 눌러왔다.
정말 건망증인가보다. 건망증이란,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기억하는 속도가 느려지거나 일시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장애의 한 증상이다.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많거나, 해야 할 일의 종류가 많은 상황처럼 주의력이나 집중력이 저하될 때에는 더 잘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나이가 드는 정상적인 노화 과정에서도 늘어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면 치매를 유발할 수 있는 퇴행성 질환이 원인일 수 있기 때문에 감별을 위한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 날 저녁 퇴근한 아들이 물었다.
“엄마, 왜 집에서 탄내가 나지?”
그때까지 환기를 시켰음에도 탄내가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말했다. 아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타이머를 가스렌지에 부착하자고 한다. 전에도 몇 번 타이머 얘기를 하는데 픽 하고 웃고 말았었다. 이 날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밤에 침대에 누워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같이 나오던 길이었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생활하는 친구는 나오기 전 노트 하나를 꺼내더니 집안 곳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적혀 있는 것이 궁금해 보았더니 집안 점검 목록이었다. 가스밸브, 전등, 멀티탭, 커피 머신 전원 등등. 집안 곳곳에 놓인 것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일종의 자가점검표였다. 왜 그렇게 하냐고 물으니 지방에 가다가 불안해서 다시 돌아온 적이 너무 많아 생각해 낸 것이라 한다.
굳이 천행주를 고집하는 내 마음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익숙한 것을 버리기 싫은 마음이 아닐까. 낯섦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익숙한 것은 다루기 쉽고 편하니까. 건망증 또한 익숙함과의 이별 연습 아닐까. 잘 저장되었던 냉장고에서 재료를 하나씩 꺼내면 언젠간 저장된 것이 얼마 남지 않아 느낄 두려움. 그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익숙함만을 고집하는 건 아닌지.
다들 나름으로 건망증을 이겨나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 같다. 누군가는 자가점검표로, 또 다른 누군가는 수첩을 들고 다니며 모든 것을 메모하는 방법으로. 타이머를 달까 ? 아니면 일회용 행주를 조금 써 볼까? 무엇이라도 시도해봐야겠단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다. /시조시인 전영숙